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후 1: 8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 - 고후 1: 11 간구함으로 도우라 ( 상 )
고후 1: 8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 -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
바울은 자신과 디모데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언급한다. 그들은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하였고 살 소망까지 끊어졌었다. 그것은 죽음의 문 앞까지 간 환난이었다. ‘이제는 죽었구나!’ 하는 절망의 때이었다.
바울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고 때때로 성도들에게 이런 극심한 고난이 닥쳐온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기쁨과 위로의 줄을 다 끊어버리시고 오직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서게 하시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게 되는 경우가 있다.
1] 형제들아,
형제(兄弟, brother)는 형과 아우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형제로 번역된 '아흐'는 '형제'(창 9: 5), '아우'(창 4: 2)이다.
* 창 9: 5 -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 창 4: 2 -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아브람이 롯을 가리켜 '벤 아흐'(조카, 12절)라 하지 않고 이렇게 칭한 것은 롯의 이기주의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그를 사랑한 애정을 의미한다.
또한, 친한 친구,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 그리스도인들 등을 말하기도 한다.
* 삼하 1: 26 – 친구 -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 암 1: 9 – 친구 -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시되 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그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음이라.
* 마 7: 3 – 친구 -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출 2: 11 – 동족 -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 신 23: 7 – 동족 -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
* 약 2: 15 – 교인 -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 롬 16: 1 – 교인 -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예수님도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 50)고 하셔서 형제의 범위를 육신의 형제를 넘어선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 된 지체들로 확대 시켰다.
바울 사도도 여러 편지에서 편지의 수신자가 되는 성도들(롬 1: 13, 고전 1: 10, 갈 1: 2, 빌 1: 12, 골 1: 2)은 물론 소스데네(고전 1: 1), 디모데(골 1: 1), 디도(고후 2: 13), 에바브로 디도(빌 2: 25), 두기고(엡 6: 21), 오네시모(골 4: 9) 등을 형제라고 불렀다.
2]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본문에서 논의의 초점이 되는 것은 '아시아'가 구체적으로 어디인가 하는 것과 '환난'이 어떤 종류의 것을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이다.
(1) 아시아에 대한 구체적 지역 문제
Ⓐ 에베소를 가리킨다고 본다(Haenchen, Robertson, Farrar 등).
이렇게 보는 근거는 고전 15: 32의 맹수와의 싸움에 대한 비유적 표현과 행 19: 23-40에 언급된,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일으킨 소란에 두고 있다.
* 고전 15: 32 -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 행 19: 23-40 - 23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24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25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26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27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2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29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30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31 또 아시아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 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32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33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변명하려 하나 34 그들은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소리로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이나 하더니 35 서기장이 무리를 진정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시가 큰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36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37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비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붙잡아 왔으니 38 만일 데메드리오와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고발할 것이 있으면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39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면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정할지라. 40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 사건으로 책망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는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자료가 없다 하고
Ⓑ 리쿠스 계곡을 가리킨다고 본다(Harris, Duncan).
이렇게 보는 이유는, 바울이 매를 맞아 거의 죽게 된 일에 대해 기록한 고후 11: 24을 이곳에서 있었던 일로 보기 때문이다(Lowery).
* 고후 11: 24 -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또 다른 이유는, 만약 '아시아'가 에베소를 가리킨다면 고전 15: 32나 16: 8에서 처럼 '에베소'라는 지명을 밝혔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 고전 16: 8 -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 함은
이상에서 언급한 두 견해는 나름대로의 이유를 제시하나 모두 하나의 추측에 불과하다. 오히려 본 절에서 '아시아'가 가리키는 곳은 에베소와 리쿠스 계곡을 제외한 다른 어떤 장소 일지도 모른다(Charles, Hodge, Tasker).
3]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바울은 그의 생명을 노리는 수많은 대적들로부터 여러 차례 시련을 겪었고, 이러한 사실이 모두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바울이 고난을 겪은 장소가 아니라 그가 당한 고난이 얼마나 극심한 것이었던가 하는 것인 만큼 이에 대해 집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4]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바울이 당한 극심한 '환난'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 세 가지 견해가 있다.
Ⓐ 바울이 구체적인 사실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미 고린도 교인들이 알고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고전 15: 32과 16: 9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Harris).
