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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회 욥기 32장-42장
욥 32,1-22 엘리후의 연설
32장에서 37장까지는 갑자기 등장한 엘리후가 욥에게 발언하는 내용이다. 31장까지 아무런 언급이 없었던 엘리후가 갑작스레 등장하고 37장에서 그의 발언은 끝을 맺는다. 이것이 욥기에 후대에 첨가된 내용일 수도 있고, 엘리파즈, 빌닷, 초파르의 발언을 듣다 듣다 등장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 구절에 쓰여진 내용에 충실하면 좋겠다. “마침내 이 세 사람은 욥에게 대답하기를 멈추었다. 그가 자신을 의롭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자 람 가문 출신의 부즈 사람, 바라크엘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었다. 욥이 스스로 하느님보다 의롭다고 주장하므로 화를 낸 것이다. 그는 세 친구에게도 화를 내었다. 그들이 대답할 말도 찾지 못하면서 욥을 단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리후는 그들이 자기보다 나이가 많기 때문에, 욥에게 말할 기회를 기다렸다. 엘리후는 그 세 사람이 더 이상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화를 낸 것이다”(1-5).
예기치 못하게 우리는 엘리후라는 인물을 보게 된다. 명백히 이전 논쟁을 지켜보던 최소한 한 방관자가 있었으며, 그는 화가 나 있다. 그는 세 친구들에게도 화가 나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욥을 설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욥에게도 화가 나 있다. 왜냐하면 욥이 자신이 하느님보다 더 의롭다고 계속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화자는 우리에게 엘리후가 과묵했던 이유를 말해 준다. 그는 젊었고, 연장자를 우대했던 것이다.
32,6-10에서 엘리후는 자기 발언을 시작한다. 여기서 엘리후는 네가티브의 도입과 동일한 요점을 표현한다. 즉 엘리후는 어렸으므로 기다렸다. 그렇지만 세 친구의 실패가 그를 담대하게 하여,그는 자신 안에 영의 능력으로 말하게 되었다. “저는 ‘나이가 말을 하고 연륜이 지혜를 가르쳐야지.’ 생각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사람 안에 있는 영이, 전능하신 분의 입김이 사람을 깨우치는 것이더군요”(7-8).
일단 엘리후가 말하기 시작하자,그들 모두 가운데 자신만이 진리를 가졌다고 강력하게 느끼며 말한다. 실제로 32,11-22에서 엘리후는 자신의 변증을 이어 가는데,아마도 그것은 젊은이가 이런 상황에서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기묘한지를 드러낸다. 엘리후는 자기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나는 하고픈 말로 가득하고 속에서는 영이 말하고파 나를 다그친다네. 내 속은 바람구멍 없는 술통 같고 새 술 부대처럼 터져 버리려 하네. 속이 후련하게 말을 해야지. 입술을 열고 대답해야지”(18-20). 그는 말하여야 “후련하게" 것임이 틀림없다. 엘리후는 아첨하지 않을 것이며,완곡하게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33,1-33 엘리후의 발언, 내 말을 들으라, 욥의 잘못, 중재자와 하느님의 구원
33장은 욥에게 엘리후를 주목하라는 또 다른 요청으로 시작한다(1-11절). “그렇지만 이제 욥이시여, 제 말을 들으십시오. 제가 하는 모든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자, 이제 제가 입을 열고 제 입의 혀로 이야기하렵니다. 제 말은 마음의 정직함에서 나옵니다. 제 입술로 아는 것을 솔직히 토로하렵니다. 하느님의 영이 저를 만드시고 전능하신 분의 입김이 제게 생명을 주셨답니다”(1-4).
엘리후는 너무나 확신에 가득차서 자신이 욥과 같은 인간일 뿐이라고 욥에게 말할 필요를 느낀다. 엘리후는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가 옳으며 하느님이 자신을 학대한다는 욥의 말에 동요되었다. “자, 하느님께는 저도 당신과 같은 몸, 저 또한 진흙으로 빚어진 몸이랍니다. 저에 대한 공포가 당신을 덮치거나 저에 대한 압박감이 당신을 짓누르지는 않을 것입니다”(6-7).
12-30절에서 엘리후는 욥의 자기 의로움에 대한 주장을 강력하게 반대한다. 하느님은 부당하지 않고 오히려 욥의 고난을 통해 욥에게 교훈을 가르치려고 한다. 고난은 훈육의 역할을 한다. “그가 하느님께 기도하면 그를 받아들이시어 그는 환호하며 그분의 얼굴을 뵙고 그분께서는 사람에게 그의 의로움을 되찾아 주신답니다. 그러면 그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며 말할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짓고 바른 것을 왜곡하였지만 그에 마땅한 벌을 받지 않았네. 그분께서 구렁으로 떨어지는 내 목숨을 구하시어 내 생명이 빛을 즐거이 바라보네”(26-28). 그렇지만 욥은 중재자의 개입을 통해 고난을 모면할 수도 있는데 이는 욥 자신이 9,32-35과 16,18-22에서 바란 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33장은 욥이 조용히 하고 엘리후에게 귀 기울이라는 또 다른 호소로 마무리한다. “욥이시여, 주의를 기울여 제 말을 들으십시오. 제가 말씀드리겠으니 잠잠히 계십시오. 하실 말이 있거든 제게 대답하십시오. 말씀하십시오. 저도 당신이 정당함을 인정하고 싶습니다. 없거든 당신이 제 말을 들으십시오. 당신께 지혜를 가르쳐 드리겠으니 잠잠히 계십시오”(31-33). 엘리후는 욥에게 나눠 주려는 지혜를 가진 자라는 것을 강조한다.
욥기 34,1-37 엘리후의 두 번째 발언: 욥의 오류, 전능하신 분의 정의
34장은 “엘리후가 말을 계속하였다”라는 1절의 시작하는 말에서도 알려 주듯이,엘리후가 발언하는 새로운 문단을 시작한다. 엘리후는 다시 청중들에게 자기를 주목하라고 그리고 자기 말이 단순히 욥 이상을 전제한다고 권고할 필요를 느낀다.
