|
[제6장] 녹동서원.
1. 존양사기(存養祠記){연촌공파보}
存養祠者惟我七世祖通訓大夫守藝文舘直提學兼春秋舘記注官存養崔先生祠也然然則此祖祠孫其敢當而不讓於人乎雖然非孫則盖莫能詳其世籍莫能詳亦無以彰其世德孫何敢讓於人孫何不盡於心心於戱有孫敬之哉敬之哉謹稽我崔氏系出全州徵諸輿地誌自崔均至崔宰世代悠遠今不敢附會焉今不敢附會焉其在高麗朝有門下侍中諡文成公諱阿寔先生高祖也侍中生中郞將諱龍鳳地誌所錄崔龍甲擢科一人者卽其同母兄也地誌何不詳耶郞將生直長同正諱乙仁同正生檢校參議諱霮寔先生皇考也參議年十七中司馬三十二登文科家食不仕者二十年入我朝康獻大王卽位之五年始受奉常小卿之命恭靖二年又退歸太宗大王三十六年特授檢校戶曹參議集賢殿提學享年八十九以終參議四子長諱匡之次諱直之皆以文顯次諱得之俱中生進由舘薦官至少尹先生諱德之乃其季也先生亦以司馬登永樂乙酉文科□坐(1)卽我太宗大王五年也由槐院入翰苑曆玉堂臺閣屢出治郡皆有聲績至世宗朝嘗以南原府使退卜此郡東永保村居焉國初所刊三綱行實節婦趙安鼎妻金氏寔先生夫人之母也旌門今在嶺院下先生有樓扁曰存養卽安平大君手書也筆本模入於海東名迹者是也文宗大王元年召先生爲成均司藝尋陞是官粤翌年先生告老而歸常居存養樓亦得年七十二以卒於家其世系源派出處終始大略如是今究其立心以正行已以直居官處事守道不撓先幾勇退明哲自保眞有存養之功大爲一世之重者則觀乎當時名公鉅卿送別詩序及跋文存養樓題詠等篇章可述尙何待於今之文章達官更爲張皇然後可以夸視於鄕黨子孫耳目亦何待於今之藐孤裔孫妄加贊揚然後可以振耀乎鄕黨子孫耳目者乎然於此間有不可泯而不可掩者則雖以裔孫之不肖亦不敢不詳於戱有孫敬之哉敬之哉先生世雖遭文明之會歷事三朝終守一節身無累於勢利心自謙於道義而然其位未得大施壽猶嗟大耋則非其存養之德爲未至也是其命也若夫當時大節如六臣中五人其他諸公皆以德行事業文章卓冠千古而莫不以先生爲重今世有德行有事業有文章者且不下昔人而亦莫不以先生爲重凡人聞先生之遺風則莫不加敬見先生以諸孫則亦莫不加敬此祠宇則有如李侯諱善行李侯諱志宏但以我朝喬木世臣之賢孫賢子莫不綱紀而完美之至於舍菜之費藏修之助莫不官給而永爲百世恒式之永爲百世之模範焉非有先生存養之德能信於一時能信於百世則安得二百年後爲此守宰者敬先生如親師爲此鄕黨子孫者慕先生如親祖悠久而悠加慕焉立此祠尊此祠赫赫如前日事乎先生沒而可傳於後者如此其不可泯也如此其不可掩也如此豈非誠於中形於刻形則著著則明明則勤動則變者乎存養之效吁共至矣若先生者誠可謂百世之師也廟食百世而無愧也奚啻可祭於社而已耶始焉此郡距京師甚遠倭寇不已常以武臣爲守故文敎不宣文風不振自先生退居郡之人乃服文化至於今日文士輩出彬彬焉郁郁焉朝廷亦繼以文望治之豈非先生存養之所嘉惠歟先生之爲可法爲可師者又如是夫昔蘇東坡稱韓文公爲百世師後之人亦稱東坡爲百世師文公爲學雖或未醇然以程朱二賢師旣許其有所見則稱以百世師宜也若東坡則出處不正晦菴言蘇軾非正人也其謂之百世師不幾於妄乎今以裔孫之不學無識乃稱其祖爲百世師則似涉於私也亦幾於妄也然其實則百世以俟而不易實非私也實非妄也噫論語稱人之善必稱其父兄師友厚之道也今世論人亦必稱其世盖有是父兄有是師友者有時世也有時世者必有所受有所受者必有所立今若不究其世則何以知其人爲某之子某之孫某也師某也友其學也醇歟雜歟其道也正歟邪歟由百世上人豈無錙銖之差歟玆所以先詳先生之世系者欲使人曉然知其有是世有是受有是立者如是而其正道其正學有非後世之所可幾及也噫斯道不泯斯祠不廢斯祠不廢斯學不絶凡入此祠者必先瞻拜於先生退與諸儒講劘心學要先存其心養其性以爲省察之根本而博學也審問也愼思也明辨也篤行也五者無廢其一至於衆物之表裏精粗本末先後無不融會而貫通則亦可宗而師也如或徒竊儒名只知之墨爲廢身之媒而不知其正道如何而