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징계는 자비의 손길 잠21:7-13,
지난주에 이어서 잠언서를 통해 은혜를 기다립니다.
7절 “악인의 강포는 자기를 소멸하나니 이는 정의를 행하기 싫어함이니라”
“강포” ‘쇼드’는 ‘파멸시키다, 황폐화 시키다’라는 ‘슈드’는 ‘파괴적인 범죄 행위와 그 결과 발생하게 되는 황폐화된 상태를 모두 함축하는 명사입니다. 이 ’쇼드‘는 폭력 그 자체를 가리킴과 동시에 폭력이 폭력을 양산시켜서 전체적으로 완전히 황페됨을 지시하는 단어입니다. 또한 이어서 나오는 단어 “자기를 소멸하나니”‘예고램’ ‘까라르’는 ‘거칠게 질질 끌고 가다, 끌고 가다’라는 의미로서 악인의 ‘쇼드’ 강포는 전체적으로 완전히 황페시켜서 자신을 거칠게 질질 파멸로 이끌어가는 것을 말씀합니다.
시9:15절“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고 자기 맘대로 행하는 악인의 패역은 완전한 멸망에 빠지게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7절은 옳은 일을 행하기보다는 악을 지속적으로 행하기를 선택했던, 악인은 결국에는 모든 비난의 책임이 그들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언제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8절“죄를 크게 범한 자의 길은 심히 구부러지고 깨끗한 자의 길은 곧으니라” 여기서 ‘구부러지다’‘하파크’는 ‘부정하다, 간교하다’의 뜻인데 이 단어가 말하고 있는 의미는 ‘기회가 주어지면 악을 도모하는데 여념이 없는 악인의 습성’을 나타내는 있는 표현으로 ‘접시를 뒤집어엎다, 파괴하다, 방향을 돌리다’등의 의미로서 방향이 일정치 않아 뒤집어지고 파괴되는 등, 위태롭고 불안정한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을 정반대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법대로 산다는 것은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처럼 받아 들여서 적당히 거짓을 행하고 모사와 술수로 위기를 모면하는 삶이 더 쉽고 평탄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적당히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고 원하는 대로 승승장구하며 출세 가도를 달리는 자들이 있고 그들을 바라보는 자들이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들을 향해 예수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마7:13-14절“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우리 눈에는 넓어 보이고, 탄탄해 보이고, 올곧게 보이는 그 길이 그 인생을 파멸로 인도해 가는 지름길이라고 하시고 있습니다. 시125: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구부러진 길은 아닌가 점검해 보고, 지금이라도 구부러져 있다면 방향을 돌려 예수그리스도에게 향하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서 씻어 내고 곧게 펴는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9절“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 새번역“다투기를 좋아하는 여자와 넓은 집에서 함께 사는 것보다, 차라리 다락 한 구석에서 혼자 사는 것이 더 낫다” 했습니다. 여기서 움막은 ‘팔레스타인에서는 평평한 지붕 한 귀퉁이에 손님을 위한 침실을 자그마하게 짓는 것이 보통인데’ 아마도 이것을 염두에 둔 표현인 것 같습니다.
“엘리야가 그 여인에게 아들을 달라고 하면서, 그 여인의 품에서 그 아이를 받아 안고, 자기가 머물고 있는 다락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를 자기의 침대 위에 뉘어 놓고” 또 행10장에 보면 베드로도 지붕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사건을 보게 됩니다. 이런 옥상에 작은 방들이 다락으로 불러지고 있습니다. 9절에서는 큰집에서 여인과 싸우며 사는 것보다 작은 옥상방에서 혼자 사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행복은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주지하고 있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가난하고 척박한 환경에 살지라도 슬기롭고 지혜로운 배우자와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배우자에게 국한되지 않고 친구를 만날 때 직장 동료를 만날 때 적용되는 말씀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인격과 성품을 소유한 자를 찾고 만나서 배우자, 직장동료, 친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시101편 5-6절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로다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깨달아지면 아멘.