엘리후는 욥이 자기는 온전하며 하느님이 까닭 없이 자기를 공격한다고 말함으로써 반항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고발한다(2-6절). 엘리후는 욥의 말을 직접적으로 인용하여 그의 잘못을 상세히 말한다. “욥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죄가 없는데 하느님께서 내 권리를 박탈하셨네. 올바른데도 나는 거짓말쟁이가 되고 잘못이 없는데도 화살 맞은 내 상처는 아물지 않네”(5-6). “그는 나쁜 짓 하는 자들과 한패 되어 다니고 악한 사내들과 어울려 돌아다니며 ’하느님과 잘 지내 봐야 사람에게는 이득이 없는 법!‘ 하고 말합니다”(8-9).
이렇게 하여,욥은 자신을 악을 행하는 자와 제휴한 것이다. 욥은 하느님에게 순종한 자를 보상하지 않았다고 하느님을 잘못 고발한다(7-9절). 이와 같이 엘리후는 하느님이 사람들의 행동에 따라 보상한다고 말함으로써 보상 원리를 다시 주장한다(10-l2절). “그분께서는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되갚으시고 인간을 그 길에 따라 대하십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는 악을 행하지 않으시고 전능하신 분께서는 올바른 것을 왜곡하지 않으십니다”(11-12).
결국 하느님은 선택이나 임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성품에 의해 땅을 통치한다. 모든 생명은 하느님에게 달려 있다(13-15절). “누가 그분께 세상을 맡겼습니까? 누가 온 누리를 세웠습니까?”(13).
16-30절에서 엘리후는 하느님이 정의롭고 욥은 하느님이 불의하다고 잘못 고발했다고 주장한다. 하느님은 결국 악인을 처리할 것이다. 악인들이 번영하는 것 같지만,그들의 성공은 일시적이다. “이렇게 그들의 행실을 알고 계시어 밤중에 뒤엎으시니 그들은 파멸됩니다. 악인들이기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을 처벌하십니다”(25-26).
그다음에 엘리후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훈육에 잘 반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한탄한다. 이것이 내포하는 바는 욥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며 엘리후는 욥에게 하느님과 화목하라고 권고한다(31-33절). “당신 생각에는 그분께서 그 불의를 응징하셔야 합니까? 당신이 단순히 그를 싫어하기 때문에? 당신이 선택하셔야 합니다. 제가 아닙니다. 무엇을 알고 계십니까? 말씀해 보십시오”(33). 하지만 욥은 진리에 잘 반응하지 않고 있다(34,34-37). “욥은 알지도 못하면서 말하는군. 그의 말은 현명하지 못해”(35).
35,1-16 엘리후의 세 번째 발언: 하느님의 초연성, 하느님의 지고한 정의
엘리후는 다시 한 번(33,8-11; 34,5-6,9) 욥의 입장을 요약하며 시작한다(35,2-3). 34,5에서 엘리후는 욥이 의롭다고 주장했다고 말했다. 이제(35,2) 엘리후는 하느님이 의롭지 않다는 것을 내포하는 방식으로 욥이 의롭다고 주장한다고 말한다. “‘나는 하느님보다 의롭다.’ 하고 말하는 것을 당신은 옳은 일이라고 여기십니까?”(2).
34,9에서 엘리후는 사람들이 하느님에게 어떤 혜택도 얻지 못한다고 욥이 말했으며 35,3에서는 욥이 이 생각을 반복한다고 진술한다. 욥과 그의 친구들에 응답하여(4절),엘리후는 하느님이 선하든 악하든 사람들에게 혜택을 얻지 못한다고 말함으로써 욥의 견해에 맞서 주장한다(5-8절). “당신이 의롭다 한들 그분께 무엇을 드리며 그분께서는 당신 손에서 무엇을 얻으시겠습니까? 당신의 불의는 당신 같은 인간에게나 해당되고 당신의 정의는 사람에게나 해당된답니다”(7-8). 인간은 하느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는 하느님의 초연성에 대해 엘리후는 말한다. 엘리후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인간의 죄나 의로움에 영향을 영향을 받지 않는다. 반면에 한 사람의 인격은 다른 인간에게 정말로 영향을 미친다.
35장의 엘리후의 발언의 후반부는 또 다른 주장을 시도한다. 엘리후는 사람들이 고난 가운데 부르짖을 때,하느님에게 도움을 청하며 부르짖지 않기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느님을 무시하기 때문에 하느님이 사람들을 무시한다. “당신을 보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시지만 당신의 송사는 이미 그분 앞에 있으니 기다리십시오”(14).이 발언에서 엘리후는 욥의 발언을 “지식 없는 말”이라는 것으로 묘사하려는 시도를 계속한다(16절). “욥은 쓸데없이 입을 열어 분별없이 말을 늘어놓고 있습니다”(16).
36,1-33 엘리후의 네 번째 발언: 하느님의 교육, 욥에 대한 경고, 가을의 주님
36장은 새로운 발언을 포함하지만 거의 새로운 내용을 제공하지 않는다. 엘리후는 전형적인 특정대로,자기주장에 대한 다소 장황한 도입으로 시작한다(2-4절). 엘리후의 발언이 장황하고 자만심을 강하게 드러낸다. 엘리후가 하는 말은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대변인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엘리후의 말은 하느님의 말이기에 참되다는 것이다. “당신께 알려 드릴 터이니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하느님을 대신하여 드릴 말씀이 아직 있습니다”(2).
엘리후는 자신이 하느님을 위한 대변인이며 따라서 “완전한 지식”(4절)을 말한다고 주장하면서,자기중심적으로 이해한다. “참으로 제 말은 거짓이 아니며 당신 곁의 이 몸은 완전한 지식을 갖추었습니다”(4).
