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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호 목사
어느 아프리카 부족의 이야기입니다.
이 부족의 추장이 이제 너무 연로하여 후계자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있었습니다. 누구를 세울까 고심하던 늙은 추장은 마을에서 가장 총명하게 생긴 청년 세 명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이제 너희들 셋 모두 저기 보이는 저 산의 정상까지 올라가거라. 저 산은 너희들이 이제까지 한 번도 오르지 않은 산이다. 정상에 오르거든 구석구석 살펴본 다음, 나에게 가장 값진 선물이 되겠다 싶은 것을 가져오너라. 나에게 가장 값진 선물을 가지고 오는 자를 나의 후계자로 삼겠다.” 늙은 추장으로부터 이 말을 들은 세 명의 청년들은 높은 산꼭대기를 살펴본 다음, 각각 가장 값지다고 생각되는 선물을 가지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첫 번째 청년은 산꼭대기에서 굉장히 값지고 귀한 보석을 주워 왔습니다.
두 번째 청년은 어떠한 병이라도 고칠 수 있는 신비의 약초를 캐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세 번째 청년만은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세 번째 청년은 늙은 추장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추장님, 제가 오늘 추장님께 드릴 선물이 하나 있습니다.
추장님께서 왜 저희에게 한 번도 올라가 보지 않은 산에 올라가라고 하셨는지 이제 그 이유를 알겠습니다. 산 정상에 올라가보니 산 너머로 광활한 초원과 넓은 세계가 펼쳐져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저는 우리 부족이 광활한 초원과 넓은 세계로 나아가게 될 비전을 추장님에게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세 청년 중에 누가 추장의 후계자가 되었을까요? 세 번째 청년입니다. 늙은 추장은 다른 두 청년을 제쳐놓고 비전을 가진 세 번째 청년을 자기 후계자로 세웠다고 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외부적으로 어떠한 훌륭한 조건을 가진 사람이 아닌, 미래를 바라보는 비전의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건물은 형편없고, 비천한 역사를 가진 교회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비전이 있는 교회를 쓰신다고 믿습니다.
그레이(E. M Gray)라는 사람이 쓴 <성공의 공통분모>라는 책이 있습니다.
역사상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수많은 위인들의 생애를 살펴보니 그들에게서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비전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비전에 자기 인생을 집중시켜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으며, 소중한 것을 먼저 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렇습니다. 비전의 사람이 위대한 일을 합니다. 비전의 사람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 어디로 가든, 무엇을 하든, 자기 비전을 가지고 나아가, 결국에는 귀한 일들을 성취합니다. 그러나 비전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 따라하기 바쁩니다. 다른 사람이 미국 간다는데, 옆집은 아이들에게 그림 그리기 레슨을 시킨다는데, 그 친구는 발레 한다는데, 김집사는 아이에게 과외를 10개나 시킨다는데. 이런 말 저런 말 듣고 따라하며, 다른 사람 흉내 내다가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맙니다. 이것은 비단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개인 뿐 아니라, 가정도 그렇고, 회사도 그렇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분명한 기준이 없으면 위대한 일을 하기는 커녕, 날마다 흔들립니다. 교회에 분명한 비전도 없고 나아가야 할 분명한 방향이 세워지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날마다 옆 교회 눈치 보기 바쁩니다. 옆 교회는 총동원 전도 잔치를 해서 성공했다는데, 옆 교회는 부흥회에서 재미 봤다는데, 옆 교회는 가정사역 세미나해서 좋았다는데, 그 교회 문화사역은 아이들을 한방에 ‘뿅!’가게 만든다는데, 제자훈련 끝내준다는구먼. 이런 말 저런 말 듣고 제자훈련 했다가, 문화사역 흉내 내다가, 총동원 전도 잔치 열었다가, 우왕좌왕하다가 세월 다 보내버리고 맙니다. 이처럼 분명한 비전과 방향이 없는 개인이나 교회는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비전과 방향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고백할 만큼, 목숨 걸고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가슴 깊숙한 곳에 담겨있는 비전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9장 26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라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삶은 향방, 즉 방향이 분명한 삶이었습니다. 허공에다 대고 헛손질 하는 것과 같은 삶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향방을 분명히 세운 사도 바울과 같은 모습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향방 없이 흘러가는 교회가 아닌, 나아가야 할 분명한 향방을 가진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와 같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비전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 동안 한 달 이상 매일 새벽마다 새벽기도회에서, 금식하며 기도하는 골방 기도팀에서, 각종 모임과 예배 때마다, 우리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비전에 대해서 기도해 왔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올해 우리 교회가 새롭게 나아가야 할 향방을 보여 주셨습니다. “물 댄 동산 같은 교회, 세상을 살리는 교회”입니다. 따라서 하시겠습니다. “물 댄 동산 같은 교회!“ ”세상을 살리는 교회!“ 그러니까 우리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저는 2004년 한 해 동안 여러분들이 물댄 동산 같은 성도, 여러분들의 가정이 물댄 동산 같은 가정, 그리고 우리 교회가 물댄 동산 같은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물 댄 동산 같은 교회