Ⓑ 심한 질병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다(Knox, Ruckert).
이 견해를 지지하는 자들은 바로 다음 절의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9절)라는 내용이 자기들의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고 본다.
그러나 '환난'에 해당하는 헬라어 '들립시스'(*)는 심한 질병에 적용하기에는 적합치 않으므로 이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 본문의 맥락에서 볼 때 이미 고린도 교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우며 그 이후에 있었던 새로운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판단하여 행 19: 23-40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Theodoret, Calvin).
* 행 19: 23-40 – 23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24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25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26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27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2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29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30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31 또 아시아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 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32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33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변명하려 하나 34 그들은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소리로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이나 하더니 35 서기장이 무리를 진정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시가 큰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36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37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비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붙잡아 왔으니 38 만일 데메드리오와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고발할 것이 있으면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39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면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정할지라. 40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 사건으로 책망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는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자료가 없다 하고
위의 견해 중 세 번째 견해가 타당한 것으로 보이며, 여기에 바울의 첫 번째 편지에 대한 고린도 교회의 부정적인 반응으로 인해 바울이 정신적으로 고통받은 것을 지칭한다는 파라(Farrar)의 견해가 첨가될 수 있을 것이다.
5]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마치 너무 많은 짐을 실은 배가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가라앉듯이 바울에게 가해지는 고난의 무게는 그 자신의 힘으로는 견디어내기 어려운 혹심(酷甚)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절망적인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여기서 '끊어지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사포레데나이'(*)는 급작스러운 고뇌로 모든 소망을 상실케 되며 마침내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게 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와 같은 강렬한 경험을 생생하게 회상하고 있다.
고후 1: 9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바울이 당한 극심한 고난의 목적이 무엇이었는가? 오늘날도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들의 목적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들에는 몇 가지 목적이 있다.
첫째, 고난은 우리를 겸손하게 한다.
* 신 8: 2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둘째, 고난은, 본문의 말씀대로,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한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많은 고난을 통해 강해지고 견고해진다.
셋째, 고난은 우리의 인격을 거룩하게 한다.
* 히 12: 10-11 –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1]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이 문구(*, 토 아포크리마 투 다나투)에 대한 해석은 분분(紛紛)하다.
Ⓐ 행 19: 23-41에 기술된 에베소의 데메드리오 폭동 사건(Silanus, Duncan).
Ⓑ 법과 질서를 어긴 사람을 원형 경기장의 맹수들에게 주어 생명을 빼앗게 하는 심각한 위험(Malherbe, Warfield).
Ⓒ 법정에서 내려진 사형의 판결(Deissmann, Stanley).
Ⓓ 복음을 증거하다가 겪는 육체적 고난(Strachan, Martin).
Ⓔ 12: 7의 '육체에 가시'와 연관되는 것으로서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Clavier, Barrett).
이 중에서 Ⓒ와 Ⓓ의 해석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이 문구는 용어상 재판에서 사용되는 표현이며 전후 문맥상 5절의 `그리스도의 고난' 및 8절의 '환난'과 긴밀하게 연계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바울은 본문을 통해 자신이 경험했던 절망감의 최종적 나타내고 있다.
2] 받은 줄 알았으니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스케카멘'(*)은 `가지다', `소유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동사 '에코'(*)의 완료형이다(hadreceived).
이것이 완료형으로 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는
Ⓐ 과거에 경험한 것에 대한 생생한 회상으로 보는 견해(Robertson),
Ⓑ 단지 과거에 대한 회상을 넘어 현재에도 효력을 가지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는 바울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가 아직 집행만 되지 않았을 뿐 여전히 효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의 유일한 희망이 부활에 있음을 뜻한다고 본다(Haenchen).
위의 두 견해 중 Ⓐ가 더 타당한 듯하다.
3]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바울이 절망하여 사형 신고를 받은 것으로 생각한 것은 더 이상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어떤 구원에의 능력도 기대할 수 없음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 누구보다도 신뢰할 만한 것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서 맛본 좌절, 신체적인 질병, 거듭되는 죽음의 위협 속에서 자신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때 비로소 그는 참된 위로와 구원과 신뢰가 인간의 한계 상황인 죽음 너머로부터 역사해 오시는 하나님께 있음을 통감하게 되었다.
