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양윤영(梁允永) - 천국은 놀라운 음악의 세계 1. 유년시절의 꿈과 신앙입문
1 유년기를 보낸 경의선 변의 평안북도 선천은 나에게 기독교 신앙의 자연스러운 성장의 분위기가 돼 주었다. 우리 집안은 크리스찬 가정이었고, 3.1운동의 33인 중 한 분이신 양전백(染旬伯) 목사가 바로 백부이시다. 거기다 내 고향인 선천은 제2의 예루살렘이라 할 만큼 기독교가 깊이 전파돼 있었다.
2 그래선지 이웃에는 외국의 선교사 가족들이 많았는데 추수감사절이나 부활절 및 성탄절 등의 기독교의 예식이 우리 집에도 생활 속에 무리 없이 배어 있기도 했다. 내가 성악을 하게 된 것도 기독교 신앙 탓이었다.
3 선교사 집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선교사 집 담 밑에서 가족들의 합창과 피아노의 화음에 도취되곤 했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4 보통학교와 유년 주일학교에서 특출하게 노래 솜씨가 인정됐는데 이것이 끝내 성악가로서의 길을 걷게 한 동기가 되었다. 평양승의학교를 졸업한 나는 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내 생활이 정착된 것은 아니었다.
5 기필코 미국으로 유학을 가 성악가로 대성하고 싶었다. 그러나 미국행이 여의치 않아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제2차 대전이 일어나는 바람에 동경에 머물러 성악 공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3년 동안 성악 공부를 하고 귀국, 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으나, 곧 교직을 그만두고 결혼을 하고 말았다.
6 남편은 은행지점장. 그런대로 생활에 불편함이 없었던 탓으로 전시(時戰)였지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할 수가 있었다. 감사와 은혜의 생활, 나는 항상 하나님이 곁에서 지켜주심을 체험할 수가 있었다.
7 해방을 맞이하고 황해도 해안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장(長)자 붙은 인사의 목 하나에 백만 원 현상금이 걸렸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어 나는 서둘러 서울로 올라와 경기여고에 취직하고 남편을 서울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했다. 6.25 사변 때도 마찬가지였다. 서울이 저들의 수중에 들어가고 미처 피난 가지 못하고 남아 있던 사람들 중에 고난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지만, 우리도 많은 시련을 겪었다.
8 어느 날은 북괴군이 기독교인을 조사한다고 하기에 나는 피하지 않고, 내 이름을 써 내라고 반장에게 말한 일이 있었다. 북괴군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내가 기독교인인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 나는 그때 하나님의 섭리를 위해 내가 순교라도 당해야 한다면 당할 결심이었던 것이다.
9 그런데 그때가 바로 서울수복 3일 전이었다. 그날 밤 남편은 예감이 이상하다면서 방공호에 숨어 있었는데 나는 12시쯤에 괴뢰군에게 붙들려 삼청공원으로 해서 파출소로 끌려갔다. 그들은 내가 “‘여성 동맹’ 장부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고해바치려고 펴봤다”라고 공갈하면서 심문했다.
10 이미 나는 각오를 하고 있었으나, 어린 자식들이 자꾸 걸렸다. 안국동 파출소, 종로경찰서에서도 같은 심문을 받았다. 다행히 이날 같이 끌려왔던 여자 한 분이 괴뢰군에게 협조하고 있는 젊은 청년과 인척 간이어서 그가 풀려나는 바람에 나도 풀려날 수 있었다. 후에 들은 말로, 이날 삼청공원과 종로서에 붙들려 간 기독교인들은 모두 총살 당했다고 했다.
11 그러고 보면 나는 또다시 천행으로 광명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서울 수복 후, 내가 부역혐의로 경찰서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내가 음악 선생이었던 탓으로 소격동에서 피할 수 없는 사정으로 저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노래를 가르쳐 준 일 때문이었다. 아마 이때 붙들려 갔다면 십중팔구는 징역살이를 했을 것이다.
12 그런데 이번에도 하늘의 도우심인지, 내게 ‘기독교인 조사’ 때 알려 주었던 반장이 동네 통반장과 이웃들을 찾아다니면서 ‘기독교인 조사’ 때 순교까지 불사했던 양 선생이란 말을 내세우며 변호해 주어 무사히 또 한 번의 위기를 모면하였다.
13 전쟁은 나에게 많은 시련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실감하게 한 기간이었다. 또한 많은 생각과 함께 자신을 돌이켜 볼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의 잔악성과 만행,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눠야 하는 비인도적인 현실, 그리고 파리처럼 여기저기 거리에 널려 있는 주검들, 이 혼돈 속에서 나와 우리 가정이 무사하게 살아남아 있음은 실로 하나님의 가호가 아닐 수 없다.
14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나는 새롭게 부활된 삶을 위해 나머지 인생을 하나님 뜻만을 위해 헌신할 것을 굳게 다짐했다. 교회에서 다시 성가대를 이끌어 갔고, YWCA 여학생 합창단도 조직했다. 그리고 이화여자대학, 숭실중, 숭의여중, 보성여중 등에서 음악을 지도하기도 했다.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