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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공을 보며 숨을 고르다
고광식(문학평론가, 시인)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 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게오르그 루카치
1. 고통을 기억하는 시간
세계와 자아가 일치하던 고대인들은 행복했다. 루카치의 말처럼 창공을 가득 채우던 빛나는 별의 풍요로움이 고대인들에게 행복을 주었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에겐 형이상학적 고향이 있었고, 선험적 좌표가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그들의 영혼은 아무런 문제없이 편안히 안주하였다. 별을 품은 하늘을 보아도 일체감을 느꼈고, 생명을 품은 지상을 보아도 일체감을 느꼈다. 동경과 모험을 떠날 때도 내면에 가득 찬 풍요로움을 느꼈다. 하늘의 빛과 자아의 빛이 맞닿아 있었다. 드넓은 세계는 자기 집처럼 아늑했다. 하지만, 근대 이후의 인간은 형이상학적 고향을 상실한 존재이다. 이성 안에 형이상학적 주인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성이 세계의 주체가 된 후 근대 자본주의가 발달했다. 독점 자본이 나타나면서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전쟁은 완전히 타락한 세계를 보여주었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세계와 자아의 일치를 무너뜨렸다. 이제 마르크스의 주장을 비틀어 변주해보면 현대인들은 신으로부터도 소외되었고, 사회로부터도 소외된 고독한 상태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존재이다.
“폭포를 뛰어넘고 거슬러 가는 물길/저문 강물만큼 눈 깊은 엄마/목쉰 엄마/죽은 예수를 안고 계절의 끝에 선 피에타(pieta)”(「물길」)처럼 시적 화자는 고통스러운 현재를 진술한다. 근대 이후의 물질은 그 자체가 행복인 것처럼 인식되었다. 형이상학적 고향을 잃은 주체들은 형이하학적 땅 위에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했다. 욕망과 물질이 뒤섞여 만들어 낸 현실은 통제되지 않는 부조화를 이루어내었다. 선험적 좌표가 없는 현대인들은 감각적이고 경험적인 것을 중요시한다. 그래서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행복이다. 물질에 행복으로 가는 길을 여는 고유의 기능이 내재해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벤담 같은 철학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인간의 모든 행위는 고통과 쾌락에 의해 좌우된다”고 말하였다. 고통과 쾌락은 우리가 어떻게 행위해야 할지를 결정한다.
류인채 시인은 벤담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다. 이성의 한계를 너무 처절하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형이상학적 고향과 선험적 좌표를 잃은 고통을 말하지 않은 벤담을 외면할 수밖에 없다.
암 덩어리가 커져도 신음하지 않던 아버지
꼿꼿이 앉아 김삿갓 방랑기를 읽고 성경을 필사하시더니
화장실에서 결국 우셨다
변기에 가득한 핏물
물을 내려도 벌겋게 고통을 기억하던 하얀 변기
나는 문밖에서 울음을 삼키며
믹서에 요구르트와 피보다 붉은 토마토를 넣고 갈았다
한참 만에 거실에 나온 아버지는 비에 흠뻑 젖은 허수아비 같았다
끝내 식도와 유문이 닫혀
물 한 모금도 내가 만든 토마토 주스도 삼키지 못했다
벌거벗은 아버지를 부둥켜안고 씻겨드리는데 매끄럽게 닫힌 몸의 문
항문의 입구가 없었다
재채기하다 엉겁결에 분비물을 지린 다음날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결국 앞문도 뒷문도 닫고
그 안에 갇혀버린 아버지
우리가 아무리 두드리고 발버둥을 쳐도
한 번 닫힌 문은 통 열리지 않았다
―「닫힌 문」 부분
류인채는 ‘고통’은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안다. 아버지는 늙고 병들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고통 앞에 맞닥뜨린다. 죽음 앞의 아버지는 “화장실에서 결국 우셨다/변기에 가득한 핏물/물을 내려도 벌겋게 고통을 기억하던 하얀 변기”처럼 고통을 극단적으로 느끼는 상태에 이른다. 위암에 걸린 아버지는 배변을 보지 못하는 고통에 시달렸다. 인간의 삶이란 이성에 의해 기개가 넘칠 것 같지만, 계속 진행되는 죽음의 메커니즘 앞에 속수무책이다. 시적 화자는 병이 진행되어 “항문의 입구가” 막혀버린 아버지를 보게 된다. 죽음 앞에 고통의 양은 커갈 뿐이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고통이다. 혼자 떠안아야 할 고통 때문에 저녁노을이 더욱더 붉게 퍼진다. 벤담의 주장처럼 고통을 줄이고 쾌락의 양을 최대화할 방법이 없다. 인간의 감각은 직접적이어서 고통은 삶을 사유할 능력을 마비시킨다. 시적 화자의 “우리가 아무리 두드리고 발버둥을 쳐도/한 번 닫힌 문은 통 열리지 않았다”는 진술은 고통스럽다. 닫힘은 열림을 전제로 한다. 닫힘은 죽음의 역설이다. 따라서 류인채 시인에게 성경은 죽음의 역설적 해결 방식으로 작동한다.
