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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어머니 2장 나는 독생녀로서 이 땅에 왔습니다 3. 달래강 전설, 하늘의 섭리 잉태하고 1 "엄마, 평안도가 무슨 뜻이에요?" 호기심이 가득했던 나는 궁금증이 일면 어머니에게 쪼르르 달려가 무엇이든 물었습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친절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평안도는 평양과 안주에서 한 자씩 따 지은 이름이란다." "왜 한 자씩 땄어요?" "두 곳 모두 큰 고을이기 때문이지." 2 내 고향 안주는 예로부터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또 너른 평야에서 농사가 잘되었고 먹을 것도 풍족해 고조선 때부터 큰 고을을 이루었습니다. 어머니가 태어난 정주는 나의 남편 문선명 총재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남쪽으로 청천강을 건너면 바로 안주입니다. 3 옛날에 살수라 불렸던 청천강은 고구려 때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대군을 격파한 살수대첩으로도 유명합니다. 이 강을 경계로 평북과 평남으로 나뉩니다. 안주에서 남편의 고향 정주까지는 불과 60여 킬로미터이며, 평양까지는 75킬로미터를 더 가야 합니다. 4 아버지는 그곳 안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청주 한씨 승운 선생은 1909년 1월20일, 평안남도 안주군 대니면 용흥리 99번지에서 부친 한병건 선생과 모친 최기병 여사 사이에서 5형제 중 맏아들로 출생했습니다. 11세 때인 1919년에 만성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4학년까지만 다니다 중퇴했습니다. 5 그러나 배움의 열망이 너무 커서 1923년 사립 육영학교에 다시 입학해 1925년 졸업했습니다. 그때가 17세였습니다. 졸업 후 선생님이 되어 10년 동안 모교인 육영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광복 직후 혼란기인1946년까지는 만성공립보통학교의 교두(교감)로 일하셨습니다. 6 나는 아버지와 함께 산 기간이 무척 짧았습니다. 그러나 그 온후한 성품과 모습은 내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성품은 치밀하고 알뜰하셨으며, 체격이 건강하고 체력도 뛰어났습니다. 어느 날엔 길을 걷다가 사람들이 논 가운데 있는 큰 바위를 치우는 데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번쩍 들어내셨을 만큼 힘이 장사였습니다. 7 공부도 잘했으며 기독교 신앙이 독실하셨는데, 충직한 교편생활과 신앙생활로 인해 중견 간부로 바쁘게 생활하셨습니다. 악랄한 일본 경찰의 온갖 핍박과 감시를 받으면서도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과 심정으로 삶을 이어가셨습니다. 8 어머니 홍순애 여사는 1914년 음력 2월 22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지닌 아버지 남양 홍씨 유일 선생과 어머니 영변 조씨 원모 여사 슬하에서 탄생한 1남 1녀 중 맏딸이었습니다. 외할머니는 조선시대에 부유한 선비였던 조한준의 직계 후손으로, 그 동네는 벼슬을 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기와집 촌이었습니다. 9 그곳 정주에 달래강 다리가 있었습니다. 커다란 돌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튼튼한 다리였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낡고 허물어져 건너다니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먹고사는 일에 바빠 그냥 방치해 두었습니다. 그러자 홍수에 휩쓸리고 모래더미가 밀려와 강바닥에 묻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10 그런데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예언이 있었습니다. 달래강 다리에 바위를 깍아서 세워 놓은 장승 표석이 묻히는 날에는 나라가 없어지고, 드러나는 날에는 조선 땅에 신천지를 펼쳐지리라. 11 중국 사신이 두만강을 건너와 한양으로 가려면 달래강을 건너야 하는데 다리가 망가져 건널 방도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나라에 돈이 없어 다리 놓아 줄 사람을 찾기 위해 방을 붙였습니다. 그때 조한준 할아버지가 가진 재산을 전부 털어 돌다리를 새로 놓았습니다. 네모난 돌을 빈틈없이 쌓아 튼튼하게 올리고 그 밑으로는 배가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 널찍하게 만들었습니다. 12 조한준 할아버지는 다리를 새로 만드는 데 전 재산을 다 쓰고 엽전 세 푼을 남겨 놓았습니다. 