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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 희망 끊어야 저주도 끊긴다>의 줄거리:
이 세상 삶의 조건과 환경이 변화하고 개선되리라는 희망이, 내게 임하여 있는 저주를 보호하고 유지하고 강화하는 효과를 낸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세상 변화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는 한 내 삶을 향하여 내뿜어지고 있는 저주의 기운은 사그라지지 않습니다. 미래 희망 대신에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가 임함을 체험해야 합니다.
세상 희망 끊어야 저주도 끊긴다
(누가복음 17장 20a절)
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세상 희망 끊어야 저주도 끊긴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상 희망 끊어야 저주도 끊긴다’
앞서 나병환자 열 명이 치유 받은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나병으로 상징되는 저주의 문제가 핵심 주제였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저주는 좋아하는데 가질 수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제까지 버리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소유의 문제를 다루어오셨습니다. 다만 지난 사건에서는 저주의 문제를 통해서 소유의 문제를 다루시며 접근법을 뒤집어서 가짐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저주는 좋은 것을 가지고 싶으나 가질 수 없고, 참으로 가져야 할 것을 가질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증상이 부족감과 결핍감입니다. 우리는 아담 이후로 저주받은 상태라고 말을 합니다만 도대체 그 상태가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해서 무지한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저주의 상태를 나병환자를 통해 드러내셨습니다. 정말로 좋다고 여겨지는 것을 가질 수 없는 상태가 저주이며, 이러한 저주의 상태에서는 부족함과 결핍감이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나고 또한 그로 인해 불만과 원망도 생겨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하는 진짜 좋은 분이시자 유일하게 좋으신 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입니다. 그러나 나병환자들이 인간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마음은 하늘로부터 격리되어 세상에 갇혀있는 상태입니다. 밀림을 마음껏 뛰어다니던 표범이 사냥꾼들의 올무에 걸려서 철장 우리에 갇히게 된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이라는 철장 우리에 갇혀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격리된 상태가 바로 저주받은 것입니다.
이 근원적인 저주의 상태에 대처하는 인간들의 마음과 태도나 방식은 극적인 차이가 납니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마음 채움의 문제가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정확하게 파악했던 사람은 저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마음 채움의 문제를 세상에 속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오해하였습니다. 그렇기에 똑같이 예수님을 만나고도 이들은 저주에서 또 다른 저주로 옮겨졌을 뿐 저주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었습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질문은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보편적이고도 뜨거운 토론의 주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로마 식민지하에서 민생이 피폐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성들은 메시아가 와서 나라를 독립시키고 다윗 왕국의 전성기를 재현하리라는 희망을 붙잡고 겨우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연결하여 나라가 독립하고 전성기를 이루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라 여기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바라는 일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이라는 라벨을 가져다 붙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람은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한편 메시아 대망을 가지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희망의 문제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임함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다만 간략하게 말씀드리자면 하나님 나라의 임함이란 유대인들이나 바리새인들이 기대했던 것과 같은 삶의 조건이나 상황의 변화가 아닙니다. 누가가 성령의 감동을 통해 열 명의 나병환자가 치유 받은 사건 뒤에 이 문답을 기록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내린 나병으로 상징되는 저주가 끝나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저주는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지 못하여 부족감과 결핍감이 느껴지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으로 저주가 끝난다는 것은 마음에 충만함과 만족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라고 질문했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었으나 이 질문을 본질적인 측면에서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모든 삶의 영역에서 어떤 부족함이나 결핍감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는 때가 언제 오게 됩니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을 체험하게 되면 절대로 결핍감이나 부족감을 느낄 수가 없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저주에서 빠져나오기 때문입니다. 저주에서 빠져나온 사람의 대표적 특징은 마음의 만족함입니다. 만족함이 지속되기에 기쁨이 주어지고, 기쁨이 있기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평강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기에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에 대해 부족감이나 결핍감을 느낀다면 실제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저주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오해해서 안 되는 점은 부족감과 결핍감의 해소는 결코 환경의 변화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로 동양사상이나 종교에서는 인격적 수련이나 마인드컨트롤을 통한 자족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이란 이런 수련의 결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도 자족이라는 말은 등장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에서 11~12절을 보면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이어지는 13절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와 연관되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자족이란 동양사상에서 말하는 수련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체면을 중시하여 자족의 행세를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수련의 결과로 주어진 자족도 아니며 자족의 행세 또한 아닙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환경이 주어지더라도 마음이 환경을 떠나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안으로 들어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다양한 기적을 행하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떤 환경이 주어지더라도 만족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이나 유대인들처럼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질 환경의 변화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환경 즉 삶의 조건은 내가 희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경에는 손가락 끝 하나 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주어지는 대로 받는 것입니다. 다만 사도 바울이 몸이 처한 환경에 마음을 머무르게 두었던 것은 아닙니다. 상황이나 조건 혹은 환경이 바뀌기를 원하는 대신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님 안으로 도망가듯이 마음을 환경에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마음을 붙잡고 부활의 자리로 가십니다. 이제 마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힘입어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도달하게 되고 하나님으로 채워지게 되는 만족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신비하고도 기이한 현상을 처음 마주한 때가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현장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어가는 극한의 환경에서도 하나님으로 충만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육체의 죽음 앞에서도 부족감과 결핍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저주에서 빠져나온 상태이고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주어지는 절대평강의 상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신비한 상태를 경험하였고 자신의 삶에서도 생활화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잘못도 없이 돌에 맞아 죽어가는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현장이야말로 저주받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저주는 오히려 마음에 살기가 등등하여 스데반 집사님을 죽음으로 몰고 가던 사울이라는 청년에게 임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은 저주의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저주는 눈에 보이는 삶의 환경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삶이 아무리 열악해서 거지 나사로와 같은 상황이 될지라도 진짜 저주는 거지 나사로가 아닌 부자에게 임하고 있었음을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 결국 부자는 그 저주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로 음부로 가게 되었고, 절대 궁핍의 환경 속에서 살던 거지 나사로는 저주를 빠져나와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으로 만족을 구한 결과 낙원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어렵다고 하시는 분들의 70~80% 이상은 처해 있는 삶의 조건이 변화할 것에 대한 희망의 잔재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현재 상황이 바뀌고 개선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해서 죽고 부활의 자리로 가는 세상 탈출은 불가능합니다. 표범이 철장 우리에 갇힌 것처럼 나의 마음이 세상이라는 우리에 갇혀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이 세상 변화에 대한 조금의 희망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저주에서 탈출은 불가능합니다.
