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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기의 즐거움
핸드폰에 부고訃告가 찍히면 죽음은 배달상품처럼 눈앞에 와 있다. 액정화면 속에서 죽음은 몇 줄의 정보로 변해 있다. 무한공간을 날아온 이 정보는 발신과 수신 사이에 시차가 없다. 액정화면 속에서 죽음은 사물화되어 있고 사물화된 만큼 허구로 느껴지지만 죽음은 확실히 배달되어 있고, 조위금을 기다린다는 은행계좌도 찍혀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의 관성적 질감은 희미한데, 죽은 뒤의 시간의 낯섦은 경험되지 않았어도 뚜렷하다. 이 낯선 시간이 평안하기를 바라지만, 평안이나 불안 같은 심정적 세계를 일체 떠난 적막이라면 더욱 좋을 터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면 부고는 그다지 두렵지 않다. 내가 살아서 읽은 책 몇 권이 나의 마음과 함께 무無로 돌아가고, 내가 쓴 글 몇 줄이 세월에 풍화되어 먼지로 흩어지고 살았을 때 나를 들뜨게 했던 어수선한 것들이 애초부터 없었던 것처럼 적막해지는 사태가 좋거나 나쁜 일이 아니고 다만 고요하기를 나는 바란다. 이승에서의 신산한 삶을 위로할 만한 지복이나 구원이나 주막이 거기에 없어도 나는 괜찮다.
부고를 받을 때마다 죽음은 이행해야만 할 일상의 과업처럼 느껴진다. 마감을 지켜야 하는 원고 쓰기나 친구의 자식들 결혼식이나 며칠 먼저 죽은 친구의 빈소에 흰 돈봉투 들고 가서 얼굴을 내밀어야 하는 일처럼 죽음을 루틴으로 여기는 태도는 종교적으로는 경건하지 못하지만, 깨닫지 못한 중생의 실무이행으로서 정당하다. 애착 가던 것들과 삶을 구성하고 있던 치열하고 졸렬한 조건들이 서서히 물러가는 풍경은 쓸쓸해도 견딜 만하다 이것은 속수무책이다.
내가 사는 마을은 경기도 고양시 일산이다. 내 집 뒤의 정발산 숲은 사람이 공들여 가꾼 숲이 아니고 자연림이다. 상록수와 낙엽수, 활엽수와 침엽수들이 계통이나 군집을 이루지 않고 여기 저기 박혀서 헝클어져 있다.
나무들은 꽃 피고 잎 지는 때가 제가끔이어서 숲의 빛과 냄새는 수시로 바뀐다. 바람이 불면 여러 나무들이 흔들리면서 숲 전체가 수런거리는데, 이 소리는 인간의 악기로는 흉내 낼 수 없다.
정발산의 높이는 해발 88m다. 88m는 해발海拔이라고 하기에는 쑥스럽지만, 정발산 꼭대기에는 ‘해발 88m’라고 적힌 팻말이 서 있다. 정발산을 한자로 ‘鼎鉢山’이라고 쓴다. ‘정鼎’은 중국의 고대국가들이 하늘에 제사를 드릴 때 쓰던 솥이고, ‘발鉢’은 운수행각雲水行脚하는 승려가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밥그릇(바리때)이다. 이 야트막한 뒷동산이 어째서 이처럼 신화적인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여러 서물書物을 뒤져 보았으나 기록을 찾지 못했다.
‘고향’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지만, 나는 서울 도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청소년 시절에는 인왕산, 북한산, 북악산, 도봉산, 관악산, 낙산에서 놀았다.
