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된다고 해서 시작한 신심(信心)이지만 부자되게 해달라고 기원한 적은 한번도 없어요! (웃음)”
올해로 정확히 20년 전 암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박태심(75)씨.
40년 가까이 신심을 해 오며 오로지 광선유포를 위해 순수한 신심을 관철한 덕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고 확신하고 있다.
"순수하게 광포 대원의 인생을 관철한 공덕으로 암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라고 말하는 박태심(앞줄 왼쪽)씨가 남편과 둘째아들 가족과 함께.
우연히 좌담회 참석 후 입회
박태심씨는 지난 1931년 경남 남해에서 7남매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유복한 집안에서 곱게 자라 경남 진주로 시집온 박씨.
그가 신심을 만난 것은 한국의 신심 초창기에 해당하는 1966년이다.
일본에 사는 셋째 오빠 집에 방문했다가 좌담회 장소인 오빠 집에서 자연스럽게 좌담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오래 전부터 이전경을 믿었지만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야말로 최고의 법”이라는 부인부의 말에 끌렸다.
본존님을 하부받아 한국에 돌아왔지만, 그 당시 신심의 불모지던 국내에서 신입회원이 홀로 신심을 지속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남편의 근무처가 서울로 바뀌어 진주에서 상경한 1968년, 신심하는 학회원과 연결되면서 입회를 하고 본격적인 신심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수십년간 좌담회 등 지역 광포의 거점(據點)으로 사용한 성북동 집은 지금도 학회원인 다른 사람이 살며 아직도 좌담회를 하는 유서(由緖)깊은 집이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다보니 당시 사람들의 주된 어려움은 경제고와 병고였다.
그런 서민들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밤낮으로 뛰어다니며 민중구제의 삶을 관철한 박씨.
서서히 찾아온 어두운 그림자
하지만 누구에게나 숙명은 찾아오듯 박씨에게도 병마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1984년 어느날.
그날도 박씨는 춘천에서 활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갑자기 복부에서 찌릿하는 느낌이 들더니 숨이 탁 막힐 정도의 통증이 엄습했다.
“체하거나 거북한 느낌과는 달랐어요. 하늘이 노래질 정도로 찌릿거리며 아픈데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어요.”
그때부터 며칠마다 그런 증상이 반복됐다.
하지만 그때마다 꾹 참았다.
그리고 어느새 날마다 그런 발작이 찾아왔고, 어느덧 일년의 세월이 흘렀다.
의사 부부인 막내딸 내외가 진작부터 병원에 가보자고 권유했지만 박씨는 듣지 않았다.
“부끄럽지만 병원에 가면 큰 병이라고 할 것 같아 무서워서 못 간거예요.
통증도 일년동안 날마다 겪다보니 그 순간만 잘 참으면 또 아무렇지도 않고….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리석었죠.(웃음)”
그때 일을 거울 삼아 “지금 지도부들에게는 어디 아픈 곳이 없더라도 꼭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아보라고 권유하고 싶어요”라고 덧붙인다.
박씨의 증세는 통증에만 그치지 않았다.
불과 수개월새 몸무게가 10kg이 줄며 소화도 잘 안 됐다.
그때까지 ‘그저 체했겠거니’ 하며 한약과 양약을 가리지 않고, 용하다는 약방은 모두 다닌 그는 그제서야 작은딸이 근무하는 성모병원(당시 명동 위치)을 찾았다.
내시경 검사 결과 대장 옆 쪽에 혹이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며칠 후 대장 일부와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암 선고 오히려 숙명전환 기회로
수술은 잘 됐다. 일주일 후 수술 자리가 잘 아물자 박씨는 기쁜 마음으로 퇴원을 준비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병원에서는 퇴원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집에서 걸려온 한통의 전화.
남편이었다.
“자네, 창제 많이 해야 살겠네”라고.
이때 박씨는 자신의 병이 암일거라는 예감을 했다고 한다.
“여보 걱정하지 마세요.
암도 창제로 고치는 신심입니다.
함께 창제해 주세요.”
어디서 그런 침착함과 대담함이 나온 걸까.
자신이 암이라는 선고를 받고도 그는 오히려 남편을 격려하고 있었다.
오빠들 중에 암으로 돌아가신 사람이 몇사람 있었다는 생각에 이르자 드디어 가문의 숙명전환을 할 기회가 온 것이라는 기백과 확신이 있었다.
박씨의 병명은 악성림프종(malignant lymphoma).
우리 몸의 면역체계를 구성하는 림프조직에서 발생하는 암으로, 그 빈도는 전체 암의 약 5% 정도로 우리나라에 흔한 위암, 폐암, 간암 등의 고형암에 비해서는 훨씬 낮은 편이다.
