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시간에 신부님께서 탈출 33,12-17 절을 그대로 읽으니 좀 이상하더라. 그리고 성서 신학을 연구하시는 분들이 순서를 뒤바꿔 놓으시는 부분이 있으셔서... 일반적으로 주석가들이 하는 한 예입니다.
첫번째 제안은, 12절ㅡ 16절 ㅡ 15절ㅡ14절 ㅡ13절 ㅡ17절을 읽으면 좀 얘기가 되는 것 같다고 하는 주석가들의 전체적인 배칭이 있다고 하시며, 이런 제안이 결코 불가능한게 아닌게 유다의 랍비들의 주석 방법 중에서 커다란 원칙 중에 문장의 순서는 바꿀수 있다고 하는 원칙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성서 신학자들이 훨씬 더 문장의 순서들과 같은 것을 바꾸지 않고 있는 그대로 해석을 하시고 랍비들은 더 자유롭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는 이런식으로 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 주석가들의 의견이고 신부님의 제안은 12절과 마지막 17절 부분이 연결되는 것이 더 매끄러운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좀 많은 부분들을 편집적인 첨가라고 생각하시고 뽑아내시고 순서를 다시 구성하셨는데요,
탈출 33,12-17 신부님 재구성
보십시오/ 당신은 말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오르게 해라 / 이 백성을
그러나 당신은 나를 알도록 하지 않았다
(누구를) 당신이 보낼 것인지를 / 나와 함께
그러니
내가( 제발) 알도록 하십시오 / 당신의 길들을
그리하여 내가 당신을 알도록 / 내가 발견하기 위하여
호의를 / 당신의 양 눈에 / 그리고 보십시오
이 민족은 당신의 백성이라는 것을
그러자, 하느님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말씀( =일)은 / 네가 말씀한 / 내가 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발견했다 / 호의를
나의 양 눈에 / 그리고 나는 너를 알고 있다
이름으로
당신은 말했다 / 나는 너를 알고 있다 / 이름으로
그리고 너는 발견했다 / 호의를 / 나의 양 눈에
하지만 무엇으로써 알려지겠습니까 / 이제
내가 발견했다는 것을 / 호의를
당신의 양 눈에 / 나와 당신의 백성이
우리와 함께 당신이 걷는 것으로써 아닙니까
그리고(무엇으로써) 우리가 구분되겠습니까
나와 당신의 백성이 / 모든 백성으로부터
땅의 얼굴들 위에 있는
따라서,
당신의 얼굴들이 가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를 올라가게 하지 마십시오 / 이곳으로부터
그러자, 하느님이 대답합니다.
나의 얼굴들이 갈 것이다
그리고 내가 쉬도록 할 것이다 / 너를 위해
신부님이 하신 재구성입니다. 지금 성경의 텍스트가 하나가 있고 그 다음에 전문적인 주석가들이 하는 제안이 있고 그 다음에 신부님께서 용기를 내셔서 하신 재구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한번씩 해보라고 권하시는,
순서를 바꾸어서 전체가 의미가 될수 있게 나에게 이해가 되는 텍스트로 만들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발견해 볼수 있고 하느님의 뜻을 알아 들을 수 있는 그러한 틀이 있다는 것을 시도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단지 문제가 되는 것은? 텍스트를 가지고 함부로 뜯어내고 잘라 붙이고 위에서 아래로 옮기고 그러면서 텍스트에 대한 경건함이 사라지는 것은 좀 조심스러운 문제인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신부님께서도 그와 같은 작업을 자세하게 소개의 말씀을 안하셨는데 이 부분 만큼은 좀 그런식의 시도가 가능하다는 것에 대해서 소개의 말씀을 하셨고 단지 전제 조건은 이 텍스트에 대한 하느님 말씀에 대한 그 경건함 앞에서의 어떤 경외를 잃지 않는 우리들의 신앙의 자세는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본래의 탈출 33,12~17절의 테두리가 되는 부분에서는 12절, 13절, 16절,17절에서 호의를 발견하다.라는 표현이 테두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심 부분인 14절과 15절에서는 얼굴들 이라는 표현이 반복되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입니다. 시작과 끝은 하느님의 호의에 관해 얘기하면서 중심에는 하느님의 얼굴들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그와 같은 하나의 문학적인 구조가 우리가 알아 볼수 있는 구조입니다.