이 발언에 대해 스스로 밝힌 중요한 서문에도 불구하고,엘리후는 고난의 훈계의 기능을 강조하여,보상 신학의 원리를 고쳐서 말한다. 고난은 어떤 경우 훈계가 되지만,엘리후는 이것을 일반적인 원리로 잘못 삼아 욥의 상황에 개인적으로 적용하려고 한다(5-14절). “악인은 살려 두지 않으시고 가련한 이들의 권리는 보장하십니다. 의인에게서 당신의 눈을 떼지 않으시고 늘 임금들과 함께 왕좌에 앉게 하시어 그들을 존귀하게 만들어 주십니다”(6-7).
15절-21절에서 엘리후는 하느님이 완고한 악인을 괴롭혀 옳은 길로 다시 돌아가도록 하려고 고난을 사용한다는 자기 요점을 강조한다. 엘리후는 욥이 이 진리를 보지 못하고 하느님의 정의를 부인한다고 고발한다. 이 때문에 욥은 이미 멀어진 것보다 하느님에게서 더 멀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가련한 이를 그 고통으로 구하시고 재앙으로 그 귀를 열어 주십니다”(15). “조심하여 악행으로 기울지 마십시오. 그것을 고통보다 더 좋아하시는 것 같군요”(21).
욥은 하느님이 얼마나 위대한지 깨달을 필요가 있다. 엘리후는 자연,특히 37장까지 확대될 기후(weather)에 드러난 하느님의 권능을 길게 묘사하기 시작한다. 엘리후는 누군가가 하느님이 옳지 않다고 말한다는 생각에 깊이 화가 나 있는데,그는 바로 정확하게 욥이다(22-33절). 팔레스티나에서 가을은 오랜 건기 끝에 비가 본격적으로 내리는 절기이다. “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깨달을 수 없이 위대하시고 그분의 햇수는 헤아릴 수 없답니다. 그분께서 물기를 뽑아 올리시니 안개에서 비가 걸러진답니다. 구름이 흘러내리면 수많은 사람들 위로 떨어집니다”(26-28).
욥 37,1-24 엘리후의 네 번째 발언: 겨울의 주님, 여름의 주님, 하느님의 광채
장 구분을 했던 사람들은 엘리후가 다시 끼어들어서 욥이 하느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묘사하기 때문에 새로운 장(37장)을 시작했던 것 같다. “이 때문에 나의 심장은 떨다 못해 제자리에서 퉁겨 나려 하는군요”(1). 우리는 이로 말미암아 그의 마음이 멈췄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37장의 기후,특히 천둥에 남겨진 하느님의 지문(fingerprint)에 대한 성찰을 이어간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2-13절). “그 빛에 이어 소리가 터지니 당신의 장엄한 소리로 울리시는 천둥입니다. 그분의 소리가 들릴 때마다 번개들이 멈추지 않습니다”(4). “폭풍은 곳집에서 불어오고 추위는 북풍과 함께 옵니다. 하느님의 입김에서 얼음이 나오고 넓은 물은 얼어서 단단하게 됩니다”(9-10).
37장의 두 번째 문단은 욥에 대한 또 다른 서론으로 구분된다(14절). “욥이시여, 이것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잠깐 멈추고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살펴보십시오”(14). 여기서도 엘리후는 기상 현상에 초점을 두면서,“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에 대한 성찰을 이어간다. 엘리후는 열기(heat)에 초점을 두며 여름의 주님을 말한다(14-20절). “남풍으로 땅이 숨죽일 때 자기 옷조차도 뜨겁게 느끼시는 당신이 그분과 함께 하늘을 펴실 수 있단 말입니까? 부어 만든 거울처럼 단단한 저 하늘을?”(17-18).
마지막이자 세 번째 문단은 해의 영광에 대한 것이다. 이 모두는 하느님의 광채로 하느님을 경외함으로 이어진다(21-24절). “이제 바람이 불어 하늘을 맑게 하고 거기에 빛이 밝게 비추면 사람들은 그것을 똑바로 볼 수 없습니다. 북녘에서 금 빛살이 솟아오르니 두려운 위엄이 하느님을 둘러싼답니다. 전능하신 분, 우리는 그분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권능과 공정이 뛰어나신 분, 정의가 넘치시는 분, 그분께서는 억누르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분을 경외합니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지혜롭다는 자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으십니다”(21-24).
37장(아마도 우리는 36,22-37,24을 말해야 한다)은 엘리후 발언의 이전 부분과는 전혀 다른 어조로 되어 있다. 실제로 엘리후의 자연에 대한 고찰은 따라나오는 주님의 발언을 미리 보여 준다. 특히 엘리후가 수사적 질문을 사용하여 욥의 지식이나 지혜에 대해 욥에게 도전할 때 그러하다(37,18-20). 그러나 우리는 이것 때문에 엘리후의 발언에 대해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바꾸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32장-37장까지 엘리후의 발언이 초점을 맞춘다. 이 부분은 ‘세 친구와의 논쟁’(2,7-31,40)을 ‘하느님의 등장’(38,1-42,6)과 연결하는 기능을 한다. 엘리후는 항변하는 욥에게도 화를 내지만 세 친구에게도 화를 낸다. 욥에게 변변한 반론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욥기의 저자는 엘리후의 태도를 통해, 세 친구의 설득이 실패할 것을 전통적인 지혜학파의 한계로 지적하고, 이에 대한 유감을 표현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엘리후는 고통을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하는데, 고통이란 인간이 자기중심주의를 벗어나 진정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알게 되는 은총의 장(場)이자 교육의 장이라는 것이다(36,15 참조).
사실 엘리후의 담론에는 세 친구의 담론과는 구별되는 어법과 문체, 수사학적 방법론들이 등장한다. 이를 통해 학계는 엘리후의 연설이 후대에 첨가된 본문이라는 데에 일반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그 근거는 1) 고통의 긍정적인 측면, 곧 교육적 가치를 새롭게 제안하고 있다는 점, 2) 세 친구가 설득에 실패한 것을 전통적인 지혜학파 교사들의 한계로 보고 이에 대한 유감을 표현하고 있는 점 등이다.
