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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예언을 선포하는 하나냐(1-4)
거짓된 세상에서 진리를 품고 살아가는 삶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성도는 진리를 따라 살아가다가 손해를 보거나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거짓된 이치를 따라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참 예언자 예레미야도 오늘 그런 생활을 만났습니다.
1이 해, 유다 왕 시드기야의 즉위한지 오래지 않은 해 곧 사년 오월에 기브온 앗술의 아들 선지자 하나냐가 여호와의 집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 앞에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2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여 가라사대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3내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이곳에서 바벨론으로 옮겨간 여호와의 집 모든 기구를 두 해가 차기 전에 다시 이곳으로 가져 오게 하겠고 4내가 또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을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는지라 5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집에 선 제사장들의 앞과 모든 백성 앞에서 선지자 하나냐에게 말할쌔 6선지자 예레미야가 말하되 아멘, 여호와는 이 같이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네 예언대로 이루사 여호와의 집 기구와 모든 포로를 바벨론에서 이곳으로 다시 옮겨오시기를 원하노라 7그러나 너는 이제 내가 네 귀와 모든 백성의 귀에 이르는 이 말을 들으라 10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취하여 꺾고 11모든 백성 앞에서 말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두 해가 차기 전에 열방의 목에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이 같이 꺾어버리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 길을 가니라(1-11)
선지자 예레미야가 전한 예언은 유다 사람들에게는 듣기 거북스러운 내용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비유를 맞추는 거짓스러운 사람들은 자칭 선지자가 되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귀에 달콤한 내용으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계속해서 유다가 망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레미야를 거짓 예언자로 내몰며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1) 예언자 하나냐의 구원 예언(1-4)
주변 나라들의 사신들이 예루살렘에서 모임을 가진 해에 예레미야와 하나냐가 대결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다스리기 시작한 지’는 문자적으로는 ‘통치 처음에’로 통치 원년이나 초기를 가리킵니다. 통치 초반이 다시 ‘사 년 다섯째 달’(주전 594년 7/8월)로 구체적으로 제시됩니다. 51:59에 의하면 시드기야 왕은 통치 제 4년에 (달은 나오지 않음) 사절을 이끌고 바벨론으로 올라갑니다. ‘달’의 언급은 매우 이례적인데, 아마도 17절의 ‘그 해 일곱째 달’과 관련된 것 같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상대역으로 기브온 앗술의 아들 선지자 하나냐가 소개됩니다. 하나냐는 아마도 예루살렘 성전 소속의 예언자였던 것 같습니다. 사건의 장소로 ‘여호와의 성전’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의지를 대변하는 두 예언자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서로 충돌합니다. 27:16의 경우처럼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이 청중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냐 역시 예레미야처럼 사자의 전언 양식(‘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일러 말씀하시기를’)을 사용하며 신탁을 선포합니다(2;참조. 26:16). 예언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사자의 전언 양식은 이들의 선포에 신적 기원(정당성)을 부여해주는 기능을 담당합니다. 하나냐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포한 말씀은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포한 말씀과 완전히 충돌합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고 그를 섬기는 것만이 살길임을 선포하고(27:12,17), 하나냐는 여호와께서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었다고 선포합니다(2).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남아 있는 기구마저 바벨론으로 옮겨질 것을 선포하고(27:19-22), 하나냐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빼앗아 바벨론으로 옮겨간 성전의 모든 기구가 2년 안에 제자리로 되돌아 올 것을 선포합니다(3). 예레미야는 사로잡혀간 고니야가 유배지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을 것을 선포하고(22:24-30), 하나냐는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것을 선포합니다(4). 예레미야는 칠십 년(25:11-12) 또는 세 세대(27:7)의 바벨론 지배를 선포하고, 하나냐는 바벨론 왕의 멍에가 2년을 넘지 못할 것을 선포합니다. 주전 597년의 재앙을 경험한 자들에게 예레미야는 더 큰 재앙을 선포하고, 하나냐는 자기 이름(‘여호와께서는 자비로우시다’)에 걸맞게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예레미야와 하나냐가 선포한 예언은 서로 조화될 수 없는 것으로, 누군가 한 사람은 거짓을 예언한 자가 됩니다.
(2) 예언자 예레미야의 응수(5-9)
예언자 하나냐가 그러했던 것처럼(1) 예레미야도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예언자 하나냐에게 말합니다(5). 예레미야는 내면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반격합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의 멸망은 예레미야에게 결코 좋은 소식일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도 개인적으로는 하나냐의 구원 예언이 성취되어 빼앗긴 성전 기구와 사로잡혀간 동포들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당연히 더 좋습니다(6절; 참조. 29:10; 33:14). 예레미야도 바라지 않지만, 유다의 멸망은 여호와의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예언자라면 개인 기대를 내려놓고 그분의 결정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냐의 구원 예언에 맞서 예레미야는 역사적 입장에서 심판 예언의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예언 전통을 심판 예언자들에게서 찾습니다. ‘나와 너 이전의 선지자들이 예로부터 많은 땅들과 큰 나라들에 대하여 전쟁과 재앙과 전염병을 예언하였느니라’(8). 역사적으로 볼 때, 예레미야의 심판 선포는 예외적 현상이 아닙니다. 이미 이전의 예언자들이 나라들과 왕국들에 심판을 선포했고, 선포된 예언은 그대로 성취됐습니다. 이스라엘의 예언 역사는 구원 예언자들이 아니라 심판 예언자들의 정당성을 증명해줍니다. 구원 예언자는 선포된 구원 신탁이 실제로 이뤄질 때만 여호와께서 보낸 예언자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9). 예레미야는 아직 하나냐를 거짓 예언자로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냐가 여호와에 의해 보냄을 받은 예언자로 인정받으려면 먼저 그가 선포한 예언이 성취되어야 합니다.