可入正學如何而可學悠悠泛泛滔滔汨汨徒籍此院籍私便其身圖則非吾徒也將不免小子之鳴皷於戱小子敬之哉敬之哉是祠也經始於崇禎己巳則李侯善行實多助焉至庚午秋廟藐稍成則亦皆李侯志宏之力也及及其中丁奉安先生之神則李侯身先拜之二侯之崇儒重道也大綱如是是亦不可泯而不可不可掩者也若其以存養爲祠額者則先生在時旣以存養爲樓扁更無他號今觀於此祠益知先生存養之澤雖百世不斬故直以存養加於先生之位板亦以存養揭于先生之祠宇若其不以是請額于朝廷者則先生守約平生所自修不欲使人知故遵先生志也先生眞像今在先生存養樓舊宅存養樓傳受今在其七世孫珽尙不毁玆不可不記是用不讓而詳說之於祠中學徒焉
癸酉五月下浣
존양사는 나의 7세 할아버지 통훈대부 예문관 직제학 겸 춘추관 기주관 존양당(存養堂) 최 선생의 사당이다.
그러므로 할아버지의 사당은 당연히 손자가 감당해야만 할 몫인데 어찌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수 있겠는가?
비록 후손이 아닌 사람이 감당하겠다고 나선다고 하더라도, 할아버지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읽어보지 않고서는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을 것이고,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면 그 세덕을 하나하나 들어내어 밝히기는 어려울 터인데, 후손된 사람으로서 어찌 감히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수 있을 것이며, 후손된 사람으로서 어찌 온 마음을 다하여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음속에서부터 그와 같이 탄식하는 바가 있다면 당연히 후손으로서 공경함이 있을 것이고, 공경함이 있으면 삼가 생각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우리 최씨는 전주에서 시작되었는데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여러 지리책에서 증거를 찾아 볼 때, 최균(崔均)에서 시작하여 최재(崔宰)에 이르기까지는 세대가 아득하게 멀어서 자세하게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금 감히 이치에 닿지 않게 억지로 이리저리 끌어다 붙일 수는 없을 것 같다.(2)
고려에서 문하시중을 지낸 시호 문성공 휘 아(阿)는 선생의 고조할아버지이시다.
시중공께서 중랑장 휘 용봉(龍鳳)을 낳았는데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되어 있는 최용갑(崔龍甲)은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사람인 즉, 바로 중랑장공과 같은 어머니에서 태어난 형으로 어찌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상세한 내용에 다름이 있을 수 있겠는가?
중랑장공께서 직장 동정(同正) 휘 을인(乙仁)을 낳고, 동정공께서 검교 참의 휘 담(霮)을 낳았으니 바로 선생의 아버지이시다.