엘리후의 마지막 담론에는 하느님의 업적을 노래하는 찬양시가 나오는데, 이는 하느님의 등장을 준비하는 역할을 한다.
욥 38,1-41 주님의 말씀
38장 1-3절에서 주님께서는 욥에게 신랄하게 응대하신다. “지각없는 말로 내 뜻을 어둡게 하는 이자는 누구냐? 사내답게 네 허리를 동여매어라. 너에게 물을 터이니 대답하여라”(2-3)라는 물음으로 주님께서는 당신의 우월성을 드러내시며 욥을 꾸짖으신다.
욥은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그분께서 불의하게 행동하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욥이 비록 당신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죄를 지었다고 말씀하지는 않으신다. 단지 욥의 짧은 이해력을 지적하실 뿐이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의 의미를 하느님 안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가운데서 찾으려 했다. 이제 욥은 하느님의 물음에 혼신의 힘을 다하여 답해야 한다.
38장 4-7절에서 하느님께서는 욥에게 창조 질서에 대하여 알고 있는지 물으신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욥이 그것을 보기나 했는가? 구약 성경의 관념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는 오직 지혜만이 함께 있었다(참조: 욥 28장; 잠언 8,22-31). 창조 때에 존재하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욥이 하느님과 논쟁을 벌일 수 있겠는가? 땅은 정확하게 하느님의 설계에 따라 만들어졌다. 하느님께서 세상의 주춧돌을 놓으실 때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땅을 세울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네가 그렇게 잘 알거든 말해 보아라. 누가 그 치수를 정하였느냐? 너는 알지 않느냐? 또 누가 그 위에 줄을 쳤느냐?”(4-5).
38장 8-18절에서는 하느님께서 바다의 기원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고대 셈족들은 바다, 또는 심연이 세상의 원천이라 믿었다(창세 1,2 참조). 또한 바다는 생명에 적대하는 혼란의 힘으로도 이해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이 바다의 주인이시다. 바다는 오로지 하느님께만 복종한다(8-11절). 12-15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아침과 새벽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신다. 창조 첫날에 하느님께서는 빛이 생기게 하셨다(창세 1,3-5). 욥이 새벽에게 명령하여 동트게 할 수 있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새벽은 오직 하느님의 소리만을 듣는다. 16-18절에서 하느님께서는 욥에게 바다 속 깊이 들어가 보았는지 물으신다. 그 깊숙한 곳 너머에는 저승이 있다. 만일 욥이 그곳에 가 보았다면 우주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바다의 원천까지 가 보고 심연의 밑바닥을 걸어 보았느냐? 너는 땅이 얼마나 넓은지 이해할 수 있느냐? 네가 이 모든 것을 알거든 말해 보아라”(16-18).
38장 19-21절에서 하느님께서는 욥에게 빛과 어둠이 있는 곳을 아는지 물으신다. 만일 욥이 안다면 빛과 어둠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빛이 머무르는 곳으로 가는 길은 어디 있느냐? 또 어둠의 자리는 어디 있느냐?”(19).
38장 22-30절에서 하느님께서는 기후를 통제하는 분으로 당신을 드러내신다. 눈, 우박, 바람, 비, 이슬, 얼음, 서리, 이 모든 것을 조정하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인간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심지어 인간은 바람의 방향도, 비, 이슬, 얼음, 서리가 어떻게 생기는지도 알지 못한다. 물이 여러 형태로 변화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느님의 놀라운 창조력이 입증된다. “비에게 아버지가 있느냐? 또 누가 이슬방울들을 낳았느냐? 누구의 모태에서 얼음이 나왔느냐? 또 하늘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28-29).
38장 31-38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하늘을 다스리는 분이라고 밝히신다. 별들의 움직임, 비를 내리게 하는 구름, 따오기의 지혜, 수탉의 슬기,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다스림 아래 있다. “누가 따오기에게 지혜를 내렸느냐? 또 누가 수탉에게 슬기를 주었느냐?”(36). “따오기”와 “수탉”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들은 뜻이 분명하지 않다. 이 낱말들의 이해와 번역은 통상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위의 새들, 서로 다른 모습을 한 구름들, 그리고 지혜의 자리로 여겨졌던 사람의 몸의 기관들이다. 따오기는 사려와 지혜의 새로 여겨졌으며 이집트에서는 신령한 새로 일컫어졌다. 나일 강의 범람을 이 새가 알려준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라삐들의 전통에 따르면, 수탉은 새날을 알리는 것 말고도, 긴 여름동안의 건기 끝에 오는 가을비를 예교하는 것으로 믿어지기도 하였다.
욥 39,1-30 동물 세계의 주재자
38장 39절-39장 30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동물의 세계도 통제하며 보살피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신다. 하느님께서는 들짐승들이 당신의 보살핌 속에서 살아감을 설명해 주신다.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사자와 까마귀(38,39-41), 산양과 사슴(39,1-4), 들나귀(39,5-8), 들소(39,9-12), 타조(39,13-18), 말(39,19-25), 매와 독수리(39,26-30)등을 다스리며 이들에게 보금자리와 먹을 것을 장만해 주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물론 인간은 할 수 없는 일이다. “타조가 날개를 즐겁게 푸덕댄다고 과연 그것이 황새의 깃이며 털이 될 수 있느냐?”(13). ‘황새’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은 본디 ‘우아한, 사랑스러운’ 등으로 옮길 수 있는 형용사의 여성형이다. 그런데 고대의 통속적 인식에 따르면 황새가 새끼들을 잘 보살피기 때문에, 이 새를 위의 낱말과 동의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는 타조가 자기 알과 새끼를 잘 보살피지 않는다는 대중적 인식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타조에 반대되는 황새, 그리고 알과 새끼를 보살피는 데에 쓰이는 그의 깃과 털이 언급됨은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욥 40,1-5 주님의 꾸지람, 욥의 첫째 답변
40장 1-2절에서 하느님께서는 과연 욥이 이 전능하신 분과 논쟁을 벌일 수 있으며, 또 그분을 비난할 수 있는지 물으신다. “주님께서 욥에게 계속 말씀하셨다. 불평꾼이 전능하신 분과 논쟁하려는가? 하느님을 비난하는 자는 응답하여라”(1-2). 하느님께서 동물 세계의 주인이시라면 그분께서는 분명히 이 세상을, 특히 인간사를 통제하신다. 욥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메시지는 이것이다. 곧 그분께서는 동물들보다 욥을 더 아끼고 보살피신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욥이 잘살 때에도, 고통을 당하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욥을 돌보아 주신다. 욥의 고통은 이 세상의 구조 안에서 일어난 것이다. 욥의 불행은 하느님께서 부당하게 행하신다거나 부당한 상황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일은 그분의 지혜로운 통제 아래 일어난다.