반대로 그렇게 하다 보니까, 전체적인 구조는 맞아 떨어지는데 문장과 문장 사이에 논리적인 연결이 조금 약해졌던 것이 문제인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탈출 33,12절부터 사용되는 전체적 대화의 분위기에서 야훼와 모세사이에 친밀한 관계를 엿볼수가 있습니다. 이는 앞선 탈출 33,11절에서도 이미 언급되었습니다. 모세는 이 친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야훼가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과 함께 가도록 설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은 마치 친구끼리 얘기하는 듯한 "에이 그러지 말고 같이가," 이런식의 어떤...모세가 감히 하느님을 설득할 수 있는 그와 같은 대목들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신약에서도 인간이 예수님을 설득하는 경우가 나옵니다. 어떤 엄마가 와서 딸을 고쳐달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유다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구하신다고 하시며 강아지에 던져줄 빵은 없다고 하니 여인이 강아지도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는 먹지 않느냐고 예수님을 감동시켜 설득하였습니다.
그리고 라자로의 이야기도 본래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구할 계획이 없으셨는데 마리아와 마르타가 와서 라자로의 죽음을 알리면서 슬퍼하니까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무덤에서 나오라고 하시는 이야기,
그리고 이것은 애매한 경우입니다.
이미 탈출 3,2절 과 탈출 14,19절에서 보면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앞서서 이스라엘과 함께 천사들을 보내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가시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보내서 이스라엘을 인도하게 하는 그와 같은 형태에 그런 진술들을 우리가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탈출 23,20 그리고 탈출 23,23절에서 그와 같은 예고를 합니다.
그리고 탈출 32,34절과 탈출 33,2절에서 천사를 보내서 이끄시겠다는 예고가 확인이 됩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흐름으로 보면은 정말 하느님이 함께 가는 것인지, 천사가 함께 가는 것인지에 관해서 우리가 조금은 이것은 어떻게 되는 거야? 의문을 가질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인 것 같습니다.
일단 중요한 것은? 하느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간다는 것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부대끼는 사람은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 문장 자체가 하느님이 함께 간다고 했지만 사실은 야훼의 천사가 함께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것을 통해서 부대낌을 해소하는 그런틀로서 야훼가 함께감과 야훼의 천사가 함께 가는 것이 텍스트 안에서 공존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창세기에서도 아브라함에 하느님과 얘기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또 하느님은 없고 하느님의 천사가 등장하는 하지만 그 두가지가 동일하게 생각되는 그런 틀을 볼수 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읽는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럽습니다.
그 당황스러움 역시 신학적인 부대낌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저 높이 계시고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보거나 얘기를 나눈다거나 이런것들은 가능하지 않다! 텍스트가 그렇게 얘기하고 있는 것은 사실 하느님의 천사와 이야기 하는 것이다!
야곱도 씨름 한것이 하느님의 천사인지 하느님인지 조금은 애매합니다. 그런 텍스트가 주는 신학의 이중성 때문에 조금은 읽는 사람들에게 오늘날 최종 편집된 텍스트를 읽는 이들에게는 무언가가 분명하지가 않다고 전해 줍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가 알아 들어야 할 것은 이 안에는 사실은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대화하거나 인간이 하느님과 얼굴을 마주보거나 씨름을 하거나 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흐름도 있었고,
반대로 하느님은 너무 높은 곳에 있고 너무 밝고 위대하시고 권능이 놀랍고 인간은 그렇치 않아서 그 사이에 간격이 필요하다는 그러한 두 신학이 성경 안에서도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들으면 되겠습니다.