박씨의 경우 대장 쪽에 위치한 림프절에서 생긴 종양으로 그 동안 복통이 계속된 것이다.
림프종의 주된 치료는 항암화학요법이다.
항암제를 복용하거나 주사를 맞아 전신에 퍼진 암세포에 작용하게 함으로써 암을 치료하는 방법이다.
곧 항암제 치료에 들어갔다.
항암제 투여는 정말 참기 힘든 고통이 뒤따랐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이 기간을 가장 견디기 힘들어한다.
항암제는 암세포에만 선택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세포, 특히 세포분열이 활발한 조직세포에도 손상을 입히기 때문에 골수기능저하, 위장장애, 탈모증 등의 여러 가지 부작용이 나타난다.
항암제 부작용은 박씨에게도 나타났다.
구역질과 구토, 식욕부진 등의 증상으로 밥을 씹어도 꼭 모래알을 씹는 것 같았다고.
하지만 “내게는 본존님이 계신다. 반드시 변독위약하겠다”라고 강하게 결의하며 필사적인 창제에 도전했다.
학회 활동과 암 치료의 병행, 골수검사와 항암제의 고통은 창제의 힘이 아니면 견디기 어려웠다.
항암 치료 영향으로 머리카락도 빠지기 시작했다.
머리가 가려워 만지다 보면 한 웅큼씩 머리카락이 빠지기 일쑤였다.
남은 삶 보은사덕의 인생으로
하지만 결코 학회 활동도 소홀히 할 수 없기에 가발을 쓰고 다니며 대상자 한사람 한사람을 만나 묘법의 위대함을 전했다.
그렇게 매달 받던 치료 간격을 2개월, 3개월, 6개월로 늘리며 건강은 점차 호전되고 있었다.
그리고 4~5년의 시간이 흘러 드디어 어떠한 암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는 반가운 소식.
드디어 암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다.
박씨는 말한다.
“본존님께서 광선유포 하라고 다시 주신 인생입니다.
그때 정했지요.
남은 생 건강이 다 하는 날까지 광포에 매진하겠다”라고.
한국SGI 부인부 지도위원으로서, 75세인 지금도 매달 좌담회를 3~4군데 참석할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한다.
“휴전선 인근 지역부터,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섬까지 어디라도 회원님들이 불러주시면 달려갑니다.
그게 제가 사는 이유인걸요.”
이처럼 묘법의 대양약으로 완쾌한 몸을 법을 위해, 회원을 위해 사용하는 존귀한 박씨의 신념과 활동.
1998년에는 이케다(池田) SGI회장의 한국 방문 기념근행회에 참석.
이케다 회장에게 직접 ‘영국SGI 타플로코트상’을 수상하는 잊지못할 사제 승리의 역사를 새길 수 있었다.
한편 올해 80세인 남편은 검찰청에서 근무하던 경력을 살려 지금도 무척이나 건강한 모습으로 개인법무사 일을 하고 있다.
앞으로 영원히 가족 모두 광선유포의 인재로 성장하고, 생활 속에 불법(佛法)의 위대함을 증명하고 넓히는 보은사덕의 인생을 살 것을 결의하고 있다.
"어머니가 걸어오신 인생은 제 신심의 모범입니다." 둘째 며느리 우종분씨와 함께.
※ 가족의 말(둘째딸, 정치연씨. 당시 명동성모병원 소아과 의사)
1985년 어머니가 암 치료를 받던 당시 저와 남편은 같은 병원의 소아과와 비뇨기과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어머니의 암 소식을 전해 듣고 깜작 놀란 것은 의사인 우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머니가 받은 수술은 장폐색증으로 인한 장관(腸管) 절제와 문합 수술이었는데, 어머니의 경우 대장에 위치한 림프절에 생긴 종양이 점점 커져 장을 중첩시키고, 그것이 결국 장폐색까지 초래한 경우였습니다.
오래 방치하면 사망에까지 이르는 병인데 어머니가 1년 동안 통증을 참아오셨기 때문에 상당히 진행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술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떼어낸 장의 조직 검사 결과 악성림프종임이 밝혀졌고, 이후 김동집 의사의 주관으로 항암화학요법 치료가 실행된 것입니다.
어머니는 젊은 사람들도 힘들어하는 항암제 치료 역시 잘 버텨주셨고, 이내 건강하게 완쾌해 저희를 기쁘게 해 주셨습니다.
돌이켜보면 어머니의 확신있고 강성한 신심 덕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박태심 한국SGI 婦지도위원
길근혜(ghgil@hknews.co.kr) | 화광신문 : 05/02/25 62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