중학교 3학년 때, 인왕산 치마바위에서 암벽등반의 기초를 배웠는데, 이 바위가 바로 조선후기 화가 정선鄭敾의 유명한 그림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에 나오는 그 바위다. 여름에 장대비가 쏟아지거나, 겨울에 폭설이 내리면 나는 집 안에서 책을 읽다가도 장비를 챙겨서 산으로 들어갔다. 산과 숲의 매혹에는 중독성이 있었다. 산에는 내가 특별히 편애하는 나무와 바위가 있었다. 산에서 나는 언어와 개념으로부터 풀려나서 자유로웠고 몸으로 살아 있다는 느낌으로 자족했다. 나는 이 자유의 느낌에 의지해서 속세를 헤쳐 나갈 수 있었다.
나는 이제 높은 산에는 오르지 못한다. 북한산 언저리에서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문수봉 같은 높은 봉우리들을 올려다보면서 둘레길을 걷다가 돌아온다. 산꼭대기에서는 세상이 내려다보이고 둘레길에서는 산봉우리가 올려다 보인다. 올려다보거나 내려다보이거나 시선의 방향은 반대지만 어느 쪽에서도 착시 현상은 있을 것이다. 내려다볼 때는 땅이 넓어 보이고 올려다볼 때는 하늘이 넓어 보인다. 내려다 볼 때는 먼 것이 가까워 보이고 올려다 볼 때는 가까운 것이 멀어 보인다. 내려다 볼 때는 눈 아래도 많은 봉우리들이 나를 향해 밀려오는 듯싶지만, 올려다 볼 때 봉우리들은 첩첩 능선의 뒤쪽으로 사라져 간다.
젊었을 때,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세상을 내려다볼 때 나는 세상 소긍로 내려가고 싶었고, 산 밑에서 산봉우리를 올려다볼 때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었다. 지금은 이쪽저쪽에 마음을 뺏기지 않고 둘레길을 조금 걷다가 마을버스 타고 마을로 돌아온다.
동양의 산수화는 먼 산과 가까운 산, 높은 봉우리와 낮은 마을을 통일한 화폭에 배치한다. 이런 구도는 서양인의 원근법에는 맞지 않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여러 각도들이 서로 겹이고 스미면서 육안肉眼에는 보이지 않지만, 풍경을 화록에 들여앉힌다. 대체로 이런 화폭 속에서는 우뚝한 산은 화폭의 맨 위나 맨 가장자리에 자리 잡고, 산 아래로 무진無盡한 강산江山이 펼쳐지는데, 논과 밭, 초가집, 정자로 표현되는 인간의 마을은 화면의 아래쪽에 숨기듯이 배치되어 있다.
동양 산수화 속에서 사람은 매우 작게 그려져 있다. 그 사람은 풍경의 표면으로 얼굴을 내밀기를 저어하는 듯하다. 그 사람은 풍경의 핵심부가 아니고 풍경의 주인 노릇을 하지 않지만, 이 화폭은 애초부터 핵심부를 고정해 놓고 있지 않다.
화폭 속의 사람은 심부름하는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선비이거나 지게를 지고 소를 몰아가는 농부이다. 화폭 속의 사람은 등 굽은 노인이고, 동행 없이 혼자서 가고 있다. 대체로 동양 산수화 속의 사람은 세상을 향해서 밖으로 나가지 않고 논두렁길, 밭두렁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그 너머로 넓은 강산이 펼쳐져 있다.
이 무한강산은 공간으로서 고정되지 않고 시간 속에서 시간과 더불어 흘러가는 강산이다. 겹쳐지는 시선들이 이 운동성을 표현해 낸다. 그래서 동양 산수화 속의산은 멀리서 흔들려 보인다.
오래 쓰던 등산장비를 후배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나니까 날이 저문 것을 알겠다. 산에 올라가기보다는 산수화를 들여다보는 편이 더 한갓지고, 아끼던 장비도 애착이 가지 않는다. 장비를 받아가는 후배도 나의 늙은이 행세가 민망했던지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선배, 물건이 아직도 멀쩡한데, 좀 더 쓰시지요.”
“멀쩡하니까 주는 거다. 물건이 문제가 아니야.”
“벌써 산을 끊으려는 것입니까?”