이는 욥의 고통이 하느님의 통제 아래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자유를 위하여 배고픔을 참아야 하는 광야의 나귀처럼 욥이 하느님과 완전한 관계를 이루려면 고통을 견디어 내야 한다. 인간의 완전함은 그의 육체적, 감정적 건강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욥은 인간이 큰 불행과 심한 고통에도 자신의 흠 없음을 보존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불행한 상황이라 해서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느님과 지녀야 할 관계의 기본은 그의 건강이나 재산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이며 악을 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하느님께서 욥에게 제시하시는 것은, 욥이 계속해서 선하시고 충실하신 하느님을 신뢰할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을 변덕스러운 분으로 여기고 그분을 배척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하느님의 논리에 따르면, 욥이 이 땅 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겉모습만 보고서 하느님의 통치를 판단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욥은 아직 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가 해야 할 일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을 지혜롭게 다스리심을 믿으며 그분을 신뢰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 불평하면서 자신을 주님보다 더 높일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다. 첫째 말씀으로 주님께서는 욥에게 당신의 섭리를 믿을 것이지, 아니면 계속해서 당신을 비난할 것인지 선택하게 하신다.
40장 3-5절에서 욥이 주님께 유구무언이라고 대답한다. “저는 보잘것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한 번 말씀드렸으니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두 번 말씀드렸으니 덧붙이지 않겠습니다”(4-5). 말 많던 욥이 움츠러들고, 그의 짧은 대답은 자신의 무죄 주장에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음을 드러낸다. 주님의 위대하심 앞에서 욥은 자신의 무가치함을 절실히 느낀다. 욥은 자신이 주님께 답변할 처지에 있지 않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자신의 무죄 주장을 취소한 것은 아니다. 단지 더 이상 주님께 항변할 말을 찾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욥에게서 당신의 주권에 대한 온전한 응답을 얻어내시고자 거듭 말씀하신다.
욥 40,6-41,26 주님의 두 번째 말씀: 보헤못, 레비아탄
40장 6-14절에서 하느님께서는 욥에게 폭풍 속에서 말씀하신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느님께서 욥의 어떤 특별한 죄를 지적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곧, 욥이 의롭게 살았음을 인정하신다는 표시다. 그러나 욥이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주장과, 하느님의 통치방법에 대한 불평은 수정되어야 한다. 욥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함으로써 자기의 행위를 과신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으며 하느님에 대한 불평으로 자기가 하느님보다 더 의롭다고 주장하게 되는 실수를 범할 수 있는 것이다(7-8절). “사내답게 허리를 동여매어라. 너에게 물을 터이니 대답하여라. 네가 나의 공의마저 깨뜨리려느냐? 너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나를 단죄하려느냐?”(7-8).
욥이 자신의 주장이 옳음을 증명하려면 자기의 힘을 드러내 보이고 아름다운 복장으로 존귀함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9-10절). “존귀와 엄위로 꾸미고 존엄과 영화로 옷을 입어 보아라”(10). 만일 욥이 힘이 있다면 교만한 자들을 낮추고 악인들을 벌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불의하게 다스리신다는 욥의 불평을 인정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욥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하느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지도 않을 것이다(11-14절). “그러면 나도 너를 인정하리니 너의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14).
40장 15절과 25절에서 하느님께서는 욥이 당신의 주권을 인정하게 하시고자 인간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는 두 짐승, 브헤못(40,15-24)과 레비아탄(40,25-41,26)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보아라, 내가 너를 만들 때 함께 만든 브헤못을! 그것은 소처럼 풀을 뜯고 있다”(15). “너는 갈고리로 레비아탄을 낚을 수 있으며 줄로 그 혀를 내리누를 수 있느냐?”(25).
만일 욥이 이 세상을 정의롭게 다스릴 수 있다면 브헤못을 포획하고 레비아탄을 쳐 이길 수 있으리라. 욥이 이 힘센 피조물들을 물리칠 수 없다면 하느님께서 자기를 부당하게 다루신다는 주장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브헤못은 짐승을 뜻하는 히브리 말 ‘브헤마’의 복수형이다. 여기서 복수는 강조의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브헤못은 ‘가장 힘이 세고 뛰어난 짐승’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욥기의 저자는 이집트 나일 강에 서식하는 거대한 하마류의 짐승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이집트에서는 파라오만이 이 힘센 짐승을 사냥할 수 있었다. 임금의 사냥은 일종의 종교 의식으로 악에 대한 전쟁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힘센 짐승을 포획함으로써 파라오는 자신의 통치권을 증명하였다. 레비아탄은 이집트에 많은 일종의 악어를 연상시키는데, 종종 혼란을 일으키는 악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바다 괴물이다. 욥이 과연 이 괴물을 쳐 이길 수 있는가?