탈출기 3장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34장에 이르기까지 야훼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선포합니다.
내가 누구인가? 여기서도 그 대목이 상당히 중요한 것입니다.'당신은 나를 알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당신을 알도록, 내 길들을 알도록 해주십시오.' 라는 대목이 중요합니다.
탈출기 전반부에서도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키신 신학적인 이유도 '그리하여 이집트인들이 야훼를 알도록 하기위해서.'
그리고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을 왜 시험하였는지, ' 그리하여 그들이 야훼를 알도록...'이었습니다.
나중에 복음서에서도 보면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나를 보았다면 아버지를 본 것이고 나를 안다면 아버지를 알고 있는 것이다.' 라는 복음서의 말씀도 같은 틀에서 우리가 알아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철학적인 용어로 표현한다면 구약과 신약이 함께 갖고 있는 인식론적 요청입니다.
구약의 최종적인 목적은? 그리하여 세상이 하느님을 알게 되는 것.
신약의 최종적인 목적은? 그리하여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앎이란 말은 깨닫는다 라는 말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부분과 연결해서 13절의 '당신의 길들을 알려 달라' 는 모세의 요청은 깊이 있게 묵상해 볼수 있는 묵상의 소재가 될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당신의 길들을 알려 주십시오. 라는 모세의 요청은 사실상 우리들이 매일 하는 주님의 기도의 시작 부분과 일맥 상통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 라고 얘기 하는 그 안에 신학적으로 어떤 동질적인 그와 같은 하나의 요청을 '하느님 우리가 당신을 알도록 해주십시오.' 라는 '당신의 뜻을 깨닫도록 해 주십시오.' 라는 우리의 기도를 모세가 여기서는 히브리적 방식으로 야훼 하느님께 드리고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탈출 33,18절로 넘어 갑니다. 모세의 청원으로...
첫번째 모세의 청원은 당신의 길들을 알도록 해 주십시오. 그리고 당신 얼굴들이 우리와 함께 가는 것, 그게 제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야훼 하느님은 '아! 그래 그럼 나의 얼굴들이 너와 함께 가겠다.' 라고 하시며 긍정적으로 하셨는데 하지만 문제가 '내가 너희와 함께 가지 않겠다. 내가 너희와 가다간 너희를 한 순간에 죽여 버릴 수도 있다.' 라는 문제가 이제는 해결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그와 같은 청원을 통해서
그러자, 모세가 이번에는 두번째로 청원을 합니다.
탈출 33,18 직역
그리고 그는 말했다 / 나로 하여금 보게 하십시오
제발 / 당신의 영광을
영광이라는 단어가 히브리말로 카볻(כבוד)이라고 합니다. 이것의 해석은 여러가지 입니다. 파라오의 심장이 단단해지는 것도, 심장이 무거워졌다는 표현도 카볻과 같은 어원을 가지고 동사가 형성이 됩니다.
그래서 당신의 영광, 아니면 파라오의 그런 완강함 이런것들이 그 안에서 언어의 유희가 함께 공존한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고 있으면 됩니다.
탈출 3,6절에서 처음에 호렙산에 간 모세가 불붙은 것 같은 떨기 나무를 보았을 때 모세는 두려워서 얼굴을 가립니다. 반면에 탈출 24,11절에서는 모세와 수령들은 하느님을 뵙고서 먹고 마십니다. 시나이 계약을 맺으면서
그리고 탈출 33,11절에서 야훼는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제 탈출 33,18절에서 모세가 보고자 하는 영광에 관해서 이야기 하는데, 이상합니다.
어떨때 하느님이 나타나면 숨고 또 어떨 때는 보게 해 달라고 하고 이 부분에서도 역시 앞서 말씀해 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과 마주 보는 것이 문제가 없다는 신학도 있고 반면에 그러면 죽게 된다는, 그러면 인간이 감당 할수 없다는 그와 같은 신학의 이중성을 이 흐름안에서도 만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한가지 재밌는 것은?