“끊는 게 아니야. 저절로 그렇게 되는군.”
“저절로요?”
“그래, 저절로, 끊기 전에 저절로 물러서게 되니 좋은 일이지 너도 며칠 지나면 나처럼 되는 거야.”
“며칠요?”
“그래 며칠이지.”
나는 장비를 받으러 온 후배와 이처럼 식은 방귀 같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또랑또랑한 소리보다 헛소리가 더 평화로울 때가 많다.
장비를 받은 후배는 기어코 나를 와인 바로 끌고 갔다. 나는 와인 두 잔 이상을 마시면 힘들어진다. 이날은 세 잔을 마시고 취했다. 내 취기 속에서 북한산의 봉우리들은 시간과 더불어 흔들리면서 흘러가고 있었다. 그 시간 속에 내가 있거나 없거나, 나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 거기에 내가 없어도 나는 괜찮다. 이날 나는 모처럼 취했다.
나는 50년 넘게 술을 마셔 왔지만, 와인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프랑스 사람들은 와인을 마시면서 술맛을 놓고 ‘무겁다, 가볍다. 어리다. 늙었다, 젊다, 들떴다, 가라앉았다, 뒤뚱거린다, 흔들린다, 앞으로 쏠린다. 뒤로 쏠린다……’라며 수다를 떤다고 하는데, 나의 미각은 이처럼 섬세하게 진화되어 있지는 않다.
나는 와인을 마시면 몸과 마음이 혼곤해진다. 와인에는 현실과 부딪치는 술맛의 저항감이 없다. 와인의 취기는 계통이 없다. 와인의취기는 전방위에서 스멀거리면서 피러나서 스미듯이 다가와 내 마음을 차지한다.
와인은 현실을 서서히 지우면서 다가온다. 와인의 취기는 비논리적이고 두루뭉실하다. 이 취기는 마음속에 몽롱한 미로를 끝없이 펼쳐 놓는데, 그 미로를 따라가면서 마시다 보면 출구를 찾지 못한다. 와인의 맛은 로맨틱하고, 그 취기의 근본은 목가적이다.
연애하는 젊은이들은 주로 와인을 마시는데, 와인에 취하면 헛사랑을 고백하게 되기가 십상이다. 와인 바에서 와인을 마시는 젊은 연인들을 보면 나는 기특하고 대견해서 술값을 대신 내주고 싶기도 하지만 와인의 취기에 실리는 그들이 사랑이 위태로워 보이기도 한다.
와인은 첫 잔에 입술을 댈 때, 그 몽롱한 입구로 사람을 끌어당기지만 출구를 찾기가 어렵다. 와인이 마음속에 펼쳐 놓는 미로를 다라서 멀리 갔다가, 그 미로를 다시 거꾸로 거슬러 나오면서 깰 때는 술 깨는 시간조차도 몽롱하고 흐리멍텅하다. 와인의 입구는 로맨틱하지만 출구는 멀고 힘든데, 들어갈 때는 나갈 걱정을 하지 않는다.
막걸리는 생활의 술이다. 막걸리는 술과 밥의 중간쯤 되는 자리에 있다. 막걸리는 술을 밥 쪽으로 끌어당긴다. 젊어서 육군에 복무할 때 모내기철이면 대민지원을 나가서 농부의 일을 거들어 주었다. 그때 놀부들과 함께 막걸리를 곁들여서 들밥을 먹었다. 막걸리는 밥을 술처럼 먹게 하고 술을 밥처럼 먹게 한다. 농부들은 막걸리를 숭늉처럼 마셨다.
막걸리를 마실 때는 기름진 안주는 필요 없고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 먹으면 족하다. 막걸리의 텁텁함과 풋고추의 산뜻함이 입안에서 조화를 이룬다. 사람은 밥만 먹고는 살 수가 없고 술만 마시고도 살 수가 없는데, 막걸리는 그 사이에서 어중간하다. 농부들 틈에 끼어서 풋고추를 안주로 막걸리를 마실 때 나는 오래된 농경사회의 평화를 느꼈다.