10절 “악인의 마음은 남의 재앙을 원하나니 그 이웃도 그 앞에서 은혜를 입지 못하느니라”
본절은 원문을 살펴보는 것이 더 이해가 잘 될 것입니다. ‘원하나니’‘이우웨타’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간절히 원하는 악한 마음을 말하고, 또 ‘남의 재앙’‘라으’는 ‘악’을 의미합니다. 다시 살펴보면 악인의 마음이 근본적으로 악을 향해 있고 악을 열망하며 무슨 행동을 하던지 그 모든 행동은 악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악인을 이웃으로 둔자는 아무런 은혜나 도움을 받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그 앞에서’‘뻬에나이우’는 직역을 하면 그의 눈 안에서 긍휼의 눈빛도 받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또한 이웃을 해롭게 할 목적으로 악을 애써 도모하는 자는 예외 없이 자신만을 생각하는 철저한 이기주의자들입니다.
11절“거만한 자가 벌을 받으면 어리석은 자도 지혜를 얻겠고 지혜로운 자가 교훈을 받으면 지식이 더하리라” ‘거만한 자’‘레츠’는 ‘입을 비쭉 거리다, 업신여기다’이며 스스로 잘난 체하며 남을 업신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또 ‘어리석은’‘페티’는 ‘단순하다, 속다’라는 뜻입니다. 영적이나 육적이나 미숙하여서 혹은 단순하여서 남에게 잘 속아 넘어가는 것을 어리석은 자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앞의 거만한 자들과는 달리 근본적으로 성품이 악하고 패역한 자들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만한 자가 벌을 받으면 어리석은 자도 지혜를 얻겠고’ 이 말씀은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엄하게 심판하시는 목적이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고 어리석은 자들을 깨우쳐서 회개시키려는 것과 동시에 죄악에 휩쓸리기 쉬운 연약한 자들로 두려움으로 근신하고 자중하여 구원을 이루시려는 이중적인 의도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검은 양날선 검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속에 모델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가려고 출애굽 할 때에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오자 그들을 물속에 수장 시키면서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하시고 경각심을 주셨습니다. 또 여리고서에 들어가서 아이성을 칠때에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물건을 감춘 아간도 또 모세를 대적했던 고라와 다단일행도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심판을 하셨습니다. 그 일들은 곧 사방에 퍼져서 본 사람이나 들은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시고 하나님께 구원하여달라고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수2:9-14, 9:3-26)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면서 하나님이 참 자비하심이 없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태인들이 나찌 수용소에서 죽어가면서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가 라고 질문을 했다고 하듯이, 또 노회 목사님이 운전을 하다가 눈길에 미끄러져서 안전사고가 나고 차 안에 동승을 했던 권사님이 다치고, 이어서 아들이 세상을 떠나자 성도들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하나님을 믿는데 목사님인데, 하면서 교회를 떠나가더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세계를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고전10:11절을 보면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보면서 우리의 마음이 교만하거나 걍팍하게 되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 합니다. 또한 앞서간 자들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잘못된 일이 있으면 즉시 돌이키고 죄의 자백도 해서 늘 겸손의 자리에 순종하는 모습을 잃지 않도록 순종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는 많은 사람들을 돌이키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죄를 꾸짖을 수 있어야 합니다. 딤전5:20절“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 하셨습니다.
13절“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이 말씀은 의도적으로 듣지 않으려는 행동입니다. 행7:57절에 보면 이 부분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본절에서는 가난한 자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못함이 아니라 듣고도 모른 체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돕기를 거절하거나 외면하면 반대로 내가 어려움에 빠질 때에 동일하게 외면 당할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의 법칙이나 하나님의 법칙은 같은데 그것은 심은 대로 거두기 때문입니다.(갈6:7),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으시기 때문입니다.(계22:12) 좋은 예가 눅16장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입니다. 부자가 지옥에 가서 혀끝에 물 한 방울 적셔 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씀합니다. 25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이 말씀은 자비를 나타내지 않는 자는 자비를 얻을 수 없다는 진리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눅 16:19-31),
이 땅에서는 영원한 부자도 없고 영원한 권세자도 없습니다. 역사를 보면 부강한 나라도 기울고 권세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화무십일홍, 세무십년영 이란 말이 생겨난 것일 것입니다. 야고보는 말씀합니다. 2:13절“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긍휼을 베풀기를 거절한 자들은 마지막 날에 그곳에 설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심판대입니다. 고후5:10절“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아멘.
이제 마치려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가난하고 외롭게 소외당한 이들을 외면하거나 무관심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말 속담에 콩 한쪽도 나눈다는 말이 있습니다. 힘들고 고통을 당하는 자들을 돌아보면 그것이 주님을 섬긴 것이라 하셨습니다. 마25:34-36절“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눅6:38절“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으로부터 넘치는 칭찬과 상급을 받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으로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의정부 등대지기 하늘산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