에제 1,27-28을 보면 하느님의 영광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예언자가 애기합니다.
에제 1,27-28
내가 또 바라보니, 그의 허리처럼 보이는 부분의 위쪽은 빛나는 금붙이와 같고, 사방이 불로 둘러싸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허리처럼 보이는 부분의 아래쪽은 불처럼 보였는데, 사방이 광채로 둘러싸여 있었다. 사방으로 뻗은 광채의 모습은, 비 오는 날 구름에 나타나는 무지개처럼 보였다. 그것은 주님 영광의 형상처럼 보였다. 그것을 보고 나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그때 나는 말씀하시는 분의 소리를 들었다.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느님이 영광에 관해서 제일 자세하게 묘사하는 부분입니다.
조금 요약하자면은? ① 불과 같았다 ② 반짝반짝했다
즉 하느님의 영광에 불 내지는 광채가 있었음을 말합니다.
나중에 복음에서도 예수님이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실 때도 빛이 나고 하얗게 보이는 광채와 같은 것들이 신성과 연결되어 있으면서 탈출기 안에서도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어떤 불기둥의 모습, 불이 갖고 있는 그 신적인 이미지에 관해서 지속적으로 성경 안에서 만나게 됩니다.
탈출 33,19 직역
그리고 그(야훼)는 말했다
그는 야훼를 지칭, 하지만 텍스트에서느 그냥 대명사로 처리했습니다.
탈출 33,19 직역
바로 내가 지나가게 하겠다 / 모든 나의 좋음을
너의 얼굴들 위로 / 그리고 나는 외치겠다 / 야훼라는 이름으로
너의 얼굴들에게 / 그리고 나는 좋아할 것이다 / 내가 좋아할 이를
그리고 나는 사랑할 것이다 / 내가 사랑할 이를
우리 성경과는 다르게 직역하셨습니다. 이 부분을 성경의 번역이 틀려서가 아니라 히브리말 문장은 다양하게 번역될 수가 있는데 성경에 있는 번역을 그냥 말씀해 주시는 것 보다 그 번역의 다양성이 얼마나 넓어질 수 있는가를 소개해 주신다는 의미에서 신부님께서 직역을 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나옵니다.
첫번째 '바로 내가 지나가게 하겠다.' 라는 것에서 야훼 스스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지나가게 하겠다는 일종의 사역적 의미의 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나가게 하겠다는 것이 나의 좋음을 지나가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좋음이 히브리어로 토브입니다.
신부님께서 좋음이라고 번역하신 것은? 하느님께서 창조 이야기에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았다. 라고 했을 때
이, 톱(טוב)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바이야브 키 토브' 좋다!(????)
모세가 나중에 태어났을 때 부모가 모세를 죽이지 않았는데 보니까 모세가 좋았다. 그때도 '토브' 입니다.
나중에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 부으려고 하는데 마지막의 막내 아들을 보니까 좋았다. 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와 다윗의 번역에서 우리에게 생소하다 보니까 '잘생겼다.' 라고 우리 성경에서는 번역을 했는데 어쨌든, 좋은겁니다.
그 좋음이란? 선함, 아름다움 등에 긍정적인 덕목을 함축하는 개념입니다. 여기서 보면, 가끔 성경에서 우리를 깜짝 깜짝 놀라게 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야훼의 악함, 이런식의 어떤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것과는 반대입니다. 하느님의 어둠이 아니라 하느님의 어떤 밝음,
따라서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유일신 사상이 갖고 있는 일종의 딜레마입니다. 유일신 사상은 유일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에 대한 권능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즉, 선함도 악함도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다 하느님에게 달려 있다는 생각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갖고 있는 '하느님은 선한 분이시고 좋은 분이시고 착한 분이시다.' 라고 하면서 악의 존재를 얘기하면서 '악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 결핍이다.' 라는 철학적 교의적 설명의 이전의 단계라고 볼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유일한데 그러면 좋은 일과 함께 나쁜 일은 어디서 생기는 거야??