다음 날 다리 준공식에 신고 갈 짚신을 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날 밤, 꿈에 하얀 옷을 입은 할아버지가 나타나 말했습니다. "한준아, 네 공이 크구나. 그래서 너희 가문에 천자를 보내려 했는데 남겨 놓은 엽전 세 푼이 하늘에 걸려 공주를 보내겠노라." 13 꿈에서 깨어나 의아한 생각이 들어 달래강에 가 보니, 언덕 위에 이제까지 없던 돌미륵불이 생겨나 있었습니다, 그 미륵이 얼마나 영험했으면, 누구든지 말을 타고 그 앞을 그냥 지나가지 못했습니다.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나서야 갈 수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별 신기한 일이 있다며, 경건한 마음으로 그 위에 집을 지어 돌미륵이 비바람을 맞지 않도록 했습니다. 14 이렇듯 충정 어린 조한준 가문을 통해 하늘은 신앙심 깊은 조원모 외할머니를 보내셨고, 그리고 그분에게서 신앙심이 더욱 깊은 홍순애 어머니가 탄생했습니다. 한반도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독생녀를 탄생시키기 위한 하늘의 섭리와 정성이 그 옛날 조한준 선조로부터 시작되어 나에게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
平和の母 第二章 私は独り娘としてこの地上に来ました 3. タルレ江の伝説、天の摂理を宿して 「お母さん、平安道ってどういう意味?」 好奇心旺盛だった私は、気になることがあると母の元に走っていき、何でも尋ねました。その都度、母は丁寧に教えてくれました。 「平安道は、平壌と安州から一文字ずつ取って付けた名前よ」 「どうして一文字ずつ取ったの?」 「どちらも、大きな街だからよ」 私の故郷である安州は、昔から軍事的にも政治的にも非常に重要な地域でした。また、広い平野があり、農楽が栄えて食糧にも恵まれ、古朝鮮時代から大きな都市を築いていました。母が生まれた定州は、私の夫、文鮮明総裁の故郷でもあります。そこから南に向かって清川江を渡ると、すぐに安州です。 昔、「薩水」と呼ばれた清川江は、高句麗時代に乙支文德将軍が隋の大軍を撃破した「薩水大捷」でも有名です。この川を境にして、平安北道と平安南道に分かれているのです。安州から、北にわずか六十数キロ行けば夫の故郷である定州があり、南に七十五キロ行けば平壌があります。 父の韓承運(清州韓氏)は、陰暦の一九〇八年十二月二十九日、その平安南道安州郡の大尼面龍興里九十九番地で、父・韓炳健と母・崔基炳の間に、五人兄弟の長男として生まれました。 数えで十一歳になる一九一九年、萬城公立普通学校に入学しています その学校は四学年の時に中退しましたが、勉強がよくできた父は学びへの情熱を抑え切れず、一九二三年に私立の育英学校に入学し、一九二五年に卒業しました。数えで十七歳の時でした。 父は卒業後、教師となり、約十年間、母校の育英学校で子供たちを教え、解放直後の混乱期においても一九四六年まで、 萬城公立音通学校の教頭として働きました。 私が父と一緒に過ごした期間は、とても短いものでした。しかし、その温厚な人柄と風貌は、私の記憶に深く刻まれています。細やかで慎み深い性格でしたが、 がっちりとした体格で、 体力も秀でていました。村の人が田んぼの中の大きな岩をどけようと苦労しているのを目にすると、すぐに駆け寄って、ひょいと岩を持ち上げてしまったというほど、力持ちでした。 キリスト教の信仰に篤かった父は、教員生活と信仰生活に真撃に取り組む中、家を空けることが多くありました。李龍道の新イエス教で中堅幹部として忙しく過ごし、日本警察からの迫害と監視を受けながらも、ひたすら神様に仕える信仰と心情で生活していました。 母洪順愛は、一九一四年の除曆二月二十二日、平安北直の定州で生まれまLた。敬虔なキリスト教信者である父・洪唯一(南陽洪氏)と母・趙元模(寧邊趙氏)の間に、一男一女の第一子として誕生しています。 祖母の趙元模は、朝鮮時代に裕福で学のあった趙漢俊の直系子孫で、官職を担った人々の住む瓦屋根の家が立ち並んだ村で育ちました。 その昔、定州を違れるタルレ江に一本の橋が架かっていました。大きな石を一つ一つ積み上げて造った丈夫な橋でしたが、月日が径つにつれ古くなって崩れ始め、渡ることができなくなったといいます。そして、人々が日々の生活に追われ、そのまま放置していたところ、ある日洪水によって大量の土砂が押し寄せ、橋は完全に崩れて、川底に沈んでしまったのです。 ところで、その地域に昔から伝えられてきた予言がありました。 タルレ江の橋に岩を削って立てた将軍標が埋もれれば国がなくなり、それが姿を現せば朝鮮の地に新天地が広がるであろう。 当時、中国の使臣が鴨緑江を越え、漢陽(現在のソウル)に行こうとすれば、タルレ江を渡ら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ですが、橋が壊れてしまったため、渡る方法がありません。国にもお金はありませんでした。そこで、橋を架けてくれる人を探している旨のお触れを出し、募集したのです。 その時、趙漢俊が、持っている財産をすべてはたき、石橋を新たに架けたのです。 四角い石を隙間なくしっかりと積み上げ、その下を船が通れるほど、大きな橋を造ったといいます。 新しい橋を架けるのにほぼ全財産を使った趙漢俊ですが、手元に三文ほどの小銭が残りました。そこで、翌日行われる、橋の竣工式に履いていく草履を買ったのです。 その晩、夢に白い服を着た老人が現れて言いました。「漢俊よ、お前の功は大きい。そこでお前の家門に天子を送ろうとしたのだが、残しておいた小銭三文が天に引っ掛かったので、王女を送ることにした」 夢から覚めた趙漢俊が不思議に思い、タルレ江に行ってみると、丘の上にそれまでなかった弥勒仏の石像が立っているのが見えました。その弥勒像は非常に霊力が強く、誰一人として、馬に乗ったままその前を通り過ぎることはできませんでした。 馬から降り、お辞儀をして、ようやく通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村の人々は、不思議なことがあるものだと言いながら、その上に屋根を建て、弥勒像が雨風に当たらないようにするなど、心を込めて祀りました。 このように、忠誠を尽くした趙漢俊の家門を通して、天は信仰心の篤い祖母・趙元模を送ってくださり、その祖母から、さらに一層深い信仰心を持つ母の洪順愛が誕生しました。韓半島に神様の愛する独り娘を誕生させるための天の摂理と精誠が、はるか昔、先祖の趙漢俊から始まり、私にまで綿々と続いてきたのです。 |