하느님께서는 욥에게 브헤못과 레비아탄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심으로써 당신께서 이 세상의 모든 힘센 것들, 땅이나 하늘이나 할 것 없이 만물의 주인이심을 그에게 확인시키려 하신다. “땅 위에 그와 같은 것이 없으니 그것은 무서움을 모르는 존재로 만들어졌다. 높은 자들을 모두 내려다보니 그것은 모든 오만한 자들 위에 군림하는 임금이다”(41,25-26)
사실 욥에게 재앙을 가져다준 모든 힘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욥이 하느님의 은총을 다시 얻으려면 자신의 무죄 주장을 철회하고 그분의 세상 통치에 대한 불평을 그만둠으로써 그분을 만물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분께 굴복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욥에게 자신의 주장을 계속할지, 아니면 당신께 불복할지 결정할 것을 요구하신다.
욥 42,1-6 욥의 두 번째 답변: 하느님 체험과 고백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당신께서는 ‘지각없이 내 뜻을 가리는 이자는 누구냐?’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당신께서는 ‘이제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너에게 물을 터이니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2-6).
42장 1-6절에서 욥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바를 고백한다. 욥은 하느님께서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며 그분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고 말씀드린다. 욥은 지금까지 하느님께서 과연 정의롭게 당신의 권능을 행사하시는지에 대하여 의문을 품었으나 이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수긍한다. 곧, 모든 일이 하느님의 지혜 안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말이다(2절).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방법에 대하여 욥은 너무나 신비하여 이해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그는 하느님의 지혜가 인간의 이해 능력을 능가함을 깨달은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욥은 그분께서 정의롭게 세상을 다스리심을 이해한다. 욥은 이렇게 자신의 이해 능력을 넘어서는 일에 대하여 모르고 떠들었다고 고백함으로써 하느님 앞에 자신을 겸손하게 드러낸다(3절).
이로써 욥이 하느님을 경외하고 섬긴 이유가 하느님에 대한 믿은 자체 때문이지, 친구들의 충고나 사탄이 주장하는 것처럼 개인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욥은 축제 때마다 어른들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에 대하여 들어 왔는데, 이제 그분을 직접 뵙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다. 그래서 욥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자신을 낮춘다.
이제부터 욥은 자신의 주장에 매달리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손에 자기의 모든 것을 맡기려는 의지를 표명한다. 여기서 욥이 지닌 믿음의 완전함이 분명히 드러난다. 욥이 자신의 고통에 대하여 불평하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과 장벽을 만들게 되었다. 하느님의 판단보다 자신의 판단이 더 옳다고 생각하는 위험에 빠진 것이다. 결국 욥은 자신의 주장을 완전히 철회하고 겸손하게 하느님의 섭리에 모든 것을 내맡기며 하느님을 찬양한다.
욥 42,7-16 맺음말: 욥의 회복
욥기의 결론에서 첫 두 장의 산문 문체로 되돌아간다. 욥이 회개하고 하느님에게 굴복하면서 자신의 불평을 거둬들인 후,하느님은 세 친구들에게 주목한다. 하느님은 욥이 옳다고 선언하면서,세 친구들에 대한 불만을 표현한다. 하느님은 욥에게 그들을 위해 중재하도록 하고 그들을 위해 제물을 바치도록 함으로써 출구를 허용한다. 하느님이 세 친구들에게 지시한 대로 그들은 행하고,욥은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흥미롭게도 욥의 회복은 욥이 자기 친구들을 위해 중재하는 것과 연결된다. 욥이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하느님은 욥의 이전 번영과 행복으로 회복시켰다. 실제로 욥의 새로운 상황은 이전 상황을 능가했다. 욥은 번창하는 대가족을 남겨두고서,나이 들어 행복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다음, 주님께서는 테만 사람 엘리파즈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너의 두 친구에게 내 분노가 타오르니, 너희가 나의 종 욥처럼 나에게 올바른 것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7). 하느님은 욥이 회개하도록 성공적으로 그에게 말씀한 후에 세 친구들에게 주목한다. 하느님은 엘리파즈를 셋 가운데 대표로 부르는데,이것은 아마도 그가 가장 나이가 많으며,4장-27장의 논쟁의 세 단락에서 처음 말했다는 사실에서도 이미 암시된다. 하느님의 첫 진술은 놀랍지 않다. 하느님이 셋에게 화를 낸 이유는 “나에게 올바른 것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보상신학(죄인이 고난을 당하므로 고난 당하는 자는 죄인이다)은 부적절했으며,그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어떤 변화의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논쟁의 마지막에서도 그들의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그들은 단순히 포기했을 뿐이었다.
당황스러운 점은 “나의 종 욥처럼”이라는 하느님의 다음 진술이다. 하느님은 여기서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방금 네 장에 걸친 두 주님의 발언을 읽었는데,거기서 하느님은 자신의 종 욥이 말한 것에 만족하지 않은 듯하다. 첫 발언의 절정에서 하느님은 욥에게 다음의 말씀으로 도전했다. “불평꾼이 전능하신 분과 논쟁하려는가? 하느님을 비난하는 자는 응답하여라”(40,2). 하느님의 발언은 욥이 불의에 대한 고발을 침묵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진술이 욥이 말한 모든 내용을 인정한 것은 아니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이 무엇을 인정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느님은 욥이 하느님을 찾은 것에 대해 인정할 수 있다. 즉 욥은 세 친구의 쉬운 대답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렇다. 욥은 고난 당하는 자가 죄인이라는 것을 믿지만,자신의 온전함을 주장하는 데는 확고하며,하느님과 대면하고자 하느님을 찾는다. 그러나 이미 진술한 대로,하느님은 욥이 자신에게 한 고발에 행복하지 않는 듯하다. 결국 하느님은 욥이 옳은 일을 했다고 선언하는 것은 욥의 회개를 포함하는 것 같다. 욥은 회개했고,이제 세 친구들이 회개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회개의 표정으로 욥은 그들을 대신하여 제물을 바친다. 욥이 세 친구를 위해 한 중재는 욥의 의로움에 대한 최선의 증거이다. 이 중재는 사욕이 없는 조치로 행해졌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세 친구나 하느님 측에서의 어떤 관대한 조치에 대한 반응이 아니다. 엘리파즈에게 하느님은 욥을 위해 수소와 숫양의 완전한 수인 각각 일곱 마리를 번제물로 바치도록 하였다(민수 23,1).