아!! 그것은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궁극적인 권능은 하느님이 갖고 있다는 것이야. 라는 생각입니다.
결국 지나가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악함이 아니라(신의 어떤 부정적인 면이 아니라) 하느님의 긍정적인 면, 좋음이 너의 얼굴들 위로,
지금까지는 우리는 하느님의 얼굴들, 에 관해서 얘기했습니다. 야훼의 얼굴들이 이스라엘과 함께 있느냐? 함께 가느냐? 그렇지 않느냐?
반대로 여기서는 모세의 얼굴들에 관해서 이야기 합니다.
구약성경 중에서 이상한 것 중에 하나는? 얼굴이 히브리 말로 단수로 존재합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번도 단수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이상한 경우입니다.
어쩔수 없이 인간도 그렇고 하느님도 그렇고 여러가지 얼굴을 갖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웃는 얼굴, 화난 얼굴처럼 우리 마음에는 선한 인격도 있고 악한 인격도 있다는 의미로, 여러가지 것들에 복합적인 면을 복수로 이야기 하는 것인가? 로 상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많은 신학자분들이 이 부분에 관해서 설명을 하셨는데 신부님을 설득하실 만한 이론은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이부분에서는 하느님의 좋음을 모세의 얼굴들 위로 지나가게 하겠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게 어떤 뜻인지는 추가적으로 설명이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는 좋아할 것이다 내가 좋아할 일을 그리고 나는 사랑할 것이다 내가 사랑할 일을 이러한 번역을 하셨는데, 이 좋아함 이라는 히브리적 개념은 히브리 말로
하난(חנן)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뜻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함, 이라는 히브리 말로, 라함(רחם)이라는 개념은 하느님의 동정, 즉 자비라고 했을 때나, 정확한 구분에 있어서 어려움은 있지만...
신부님께서 원고를 준비하실 때 영어를 쓰실 수 밖에 없으셨다고 합니다.
좋아함 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 grace 을 이야기하고
사랑함 이라는 것은 compassion 으로 표현되어 함축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한 단어가 갖는 다양한 의미에 대해서 알고 있었으면 합니다.
탈출 33,20 직역
그리고 그는 말했다 / 너는 할 수 없을 것이다 / 나의 얼굴들이 보는 것을
왜냐하면 인간은 나를 보지 않을 것이며 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부정하시는 것과 함께 등장하는, 왜냐하면 인간은 나를 보지 않을 것이며 살 것이기 때문이다. 라는 표현을 우리말로 의역하면,
인간이 나를 보지 않을 것이며 인간이 나를 본다면 살 수 없다,는 의미로
영어에서도 가정법 문장의 복잡하니까, 우리 말과는 반대로 틀어서 얘기하는 경우로 이해하면 히브리 말에서도 그와 같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인간이 나를 본다면 살지 못할 것이기 없기 때문이다.' 라고 알아들어야 합니다.
한가지 특징적이라고 하면,
계속해서 얼굴들, 이라는 명사가 사용됩니다. 물론 19절에서는 모세의 얼굴들, 20절은 야훼의 얼굴들을 가리키는데,
20절의 야훼의 얼굴들은 18절의 야훼의 영광, 그리고 19절의 야훼의 좋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야훼의 얼굴들, 야훼의 영광, 야훼의 좋음 이런 것들이 계속해서 체인처럼 엮여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우리의 딴지는 가능합니다! ^^
앞선 탈출 33,11절의 만남의 천막에서,
야훼는 모세와 얼굴의 얼굴을 마주하고 말씀했다. 라는 부분에서 모세는 죽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뭔가요??
이야기의 흐름 안에서 내적 논리가 깨지는 것입니다. 아까 신부님께서 말씀해 주신 대로 두 가지 신학이 공존하고 있다는 겁니다.