“엄니! 나 아퍼! 아퍼! …”
엄마가 엄마를 찾으며 여든다섯의 엄마가 통곡한다
잘리고 남은 폐로 거칠게 숨을 쉬며 아이처럼 펑펑 운다
저 울음은 노을에 젖은 산기슭 콩밭을 매고 돌아와 초저녁 한 때를 흔들던 다듬이질 소리다
사흘 굶고 고무 대야 가득 연시를 담아 이고 지친 걸음으로 타박타박
은산장으로 적곡장으로 떠돌던 발걸음 소리다
검불 같은 당신의 빈 가슴에서
오늘 살아있음에 대한 하울링이 강물처럼 흘러 침상을 띄운다
‘엄니’라는 이름은 바위만큼 무거워
울음이 울음을 낳고
육 남매가 젖어간다
―「엄마의 강」 부분
어쩌면 인간은 병으로 고문받는 존재인지 모른다. 결기가 있고 강했던 사람도 병 앞에는 한없이 나약해진다. 병은 인간을 변형시키고 두려움에 떠는 존재로 만든다. 위 시에서 엄마가 엄마를 찾으며 운다. 병 앞에 나약해진 인간의 모습을 시적 화자는 “엄마가 엄마를 찾으며 여든다섯의 엄마가 통곡한다/잘리고 남은 폐로 거칠게 숨을 쉬며 아이처럼 펑펑 운다”고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병 앞에 처절하게 무너진 엄마의 모습이 한없이 가엾다. 어릴 적 강인했던 엄마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아, ‘엄마에게도 엄마가 있었구나’라는 당연한 생각이 우리를 반성하게 한다. 현재의 고통받는 엄마의 모습에서 “사흘 굶고 고무 대야 가득 연시를 담아 이고 지친 걸음으로 타박타박” 걷던 강인한 과거의 모습은 찾을 길 없다. 하지만, 시적 화자는 역설적으로 우는 어머니의 모습과 과거 강인했던 어머니의 모습을 병치시킨다. 모성애와 삶에의 의지로 굳세었던 숭고미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울음소리에서 “은산장으로 적곡장으로 떠돌던 발걸음 소리”를 듣는 화자의 인식이 애처롭다.
우리는 늙어서 찾아오는 병을 피할 수 없다. 병으로 인해 받는 극심한 고통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고통을 기억하는 시간은 삶을 성찰하는 시간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끝에 신의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바라보게 되는 이유이다.
2. 온몸의 감각
인간은 감각에 의해 지배받는다. 세계는 끊임없이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며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한다. 세계는 광활하고 강하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성장 시기에 맞게 감각을 발달시켰다. 안전하게 살기 위해 오늘도 자신의 감각에 집중한다. 감각에 의해 얻은 정보는 삶과 죽음을 깨닫게 한다. 따라서 감각에 장애가 나타나면 온전히 세상을 살아내기 어렵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온몸으로 느끼는 감각이 있다는 것이다. 감각에 의한 정보 축적은 오래된 생존 방식이다. 우리는 생존에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감각적으로 안다.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 같지만, 그것은 경험에 의해 축적된 정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몸의 감각을 세심히 살피고 점검해야 한다.
류인채 시인은 감각을 성찰하여 삶을 안전하게 유지하고자 한다. 우리가 세계를 만나고 알아간다는 것도 감각에 의해서이다. 세계 속에 존재하는 두려움과 기쁨도 감각 처리 과정을 거쳐야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감각은 삶의 장애 앞에서 새로운 길을 찾는 에너지이다.