어떤 제사장도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또한 우리가 욥기의 행위에 대해 이른 시기(모세 이전) 배경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 족장들은 자신이 희생제물을 바칠 수 있지만,그들은 중재자가 필요한 데,하느님에 따르면 그는 다름 아닌 욥 자신이다. 우리는 욥이 또한 욥기 초반에 자기 자녀들을 위해 제사장과 같은 중재자로 기여했다는 사실을 기억 할 수 있다(1,5).
이스라엘 사람들이 금송아지로 죄를 지은 후,모세가 그들을 위해 중재했듯이(탈출 32,11-14),욥은 세 친구들을 위해 중재할 것이다. 세 친구가 가서 욥의 기도를 구하도록 함으로써 ,하느님은 그들과 독자들에게 그들의 보상 신학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그들은 하느님의 용서뿐만 아니라 욥의 용서도 구해야만 한다.
9절은 여기서 모두 하나씩 거론되는 세 친구들이 정확하게 하느님이 요구한 대로 행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그들은 욥에게 가고 욥은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들은 하느님 및 욥과의 관계에서 회복된다. “그러자 테만 사람 엘리파즈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초파르가 가서,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하니, 주님께서 욥의 기도를 들어주셨다”(9).
42장 10-16절은 하느님이 어떻게 욥의 재산을 회복했는지를 설명한다. 그렇게 함으로써,욥기는 친구들의 보상 개념에 다시 빠져들지 않는다.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다. 그들은 욥에게 회개의 필요성을 강요했었으며,욥이 회개하면 하느님이 그의 재산을 회복시킬 것이라고 했다. 욥은 회개했고,하느님은 그를 회복시켰다.
욥이 무엇보다 고난에 이르기 된 죄 때문에 회개한 것이 아니라는 논쟁의 맥락에서 하느님에게 행한 요구와 인내하지 못한 것에 대해 회개 했으므로,이미 프롤로그가 보상 신학을 긍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욥은 왜 고난을 당했는지를 결코 듣지 못하지만,이제 하느님의 주권적 권능과 지혜에 복종함을 배웠다. 욥은 하느님에게서 자신이 회복될 것이라는 약속 없이도 복종하는데,따라서 욥은 고발자가 고발한 것과 반대로(1,9) 실제로 “까닭 없이” 하느님을 경외한다.
하지만 이제 하느님은 자신의 지혜와 주권 가운데 욥이 이전 좋은 삶으로 회복되고 더 좋게 회복되도록 결정한다. 이런 회복은 욥이 옳은 일을 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이야기 방식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느님이 모두에게 행할 방식이라고 제안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하느님이 행동하는 양식으로 받아들인다면,우리는 욥기의 등장인물들이 줄곧 했던 대로 상자에 하느님을 넣는 죄를 범하게 될 것이다.
욥은 실제로 회복되며,“전에 소유하였던 것을 갑절로"(10) 되었다. 얼마나 놀라운 회복인가? 흥미롭게도 회복은 친구들을 위한 기도로 시작한다. 욥은 다시 하느님이 자신에게 하기를 원하는 바를 행한다. 욥은 자신에게 못되게 굴었던 사람들의 회복을 위해 일한다. 회복은 자기 가족과 친구들과 더불어 시작되는데 이 모두는 욥이 고난을 당할 때 거리를 두었던 자들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심지어 하느님이 욥의 물질의 번영을 회복시키기 전에,욥과 화해한다. 그들은 욥과 함께 먹고,욥을 위로하는데,이전에 일어났던 일들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일들이다. 실제로 욥의 물질적 번영의 회복은 그들 각자가 욥에게 돈과 금 고리를 줄 때 그들의 관대함과 더불어 시작된다. “그의 형제들과 자매들과 옛 친구들이 모두 그의 집에 와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에게 들이닥치게 하셨던 모든 불행에 대하여 그를 동정하고 위로하며, 저마다 은전 하나와 금 고리 하나를 그에게 주었다”(11).
하느님이 욥을 축복했다는 묘사로 욥기가 마무리된다. 시작하는 문장이 가리키듯이, 욥의 고난 이후의 삶은 하느님이 시험하기 전의 삶보다 더 좋다. 가축으로 측정되는 재물의 면에서 욥은 이전보다 두 배나 부요하다. 욥의 가족은 두 배가 됐지만,자녀의 수는 “아들 일곱과 딸 셋”으로 정확하게 시련을 겪기 전과 동일하다(1,2과 42,13을 비교하라). 실제 삶에서 새 자녀들은 사랑하는 첫 자녀들을 잃는 고통을 지우게 하지는 못하겠지만,욥기는 이런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핵심은 욥이 이전의 번영보다 더 추가된 상태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화자는 아들이 아니라 딸들의 이름을 계속 거론한다. 아마도 고대 사회에서 일곱(완전이라는 숫자) 아들들을 가진다는 이점은 충분히 명백했을 것이다. 그래서 욥의 행복한 상태를 부각시키려고,딸들에 대해 몇 마디 더 추가된 것이다. 딸들의 이름이 불리고,그들의 이름은 욥의 새로운 상태에 대한 기쁨을 부각시킨다. 첫째 여미마는 “비둘기” 를 의미하고,둘째 크치아는 “계수나무”를 의미하며,셋째 케렌 하푹은 “눈 화장품을 담는 뿔”를 의미한다.
이 이름들과 더물어 우리가 “세상 어디에서도 욥의 딸들만큼 아리따운 여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15)라고 듣게 되는 것은 놀랍지 않다. 그들은 아름다울뿐만 아니라 부요했는데,이는 고대 근동 사회에서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욥이 그들에게 유산을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민수기 27장 8절에서는 아들이 전혀 없을 때에만 딸이 상속하도록 허용하였다. 욥은 이런 비범한 딸들을 위한 남편을 찾는 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욥은 부요했고 행복한 대가족을 가졌다. 마지막으로 욥은 장수했다. 우리는 욥이 얼마나 오래 고난을 당했는지 또는 욥기의 마지막에서 나이가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이 욥의 수명에 140년을 더한 것을 아는데,이는 70의 두 배로,7이라는 완전을 의미하는 숫자에 근거한다. 욥은 실제로 ‘수를 다하고’ 죽었다.