비논리적이라는 점에서 막걸리와 와인은 같은 계층이지만, 막걸리는 생활적이고 와인은 몽환적이다. 인간에게는 그 양쪽이 모두 필요하다. 나는 막걸리를 즐겨 마시지는 않는다. 나는 막걸리와 밥이 겹치는 대목의 정서를 좋아하지 않는다. 막걸리는 텁텁하다.
소주. 아아! 소주 한국의 근대사에서 소주가 정신의 역사와 대중정서에 미친 영향을 사회과학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가공할 소비량에도 불구하고 소주는 아무런 아우라를 갖지 않는다. 소주는 대중의 술이며 현실의 술로서 한 시대의 정서를 감당해 왔지만 풍미가 없고 색감이 없고 오직 찌르는 취기만 있다. 소주는 아귀다툼하고 희로애락하고 생로병사하는 이 아수라阿修羅의 술이다. 소주는 인간의 기쁨과 슬픔, 소망과 좌절을 멀리 밀쳐 내고 또 가까이 끌어당겨서 해소하고 증폭시키면서 모두 두통으로 바꾸어 놓는다. 소주는 생활의 배설구였고 종말처리장이었는데, 나 역시 거기에 정서를 의탁해서 힘든 날들을 견디어 왔다.
회사 동료들과 다투고 나서 화해하자고 마시는 술은 대개가 소주였는데, 화해의 술자리에서 또 싸웠고, 헤어져서 각자 마셨다. 퇴근 후에 동료들이 모여서 회사 사장, 국장, 부장을 욕하고, 야당을 욕하고 여당을 욕하고 정부를 욕하면서 소주를 마셨는데, 이런 날은 아무 득이 될 것도 없이 헛되이 폭음했고, 그 다음날 아침에 오장이 녹아내리도록 뉘우쳤다. 이런 아침에는 머리는 쪼개지고 창자는 뒤틀리고 마음은 자기혐오로 무너졌다. 소주는 삶을 기어서 통과하는 중생의 술이다. 나는 소주를 많이 마시기는 했지만, 소주의 쓰라린 세속성을 소화해 내기는 어려웠다.
밥이 뜸 들면서 솥이 조금씩 김을 뿜어내면 쌀의 향기가 집 안에 퍼진다. 나는 이 향기를 맡으며, 사케가 익어가는 일본의 먼 마을들이 생각난다. 가을에 누렇게 익은 벼들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쌀의 향기가 밀려올 때도 내 마음속에 사케는 익어 가는 술도가都家가 떠오른다. 논에서 익어 가는 쌀의 냄새와 솥 속에서 익어가는 쌀의 냄새는 바탕은 같지만 갈래가 다르다. 논이 냄새는 거대하고 종합적이다. 가을의 논에서는 벼라는 품종 전체가 갖는 시원의 냄새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솥 속에서 이 근원적 냄새는 그 바탕을 유지하면서 순화되고 인문화된다. 솥 속에 쌀과 물을 알맞은 비율로 넣고 불을 때서 밥을 만들어 내는 조리법은 문명사의 위대한 전진이다. 솥뚜껑은 두껍고 또 무거워서 솥 안에 김을 가두워 놓는데, 김은 쌀의 바탕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그 형질을 이간의 몸과 마음에 맞도록 변형시킨다. 솥은 물질을 변화시키려는 인류의 오랜 소망에 봉사한다. 이것은 선밥이다. 잘 익은 밥의 향기는 자극이 없고 둥글다. 그 향기는 인간을 유혹하지 않고 감싼다.