MOTHER of PEACE CHAPTER 2. I CAME INTO THIS WORLD AS THE ONLY BEGOTTEN DAUGHTER 3. The Dallae Bridge legend “Mother, why is where we live called Pyong-an Province?” I was full of curiosity, and whenever I had a question about something, I ran to my mother and asked her for the answer. Every time my mother responded kindly. “Well, dear,” she replied, “it is called that because the Pyong part is the first character of Pyongyang and the An part is the first character of Anju.' 'Why do they take one character from each name?” I asked. “It's because both of them are big districts,” she said. Over time, Anju had grown into a large town. It was surrounded by expansive plains that were ideal for farming, and there was normally plenty to eat. My father, Han Seung-un, was born on January 20, 1909. He was the eldest of five children of Han Byeong-gon and Choi Gi-byeong of the Cheongju Han clan at Yongheung village, by the city of Anju. My father entered Mansong Public Primary School in 1919, when he was 10. He had to leave after finishing the fourth grade, but his desire to learn led him to enter a private school, Yukyong School, in 1923, from which he graduated in 1925 at age 16. He then became a teacher at his alma mater, Yukyong School, for ten years. During the chaotic period from Korea's liberation until 1946, he served as the vice principal of his other alma mater, Mansong Primary School. I lived with my father for only a brief time, but his gentle nature and features are engraved in my mind. He was meticulous and thrifty, and he was very strong. One day he was out for a stroll on a local road when he saw some people struggling to clear a big rock from a rice field. He went over, lifted up the rock and moved it out of the way. He was a devout Christian and follower of Rev. Lee Yong-do, pastor of the New Jesus Church. Because of my father's work as a teacher and his active life of faith, he was rarely at home. He lived a life of service to God, even though the government tracked and persecuted Christians from independent churches such as his. My mother, Hong Soon-ae, was born on March 18, 1914, in Chongju, North Pyong-an Province. That is the town where my husband, Father Moon, also was born. She and her younger brother (my uncle) were born to a devout Christian couple, Hong Yu-il and Jo Won-mo. My maternal grandmother, Jo Won-mo, was a direct descendant of Jo Han-jun, a wealthy scholar of the Joseon Dynasty. Jo Han-jun lived in a village of tiled roofed houses in Chongju, a community of people who held government positions. Not far from his home was a bridge across the Dallae River. It