원래 이 물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물은 아무 색이 없는 무색, 아무 냄새도 없는 무취, 아무 맛이 없는 무미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물은 인간생존에 있어서 잠시라도 없어서는 안 될 물질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이 물을 필요로 합니다. 동물도, 식물도, 물이 없으면 죽습니다. 특히 사람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70%가 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70%의 물중에서 5%만 빠져나가도 탈수증이 걸려 어려움을 겪고 심하면 목숨까지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어느 미군 군목은 전쟁터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중심으로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 글에 의하면 적군의 총탄에 맞아 숨지는 젊은 병사들이 숨을 거두기 직전에 절규하면서 마지막으로 두 가지를 찾더라는 것입니다. “O my God!(오 하나님!) O water!(물!)”
물은 우리 인간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불가결한 물질입니다. 사람은 생명의 시작을 물과 함께 합니다. 이미 사람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양수 속에서 자랍니다. 그래서 사람은 본능적으로 물을 그리워합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아를 물 속에 넣어 목욕을 시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또 사람의 생활과 직결된 문명도 물과 깊이 관련되어 있어 잇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인류의 4대문명의 발상지도 물의 근원지를 중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처럼 의학적으로 보나 역사적으로 보나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아도 물은 대단히 많이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을 보면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또 계시록 22장 1절과 2절을 보면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물로부터 시작이 되었고, 마지막에는 물로 마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물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축복과 구원을 표현하는 상징적 의미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시편 23편 2절을 보면 목자이신 여호와는 양떼들을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고 했으며, 시편 1편 3절에서는 율법을 묵상하고 즐거워하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다.
또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성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에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고 말씀하시면서 물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물>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축복과 은혜를 상징하고, 생명과 구원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반대로 가뭄은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물이 풍부한 곳에서 살기 때문에 가뭄의 무서움을 잘 알지 못하지만, 저는 과거에 가뭄의 무서움을 한 번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80년대까지의 호주 시드니는 세상에서 말하는 <지상의 천국>이었습니다. 겨울 기온도 영상 7~8도 정도로 그리 춥지 아니하고, 여름 기온도 기껏 32~3도 정도에 불과하고 날씨가 후덥지근한 날씨가 아닌 항상 깔끔한 날씨였습니다. 아무리 더운 날씨라 할지라도 나무 밑에 들어가거나, 실내에 들어가면 오히려 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90년대 초 여름부터 이상 기온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전에는 1년 동안 기온이 40도를 기록하는 날이 손꼽을 정도로 많지 않던 날씨가, 제 기억으로는 94년 여름에는 대낮 기온이 1주일 내내 38와 40도 사이를 기록했을 뿐 아니라, 밤에도 백야 현상이 되어 밤에도 34~5도를 기록하는 등,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었습니다. 한 달 내내 거의 34~5도 이상을 기록하며, 비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매일 TV에서 한 달 후면 시드니 시내에 제한 급수가 된다, 3주 후면 제한 급수가 된다는 식으로 수돗물 부족을 경고하였습니다. 그래서 수돗물을 아끼기 위해 집에서 자동차 세차(Car Wash)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농부들은 양이나 소, 등의 가축에게 먹일 풀이 부족하여 가축들을 시장에 내다 팔다보니, 가격이 폭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양 한 마리의 가격이 10센트 정도까지 떨어질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뿐 아닙니다. 워낙 가물다 보니 산에 있는 나무들이 완전히 말라버려 NSW주 곳곳에서 산불(Bush fire)이 났습니다. 모든 소방대원과 소방용 헬기를 동원하여 불길을 잡으려고 했지만, 불 소시개처럼 말라버린 나무들이 서로 부딪히면서 곳곳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화재를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는 호주 내의 다른 주에 있는 소방대원들이 합류하고 수많은 국민들이 Volunteer 자원 봉사자로 참여했지만, 불길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Bush fire가 무서운지 당시 저희가 살고 있던 시드니 북쪽 Ryde 라는 곳으로부터 약 8Km 떨어진 지역까지 산불이 났습니다. 밤에는 시뻘건 불기둥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고 낮에는 거의 한 달 내내 시드니 시내가 연기로 뒤 덥혔습니다. 또 산불 현장으로부터 날아온 재들 때문에 밖에 빨래를 널지 못했습니다. 