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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 피랍 증후군>의 줄거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목적은 나를 납치하기 위함입니다. 교인 즉 성도란, 십자가에 의한 피랍자(被拉者)입니다. 세상에 살며 있는 나를, 세상 안에서, 세상으로부터 격리 감금하기 위해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지요. 그래서 우리가 제대로 믿으면 반드시 십자가에 의한 피랍 증후군이 나타나게 됩니다. 세 가지 시험에 대한 면역력입니다.
십자가 피랍 증후군
(마태복음 4:1~25)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 피랍 증후군>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십자가 피랍 증후군’
피랍(被拉)이란 납치를 당하였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피랍 증후군이란 십자가에 의해서 납치를 당했을 때에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마귀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으시고 이기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서 납치를 당하게 되면 예수님이 이기신 세 가지 시험에 대해서 강한 면역력을 가지게 됩니다.
십자가는 마음의 납치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을 현재 삶의 현장으로부터 납치해서 격리하고 감금하는 믿음의 사건입니다. 성도는 십자가에 의한 피랍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세상에 사는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격리하고 감금하기 위해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다면 삶의 현장에서는 반드시 십자가에 의해서 납치된 증상이 나타나야만 합니다.
그 대표적 증상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는 세 가지 시험에 대한 면역력입니다. 예수님이 겪으신 세 가지 시험을 이기는 있는 힘이 우리에게도 생긴다는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세상으로부터 납치되어 격리되고 감금되는 동시에 예수님처럼 마귀의 시험을 이겨내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십자가를 외면한다면 항상 마귀의 시험에 결려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의학용어로 감금증후군(locked-in syndrome)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락트인(locked-in)은 ‘열쇠, 자물쇠, 잠그다, 가두다’라는 뜻입니다. 의식은 살아있는데 운동신경이 손상되거나 끊어져서 전신을 움직일 수 없는 마비상태를 의미합니다. 분명히 주변을 인식하고 있지만 외부의 어떤 자극에도 반응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감금증후군 환자가 있는 방에 도둑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도둑이 들어온 순간 누워있는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그런데 이내 환자가 잠든 것도 아니고 깬 것도 아니고 가만히 있기만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제 도둑은 안심하고 방에 있는 패물과 귀중품을 모두 긁어갑니다. 환자는 눈으로 이 모든 장면을 빤히 보면서도 꿈쩍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감금증후군은 몸이 접하고 있는 외부세계와 교감이 끊어져서 몸이라는 감옥에 갇혀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이 이와 닮은 점이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할 때에 마음은 감금되고 세상과 격리되게 됩니다. 다만 감금증후군과 다른 점은 감금과 격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써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납치된 사람들의 마음은 십자가를 기준으로 세상에 대해서는 격리되고 감금되었지만 하늘에 대해 교감하기 시작합니다. 하늘과 교감하면서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이 모습을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서 볼 때에는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갈릴리 바다의 풍랑 사건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조각배를 타고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제자들은 죽겠다고 아우성을 쳤지만 예수님께서는 깊은 잠에 빠지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세상과 격리되어서 하늘의 평안을 누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수많은 고난과 고초를 당하면서도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마칠 수 있었던 원동력 또한 마음이 이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하늘의 평안을 누렸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8절에서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라고 하였던 것과 같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에서는 좌절하고 낙심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들의 마음은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있기에 오히려 하늘의 평안을 누리면서 기뻐합니다.
정리해봅니다.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과 하나 되는 자리가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인정할 때에 우리의 마음은 세상으로부터 납치되어서 격리되고 감금되면서 천국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 결과 예수님이 보여주셨듯이 삶에서 나타나는 세 가지 유형의 시험에 대해 이겨낼 수 있는 면역력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 동안 풀 한 포기 없는 광야에서 금식을 하셨습니다. 광야는 물도 없고 햇빛을 피할 곳도 없기에 예수님의 육체는 상상을 초월하는 한계상황에 처해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귀는 세 가지로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3절을 보면 첫 번째 시험이 나타납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라고 대답하심으로써 첫 번째 시험을 이겨내십니다.