숨을 고른다
말랑하게 궁굴리며 내 몸을 받아 주는 물의 손
나는 자꾸만 가라앉으려 하고
온몸에 힘을 빼라고
자기 손에 내 몸을 맡기라고
물이 속삭인다
굽은 어깨와 등 거북목을 어루만져 스트림라인으로 펴 주고
내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물의 귀
숨을 참고 물 위에 가볍게 떠 있어야 한다
엎드려 몸을 곧게 펴고 둥둥 발을 차며 앞뒤로 손을 휘젓는다
개구리처럼 두 발을 오므렸다 뻗는다
그런데 왜 자꾸만 숨찰까
체위를 바꿔 물 위에 눕는다
천정을 보며 물 잡기를 하는데 코로 물이 들어간다
애플민트 냄새 훅 끼치는 물의 입술
―「물의 감각」 부분
때로 류인채 시인은 육감적인 상황을 펼쳐 보인다. 감각은 우리가 위치한 장소와 시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감각을 관조하고 성찰하는 자세는 우리를 아프게 한다. 시적 화자는 수영하는 중이다. 물 위에 떠 있는 모습이 어린아이처럼 천진스럽다. 시인은 육감적인 감각과 성찰을 섞어 놓는다. 물 위에 떠서 “숨을 고른다”는 행위는 삶에 대한 성찰이다. 세상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나는 자꾸만 가라앉으려” 한다. 이때마다 화자는 “온몸에 힘을 빼라고/자기 손에 내 몸을 맡기라고” 속삭이는 물과 대면한다. 물 위에 떠 있는 시간이 세상의 두려움을 내려놓게 한다. 화자가 처한 현실과 물의 속삭임이 빚어내는 간극이 처연함을 더한다. 그러므로 “체위를 바꿔 물 위에 눕는다”는 행위는 세상을 다른 각도에서 보게 한다. 세계와 맞서는 방식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다. 맞서는 과정에서 깊은 상처를 입었을 때, 다른 방식을 택해야 한다. 세계와 화해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물 위에 눕자 온몸으로 물의 감각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세계가 더욱 정치하게 보인다.
시상(詩想)을 적은 메모 수백 편이 날아갔다
다음 카페 글 보관함을 실수로 삭제했다
완두콩 같은 새날이 날아가고
보도블록을 걷다가 구두굽이 빠지던 날이 날아갔다
동생만 보는 어머니의 눈과
몰래 대출받고 변명하는 남편의 입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딸의 가슴이 날아갔다
울릉도 밤바다 어화 등불 날아가고
미케 비치의 해돋이
산타모니카 잔교 바다사자 울음이 날아가고
한 우주가 날아갔다
더듬더듬 일어나 구름 한 컵 마신다
늦가을 공원이 축축하다
―「삭제」 전문
감각은 완벽하지 않다. 그래서 가끔 감각적으로 행동하다가 실수를 한다. 실수가 심각할수록 우리가 느끼는 의식의 체험은 강렬하다. 감각은 간혹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사정없이 깊은 물속에 던져버린다. “시상(詩想)을 적은 메모 수백 편이 날아”간 것도 감각의 오류이다. 외부 자극에 대처하는 능력은 오랜 기간 진화과정에서 발달하였다. 환경의 변화를 우리는 감각에 의하여 인지하고 대응한다. 하지만, 이러한 외부 환경의 변화를 감각이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노마딕 기기에 대해 아직 감각은 적절하게 대응하는데 미흡하다. 그러기에 “글 보관함을 실수로 삭제”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인간은 가장 많이 진화된 동물이기 때문에 감각 능력도 탁월하다. 이러한 인간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디지털 기기의 환경변화를 감지하기 어렵다. 따라서 기기 앞에 자료의 안전성을 보장받지 못한다. 화자는 감지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고 “완두콩 같은 새날이 날아” 갔다며 깊은 절망감에 빠진다. 삭제로부터 오는 상실감은 화자가 가지고 있었던 기억을 완벽하게 지워버렸다. 그러므로 화자의 “한 우주가 날아갔다”는 진술은 설득력을 얻는다.
