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한 사람 (잠 25:17-18)
17 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18 자기의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 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화살이니라
이 시간에 “신령한 사람”이라는 제목입니다. 신령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신령한 사람이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거나 영적인 사람을 가리킵니다. 마치 하나님을 대면한 모세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신령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령하다는 것은 하나님은 물론 자신과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잘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로마의 백부장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도 알고 인간의 존엄도 알고 사회 분위기도 알고 자신도 알고 대단히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칭송이 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믿음을 크게 칭찬해 주셨습니다.
참된 신령함은 삶에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삶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지나치게 신뢰했다가 낭패를 당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나아가 남의 삶을 지도할 수 있다면 그는 아주 신령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갈6:1-3에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이것이 가능한 사람이 신령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어떤 사람이 신령한 사람입니까?
1. 이웃에 덕이 되는 사람입니다.
17절 “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는 것은 ‘이웃이 원하지 않는 빈번한 방문을 금하라.’는 뜻과 아울러 ‘너무 오래 머무르지 않도록 하라.’는 의미로도 해석되는 문구입니다.
이웃집 친구집이라고 너무 자주 그리고 오래 머물며 폐를 끼치면 좋아할 사람이 없습니다. 흔히 넉살이 좋다는 말이 있지요? 붙임성이 좋다는 말도 있고요. 이 말들은 부끄러운 기색이 없이 비위 좋게 구는 짓이나 성미를 가리킵니다. 모르는 사람이든 아는 사람이든 낯가림이 별로 없는 사교성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긍정에 속하는 기질입니다. 잘 활용하면 크게 성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치면 부정적인 의미로 변합니다. 염치없거나 얼굴이 두껍거나 뻔뻔스럽습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뭘 모르는 사람입니다.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가까운 친척이라도 와서 파고 살면 좋아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서로 원할 때는 상관이 없지만 죽치고 와서 살면 좋아할 사람이 없습니다.
혹은 말이 너무 느려도 좋지 않습니다. 말이 느려 한 시간은 쳐다봐야 무슨 말을 하는지 겨우 파악이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말을 할 때 무슨 말을 하는지 핵심부터 이야기하면 좋은데 지엽적이거나 너무 구체적이면 말을 다 듣기 전에 지쳐버립니다.
그리고 경쾌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등산하면서 마음 언짢은 이야기만 계속하면 심신이 건강하려고 운동하는데 스트레스만 잔뜩 쌓고 오면 되겠습니까? 불쾌한 이야기들은 우리 기를 막아버립니다. 기가 막히면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말조심해야 합니다. 약3:4-5에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했습니다.
전화 예절도 있어야 합니다. 너무 길게 하면 안 됩니다. 길게 할 만한 친구 사이도 아닌데 윗사람이라고 해서 오래 수화기를 들게 하면 지금 밖에는 국이 끓고 있고 아기는 울고 일이 널려 있는데 수화기에 눌려 귀가 아플 만큼 오래하면 그 다음부터는 그 사람의 전화는 기피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본 교훈은 사람과의 사귐에 있어서도 적당한 예의와 상대방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분위기 파악을 잘하는 사람이 신령한 사람입니다. 덕을 세우자는 말입니다. 믿음에 덕이라 했습니다. 믿음에 덕이 첨가 되어야 좋은 믿음입니다.
그런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착하고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5:16에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셨습니다.
바울도 롬14:17-19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그랬습니다.
진실로 이웃에 덕을 세우고 칭송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 신령한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작은 일에서부터 선한 일을 계획하고 실행해야 합니다.
어느 교회는 커피자판기를 문 앞의 거리에다 내놓았더니 그 작은 한 가지이지만 그것이 사회에 좋은 이미지를 주더랍니다. 이 교회는 열린 교회다. 이 교회는 사회에 함께 하는 교회다. 이 교회는 섬기고 봉사하는 교회다. 이 교회는 출석하기 부담스럽지 않는 교회다.
사람들 중에는 너무 자주 빼먹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고장 내놓는 사람도 있고 감사하는 마음 없는 사람도 있어 효과가 없는 건 아니냐 하는 실망된 일도 있을 수도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 작은 한 가지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그만큼 점령한다는 사실입니다.
점령 못하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귀한 것 아닙니까? 이웃에게 예절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전해야 합니다.
2. 이웃을 해에서 구출하는 사람입니다.
18절 “자기의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 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화살이니라” 여기 방망이 칼 화살은 옛날 전쟁할 때 적군을 해하는 전쟁도구입니다. 방망이는 적의 기물을 부수거나 기절시키는데 쓰이고, 칼은 베거나 찔러 살상하는 대표적인 무기이고, 화살은 멀리 있는 적을 쏴서 죽이는 살인무기입니다. 참으로 취급에 주의해야 할 무기들입니다.
우리나라가 좋은 것은 무기를 소지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점입니다. 사냥도구도 신고해야 하고 도검류도 일정 이상 크면 신고해야 합니다. 일부 국가에서는 무기소지가 합법화되어 캠퍼스나 공공장소에서 끔찍한 총기난사사건들이 자주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무기상들의 손을 들어주느라 국회의원들이 법을 개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에게서 많은 돈을 받아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사람이니 사람 같은 법을 재정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자기 이익에 따라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국민들이 철저히 감시해야 합니다.
그런데 남을 해하는 이런 무서운 무기들을 우리도 갖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언어의 무기입니다. 특히 법정에서 거짓 증언하면 안 됩니다. 타살자를 자살자로 처리하는 일도 얼마나 많습니다. 그 한 사람의 죽음에서 끝나지 않고 그 가족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메르스 35번 환자가 지금도 완쾌되지 못하고 있지요?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책임 있는 사람들이 몇 차례에 걸쳐 말을 함부로 해서 그에게 증오심을 심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로선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들어가면 사람에게 해를 가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사람 하나 죽이기 쉽습니다. 요셉이 위대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가 억울한 일을 연거푸 당해서 폐인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을 신앙으로 극복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글이 있습니다.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싸움의 불씨가 되고 잔인한 말 한마디가 삶을 파괴합니다. 쓰디쓴 말 한마디가 증오의 씨를 뿌린다. 무례한 말 한마디가 사랑의 불을 끕니다. 은혜스런 말 한마디가 길을 평탄케 하고 즐거운 말 한마디가 하루를 빛나게 합니다. 때에 맞는 말 한마디가 긴장을 풀어주고 사랑의 말 한마디가 축복을 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하면서 가장 악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혀입니다. 잠18:21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이커 주석에는 “수다를 억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벽이 없는 집과 같다. 모든 생활에서 말을 절제하면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성질을 죽이라. 남의 말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조금만 말하라. 혀는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선과 가장 커다란 악을 행할 수 있는 기관이다.”
그런데 보면 지혜로운 사람은 늘 지혜롭지만 무지한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어도 늘 그렇습니다. 지혜의 은사를 구하지 않아서입니다.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지혜의 은사를 주십니다. 신령한 사람이란 지혜로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역시 남을 해하지 않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의 말로 남을 살려야 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적으로 말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말해야 합니다. 사52:7에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했습니다.
이처럼 전도자의 발이 살리는 발이 되려면 산을 넘어야 합니다. 산은 죄를 포함해 무지와 인간의 온갖 장애를 말합니다. 즉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의 공로에 굳게 서라는 말입니다. 이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말이 남을 상처주고 죽이는 데서 벗어나 사람을 살리는 말이 될 때 그것이 가장 신령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가장 신령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 그와 같이 신령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께도 잘 할 뿐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도 잘하고 복음을 전도해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칭송 듣는 가장 신령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