* 빌 3: 4 -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 고후 11: 23-27 –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인간에 대한 신뢰를 전적으로 포기(抛棄)할 때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배울 수 있게 된다.
아마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이것을 알게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이 교훈은 철저한 환난 가운데 배우게 되는 것이며 이것 역시 고린도 교인들이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었음이 틀림없다.
고후 1: 10 큰 사망에서 건지시기를 -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 일행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 고난에서 건져내어 주셨다. “또 건지시리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 현재형이다(뤼에타이).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는 도다.”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하심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또 미래에도 적용된다. 그는 우리를 건지셨고 건지시고 또 건지실 것이라는 뜻이다.
“그에게 바라노라”는 원어(엘피카멘)는 완료형으로 소망의 확실함을 보인다. 과거에 함께하신 하나님, 지금도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미래에도 함께하실 것을 확신하며 소망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곁에 계신다.
1]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1) 큰 사망
'큰 사망'(*, 텔리쿠투 다나투)은 '어려운 죽을 고비'(공동번역)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특별히 여기에서는 마지막 심판에 의한 영벌을 의미한다.
(2) 건지셨고
여기에서는 구약시대의 구원을 의미한다.
2] 또 건지실 것이며,
여기에서는 신약시대를 의미한다.
3] 이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과거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함을 받은 바울은 그것을 현재와 미래에 있을 환난에서의 구원을 확증해 주는 예표로 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경험적 신앙으로부터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을 위로할 수 있었고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교훈을 줄 수 있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의지하는 자를 구원하시되 시간과 회수에 제한 없이 영원히 보살피신다.
* 전 3: 14 -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 딤후 4: 18 -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여기서는 재림 직전의 종말시대(7년 대환란시대)의 구원을 의미한다.
고후 1: 11 간구함으로 도우라 -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는 원문은 고린도 교인들이 사도 바울 일행을 위해 기도와 간구로 돕고 있다는 뜻이라고 본다(KJV, NASB).
성도들은 복음 사역자들을 위해 기도와 간구로 협력해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매우 중요한 방법이다. 복음 사역자들 자신들의 기도뿐 아니라, 그들과 그들의 사역을 위한 성도들의 힘 있는 기도는 하나님의 일을 힘있게 이루게 할 것이다.
* 엡 6: 19 -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의 기도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 빌 1: 19 -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여기서 바울은 커다란 힘을 갖는 중보 기도를 부탁하면서 자신이 사도로서 일방적으로 사역하는 자가 아니라 그들의 도움도 필요로 하는 연약한 존재임을 밝힘으로써 그들이 바울에게 소중한 존재임을 확인시키는 동시에 서로 협력하여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도록 일치를 이루자고 권고하고 있다.
여기서 '도우라'로 번역된 헬라어 '쉬뉘푸르군톤'(*)은 '함께 도와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바울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중보 기도를 강력하게 부탁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 살후 3: 1-3 – 1 끝으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 2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3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2]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 기도가 응답 되어 바울에게 은혜가 내린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기도가 응답 된 것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론프로소폰'(*)에서 대명사 '폴론'에 첨가된 '프로소폰'은 '얼굴'을 뜻한다.
이 말이 헬레니즘 시대에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대체적으로는 '얼굴'을 뜻하는 것으로 쓰였다.
그 예로 본서에 이 단어가 11번 나오는데 그 가운데 최소한 여덟 번은 '얼굴'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3: 7, 13, 18. 10: 1, 7. 11: 20).
반면 본서 2: 10과 4: 6에서는 '사람' 또는 '얼굴'로도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Robertson).
3]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그런데 본문의 '프로소폰'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것에 대해서 헨헨(Hacenchen)은 '프로소폰'이 '사람'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라는 구절에서는 대명사 '플론'(*)만으로 충분한데, 여기에 또다시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프로소폰'을 첨가하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이 말이 본래적 의미인 '얼굴'로 쓰였다고 보아 많은 얼굴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향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거나 아니면 연극에서의 의미 즉 연극에는 다양하고 많은 인물이 나오지만 그 모든 인물들이 하나의 결말(結末)을 위해 협력하며 그때 생겨나는 좋은 결과에 다 같이 감사하는 것을 생각했을 것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