마지막 계절 학기를 앞둔 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울면서 플랫폼으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늦은 밤 모서리가 깨진 캐리어를 끌면서
달포 전 사준 외투는 벗어던지고
브이넥 티셔츠에 망사 목도리를 걸친 목이 휑하다
검정 마스크의 비쩍 마른 밤도 기침을 하며 열차에 오른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단풍잎 하나
원가 절하 세일 전단지처럼 철로 위에 떨어진다
백록담에서 내려올 때 시누대 사이에서 마주친 고라니처럼
문이 닫히는 순간 슬쩍 나를 돌아보던 딸,
우리는 또 점점 멀어져 간다
―「플랫폼에서」 부분
딸이 “울면서 플랫폼으로 성큼 걸어 들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화자의 가슴이 아프다. 이 특정한 자극에 슬픔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내부로부터 오는 신호이다. 대가 없는 희생을 치러야 할 어머니로서 화자는 현재 상황을 감당하기 어렵다. 딸은 온몸의 감각을 흔들어 놓는다. 돌아보지 않는 딸의 태도가 시각을 흔들고, 휑한 목이 가슴을 저리게 한다. 수용하기 어려운 적절성을 넘어선 자극이다. 시적 화자는 “문이 닫히는 순간 슬쩍 나를 돌아보던 딸”의 모습에서 심한 탈력감과 좌절감을 느낀다. 가장 우선순위에 두었던 딸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안타까움이다. 딸의 문제를 직시하고 문제 해결을 시도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해결하지 못한 화자의 감정이 느껴진다. 딸의 절망감이 화자의 절망감으로 일치되어 “단풍잎”처럼 날아다닌다. 화자의 가슴도 붉게 물들어 출렁인다. 한 몸이었던 딸이 “점점 멀어져” 간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화자의 감정이 상실감으로 가득 차 있다.
인간은 온몸으로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인다. 그것이 고통스러운 자극이 되었든, 아니면 쾌락적인 자극이 되었든 일단 수용하고 판단한다. 외부에서 발생하는 자극이나 내부에서 발생하는 자극 모두 동일한 성격을 갖는다. 류인채 시인은 온몸으로 전달되는 감각을 점검하여 자신을 성찰하는 기제로 삼는다.
3. 피투 된 자의 고통
모든 존재자는 세계 속에 이루지 못한 열정을 안고 파편화되어 있다. 그것은 타자의 압박에 의해 꿈을 완성하지 못한 채 묶여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존재자가 살아간다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가능하다. 우리는 타자와 묶여 있는 동시에 파편화되어 서서히 휘발된다. 서로가 바라보며 배려하는 듯하지만, 경쟁하는 관계로 묶여 있다. 우리는 자신의 꿈을 미래에 기투하는 과정에서 현실을 견딘다. 이렇게 미래에 자신을 내던지지 못할 때, 실존은 냉혹한 현실로부터 위협받는다. 주체에게 현실적 시간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시간은 삶을 숙성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시간의 근원적 의미를 성찰해야 환원론적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현재를 사는 주체는 시간에 묶인 사슬을 스스로 끊어야 한다. 이렇듯 주체나 타자에게 시간은 같은 의미로 데칼코마니 된다. 객관적으로 분절되어 흘러가는 시간을 주관적 시간으로 만드는 것만이 냉혹한 세계를 극복하는 길이다.
류인채 시인은 현재를 사는 주체에게 딛고 있는 곳으로부터 날아오를 것을 당부한다. 낯선 곳에 던져져 있는 피투 된 자신을 조율할 필요가 있어서이다. 자신을 성숙시키는 과정을 거쳤다면, 미래에 자신을 능동적으로 기투해야 한다.
