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기 외 4편
백지
우리 집에 괴물이 산다
놈은 몸을 숨긴 채 둥근 아가리만 벌리고 있다
벌리고 있는 입 크기로 봐서는 몸집이 족히 집채만큼 큰 놈이다
괴물과의 동거는 악어와 악어새의 밀약 같은 공생.
놈은 잡식성이라 세상 모든 치부를 받아먹는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비밀을 절대 누설하는 일은 없지만
타협의 대가는 언제나 맹물 한 됫박
오늘과 내일이 타협 중인 뉴스는 하루 종일 흐림이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가 없는 기사
멈춰버린 영끌족의 롤로코스터
휴일 곳곳에 비가 시작된다는 일기예보
괴물은 아가리를 쩍 벌리며 입맛을 다시고
나는, 또 하루의 치부를 드러내고 지독한 사랑을 타전 중이다
-끙!
글 쓰는 마녀
나는 마녀야, 고약한 취미랄까 버릇을 가진
아픈 사람들 이야기를 슬쩍슬쩍 주머니에 넣어와
그믐달 뜨는 밤이면 책상 모서리에 앉아 주머니를 뒤집어 보지
펄펄 날뛰며 살아 움직이는 것들을 보면 어떤 요리를 할까
심장은 쿵쿵 펌프질하고 눈알은 이리저리 굴러다녀 튀어나올 지경이지
몸집이 큰 것들은 적당한 길이로 잘라 두고
너무 날뛰는 것들은 소금을 살짝만 뿌려 숨을 죽여놓지
밍밍한 것들은 손가락 끝에 피를 내어 마녀의 간을 맞춰 두기도 하지
오늘은 섬 사내와 어린 창녀를 데리고 왔지
가마솥 가득 물을 받아 장작불을 피우고
섬 사내를 넣어 뭉근하게 국물을 우려내지
물이 펄펄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비린 거품을 걷어내고
빚에 팔려 온 어린 창녀를 듬성듬성 썰어 넣고 뚜껑을 덮지
나는 마녀야 장작불을 보며 밤새워 군침을 흘리지
함부로 뚜껑을 여는 일은 없을 거야
섣불리 뚜껑을 여는 순간, 손가락이 튀어나와 목을 조를 수도 있으니까
사내와 창녀를 한 솥에 우려내는 일은
초승달을 보름달에 녹여내는 일
달뜨는 밤을 조심해!
나는 마녀야, 마음대로 상상을 요리하는
전복
도마 위를 달리다 전복된 남자
도마 위에서 진줏빛 갑옷이 벗겨진 남자
도마 위에서 구릿빛 온몸이 토막 난 남자
도마 위에서 황금빛 내장이 터져버린 남자
도마 위에서 꽉 다문 입술이 찢긴 남자
도마 위에서 싸구려 술 한 잔으로 상처를 달래는 남자
도마 위에서 몸통 없는 다리로 집 한 채 짓는 남자
그 남자를 생각하며 전복을 요리하는 여자
그 남자 위에서 바다향 껍질을 문지르는 여자
그 남자 위에서 쫀득한 살점을 바느질하는 여자
그 남자 위에서 비린 내장을 주무르는 여자
그 남자 위에서 찢긴 입술을 핥는 여자
그 남자 위에서 상처난 시간을 어루만지는 여자
그 남자 위에서 노 젓다 조용히 전복되는 여자
배고픈 고래처럼 여자를 삼켜버린 남자
다시 일어나 뚜벅뚜벅 도마 위를 걷는 남자
바람풍선
백지
당신은 바람난 거리의 남자
바람난 당신을 못 본 척 외면하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어요
그러면 난 춤을 출 수가 없거든요
당신이 지나갈 구멍 하나 열어 두어요
내 치마를 들췄다 놨다 장난꾸러기 당신
마릴린 먼로처럼 부끄러운 척 웃어 줄게요
좌우로 앞뒤로 그만 좀 흔들어요
정신을 잃어버릴지도 몰라요
쓰러지지 않을 만큼만 천천히 불어 주세요
당신과 느리게, 느리게 춤추며 쉬어가고 싶어요
어쩌죠?
풍선 가게 뚱뚱한 여사장이 오고 있어요 또 당신을 데려가 버리겠죠
걱정 말아요 내일은 또 우릴 위해 노래를 틀어줄 테니까
오늘 밤은 쉬었다가 탱탱하게 내일 또 만나요
당신도 나도 점점 작아지네요
피식~
실패
바느질을 시작해요
예쁜 꽃무늬 원피스를 만들 거예요
실은, 당신을 감고 있었던 거죠?
팽팽하게 감고 있어도 술술 풀어내야 해요
감고 있어봤자 실패덩어리인걸요
실패에서 내가 줄줄 풀려요
누군가가 나를 꾹꾹 눌러 박고 있어요
당신은 점점 날씬해지고 원피스에선 꽃들이 피고 있어요
이제 사막에서도 춤을 출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신으로 만든 원피스를 입고 면접을 봐요
첫 번째 면접관은 피도 눈물도 없는 AI,
실패했던 경험을 말해보라 하네요
당신에게 수천 바퀴 감겨 있었던 그때를 생각하니
숨 막히고 어지러워요
이런! 감정을 드러내면 감점이에요
두 번째 면접관이 바늘을 던졌어요
조심조심 바늘구멍에 들어가려는 낙타가 되었어요
머리는 밀어 넣었는데 몸통이 막혀 들어갈 수 없어요
꾸역꾸역 삼킨 모래는 모두 게워내요
바늘구멍을 좀 키우는 건 어때요?
그렇게 좁혀 봤자 실도 낙타도 들어갈 수 없는 걸요
나는 또 다른 실패를 준비해요
다시 바느질을 시작해요 실패가 줄줄 풀려요
이번엔 멋진 정장을 만들 거예요
나비넥타이 맨 밍크고래 되어 푸른 바다를 맘껏 누빌 거예요
실패, 그게 뭐예요?
당신에게 나에게 더 이상 실패란 없는 걸요
당선소감
온몸으로 사랑하고 온몸으로 쓰겠습니다.
시는 제게 애인처럼 왔습니다. 거리를 걷다가, 운전을 하다가, 밥을 먹다가, 커피를 마시다가, 잠자리에 들다가 예고 없이 불쑥불쑥 찾아왔습니다. 언제부턴가 그의 말을 받아 적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베란다 작은 텃밭에 심은 상추 모종에서 여린 싹이 나고 있었습니다. 연둣빛이 어찌나 예쁜지 봄의 초경이라 받아 적다가 당선 전화를 받았습니다.
방향을 잃을 때마다 등대가 되어주신 우리 장하빈 스승님, 저에게 詩아버지는 바로 당신입니다. 매주 수요일마다 시제를 공유하며 아낌없는 응원으로 용기를 준 팔공산 다락헌시인학교 우리 문우님들, 저에게 詩오누이는 바로 당신들입니다. 늘 책과 함께하며 따뜻한 가슴을 열어준 우리 다독다독 회원들과도 기쁨을 같이 합니다.
나의 시작(詩作)을 위한 다락방을 기꺼이 내준 남편에게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며 소중한 금쪽이들 지윤, 소영, 태성에게 넘치게 사랑한다는 말 전합니다. 끝으로, 부족한 제 손을 잡아주신 반경환 주간님과 심사위원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애지』에 누가 되지 않는 시인이 되도록 온몸으로 사랑하고 온몸으로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응모자 : 백 지 (본명 백정숙)
email : angel041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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