<신학적 주제들>
1) ‘왜?’를 통한 고통의 재해석
욥기에서 무엇보다 부각되는 주제는 ‘왜?’이다. 죄 없이 살아왔는데 하루하침에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면, “까닭 없이”(1,9; 2,3; 9,17) 그러한 일이 발생했다면 누구도 “왜?”라고 항변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욥기의 저자는 그 ‘왜?’에 대한 답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찾고 있다. 즉 불현듯 다가온 고통은 죄에 대한 징벌이 아니라 하느님과 더욱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관계로 나아가게 하는 은총과 지혜의 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전환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니는데, 고통을 ‘긍정적’ 의미를 가진 은총의 장으로 소개함으로써 삶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유다 사회에서 강력하게 힘을 행사하던 신명기적 사고는 신약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했다. 이러한 영향력은 무엇보다도 율법 학자들과 기득권층의 지지를 통해 강화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기득권층이 누리고 있는 부와 명예가 자신들의 선행과 바른 생활의 결과라고 설명하는 신명기적 인과보상 사상은 그들에게 그 어떤 논리보다 기특하고 충성스러운 합리적 논리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에 더욱 절대적인 힘을 싣기 위해 그들은, 나병 환자, 창녀, 세리, 불임 여성, 소경 등을 부정한 이들로 치부하였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고통을 몸에 지닌 죄인’으로 단죄받아 철저히 결리되었고, 죄에 상응한 모욕과 천대, 소외, 무시를 받아야 했다.
이러한 폭력적 시선과 관습에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그 죄인들과 한자리에서 먹고 함께 생활했던 예수님의 모습은 분명 당시의 기득권층과는 대립 될 수밖에 없었던, 그러나 욥기가 표방하는 의식과 같은 연장선 위에 있던 복음이었다.
2) 메시아관의 변화
이러한 사고의 전환은 그들의 오랜 소망이었던 ‘메시아의 오심’과도 직결되었다. 이스라엘이 전통적으로 기다려 왔던 메시아는 고통(억압과 가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 그리고 죄와 악의 결과인 고통을 영원히 없애 주실 분이었다. 유다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고통을 없애 주지는 못할망정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데 있었다. 그 고통스러운 죽음의 현장은, 예수가 절대로 메시아일 리 없음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증언의 자리였고, 오히려 저주받아 마땅한 인물임을 확인시켜 주는 자리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두고,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입장(그리스도교)과 백성을 교란시킨 정치범이라는 입장(유다교)이 첨예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고통에 대한 시각 차이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다인들은 아직도, 그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 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욥기가 제시하는 고통에 대한 긍정적 시각은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라는 그리스도교적 교의를 합리적으로 설명해 준다. 그리스도는 고통을 없애러 오신 분이 아니라 어떤 고통 중에도 우리와 함께 계심으로써 그 고통을 극복하게 하시고, 결국 고통을 넘어서는 구원(부활)으로 이끄신다는 종말론적 희망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3) 소문으로 들은 하느님
욥은 자신이 무죄한데도 고통 받고 있다면서, 세상과 하느님을 정의롭지 못하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하느님과 직접 만나면서 인간의 경험과 이성만을 앞세운 자신의 판단이 이기적이고 오만하였음을 깨닫고, 자신이 지금까지 믿어 온 하느님이 ‘소문으로 들어 알아온 분’이었음을 고백한다. ‘소문으로 알게 된 하느님’은 ‘내’가 아닌 ‘그들’에 의해 간접적으로 체험된 하느님일 뿐, 실상 내 실존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욥 역시 이제 하느님을 소문을 통해 ‘이미지’ 혹은 ‘관념’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절체절명의 고통 안에서 만나 알게 되고, 그 결과 소중한 내적 평화를 얻게 된다. 하느님을 직접 만나게 된 욥은 더 이상 입을 열어 불평의 말을 쏟아 내지 않는다. 하느님을 직접 만난 사람은 소문에 귀 기울일 필요 없이 자신의 내면에 계시는 그분의 현존을 고요히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힘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4) 곁도는 이론과 편협한 전통
욥기 저자가 그의 시대의 가장 큰 문제로 보았던 것은, ‘삶 자체’보다 ‘삶에 대한 이론’이나 ‘원칙’이 더 비대해진 데 있었다. 욥기 저자는 ‘중심’과 ‘주변’이 바뀔 때 야기될 수 있는 불안한 긴장을 정면에서 직시한 사람이었다. 신명기적 사고로 욥의 고통을 설명하려던 친구들의 논지를 통해, 이론만으로 삶을 재단하려던 당시 이스라엘의 풍조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느님의 진리, 정의, 자유 의지는 결코 인간의 공식이나 논리로 제한될 수 없는 대주제임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욥기가 거둔 가장 커다란 성과는 ‘원칙’을 ‘삶의 현실’로, ‘개념’을 ‘인간’으로 대치했다는 데 있다. 비본질적인 것(원리, 이론, 교의)을 잘라냄으로써 본질(인간, 살아있는 구원)을 제대로 보게 한 것이다.
사실, 선을 행한 만큼 복을 받고 죄를 지은 만큼 벌을 받는다는 신명기적 원칙은 매우 공평하고 정의로운 논리 같지만 모든 구원의 중심에 ‘인간’이 있다는, 신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의 논리’였다. 이러한 사상은 하느님의 은총과는 무관하게, 인간 자신의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여타 종교의 교의(자력自力 구원)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욥기의 저자는 ‘인간의 선행’보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구원의 핵심으로 제시함으로써 편협한 전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시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