사케의 맛은 쌀밥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다. 사케가 사람의 마음에 작동하는 방식은 논에서 익어 가는 쌀이 아니라 밥솥에서 조금씩 새어나오는 김의 방식이다. 사케의 맛은 쌀의 엑기스를 추출해 내고, 사케의 취기에는 도작농토 稻作農士의 질감이 들어 있다. 사케는 깊이 스며서 넓게 퍼지고 익어 가는 밥의 안온함으로 몸을 덥혀 준다. 사케를 마실 때 나는 술이 나를 안아 주는 느낌을 받는다.
몇 해 전, 눈이 많이 오는 겨울에 일본 홋카이도에서 사케를 마셨다. 눈이 키보다 높이 쌓였고 산간마을들은 눈 밑으로 굴을 뚫어서 왕래하고 있었다. 눈굴 속에서 화살표 안내판을 따라 갔더니 작은 술집이 있었다. 입구까지 눈이 쌓여서 겨우 문을 밀고 들어갔다.
거기서 사케를 마셨다. 주모는 허리가 굽은 늙은 여성이었는데, 화장이 너무 짙어서 허무해 보였다. 큰 개를 기르고 있었는데, 개도 늙어서 눈뜨기를 힘들어했다. 뜨거운 사케의 부드러움이 몸의 바닥에서부터 스며들어오니까. 늙은 주모의 빨간 립스틱이 주는 허무감도 견딜 만했다. 사케는 겨울의 술이고 나이든 사람의 술이다.
내가 즐겨 마신 술은 위스키다. 위스키의 취기는 논리적이고 명석하다. 위스키를 몇 방울 목구멍으로 넘기면 술은 면도날로 목구멍을 찢듯이 곧장 내려간다. 그 느낌은 전류와 같다. 위스키를 넘기면, 호수에 돌을 던지듯이 그 전류의 잔잔한 여파들이 몸속으로 퍼진다. 몸은 이 전류에 저항하면서도 이를 받아들인다. 저항과 수용을 거듭하면 저항의 힘은 적어지고 수용의 폭은 넓어져서 취기가 쌓인다. 위스키의 취기는 이리저리 흩어져서 쏘다니지 않고 한 개인의 정점으로 수렴된다.
온 세상의 사람들이 너도나도 위스키를 마신다 해도 위스키는 공동체의 술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술이다. 위스키는 단독자를 정서의 정점으로 이끌고 간다. 그래서 위스키를 좋아하면 혼술을 자주 마시게 되고 알코올중독자가 되기 쉽다.
이 술 저 술에 대해서 이처럼 수다를 떨고 있지만, 지나간 술은 술로서 작동하지 못한다. 지나간 술은 화폭 속의 산과 같다. 몸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들여다볼 수는 있다. 나는 이제 술을 마시지 못한다.
나는 3년 전부터 심혈관 계통의 병으로 치료를 받고 있다. 젊은 의사는 술을 ‘한 방울’도 먹으면 안 된다고 나를 겁주었다. 술을 먹으면 ‘죽는다’라고 극언을 할 때도 있었다. 나는 ‘한 방울’에 짜증이 나서 의사에게 물었다. “한 방울도 안 되나요?”
“방울 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생각을 끊으라는 말입니다. 반 방울도 안 됩니다.”
나는 더욱 약이 올랐고, 병이 들어서 의사에게 몸을 맡기게 된 신세의 설움이 복받쳤다. 그래서도 물었다.
“선생님은 술을 안 드십니까?”
“저요? 저는 술을 입에 대지 않습니다.”
의사의 말투는 자랑처럼 들렸다.
“훌륭하십니다. 저는 한 50년 마셨습니다”라고 나는 의사를 칭찬해 주었다. 의사도 지지 않았다.
“참 대단하시군요.”
의사는 지난 2주 동안에 술을 먹었느냐고 나를 추궁했다. 의사한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뭐, 그저, 조금….”
“무슨 술입니까?”
“와인입니다. 독주는 안 먹었어요.”
“얼마나 마셨습니까?”
“조금 마셨습니다.”
“조금이라면 얼마인가요?”
“극소량입니다.”
“그게 얼마입니까?”
“극소량이라면 미량이지요.”