탈출 33,21 직역
그리고 야훼는 말했다 /보라 / 한 장소가 내 곁에 있다
그리고 너는 그 바위 위에 설 것이다
탈출기의 큰 흐름에서 볼때 모세가 지금 있는 곳은? 아직 만남의 천막에 있습니다.
이제 야훼는 모세를 천막 밖에 일정한 장소로 불러 냅니다.어떤 장소라고 얘기했을 때 히브리말로
마꼼(מיקו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꼼' 이라는 단어가 숨어 있습니다.
그 "꼼(קום)" 은 세운다. 라는 뜻으로
논리적 단계별로 이해해야 합니다.
마꼼(장소), 이 안에는 꼼(קום, 세운다) 라는 동사가 이 안에 들어가 있고
그 '꼼(세운다)' 라는 말은 '계약'이라는 명사와도 연결이 됩니다.
따라서 구약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식의 표현을 씁니다. '계약을 자른다' 라는 표현도 쓰지만 '계약을 세운다' 라는 표현도 씁니다.
왜? 그러하나면은, A와 B 가 계약을 맺고 나서 그 계약을 잊지 않기 위해서 구약의 백성들이 돌기둥 같은 것을 세워 둡니다. 또는 돌무더기를 쌓아둡니다.
마꼼 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아! 뭔가 계약과 관련된 이야기인가? 라고 우리들이 약간 좀 상상해 볼 수 있는 그러한 여지가 있습니다.
탈출 33,22 직역
그리고 나의 영광이 지나갈 때
(그리고) 나는 너를 둘 것이다 / 그 바위의 틈에
그리고 나는 덮을 것이다 / 나의 손바닥을
너의 위로 / 나의 지나감까지
여기서 '틈' 이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아주 드물게 발견이 됩니다. 신부님께서 테바(תבה)라는 히브리 단어를 설명하실 때 노아의 방주도 테바고 모세를 구출한 바구니도 테바였습니다. 그 테바는 사이즈와 관계가 없습니다.
여기의 틈도 틈이라는 말과 구멍이라는, 또는 동굴이라고 번역 할 수 있는 히브리 말 단어입니다.
이사 2장 10,19,21절에서 이 단어가 등장합니다.
또 이 구절에서 야훼는 마치 커다란 거인이 작은 소년을 다루듯이 모세를 바위 틈 혹은 구멍에 갖다 놓고 손바닥으로 딱!! 덮는,
굉장히 신화적인 그와 같은 그림입니다.
상상력을 발휘해 보면 그와 같이 상상할 수 있는데 단지 그게 불편합니다. '이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물론 그럴수도 있겠지만은,
따라서 이것을 불편하게 생각한 주석가들과 유다 전통도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만, 이 단어를 손바닥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옷자락' 이라고 이 단어를 알아 듣기도 합니다.
즉, 바위 틈에 모세를 들어가게하고 야훼의 옷자락으로 그것을 덮는 모습으로 알아듣기도 합니다.
탈출 33,23 직역
그리고 나는 치울 것이다 / 나의 손바닥을 / 그리고 너는 볼 것이다
나의 뒤를 / 하지만 나의 얼굴들은 보여 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야훼는 모세의 요청을 완전히 안된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분적으로 수용을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영광, 얼굴들을 정면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뒷면 정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앞면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유다 전통은 야훼의 영광이 태양과 같아서 정면으로 볼 수 없다고 합니다.
▶ 요 대목에서 우리들이 전체를 되짚어 보면서 생각해 볼 문제가 몇가지가 있습니다.
탈출 33,7-11절의 만남의 천막 이야기를 통해서 야훼와 모세의 친밀함에 대해 묘사한 후 탈출 33,12-17절에서 모세는 야훼에게 한 가지 요청을 합니다.
'함께 가자!' 그리고 탈출 33,18절 이후부터는 두번째 요청을 합니다.
따라서 만남의 천막에서 첫번째 요청, 그 다음에 두번째 요청으로서 전체적인 무대는 만남의 천막입니다.