참의공께서는 나이 17세에 사마시에 급제하시고, 32세에 문과에 급제하시었으나, 집에서 머물면서 벼슬에 나가지 아니하기를 20년간 하시다가 조선조에 들어와 태조대왕께서 즉위하신지 5년(1396)이 되는 해에 봉상시 소경으로 명령을 받아 벼슬에 나갔으나, 정종 2년(1400) 또다시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태종대왕 16년(1416) 특별히 검교 호조 참의, 집현전 제학에 제수되시고 향년 89세로 돌아가셨다.
참의공의 아들은 네 명이 있었으니, 장남 휘 광지(匡之)와 차남 휘 직지(直之)는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이름을 날렸고, 그 다음 휘 득지(得之)는 생원시와 진사시를 모두 합격하여 추천을 받아 벼슬에 나가 벼슬이 소윤에 이르렀으며, 선생 휘 덕지(德之)는 막내아들이다.
선생 역시 사마시에 급제하고, 1405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바로 우리나라 태종대왕 5년의 일이다.
승문원을 거쳐서 예문관에 들어갔고 홍문관 대각을 거쳐서 여러 군(郡)으로 나가서 고을을 다스리니 모든 곳에서 명성과 공적이 있었는데, 세종 때에 이르러 남원 부사로 근무하다가 은퇴하여 영암군 동쪽 영보촌(永保村)에서 살았다.
조선 초기에 간행된 <삼강행실도>에 수록된 절부(節婦) 조안정(趙安鼎)의 아내 김씨(金氏)는 바로 선생 부인의 어머니로, 나라에서 내린 정려가 지금 영원치(嶺院峙) 고개 아래에 전해오고 있다.
선생은 서루에 편액을 붙이기를 존양루(存養樓)라 했으니,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손수 적은 글씨인데 우리나라 최고의 명필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문종대왕 원년(1450)에 임금께서 선생을 불러 성균관 사예를 삼으니 앞으로 벼슬이 높이 올라갈 일만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다음 해에 선생은 늙었다고 보고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영암으로 돌아와 존양루에서 거처하시다가 향년 72세로 집에서 돌아가셨다.(3) 선생의 세계에 있어서 근원이 되는 계파와 출처(出處)의 처음에서 끝까지는 대략 이상과 같다.
그 분께서 세우신 뜻에 관하여 탐구해 보면 맑고 깨끗한 행실이 이미 있었고, 벼슬에 나가서는 항상 바르게 일을 처리하셨으며, 어떤 일에 있어서나 항상 도(道)를 지키고 흔들리지 아니하셨으며, 때가 이르기 전에 용감하게 물러나 명철함으로 스스로를 지켰으니, 참으로 커다란 존양의 공(功)을 갖추신 것이며 한 세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켜내신 것이다.
보라! 당시의 저명한 인사들과 높은 벼슬아치들이 송별의 시(詩)와 서문과 발문을 지어 주었고 존양루를 제목으로 시를 짓는 등 당시에 지은 많은 글이 이미 전해오고 있는데, 어찌 지금 새롭게 지은 글을 기다렸다가 높은 벼슬에 올랐던 일에 관하여 길고 번거롭게 설명하여 뽐내고 과시할 필요가 있겠는가?
촌구석에서 살고 있는 자손들의 안목을 가지고 지금 어찌 아득한 옛날에 있었던 일로 이러쿵저러쿵 떠들면서 망령되이 보태어 찬양하겠다고 나선다고 해서 조상을 떨쳐 빛낼 수 있겠는가?
그것이 과연 촌구석에 살고 있는 후손들의 안목으로 가능한 일이겠는가?