“미량이 얼마인가요?”
“와인 두어 잔입니다. 잔을 가득 채우지는 않았어요. 그냥, 미량이지요. 요만큼.”
“안 됩니다. 이러시면 치료가 어려워지고, 지금까지 치료받은 것이 헛일이 될 수 있습니다.”
건강을 회복해서 술을 마실 수 있는 ‘정상인’으로 거듭나는 것이 내가 치료를 받는 ‘목적’이라고 의사에게 말해 주고 싶었지만 나는 그 말을 그 말을 참았다.
이런 지경이 되어서까지도 술을 마셔야 하는지, 내 자신이 한심했다. 의학적 근거는 없지만, 동창 아무개는 술병이 도져서 죽었다는 뒷말도 들렸다.
요즈음엔 거의 술을 마시지 않는데, 가끔씩 술 마시던 날들의 어수선한 열정과 들뜸이 그립다. 엉망으로 취한 다음 날 아침의 절망감이 혐오스럽기보다는 안쓰럽다. 저녁에 동네 술집에 모여서 술 마시는 젊은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나는 이 고해苦海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다.
술은 멀어져 갔지만, 나는 아직 술을 끊은 것이 아니다. 나는 희망의 힘에 의지해서 살지 않고 이런 미완성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나는 스무 살 무렵부터 예순 다섯 살까지 45년간 담배를 피웠다. 하루에 한 갑씩, 어떤 날은 두 갑씩 기를 쓰고 피워댔다. 지금은 담배를 끊은 지 10년이 되어 오는데, 꿈속에서는 가끔 피운다. 잠들기 전에 오늘 꿈속에서 한 대 피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날도 있다. 담배는 참으로 무서운 습관이다.
고등학교 때 장난삼아 배운 담배를 군대에 가서 본격적으로 피우기 시작했다. 그때 군대에서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나 피우지 않는 사람이나 구별 없이 사흘 에 한 갑씩 나누어 주었다. ‘화랑’이라는 담배였는데, 맛이 쓰고 거칠어서 병사들은 ‘독가스’라고 불렀다.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담배가 떨어지면 병사들은 고참 손으로 일렬로 서서 돌림담배를 피웠다. 담배 한 대를 최고참이 먼저 한 모금 빨고 아래로 내려주었다. 꽁초가 한 개만 있을 때는 고참이 한 모금 빨아서 그 연기를 후임병들의 입속으로 불어넣어 주었다. 신병들은 고참 옆에서 입을 빌리고 연기를 받아먹었다. 이런 짓거리로 군생활의 고달픔을 달래면서 낄낄 웃었는데, 그때부터 담배는 내 몸에 깊이 또아리를 틀고 들어앉았다.
제대라고 나서 글을 쓰는 일로 밥을 벌어먹게 되자 나는 담배에 더욱 빠져들게 되었다. 나의 동료 중에는 담배를 피워야 글이 잘 써진다는 미신을 신봉하는 자들이 않았는데, 나는 그중의 하나였다. 이미 담배에 중독된 사람이 담배를 잠시라도 안 피우면 정신이 멍청해져서 가나다라를 제대로 쓸 수 없게 된다는 것은 경험으로 보아서 맞는 말이지만, 담배를 피우면 글이 술술 풀린다는 말은 말짱 거짓말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그 거짓말에 기대어서 마음 편히 담배를 피워댔다.
50대 중반에 나는 담배를 끊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났지만, 끊지는 못했다.
그때 나는 호남지역의 깊은 산속 절 마당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노스님에게 걸려서 크게 혼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찰 경내는 금연구역이다. 절 마당을 쓸고 있던 노스님은 멀리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나를 손짓해서 불렀다. 나는 연기를 뿜어내면서 다가갔다. 노스님은 몸이 작았고 오종종한 얼굴에 주름이 가득했지만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이 있었다. 노스님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했다.
“담배 피우는 구나”
“그렇습니다.”