그리고 이제 야훼의 영광을 보기위해서 모세가 그곳을 나와서 어떤 바위 틈새로 들어가야 하는 전체적인 장면의 변화를 보게 됩니다.
탈출 33장에 나오는 어휘들이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창세기의 한 대목이 있습니다.
창세 15장은 아브라함과 하느님이 계약을 맺는 장면입니다. 그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하느님이 두번 계약을 맺습니다. 한번은 창세 15장, 그리고 창세 17장
그 두번의 계약 이야기 중에서 특별히 15장은 탈출 33장과 비슷합니다. '무엇으로 알겠습니까?' 하고 아브라함도 모세처럼 야훼에게 묻습니다.
그리고 창세 15,17절에서 보면 화덕과 횃불이 제물사이를 지나갑니다. 탈출 33장 에서도 야훼가 지나갑니다. 화덕과 횃불이 제물 사이를 지나가는 것처럼 하느님이 그와 같은 것을 지나가시면서 계약이 성립되는 모습들로 둘 사이를 연결해서 만나게 됩니다.
계약의 텍스트에서 좋음 이라는 개념이 자주 등장합니다.
º 창세32,10
그리고 나서 야곱은 기도하였다
"저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 저의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 '너의 고향으로, 너의 친족들에게 돌아가거라. 내가 너에게 잘해 주겠다.' 하고 저에게 약속하신 주님!"
여기서 등장하는 좋음 이라는 단어는 '내가 너에게 잘해 주겠다' 로 '내가 너에게 좋음을 행하겠다'라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계약을 통해서 하느님은 "내가 너에게 좋음을 행하겠다" 를 약속하시는 겁니다.
º 창세 32,13
당신께서는 '내가 너에게 잘해 주고, 네 후손을 너무 많아 셀 수 없는 바다의 모래처럼 만들어 주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분에서도 '내가 너에게 좋음을 행하고, 즉 잘해주고..' 라는 표현이 여기서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º 여호 24,20
너희가 주님을 버리고 낯선 신들을 섬기면,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선을 베푸신 뒤에라도, 돌아서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망시켜 버리실 것이다.
즉, 선을 베푸신 뒤에라도가 좋음을 베푸신 뒤에라도 라고 쓰였고
계약에 따라서 계약에 충실하신 하느님이 좋음을 행하겠지만, 하지만 너희가 계약에 충실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도 너희를 좋음으로 대하지 않고 악함으로 대할 것이다. 라는 그와 같은 내용입니다.
º 예레 18,10
그러나 그 민족이 내 말을 듣지 않고, 내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면
나도 마음을 바꾸어 그들에게 베풀고자 했던 복을 거두겠다.
여기서는 '복' = 좋음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안에서 하느님은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좋음을 행하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그러나 이스라엘이 그 계약에서 충실했을 때의 내용이다. 라는 문맥 안에서의 우리가 이 단어를 자주 만나게 됩니다.
탈출 33,11절은 만남의 천막이야기입니다!!
야훼가 모세와 얼굴에 얼굴들로 말씀했다고 전합니다. 반대로 민수 12장에서는
º 민수 12,8
나는 입과 입을 마주하여 그와 말하고 환시나 수수께끼로 말하지 않는다.
환시나 수수께끼로 말한다는 것은 은유나 상징적인 언어로 얘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애매함이 등장합니다. '입과 입을 마주하여' 라는 표현은 가장 알아듣기 쉬운 단순한 문장으로 야훼와 모세가 대화했다는 것을 표현하였습니다.
º 이사 49,2; 51,16 에서 야훼의 손그늘, 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예언자의 은신처를 말합니다. 따라서 손바닥으로 누군가를 가려서 그 손그늘 아래에 누군가를 둔다. 라는 것은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행위(하느님의 보호) 로 알아 듣습니다.
감사합니다 💓🙏
첫댓글 아멘~!! 고맙습니다~^^
아멘 🙏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