희망은 근원적 저주를 우리에게서 가려버립니다.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 나라의 기대는 말씀드린 대로 세상 변화에 대한 희망이 핵심이었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사건들을 일으키며 로마 식민지로부터의 독립이 일어날 것이라 기대하였습니다. 이방민족들 위에 우뚝 섰던 다윗 왕국의 전성기를 기어코 재현하리라 기대하였습니다. 이러한 세상 상황의 변화를 기대하는 희망이 메시아 대망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기에 바리새인도 유대인들도 저주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들의 바람과는 반대로 AD.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깡그리 멸절시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만큼 민족과 국가 단위로 강렬한 희망을 가지고 있던 집단은 없었을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개벽이 일어날 것이고 처한 환경에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바람은 인류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민족적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처럼 철저하게 멸망해버린 예도 드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4장 2절에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후의 유대인들은 다윗 왕국의 재현을 이루기는커녕 2000년 동안이나 온 세계를 떠도는 유랑민으로 전락합니다.
이 세상에 대한 희망이 이토록 무섭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이를 잘 드러내는 비유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변화의 희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멸망은 철저하고 근원적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갇힌 자로서의 희망에서 빨리 빠져나오지 않으면 멸망은 피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희망이 무서운 이유는 말씀드린 대로 근원적 저주를 숨기기 때문입니다. 근원적 저주에서 빠져나올 기회를 영원히 매장시켜 버릴 수 있습니다. 근원적 저주의 실상을 깨달으면 빠져나올 마음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세상 희망은 이 저주의 실상을 가리기에 깨달음도 생기지 않습니다.
이 근원적 저주는 마음의 공백을 가진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인간 이외의 동물들은 마음의 공백을 갖도록 지음 받지 않았기에 이러한 저주에 해당되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마음의 공백을 갖도록 지음 받았기에 채워짐을 추구하게 됩니다. 채워지지 않으면 존재가 불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채움으로써만 인간답게 될 수 있습니다. 본래 인간은 마음의 공백을 하나님만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원죄로 인해 하나님과 격리되는 저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음에서 생기는 근원적 부족감과 결핍감의 원인을 왜곡시켜 세상에서 찾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를 갖지 못해서 마음에 부족감과 결핍감이 생겨난다고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 근원적 저주가 어떻게 숨겨지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장 흔한 예가 돈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돈이 없으면 부족감과 결핍감을 느낍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건강이 없을 때 부족감과 결핍감을 느낍니다. 부모들은 자녀가 형통하지 못할 때 부족함과 결핍감을 느끼고, 사장님들은 사업이 안 풀릴 때 부족함과 결핍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이유들은 부족감과 결핍감의 원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사탄에게 속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마음에 부족감과 결핍감의 이유를 돈이 없어서, 건강하지 못해서, 자녀가 형통치 못해서, 사업이 안 되기 때문이라고 속이고 있습니다. 아담이 속은 것이 우리에게도 유전되어 지속되고 있습니다.
근원적 저주의 이유는 하나님과의 격리입니다. 사탄의 유혹에 의해 이 저주의 근원적 이유는 가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의 마음은 여전히 비어있기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이제 인간은 한 수단을 통해서 고통을 이기고 버티고 극복하려 합니다. 그 수단이 바로 희망입니다.