(3) 하나냐의 표적행위와 예레미야의 반응(10-11)
바벨론의 지배를 표적 행위로 연출한 예레미야에(27장) 맞서 하나냐도 같은 표적 행위로 구원 예언의 확실성을 과시합니다. 하나냐는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참조, 27:2) 빼앗아 부숴버립니다(10). 예레미야는 목에 멍에를 메고 바벨론 왕을 섬기는 것만이 살길임을 예언하고, 하나냐는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벗겨내 부수고 여호와께서 민족들의 목에서 바벨론의 멍에를 꺾어버리기로 하셨다고 예언합니다(11a). 두 예언자가 언어를 넘어 행위에서도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하나냐가 단지 예레미야를 모독하거나 무시하려고 멍에를 빼앗아 부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대립적 표적행위는 예레미야가 같은 표적 행위로 선포한 심판 예언을 무력화하려는 시도였습니다. 두 예언자의 대결은 배경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7절에서 예레미야가 ‘모든 백성의 귀’에 말한 것처럼 하나냐도 ‘모든 백성 앞에서’ 말합니다. 1절과 5절에 나오는 ‘제사장들’이 동일하게 탈락합니다. 도발적으로도 보이는 하나냐의 표적 행위에 예레미야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의 길을 가니라’(11b). 두 예언자의 대결이 끝을 맺지 못하고 끝납니다. 예레미야의 행동은 하나냐에 대한 무시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냐를 아직 여호와의 예언자로 인정하고 있음을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냐가 자신과 다른 신탁을 선포하지만, 그 신탁이 여호와로부터 주어졌을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습니다(참조. 4:10). 예레미야는 하나냐가 대변하는 구원 예언의 진정성을 의심하지만, 확정적인 평가는 보류합니다. 예언자 하나냐와 예언자 예레미야 모두 여호와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기에 그분의 결정만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습니다.
거짓 예언자 하나냐(12-17)
거짓 예언자들이 보여 주는 특징은 다른 사람의 주장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어떤 소통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로지 자신만이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계시를 받았다는 주장을 접하면, 우리는 이러한 배타적인 가르침이 사람들을 미혹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야 합니다.
12○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꺾어 버린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기를 13너는 가서 하나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나무 멍에들을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들을 만들었느니라 14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쇠 멍에로 이 모든 나라의 목에 메워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하였으니 그들이 그를 섬기리라 내가 들짐승도 그에게 주었느니라 하라 15선지자 예레미야가 선지자 하나냐에게 이르되 하나냐여 들으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네가 이 백성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도다 16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너를 지면에서 제하리니 네가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음이라 네가 금년에 죽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더니 17선지자 하나냐가 그 해 일곱째 달에 죽었더라(12-17)
거짓된 세상에서 진실하게 흘리는 우리의 눈물을 아십니다. 거짓된 세상에서 흘리는 우리의 눈물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거짓 평안이 아니라 참 평안을 반드시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1) 예레미야에게 힘한 여호와의 말씀(12-14)
예레미야와 하나냐 사이의 팽팽한 대결은 여호와의 개입으로 해결됩니다(12).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을 주어 하나냐가 당신의 의지에 반하여 예언했음을 알려주십니다. 예레미야의 표적 행위에 맞서 그의나무 멍에를 부순 하나냐의 표적 행위가 다시금 여호와의 반격으로 무력화됩니다. ‘네가 나무 멍에들을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들을 만들었느니라’(13).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을 보여주기 위해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빼앗아 부숴버린 하나냐의 행동이 바벨론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만듭니다. 부서진 나무멍에 대신에 무겁고 부술 수 없는 쇠 멍에가 씌워집니다. 유다를 포함한 모든 민족이 쇠 멍에를 메고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겨야 합니다(14a). 여호와께서 민족들뿐만 아니라 들짐승까지도 바벨론 왕에게 넘겨주십니다(14b; 참조. 27:6).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예레미야가 하나냐를 다시 찾아가서 그와의 대결을 마무리 짓습니다.
(2) 심판의 선포(15-16)
예레미야는 하나냐를 여호와께서 보내지 않으셨음에도 그분의 이름으로 예언해 백성에게 거짓을 믿게 한 거짓 예언자로 고발하고(15) 그에게 멸망의 심판을 선언합니다. ‘내가 너를 지면에서 제하리니 네가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음이라 네가 금년에 죽으리라’(16).
(3) 심판의 성취(17)
예레미야의 심판 선고에 따라 하나냐가 ‘그 해 일곱째 달’ 죽습니다(17). ‘그 해 다섯째 달’에 있었던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대결이 두 달 후에 하나냐의 징벌적 죽음으로 끝납니다.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보내신 참된 예언자임이, 곧 그가 선포한 바벨론 왕의 멍에가 여호와의 의지에 속함이 입증됩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세상의 기준과 가치관으로 말씀을 해석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기준은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고 만족시키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리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추구하겠다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모함과 간절함이 있어야 거짓된 가르침에서 자기 영혼을 정결하게 지켜 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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