일반적으로 이 시험은 예수님께서 떡으로 대표되는 육체의 유혹을 이겨내신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말씀의 초점은 떡으로 대표되는 수단이 아닌 삶 자체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해하기 쉽도록 이 장면을 재구성해봅니다. 마귀가 “네가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인간의 몸을 입고 있는 이상 떡과 물을 마시지 않으면 이제 곧 죽게 될 것이다. 그러니 살고 싶으면 하나님의 권능으로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는 것이 어떠하냐?”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귀여. 너는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와 똑같이 지금도 사람의 삶과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짐승과는 다르다. 짐승은 먹이를 먹음으로써 살아가지만 사람은 몸이 살아 있다고 해도 그 상태만으로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일 때에야 비로소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무리 사십 일 금식 끝에 육체가 굶주렸을지라도 나의 행동이 육체의 요구에 반응한다면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설령 떡을 만들지라도 몸의 요청에 반응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떡을 만들라 하실 때에 비로소 만들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말씀에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에 비로소 살아있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일찍이 마귀는 아담과 하와에게 죽음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제시함으로써 유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죽음은 바로 하나님과의 교감이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하나님과의 교감은 상관없이 육체가 살아있는 것만을 살아있는 것이라고 여기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마귀의 간교를 정확하게 지적하시며 살아있음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십 일을 금식하면 육체가 떡을 갈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육체의 요청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하셨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예수님의 사십 일 금식과 같은 급박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회사가 부도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면 사장님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생각하고 불철주야 뛰어다니게 됩니다. 이미 마귀의 시험에 걸려든 것입니다. 이것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죽은 자의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살아있다면 우리의 마음은 십자가를 통해 회사의 부도라는 문제에 대해 격리되고 감금되어야만 합니다. 직접적으로 마음이 문제에 반응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결코 믿음이 아닙니다. 마귀가 바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 후에 하나님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우리의 마음은 세상으로부터 납치되고 격리됩니다. 회사가 부도 위기에 처했을지라도 마음은 하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이때에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방치하지 않으시고 지혜의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자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있는 자입니다. 이 세상을 몸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보다 강렬한 시험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오해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뜻과 계획이 있음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전제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시험과 연결이 됩니다.
두 번째로 5~6절을 보면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7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대한 해석에 오해가 많습니다. 거룩한 성과 성전 꼭대기에 서는 것을 세상에서의 명예나 권력에 대한 욕구의 상징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시험에 대해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시험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나는 시험관이고 하나님이 수험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가 내는 시험 문제를 잘 풀어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연관하여 출애굽기 17장을 보면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리는 곳에서 선민들이 물이 없어 하나님께 불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7절을 보면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고 하였습니다. 선민들은 이미 출애굽과 홍해의 기적을 목격한 뒤였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의심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중에 살아계신 것이 맞는가? 정말로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러실 수는 없으니 하나님은 안 계신다.”라는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시험관의 입장이 되어서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나를 사랑하신다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증명해보시오.”라고 시험 문제를 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삶의 현장에 살아계신다는 사실이 마음에서 첫 번째로 의식되지 않을 때에 하나님을 시험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돈을 첫 번째로 의식하게 된 마음은 돈을 통해 하나님을 시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를 사랑하신다면 돈을 벌게 해주셔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라는 대로 돈이 벌리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느낌을 강렬하게 받습니다. 그러나 돈이 벌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의심하고 부인하게 됩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 내 마음이 하나님보다 먼저 붙은 대상이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에게 시험 문제가 됩니다. 목사님들도 목회의 부흥이 마음의 첫 번째 대상이 된다면 하나님을 시험하게 됩니다. 목회가 뜻대로 잘 되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 같고, 부흥이 일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은 것 같이 느낍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의 일화를 하나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결혼해서 교육전도사 시절을 거치고 목사로 사역하게 될 때까지 약 15년의 기간이 걸렸는데 그 동안 아이가 없었습니다. 정작 집사람과 저는 사는데 불편함이 없었지만 주변의 인식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교인들에게 축복기도를 해주어도 아이를 못 낳는 목사의 축복기도는 의미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렇기에 결혼식이 있으면 몰래 다른 교구 목사님에게 결혼식의 주례를 맡깁니다. 아이를 못 낳는 목사가 주례를 하면 아이를 낳을 수 없으리라는 미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제가 느낀 것이 있습니다. 저는 목사로써 분명히 교인들 앞에서 힘차게 하나님을 전파하며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는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 계신가 하는 의심이 생겼습니다.