산불로 인해 주와 주 사이를 잇는 고속도로(Motorway)가 막히는 바람에 시골에 있는 슈퍼마켓에 물건 부족현상이 벌어지고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시드니로 출퇴근도 하지 못하는 등, 엄청난 혼란이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한국의 조선일보에 과장된 보도로 문제가 되긴 했지만, <시드니, 불바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겠습니까? 거의 1개월이 지난 후 하늘에서 비가 일시에 내려 모든 산불이 꺼지기는 했지만, 저는 그 때 가뭄의 무서움을 잠시나마 체험했습니다. 그 이후 이상 기온 현상으로 해마다 가물어서 호주, 특별히 NSW 주의 내륙 지역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많은 전문가들과 학자들은 특별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물 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내륙 지방은 머지않은 장래에 사막화가 될 것이라는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물이 없으면, 물이 부족하면, 사람 뿐 아니라 동물들도 식물들도 살 수 없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이 물을 필요로 합니다. 물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필수적인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중동의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물은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과거 아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주전 690년 경,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가장 귀한 것이 샘물이었고, 샘물이 있으면 큰 부자였습니다.
창세기에도 보면 이삭과 블레셋 사람들 사이에 우물을 차지하려고 다툴 만큼 물은 귀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양이 많아도 물이 없으면 양은 다 죽습니다. 아무리 농사지을 땅이 많아도 물이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과도 같은 물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 댄 동산 같은 삶”을 살도록 축복하시겟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물 댄 동산 같은 삶”이란 물질적으로 풍족한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높은 자리에 오른 권력이나,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물 댄 동산 같은’ 삶이란 세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라는 말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삶을 말합니다.
☛그리고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라는 말은 영혼이 잘 되는 삶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라는 말은 육신적으로도 건강한 삶을 말합니다.
‘물 댄 동산 같은’ 삶이란 육신으로 뿐 아니라 영적으로 건강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비록 은행에 잔고가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십시오. 그들이 40년 동안 그들은 단 한번도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굶어 죽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변변한 무기도 없었고, 잘 훈련된 병사들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전략이 훌륭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년 동안 그들은 아말렉도 이기고 블레셋도 이기고, 결국에는 가나안 일곱 족속들을 무찌르고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 댄 동산 같은 삶’을 살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아무리 마른 곳에 있을지라도, 아무리 거친 광야 같은 세상에 있을지라도, 그들로 하여금 ‘물 댄 동산 같은 삶’을 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도 물 댄 동산 같은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항상 영혼이 만족을 얻고, 항상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항상 뼈가 견고케 되는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물 댄 동산 같은 삶’의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들이 ‘물 댄 동산 같은 성도’, 여러분들 가정이 ‘물 댄 동산 같은 가정’, 여러분들이 경영하는 사업장이 ‘물 댄 동산 같은 사업장’, 여러분들의 학교가 ‘물 댄 동산 같은 사업장’이 되는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도 어떠한 가뭄의 날씨에도 끄덕 없는 ‘물 댄 동산 같은’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살리는 교회
둘째로 저는 2004년 한 해 동안 여러분들이 세상을 살리는 성도, 여러분들의 가정들이 세상을 살리는 가정, 그리고 우리 교회가 세상을 살리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물 댄 동산 같은’ 축복을 누리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리에게 ‘물 댄 동산 같은’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선행 조건이 있습니다. 9절 하반절부터 10절 상반절 까지 말씀을 제가 읽겠습니다. “....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여기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물 댄 동산 같은 삶’을 살수 있는 비결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물 댄 동산 같은 삶’을 살수 있을까요? 다섯 가지의 선행 조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크게 구분하면 소극적인 행동과 적극적인 행동으로 구분됩니다. 