내가 부족감과 결핍감을 느끼는데 그 이유가 돈이라고 여겨집니다. 이것이 잘못된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한 채 돈을 벌어보겠다는 희망을 품게 됩니다. “언젠가는 돈을 가질 것이다.”라는 희망의 형태로 마음을 채움으로써 급한 대로 부족감과 결핍감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안 계셔서 생기는 근원적 부족감과 결핍감을 세상 것으로 대체시켜서 희망하게 하는 것이 마귀의 전략입니다. 부족감과 결핍감에 짓눌려있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희망을 통해 그것을 넘어섬으로써 근원적 저주는 가려지고 저주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삶이 굳혀지게 된 것입니다.
사탄의 역사로 만들어진 세상 희망은 저주받은 인간들에게는 지켜야 할 절대 덕목이 되었습니다. 희망이라는 단어는 무조건 옳게 들립니다. 무조건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희망을 잃지 말라고 합니다. 비전을 가지라 하고 꿈을 꾸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영원히 저주의 철장 우리 속에 가두어 두려는 사탄의 궤계입니다. 그럼에도 이것을 깨닫지 못한 채 예배당 강단에서조차 이 세상의 꿈과 비전과 희망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습니다. 정말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스스로를 돌이켜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의 유전자가 발동해서 내게 어떤 일이 나타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 복음방송을 듣는 분들은 하도 이런 말을 많이 들으시니까 노골적으로는 세상을 희망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방송을 들으시는 성도님의 예를 한 번 들어봅니다. 이분께서는 이제 예수를 믿게 되신지 1년 남짓 되셨습니다. 자녀들이 “엄마가 믿는 하나님한테 이런 저런 것을 구해봐.”라고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분께서는 “내가 믿는 하나님께는 그런 세상 것을 구하는 게 아니야.”라고 대답해주셨다고 합니다. 앞뒤로 보완해야 될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십자가 복음방송에서 하도 그런 말을 많이 하니까 자연스럽게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도 기본적으로 이분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진 죄의 유전자는 지독하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 세상 환경과 조건이 개선되기를 바라는 희망의 잔재는 그렇게 쉽게 없어지지를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동일시할 수 없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는 마음이 거의 세상의 상황과 붙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이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기대와 마찬가지로 변화되고 개선되기를 바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희망의 잔재들은 십자가에서 죽고 세상을 탈출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들은 의미도 모른 채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으나 이 질문은 너무나도 중요한 질문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이 질문의 근원적 의미를 해석해보면 “선생님이여, 우리가 어떤 부족함이나 결핍감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는 때가 언제 오게 됩니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질문 속에는 삶의 환경과 조건과 상황의 변화 즉 절대적인 세상 변화에 대한 희망이 담겨있습니다. 이러한 희망을 가진 채로는 절대로 하나님 나라의 임함을 체험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어지는 20절 하반부에서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보고 있는 상황의 변화를 끔찍하게도 희망하고 있지만 그로 인하여 절대만족이 의미하는 하나님 나라의 임함은 볼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변화를 희망하는 잘못된 메시아 기대에 빠져있는 한 저주에서 빠져나와 온전히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로는 결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희망은 하나님이 없어서 생기는 부족감과 결핍감을 왜곡시키고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가려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고치신 열 명의 나병환자 중에 사마리아 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로 돌아옵니다. 사마리아 사람만이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현존하심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아홉 명의 유대인은 하나님이 안 계심이 저주임을 깨닫지 못하고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이들은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서 세상의 가치를 얻지 못하는 것을 저주라 여겼던 것입니다. 이들의 바람대로 세상으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그것은 저주의 해결이 아닌 또 다른 저주로의 이동이었을 뿐입니다. 첩첩산중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갈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희망하면 할수록 저주는 깊어지고 굳어지며 붙박이가 되어갑니다.
지금 여러분의 상황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이 처한 상황에 마음은 손가락 끝 하나 대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바꾸어 보겠다, 변화를 시켜보겠다, 달라져야 한다, 개선되어야 한다, 지금의 삶은 사람 사는 꼴이 아니다 라는 생각들은 모두 거짓 희망에 의한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었지만 그것은 저주가 아니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문제시했던 것은 돌에 맞아 죽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을 볼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몸이 처해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며 세상에 대해 변화를 희망하는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희망하는 나를 통째로 죽은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빠져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이 세상에 대해서는 개선처럼 보이든 개악처럼 보이든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최선을 향해 주권적으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에서 빠져나온 마음을 가질 때에 하나님이 이끄심이 어떠하든 어떤 불만이나 원망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온전히 만족을 누리기에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주어져 있는 상황이 아무리 나빠 보이더라도 손가락 끝 하나 대지 않기, 아무리 좋아 보이더라도 마음에 절대로 끌어들이지 않기입니다. 이것은 마음의 기쁨과 만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변화는 나의 부족감과 결핍감의 해결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마귀의 유혹에 속지 마시고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빠져나가서 부활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하늘로 부르심을 기다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희망은 근원적 저주를 가려버리는 저주탈피의 원수이자 장애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십자가를 생활화하면서 아담의 유전자로 인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삶의 환경과 조건의 변화를 희망하려는 잔재조차 뿌리째 뽑히는 역사가 일어나게 해주셔서 진정한 저주에서 빠져나온 절대평강을 경험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