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세계사] 마젤란
신대륙 수입 5% 받기로 하고 대장정… 260명 중 18명만 살아
입력 : 2023.09.20 03:30 조선일보
마젤란
▲ 1970년대 제작된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초상화. /브리태니커
504년 전 오늘(1519년 9월 20일), 세계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한 인물의 항해가 시작됐습니다. 바로 페르디난드 마젤란입니다. 최초로 세계 일주에 성공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필리핀 한 섬에서 생을 마감했어요. 그와 함께 간 원정대 중 극히 일부만 유럽으로 돌아왔죠. 마젤란은 출항하기 이틀 전 유서를 썼을 정도로 이 원정이 험난할 거라고 예상했어요. 그런데도 목숨 걸고 원정에 나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의 원정은 어떠했을까요?
"서쪽으로 항해" 인도로 가자
16세기를 흔히 '대항해시대'라 부릅니다.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스페인, 영국, 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들이 바다를 거쳐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갔죠. 그들이 항해에 나선 가장 큰 이유는 아시아에서 나는 향신료를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향신료는 고기 누린내를 없애고 감칠맛을 돌게 해 귀족의 수요가 컸어요. 그러나 중동에서 이슬람 세력이 팽창해 무역로가 막히는 바람에 향신료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이에 새로운 무역로로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가는 바닷길이 개척됐습니다. 그런데 이탈리아 출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이전 항로 대신 대서양을 가로질러 인도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인도에 다다르지는 못했지만,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죠. 유럽인들은 이 길고 거대한 대륙 때문에 서쪽으로 계속 항해해 인도에 닿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생각을 깨고 도전에 나선 이가 바로 마젤란이었습니다.
스페인 궁정 후원받아 5척으로 출항
마젤란은 포르투갈 귀족 계급 출신으로, 초대 인도 총독 프란시스쿠 드알메이다 함대의 일원으로 해상 생활을 시작했어요. 사병 1500여 명 중 이름 없는 한 병사에 불과했죠. 하지만 이후 여러 차례 항해에 참여하며 견문을 넓혔어요.
귀국 후 승승장구할 듯하던 마젤란의 앞날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건 1513년, 모로코의 무어인 해적 소탕에 참가했을 때였어요. 마젤란은 전투 도중 다쳐 왼쪽 다리가 거의 마비됐어요. 상이용사(군에서 복무하다 부상을 입어 전역한 병사)가 된 그는 모로코에서 무어인에게 빼앗은 가축을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됐어요. 그러다 가축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마젤란은 가축 일부를 무어인에게 되팔거나 무어인이 훔쳐 가도록 방조했다는 혐의를 받았어요. 그는 무죄를 주장했지만, 국왕 마누엘 1세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죠. 마젤란은 더는 고국에 있어야 할 필요를 못 느끼게 됐습니다.
당시 희망봉을 돌아가는 항로는 이미 포르투갈이 독점하고 있었어요. 마젤란은 아메리카 대륙을 돌아 이른바 '향료 제도'라 불린 말루쿠제도까지 갈 수 있다면 막대한 수익을 얻으리라 생각했죠. 마침내 1517년 스페인 세비야로 이주해 스페인 궁정의 후원을 얻어낸 마젤란은 곧이어 카를 5세와 정식 계약을 했어요. 그 내용은 '발견될 나라에서 얻는 수입 전부의 20분의 1을 마젤란과 팔레이루(마젤란의 친구)에게 주며, 섬을 6곳 이상 발견할 경우 그 가운데 두 곳에 대한 특별권을 인정한다. 발견한 모든 육지와 섬의 귀족이나 총독 지위를 당사자와 그 자손에게 세습할 것을 인정한다'는 내용이었어요.
약 1년 5개월을 준비한 마젤란 함대는 1519년 8월 10일 세비야항을 떠나 산루카르 데바라메다항으로 이동해 약 한 달을 더 준비했어요. 선단은 배 5척으로 구성했고 승무원 260여 명이 탔습니다. 원주민이 좋아하는 거울은 900개, 종은 2만개 이상 준비했답니다. 준비를 마친 마젤란 함대는 1519년 9월 20일 역사적 탐험길에 올랐습니다.
3년간 대장정 끝에 1척만 귀환
대서양을 건너 적도를 지난 함대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잠시 머문 후 다시 남쪽 바다로 전진했어요. 겨울을 나려고 1520년 3월 아르헨티나 푸에르토산훌리안에 입항해 거의 5개월을 보내기도 했죠. 지친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마젤란은 이를 진압하고 앞으로 나아갔어요. 마젤란 함대는 1520년 10월 한 해협(후에 '마젤란해협'이라 부름)을 통과하기 시작했어요. 약 350마일(약 563㎞)밖에 안 되는 이 해협을 통과하는 데 약 40일을 보냈습니다. 험난한 해협을 건너 처음 마주한 대양은 매우 잔잔했어요. 마젤란은 이를 보고 '잔잔한 바다'라는 뜻의 '오세아노 파시피코', 즉 오늘날 우리가 아는 '태평양'이란 이름을 붙였어요.
바다는 잔잔했지만, 약 3개월에 걸친 태평양 항해는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한 선원은 '굶어 죽지 않으려고 닻줄을 덮어씌운 소가죽도 먹었다. 가죽이 여러 해 동안 비바람에 절어 돌처럼 딱딱해졌기 때문에 네댓새를 바닷물에 담가 놓아야 했다. 그런 다음 불에 약간 구워 삼켰다'는 기록을 남겼어요. 망망대해 끝에서 마침내 육지(현재의 괌)를 발견한 마젤란 함대는 곧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기뻐했어요.
하지만 마젤란의 항해는 필리핀에서 마침표를 찍습니다. 1521년 3월 필리핀제도에 도착한 함대는 세부섬으로 이동했어요. 마젤란은 세부 통치자 라자 후마본에게 '카를로스'라는 세례명을 주며 우호 관계를 유지했죠. 맞은편에 있는 막탄섬이 세부에 대항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해 4월 부하 60여 명을 이끌고 막탄을 정복하러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1500여 명이나 되는 원주민의 공격을 받아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마젤란 함대 선원은 약 100명만 생존했고, 남은 배도 2척뿐이었어요.
다행히 남은 이들은 11월 말루쿠제도 티도레섬에 도착해 배 2척 가득 향료를 실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돌아오는 과정에서 배 한 척은 포르투갈인에게 나포돼 난파되고, '빅토리아호' 단 한 척만 인도양을 건너 희망봉을 돌아 1522년 9월 세비야항으로 돌아왔어요. 약 3년 대장정에서 돌아온 선원은 단 18명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배 한 척이 싣고 온 향료는 모든 항해 비용을 충당하고도 이익을 남길 정도였다고 해요.
▲ 1519년 9월 20일 스페인에서 출항하는 마젤란의 함대를 그린 목판화. /브리태니커
▲ 1612년 재간(再刊)된 아브라함 오르텔리우스의 지도책 '세계의 무대'에 표시된 '빅토리아호'. /브리태니커
서민영 계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김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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