그러므로 이렇게 전해오고 있는 문헌들을 흐트러지게 해서는 안 될 것이며, 숨겨지게 해서도 안 되는 것이지만, 더욱이 후손들의 불초함으로 인하여 조상의 업적을 세세히 알지 못한 것을 한탄하는 후손이 있을 수도 있는 일이므로 공경하고 공경하여 보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선생께서는 문명한 시대를 만나서 3대의 임금을 대(代)를 이어서 모시면서 마지막까지 절개를 지키셨으며, 권세와 이익으로 인하여 몸에 누(累)를 끼치지 아니하였고, 마음의 겸손함으로 도의를 따랐으니, 그로 인하여 비록 높은 벼슬에는 오르지 못하였으나 세상에 크게 베풀었고, 나이도 80세에 가까울 때까지 오래 사셨으니, 그것이 존양지덕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고도 아직도 이룩하지 못한 것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운명인 것이다.
무릇 당시에 큰 절개를 지킨 사육신 중에서 다섯 사람을 비롯하여 그 외(外) 여러 많은 분들이 모두 공(公)의 덕행을 칭찬하는 글을 지어 주었으니 영구한 세월을 두고 으뜸이라고 할 만하다.
선생의 업적 중에서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덕행이 있었음이요, 올바른 일을 했음이요, 문장이 있었음이니, 지금에 이르러 옛 사람의 업적을 낮추지는 못할 것이다.
역시 선생이 하신 일 중에서 선생께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것으로 보통사람들에게 선생께서 남겨주신 커다란 가르침이었으니 더욱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선생의 후손된 입장에서는 존경심을 더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사당은 바로 이선행(李善行) 선생 같은 분이 계시고, 또 이지굉(李志宏) 선생 같은 분이 계셨기 때문에 우리 조선의 큰 거목이라고 할 수 있는 세상에 크게 뛰어난 신하의 어진 자손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겨우 그르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사당이 이와 같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완성되기까지는 사당을 짓는데 들어가는 모든 비용을 여러 어르신들이 도와주시고, 관청에서 지원하여 주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영원히 오래토록 변함없이 지켜져야 할 법도와 양식이고, 영원히 오래토록 변하지 않는 모범인, 선생의 존양지덕이 없었다면 당시에 믿을 수 있었던 것이 어떻게 영원히 믿을 수 있는 것으로 되어서,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겠는가?
지방의 수령들마저도 선생을 부모같이 공경하고, 스승같이 공경하여 받들었으니 이 구석진 시골에 묻혀 사는 자손들로서는 선생을 조상으로서 오래토록 사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더욱 오래토록 사모하기 위하여 이 사당을 세워서 모시게 되었으며 이 사당이 혁혁하게 빛나게 될 터이니 그러한 일들이 예전과 같겠는가?
선생은 비록 돌아가셨지만 후대에 길이 전해야만 하는 선생의 가르침이 이와 같으니, 흐트러져 문란해지게 할 수 없는 것이고, 이와 같으니 숨어 감추어지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와 같이 정성을 쏟지 않는다면 어중간한 형태로 되어버릴 것이니, 비석에 새기고, 들어내며, 밝히며, 부지런히 움직인다면 변화가 일어나지 않겠는가?
존양의 효과를 함께 부르짖는 곳에까지 이르렀으니 선생이야 말로 참으로 영원한 스승이라고 할만하다.
사당에 모시고 영원히 제사를 모신다 해서 아무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것이니 어찌 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것에서만 그칠 뿐이겠는가?
처음으로 돌아가서 살펴보면, 영암군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외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왜구들의 침탈이 잦았던 관계로 언제나 무관을 뽑아 군수를 삼아 왔기 때문에 문화와 교육이 자리를 잡지 못하였으며 학문을 숭상하는 풍습도 떨치지 못하였다.
선생이 영암으로 물러나 오신 다음부터는 사람들이 학문에 감복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데, 글 읽는 선비를 배출할 수 있는 바탕이 잘 갖추어져 문화가 찬란하게 빛나게 되었으며, 조정에서도 그에 이어서 학문으로 널리 알려진 신망을 가진 수령을 내려 보내 다스리게 되었으니 어찌 이 모든 것이 선생의 존양에 의하여 베풀어진 은혜가 아닌 것이 있겠는가?