once was a sturdy bridge made of neatly piled, large stones, but over time it had deteriorated to the point that no one could cross it. No one had the time or resources to fix the bridge, and one day a flood swept it away and buried its stones in the riverbed. As did everyone else, Jo Han-jun knew the prophecy that had been passed down for generations: If a rock carved like a totem pole standing beside the Dallae River bridge is buried, then the nation of Korea will fall, but if that rock is clearly exposed to the people, then a new heaven and earth will unfold in Korea. The Dallae River bridge was important for another reason. In order for Chinese envoys to make their annual trek to the seat of Korea's government in Seoul (then named Hanyang), they had to cross that bridge. Now it was gone, and the government did not have money to rebuild it. In desperation, officials posted a bulletin calling upon the citizens to rebuild the bridge. Grandfather Jo Han-jun accepted the call and rebuilt the bridge using his personal wealth. The sturdy new stone bridge was now high enough for boats to pass under. Grandfather Jo Han-jun spent his entire fortune on this task, and when it was done, all he had left were three brass coins. These were just enough to pay for the new straw sandals that he needed in order to properly attend the bridge dedication ceremony the next day. That night, he had a dream of a grandfather in white clothes who came to him and said, “Han-jun, Han-jun! Your sincere devotion has moved Heaven. I was expecting to send a Son of Heaven to your family. However, because you bought the sandals, I will send to your family the Princess of Heaven.” Grandfather Jo Han-jun awoke from that dream and found that a stone statue of the Maitreya Buddha suddenly had appeared near the bridge. Over the years, this miracle created such an atmosphere that all those who passed that Buddha would get off their horses to offer a bow before proceeding on their way. The people of the village marveled at this sign from God and built a shelter over the statue so that it would not be exposed to rain or wind. On this foundation of devotion and loyalty, generations later, in the family line of Jo Han-jun, God sent my maternal grandmother, Jo Won-mo. We three women-Grandmother Jo Won-mo, her daughter (my mother), and I—all had a very deep Christian faith. We were also the only daughters born into our families over three generations. The providence to bring about the birth of God's only begotten Daughter on the Korean Peninsula was based upon countless conditions of devotion that started long ago with my ancestors Han Lan and Jo Han-jun and continued through the generations to this time. |
첫댓글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