북방긴수염고래가 하늘로 물을 뿜고
모자고래가 새끼를 등에 업고 느릿느릿 헤엄을 쳐요
혹등고래 귀신고래 향유고래 범고래 들쇠고래도 있어요
내가 만나고 싶은 대왕고래는 알래스카로 갔을까요
부르튼 맨발로 돌아오는 길
누군가 하모니카를 불어요
누군가는 섬집아기를 불러요
글쎄 수많은 고래가 지느러미를 펄렁이며
노래로 모여드는 게 아니겠어요
그 모진 바위 속 잠에서 깨어난 고래들
유유히 숲 속을 헤엄치고 있어요
그 먼 눈빛들이 어느새 나를 따라와 내 품에 안겨요
아주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려준 빛이지요
―「반구대암각화」 부분
외국에서 수년을 떠돌다 온 그도
저렇게 머리가 무거울까
끼니를 거르며 게스트 하우스에서 새우잠 자고
허름한 레스토랑에서 접시를 닦던 사내
걸어서 수십 블록 밖 학교에 다녀
십 년 만에 받은 학위
<중략>
연수원 길은 여전히 비에 젖고
굶주린 고양이 소리처럼 가늘게 되울리는 전화 목소리
또 물먹었다고
면목(面目) 없단다
박사가 지천인 수국(水國)
연수원 오르는 길목
연보라 자주꽃 허리가 휘청거린다
고개 숙인 것들이 널브러져 수국수국 소란스럽다
―「수국(水菊) 1」 부분
암각 되어 있는 벽화 속 “북방긴수염고래가 하늘로 물을 뿜고/모자고래가 새끼를 등에 업고 느릿느릿 헤엄을” 치고 있다. 이것 또한 세상에 던져진 것들의 자유의지이다. 세상에 던져져 혼자인 것이 아니라 관계를 맺으며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를 스스로 만드는 과정이다. 시적 화자는 세상에 던져진 존재들을 실존주의적 측면에서만 바라보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설계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내가 만나고 싶은 대왕고래”는 형이상학 너머에 존재한다. 그러기에 화자의 “누군가 하모니카를 불어요”라는 진술이 가능해진다. 누군가 알 수 없는 존재가 부르는 하모니카 소리는 형이상학 너머에서 들려온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처럼 화자의 가슴속을 핍진하게 파고든다. 세상에 던져져 암각화 되어 있는 저 동물들이 소리에 민감한 우리의 모습이다. 노랫소리로 모여들던 고래들이 화자의 품에 안긴다. 화자는 암각화에서 세계를 창조한 “아주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려준 빛”을 만난다. 결코 우리는 세계에 던져진 피투 된 존재가 아니다.
세상에 던져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던져진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살아가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더는 추락하지 않기 위해 하염없이 날갯짓해야 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추락을 멈추고 자신이 생각하는 목적지에 안착할 것이다. 던져진 수동적인 존재인 인간은 “저렇게 머리가 무거울까”처럼 세계의 압박을 견디는 중이다. 현실을 수용하고 견디는 것은 내일을 설계하는 능동적인 기투 현상이다. 하지만, 모두가 던져진 존재이므로 “연수원 길은 여전히 비에 젖”을 수밖에 없다. 사르트르의 주장처럼 우리는 세상에 버려진 존재이다. 자신이 원해서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듯이 지금 있는 이곳도 자신이 원하는 곳이 아니다. 실존주의자들의 시각에서 보면 화자의 “고개 숙인 것들이 널브러져 수국수국 소란스럽다”는 진술은 강한 설득력을 얻는다. 그러나 수국을 읽다 보면 한없는 인간애가 느껴진다. 소란스러운 수국수국 소리에 안쓰러워하는 절대자의 모습이 보인다.
나무에게도 눈물이 있을까
그저 잎새가 노래져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것뿐인데
내 눈에는 끝없는 흐느낌처럼 보인다
커다란 눈마다 눈물 그렁그렁
죄를 고백할 때마다 몸은 하늘로 더 솟아오르고
몸빛은 하얗다
빽빽이 들어찬 회개의 숲
저 하얀 고백 위에서 새들은 날개를 퍼덕이며 운다
나무의 말을 주워섬기듯
들쥐가 나무의 발밑을 파고 있다
나도 한 그루의 나무로 서 있다
―「자작나무」 전문
던져진 수동적인 존재는 인간뿐만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도 포함된다. 나무도 자신이 원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 수동적으로 태어나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과 동일하다. 시적 화자는 “나무에게도 눈물이 있을까”를 생각한다. 피투 된 자로서 자신의 감정을 나무에 투사한 것이다. 그러자 나무의 모습이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나무가 머리로 사유하고 감각으로 세계를 느끼는 것 같다. 나무에 감정을 투사하자 나무와 화자는 일체가 되어 흔들린다. 화자가 나무이고 나무가 화자인 상태에서 형이상학적 사유를 한다. 화자의 이러한 기투 행위는 “죄를 고백할 때마다 몸은 하늘로 더 솟아오르고”에 이르러 실존주의적 한계를 넘어선다. 형이상학의 주요 주제인 ‘하늘’이 피투 된 의미를 깨닫게 되는 순간을 도래하게 한 것이다. 이제 더는 추락하지 않아도 된다. 회개하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류인채 시인은 우리는 세상에 던져지고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고 진술한다. 실존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우리가 던져진 존재, 즉 피투 되었다면 이곳으로 던진 주체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시인의 시적 발화지점이자 지향점이다.