소극적인 행동으로는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는 멍에를 씌워서는 안 되고, 손가락질함으로 멸시해서도 안 되고, 악한 말과 같은 허망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또 적극적인 행동으로는 굶주린 자들을 동정하며, 고통당한 자를 위로하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돌보며 그들의 회복을 위하여 힘쓰는 것이 우리가 ‘물 댄 동산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바로 이러한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만 ‘물 댄 동산 같은 삶’을 사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물 댄 동산 같은 삶’을 살지 못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살리는 일을 우리 교회가 감당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또 다른 존재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크라임벨 교수라는 분이 쓴 글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동네에 호수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끔 그 호수에서 사람들이 뱃놀이를 하다가 빠져 죽기도 하고 수영을 하다가 수영미숙으로 익사사고가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였습니다. 결론은 한 사람씩 교대로 호숫가에 서서 경비를 서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서서 경비를 하다보니 다리가 아파 앉을 의자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의자를 만들어놓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따가운 햇볕을 가릴 지붕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지붕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세워 나가다보니 비를 막을 수 있는 벽도 만들고, 돌로 된 바닥에 카펫트도 깔면서, 나중에는 인명을 구조할 훌륭한 구조본부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구조본부로 데려다 눕혔더니 깨끗한 카펫트 바닥에 먹은 것을 토하고 각종 오물을 묻히는 것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카펫트가 더러워지기 때문에 물에 빠진 사람을 일단 구조하면 집 밖에 두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결국에는 생명을 살리는 목적으로 지어놓은 건물이 생명을 구조하는데 사용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인명 구조를 목적으로 세운 건물의 본질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혹시 우리 교회는 어떨까요?
우리 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상실한 것은 아닐까요? 혹시 세상에서 아직도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은 외면한 채, “나만, 우리 가정만, 우리 교회만 ‘물 댄 동산’의 축복을 누리면 되는 거지, 뭐 다른 사람들까지 돌볼 필요가 있나?“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물 댄 동산’의 축복을 누리는 사람의 의무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12절을 보겠습니다.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여기에서 물 댄 동산의 복을 누리는 사람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까?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워야 한다고 합니다. 파괴된 기초를 다시 세워야 한다고 합니다. 무너진 성벽을 다시 재건해야 한다고 합니다. 무너진 시가지를 다시 복구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9절부터 12절까지 말씀을 쉽게 정리하면, 세상을 회복시키는 일을 해야 ‘물 댄 동산’의 축복을 누릴 수 있고, 또 ‘물 댄 동산’의 축복을 누리는 사람은 세상을 회복시키고 세상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풍성함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존 샌포드라는 사람은 <내 안에 있는 천국>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자기 집에 있던 오래된 우물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집에 있는 우물물은 차갑고 깨끗했습니다. 결코 마르는 일이 없었습니다. 가뭄이 극심할 때도 차고 맑은 물이 끊임없이 솟아났습니다. 그러다가 생활이 풍족해지면서 기존의 우물은 그대로 덮어 놓고 한쪽에 현대식 펌프 장치를 설치하여 기계로 우물을 길어내도록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냥 덮어 놓은 우물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뚜껑을 열고 보니 차갑고 깊은 우물을 보리라고 생각했던 기대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우물이 완전히 말라 있었습니다. 샌포드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려고 우물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연구한 결과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우물은 지속적으로 물이 흘러나오는 수백 개의 작은 지하 수맥으로부터 물을 공급받는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내면 더 많은 양의 물이 수맥으로부터 스며 나와 우물에 고여 들면서 이 작은 수맥들의 관들은 늘 깨끗하게 열려 있게 된다. 그러나 사용하지 않고 정기적으로 물을 길어내지 않으면 미세한 수맥들이 막히고 만다. 여러 해 동안 그침 없이 흐르던 우리의 옛 우물은 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존 샌포드가 경험한 것처럼, 우물은 사용하지 않으면 마르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우물은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더 많은 물로 채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물 댄 동산’의 축복을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면 마르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물 댄 동산’의 축복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쓰면 쓸수록, 더 많은 ‘물 댄 동산’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 11장 25절에서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물 댄 동산’의 축복을 구하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물 댄 동산’의 축복을 혼자만 소유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 댄 동산’의 축복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회복시키고 살리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 올해 2004년도에는 우리 교회가 우리 교회가 위치한 Woolston 지역의 이웃들과 크라이스트처치 지역사회를 살리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물론 작년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우리 소년부가 매주일 사용하고 Woolston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두 학생에게 선교부에서 추진하여 제 기억으로는 각각 400불 정도의 장학금을 지원해주었습니다. 