선생과 함께 모범으로 삼아 스승으로 받들 만 하다고 비교하며 거론된 사람은 무릇 옛날의 소동파(蘇東坡)인데, 대개 문공 한유(韓愈)를 영원한 스승이라고 칭찬하여 왔지만, 후세 사람들이 역시 칭찬하여 말하기를 소동파 또한 영원한 스승이라고 하였다.
문공의 학문은 비록 간혹 순수함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그래도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두 현인께서 스승으로 부를 만 하다는 소견을 밝혔으니 영원한 스승이라고 칭찬하여 아무 문제도 없을 것 같지만, 소동파의 경우에는 출처(出處)가 그다지 바르다고 할 수는 없었고, 주자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소식(蘇軾)은 바르지 못한 사람이다.”라고 했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를 영원한 스승이라고 부른다면 거의 망령된 것에 가깝지 않겠는가?
지금 후손들이 배운 것이 없고 무식하여 자기 할아버지를 칭찬하기 위해서 영원한 스승이라고 부른다면, 사사로운 욕심으로 그런다고 보아야 할 것이므로 이 또한 망령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이 실제로 어떠할지는 영원한 세월이 흐를 때까지 오래토록 기다려 보아야만 알 수 있을 것이고, 실제로 개인적인 생각을 전혀 갖지 않는다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므로 사실은 그다지 망령된 것이라고만 말할 것도 아니다.
아! <논어>에서 이르기를 “남의 착한한 일을 칭찬하면 반드시 그 사람의 부모형제나 스승과 친구도 함께 칭찬을 받게 된다.”하였으니 바로 후덕한 도리를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논평하는 사람들 역시 반드시 그 당시를 칭찬할 때면 그 부모형제가 어떠했다고 말하고, 그 스승과 친구가 어떠했다고 말하게 되는 것은 그 당시의 세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당시의 세상이라 함은 반드시 받아들이는 대상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요, 받아들이는 대상이 있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주어진 명제가 있다는 말이니, 지금 만약 그 시대를 깊이 있게 탐구하지 않는다면 어찌 그 사람에 대하여 안 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무개의 아들이라 말하고, 아무개의 손자라고 말하고, 아무개의 스승이라 말하고, 아무개의 친구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배움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니, 그 학문이 얼마나 순수한지를 말하는 것인데, 올바른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구별하는 요소는 아득히 먼 위의 세대 사람들에서부터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아주 조그만 차이에 불과한 것으로 인하여 옳고 그름이 갈라지게 될 것이니,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선생의 세계는 사람들로 하여금 숨김없이 환히 알 수 있도록 들어나 있어서 그 당시의 세상을 자세하게 알 수 있고, 받아들일 대상을 알 수 있으며, 명제가 확실하게 주어져있으니 이와 같으므로 인하여 선생의 올바른 도리와 올바른 학문은 후세 사람들의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 있었지만 지금도 충분히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아! 유교 도덕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유학자의 사당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유학자의 사당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유교 학문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니, 무릇 이 사당에 들어오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선생을 뵙고 참배를 올린 다음 물러나서 여러 선비들과 인사를 나누고 함께 마음을 닦는 공부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먼저 존양이 요구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성찰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니, 박학해야 할 것이고, 자세하게 따져 물어야 할 것이며,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고, 밝게 판단해야 할 것이며, 독실하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 중에서 어느 하나도 그만둘 수는 없는 것이다.
온갖 것의 안과 밖에 이르고, 정밀하고 거칠음, 근본과 말단, 먼저와 다음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되어서, 모두를 꿰뚫어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최고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니 역시 스승이라 할 만할 것이다.