4. 창공에 빛나는 별
류인채의 시에서 억압된 주체의 모습은 피투 된 모습 그대로 나타난다. 우리는 세상에 그냥 던져진 존재이기 때문에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이 기투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실존주의자들의 주장에 류인채 시인은 의문점을 갖는다. 우리를 이 세계에 던진 존재가 분명히 있을 것이란 믿음이다. 시인은 우리가 현재를 극복하기 위해 미래에 자신을 던질 때도 이것을 관장하는 존재가 있을 거란 믿음을 가지고 있다. 창공을 보면 별이 빛난다. 피투 된 자의 형이상학적 기표로 높이 떠서 파동을 형성한다. 별을 바라보는 순간 형이상학적 기표는 알 수 없는 근원적 기의로 바뀐다. 세상을 떠도는 존재들의 절망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창공에서 빛을 발하는 것을 느낀다. 선험적인 느낌은 떠오르는 태양처럼 강렬하다. 그래서 이 땅에서의 고통은 찰나의 순간에 사라진다. 창공은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의 비극성을 새로운 의식 세계에 녹여버린다.
자명한 것은 우리가 죽는다는 것이다. 실존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우리가 이 세계에 던져진 존재라면 죽어서 던져지기 전의 장소로 가야 한다. 이처럼 류인채 시인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형이상학에서 찾는다. 그것은 고통받는 현실 너머 진리로 가는 길이다.
이 작은 돋보기 하나로
홍해를 건너고
가나안까지 거뜬히 넘어가셨다
우리가 잠들었을 때도
여리고성을 몇 바퀴나 도셨다
어둠 속에서 고요히 빛을 만나고
병상(病狀)을 들고 걷기 위해
쉬지 않던 아버지,
치매도 살라 버리셨다
가끔 흰 융으로 유리를 닦으며
가슴에 자리 잡은 우상도
하나씩 깨트리셨다
내게 그 밝은 눈을 물려주신 아버지,
볼록한 중심으로 빛을 모아
아버지가 가신 하늘을 펼쳐 본다
미처 가보지 못한 구석구석까지 환하다
―「돋보기」 부분
시적 화자는 아버지가 “이 작은 돋보기 하나로/홍해를 건너고/가나안까지 거뜬히 넘어가셨다”고 진술한다. 이것은 화자의 아버지가 성경을 필사하는 과정을 표현한 비유이다. 이렇게 돋보기로 빛을 모으자 세상에 던져진 존재는 축복받은 존재로 증명된다. 유한한 삶이 경계를 넘어 무한성으로 확장된다. 허무적 감각으로 꽉 차 있던 세계가 은혜로운 목소리로 바뀐다. 늙고 병든 몸을 억압하던 시간이 “고요히 빛을 만나고”부터 새로운 희망의 시간을 펼쳐낸다. 절망과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 현혹되었던 “가슴에 자리 잡은 우상도” 하나씩 깨트려 나갔다. 빛의 존재를 잊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는 고아 의식에 젖어 살았다. 마침내 무신론자의 말에서 벗어난 것이다. 화자의 아버지는 세계의 억압에 굴복하지 않고 “볼록한 중심으로 빛을” 모아 진리의 세계를 만났다. 그래서 창공을 보면 아버지가 보인다는 시적 화자의 진술이 진실성을 확보한다.
따라서 창공에 빛나는 별을 찾는 행위는 이 땅에 던져진 자의 적극적인 기투이다. 무기력하게 살다가 추락할 수 없지 않은가. 이제 추락하는 자의 날갯짓은 형이상학 속 신에게로 향한다. 그곳엔 던져진 자의 ‘고통’이 아닌 ‘축복’의 별이 영원히 빛난다. 창공의 별을 바라보면 고통이 걷히고, 빛으로 온몸의 감각을 부드럽게 하는 순간을 만난다. 별빛은 우리를 감싸고 새로운 길로 안내한다. 절망에 찾던 슬픔은 어느덧 사라지고 기쁨이 밀물져 온다. 고통을 돌파하려던 무수한 행동들이 결국 빛으로 환원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믿음을 갖고 창공을 바라보면 우리는 루카치의 말처럼 행복해진다. 그러므로 류인채의 시는 적극적인 기투 방식으로 발견한 에피파니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