또 추수 감사주일에는 교회와 이웃하고 있는 10 가정들에게, 작지만 정성들여 준비한 선물을 운영위원들이 돌렸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가져온 각종 과일들을 이웃에 위치한 장박아 수용시설에 중고등부 학생들이 전달했습니다. 또 여선교회 헌신예배에서 드려진 헌금을 여선교회 임원들이 난민 10가정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올해에는 좀 더 확대하였으면 합니다. 비록 우리가 비전센터 완공을 사역목표로 세워서 많은 재원이 필요하지만, 우물의 원리에 따라 우리가 물질을 흘려보내면 보낼수록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물질을 주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우리와 담을 사이에 두고 이웃하고 있는 Linwood Highschool에 소액이라도 장학금을 보내주고,
Woolston Community Centre에 필요한 물품도 공급해주고, 신학교인 BCNZ에 다니는 신학생을 위해 학비보조도 해주고, 오지에 나가있는 선교사님들을 돕는 선교비도 보내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세상을 회복시키는 일은 물질로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능하다면 중고등부 학생들이나 청년들이나 남선교회 회원들이 1년에 한 두 번이라도 우리 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Woolston 지역의 거리를 청소하고, Sumner Beach에 가서 휴지와 쓰레기도 주웠으면 좋겠습니다. 또 각 부서에서 진행하는, 예를 들어 중고등부의 <시와 찬양의 밤>이나 청년선교회의 <새벽이슬의 소리>나 <성탄행사> 때에 이웃들을 초청해서 함께 하는 시간들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구체적인 방법들은 각 부서의 청지기들이 더 연구하고 계획해야겠지만, 어찌하든지 모든 분들이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세상을 회복시키고, 세상을 살리는 축복의 통로가 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때문에 Woolston 지역 주민들이 행복을 느끼고, 우리들 때문에 크라이스트처치가 잘 되고, 우리들 때문에 뉴질랜드가 복을 받는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크리스챤은 아닌 것 같고 또 지금은 경영 일선에 물러났는지 아니면 아직도 경영을 하고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지만, 파스퇴르 우유를 처음으로 세운 최명재라는 회장이 세간에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은 정말 괴짜입니다. 여기저기 싸움을 잘 걸기로 유명했습니다. “고름우유가 나온다.”, “저온 살균 우유만 영양이 살아있다.” 신문마다 1면에 빨간색과 노란색으로 유치해보이기까지 하는 광고를 실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에게는 한 가지 목표, 즉 인재 교육에 대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강원도 원주 근처의 한 시골에 민족사관학교라는 학교를 설립할 당시, 전교생 30명에게 1년에 일인당 3억 원씩 투자했다고 합니다. 30명이 공부하는 학교 땅 넓이가 38만평 이고, 선생님이 30명입니다. 한 달에 한 학생에게 1,500만원을 썼습니다. 그러면서 최회장은 입학식에서 민족사관학교 학생들에게 이러한 훈시를 남겼다고 합니다. “너희들은 개인의 행복만을 위해서 살기에는 너무나 값진 재주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것을 갈고 닦아 조국과 민족의 번영을 위해 써야 한다.”
저는 최명재 회장의 이 말이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꼭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행복만을 위해서 살기에는 너무나 값진 축복을 받은 사람들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그 축복을 가지고 세상을 살리는데 써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보면 똑똑한 머리를 가지고, 자기 혼자 잘 살겠다고 다 써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까운 재능을 가지고 자기 밥벌이 하는 데만 급급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많은 것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치하고 낭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쾌락의 늪에 빠져 즐기는데 사용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기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크리스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물 댄 동산’의 축복을 나누며 살아가는 줄로 믿습니다. 성숙한 성도는 세상을 살리기 위해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즐겨하며 기뻐하며 살아가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여러분들에게, 그리고 우리 교회에 ‘물 댄 동산’의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끊어지지 않는 샘과 같이 여러분들의 삶에 풍성한 ‘물 댄 동산’의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물 댄 동산’의 축복을 혼자만 소유하지 말고, 세상을 살리는데 사용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물 댄 동산 같은 교회‘가 될 뿐 아니라, ’세상을 살리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