혹시라도 저명한 유학자이신 연촌공의 명성만을 살짝 훔쳐서 사용하면서 다만 적혀 있는 글자 몇 자(字)만을 외워 가지고 아는 체를 하려고 든다면 몸을 망치는 지름길이 될 것이며, 올바른 학문의 길은 어떠한 것인지, 어찌 해야만 올바른 학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꼼꼼히 노력하지 않고도 배울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와 같은 것은 알지도 못할 것이다.
도도한 흐름 속에서 비록 이 서원 소속으로 이름을 올린다고 하더라도,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 행세를 하려고 들 것인 즉, 우리와 같은 무리로 볼 수 없을 것이며, 어린 아이가 두드리는 북 소리 정도에 불과한 처지를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니 결국 어린 아이 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경하고 공경해야하는 사당인 것이다.
처음 일을 시작한 것은 1629년(인조 7)으로 이선행 선생께서 실로 많은 도움을 주셨는데, 1630년 가을에 사당의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 역시 모두 이지굉 선생께서 크게 도와주셨기 때문이다.
8월 중정일에 비로소 선생의 신위를 봉안할 수 있었으며, 이(李) 선생 두 분께서 먼저 신위에 절을 올리셨으니 두 분의 유교를 숭상하고 도리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대강 이와 같았다.
이 모든 것 역시 흐트러트릴 수 없는 것이며 절대로 숨겨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이다.
사당의 이름을 존양사(存養祠)로 정하게 된 것은 선생께서 살아 계실 때 이미 존양(存養)이라는 단어를 서루의 편액으로 사용하신바 있었고, 그 외의 다른 이름은 사용하신 적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 사당의 이름도 익히 잘 알려져 있는 선생의 존양의 혜택이 영원토록 이어가야 할 것이기에 바로 존양사라 이름하고 더하여 선생의 위패에도 역시 존양당(4)이라고 적어서 선생의 사당 안에 걸어 두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조정에 사액을 요청하여 받아야만 할 것인데, 존양은 선생께서 평생 동안 지켜 오신 약속이며, 오직 스스로 수행할 뿐 남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시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선생의 뜻을 받드는 것이 될 것이다.
선생의 초상화는 지금 선생께서 지으신 존양루가 있었던 옛 집에 모시고 있는데 지금 선생의 7세손 정(珽)이 존양루를 물려받아 훼손되지 않도록 애를 많이 쓰고 있으므로, 불가불 기록은 하여야겠으나 초상화의 사용에 관해서 만큼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으므로(5), 사당에 있는 학도들에게 그 이유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자세하게 설명해 주기 바란다.
1633년(인조 11) 5월 하순(6)
* 각주 ----------------------
(1) 한 글자가 없어 해석이 불가능하므로 번역을 생략하였다.
(2) 이때는 참판공(參判公) 휘 세영(世榮)께서 <강희보(康熙譜)>를 만드신 1686년(숙종 12)보다 53년 전일 뿐만 아니라 대전 동학사에서 범전주최씨총회가 열린 1638년(인조 16)보다 5년 전인데도 이미 사도공계의 최균(崔均)이나, 최재(崔宰)와 혈연을 검증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어서 <강희보>에 수록된 내용이 참판공 한 사람의 의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 가문에서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전통적 공론임을 알 수 있게 한다.
(3) 연촌공은 전주에 있는 완동구제(完東舊第)에서 생육신 원호(元昊)와 교류하시다가 돌아가시어 전주 주덕산에 묻히셨다. 여기에서 집은 완동구제를 말하는 것이다.
(4) 存養堂. 위패에 “연촌 선생”이라고 적지 않고 “존양당 선생”이라고 적었다는 뜻.
(5) 초상화는 영보를 떠나면 안 되므로, 존양사에 봉안할 수 없다는 뜻.
(6) 이 글은 저자를 밝히지 않고 있으나 의령공파 12세 기정공(棄井公) 휘 정(珽)으로 추정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