이 세상에 마음이 붙어있다면 하나님을 시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사랑하심을 증명하고자 요구하게 됩니다. 마음에서 건강과 장수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내가 건강해야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낍니다. 몸이 조금이라도 아프면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생겨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돈에 붙은 사람은 돈을 벌 때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강렬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마귀의 시험에 걸려 넘어진 것이고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마귀가 기뻐하며 펄쩍 뛸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반드시 십자가에 의해 납치되어야만 합니다. 세상과 격리되고 감금되어 하나님을 첫 번째로 의식하지 않는 한 반드시 이 두 번째 시험에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사랑하심을 증명하고자 문제를 내는 시험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시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험으로 8~9절에서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10절에서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대답하십니다.
천하만국의 영광이란 알렉산더 대왕이나 칭기즈칸처럼 대제국을 건설하는 것도 아니고 로마나 중국의 황제들처럼 호사스러움을 누리는 것도 아닙니다. 이 시대의 대통령이나 장관들처럼 명예를 얻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꼭 갖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천하만국의 영광을 받는 대상입니다. 무대에서 주인공이 조명을 받듯이 나의 마음에서 어떤 대상이 주인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마음에서는 고급 외제차가 영광을 받습니다. 지나가는 외제차만 보면 “나도 저 차를 가졌으면”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마음에서 외제차가 천하만국의 영광을 받게 된 것입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는 것들 중에는 갖고 싶은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가지고자 소망하는 것이 이미 시험에 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 납치당해서 이 세상에 대해 격리되고 감금된 마음은 무엇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것일까요? 이때에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10절에서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경배는 감탄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서 그것만이 보이고 그것만을 갖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섬김은 그것을 실제로 갖기 위해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재물을 대표적인 예로 드시며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납치되지 않고서는 반드시 세상의 어떤 대상을 소망하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 추구하게 되면 그대로 마귀의 시험에 넘어가게 됩니다. 마음에서 영광을 받는 대상이 생길 때에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마음이 피랍된 상태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마음이 피랍된 상태에서는 하나님만을 소망하게 됩니다. 하나님만 먹고 싶어 하고 하나님만 가지고 싶어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루고 싶어 하게 됩니다.
이 상태가 바로 시험을 이기는 모습입니다. 17절을 보면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비로소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십자가에 납치되어서 감금증후군과 같은 상태가 될 때에 세 가지 시험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도 우리가 할 일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계속해서 주어집니다. 우리는 구원받고 십자가에 마음이 납치당한 자답게 이 시험을 이겨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봄을 통해 세상에 반응하는 대신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말씀을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 할 수 있습니다. 또 세상의 어떤 대상에도 마음이 매이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붙든 마음으로 세상을 살 때에 구원받은 자의 모습으로 세 가지 시험을 이겨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더 이상 마귀가 노래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마귀는 세 가지 시험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납치됨으로써 세 가지 시험을 거뜬히 이겨낼 수 있고 마귀가 땅을 치며 통곡하는 오늘 하루를 살아가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삶의 현장인 가족들 앞에서 직장에서 시장에서 학교에서 마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이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 너머로 납치되고 격리되게 하여 주셔서 마귀가 세 가지 시험을 가지고 올 때에 거뜬히 이김으로써 마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질 정도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