“끊어라, 딴 데 가서 피우란 말이 아니다.”
나는 스님의 고압적인 어투에 반감이 솟아올랐다.
“스님께서는 담배를 피워 보셨습니까?”
“아니다.”
“그럼 모르시겠군요. 이게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한테 물어보세요.”
스님이 날카로운 눈매로 나를 노려보았다.
“말 잘하는구나. 이 사람아, 그걸 왜 못 끊어 자네가 안 피우면 되는 거야. 피우면 못 끊는 거고.”
나는 벼락이 뒤통수를 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렇구나. 안 피우면 되는 거구나…. 나는 응답할 말을 찾지 못해서 쩔쩔맸다. 스님은 또 말했다.
“쉽구나. 쉽다, 쉬워. 그렇게 쉬운 걸 못 하는구나. 쉬워서 못 하느냐.”
나는 무참해서 물러났다. 돌아가는데 내 등에 대고 스님이 또 말했다.
“산은 금세 어두워진다. 조심해서 내려가라, 담배 피우러 절에 오지 마. 가서 끊어.”
네가 안 피우면 끊는 거다. 라는 이 단순한 말 한 마디에 나는 창피했다. 더 이상 들이댈 말이 없었다. 노스님을 고도로 응축된 단순성으로 인간의 아둔함을 까부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노스님의 그 한 마디는 무서운 위엄으로 나를 지배했다. 나는 담배를 끊으려고 별의별 것을 다 했다. 금연에 도움이 된다는 패치를 얼굴에 온통 붙이고 껌을 씹고 사탕을 먹고 회식자리를 멀리하면서 두 달을 지냈다. 금단증세가 나타나면 달리기를 하고 체조를 했다. 견딜 수 없을 때는 공원에 혼자 나가서 셔츠를 찢으면서 괴로워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틈틈이 담배를 피웠다.
피울 때마다 뉘우치고 또 피우다가, 서너 달쯤 후에는 담배를 끊기를 미루고 정식으로 피우기 시작했다. 나는 내 마음속에서 울리는 노스님 의 목소리를 향해서, 내년에, 또 내년에, 하면서 빌었다. 금연을 단념하고 정식으로 다시 피우니까 담배는 맛이 더 좋았다.
노스님한테 혼나고 나서도 나는 7년쯤 더 담배를 피웠다. 스님의 말씀은 천만 번 지당하지만, 이 단순성의 진실을 뻔히 알면서도 실천하기가 어려워서 괴로워하는 속세 중생의 고통을 산속의 스님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스스로에게 우겼다. 그러면서도 내가 담배를 끊고 찾아뵙게 될 깨까지 노스님이 세상에 머물러 계시기를 빌었다
그렇게 뉘우침과 각오가 옆치락뒤치락하는 중생고衆生苦의 세월을 담배를 피우면서 보내다가, 어느 날 나는 아무런 처방이나 노력도 없이 문득 담배를 끊게 되었다.
나는 ‘신비’라는 단어를 싫어해서 좀처럼 사용하지 않지만 나의 금연에는 신비적인 요소가 있다.
10년쯤 전에 먹고사는 일로 남과 다투고 나서 속상해서 소주를 마시면서 담배를 한 갑 피웠다. 그날 밤 내 꿈속에서 노스님이 돌아가셨다. 다비식에 갔더니, 나 혼자뿐이었다. 노스님의 상좌上佐가 “스님 불 들어갑니다!”라고 외치면서 장작에 불을 댕겼다. 불꽃 속에서 사그라지는 노스님의 육신은 나를 향해서 “그걸 왜 못끊어, 자네가 안 피우면 되는 거야. 쉽구나, 쉽다”라고 말했다.
꿈에서 깨어나서 나는 다시 금연을 결심했다. 나는 노스님의 말씀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내가 안 피우면 된다’는 이 단순한 문장의 주어 ‘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다. 단순성 안에는 강력한 힘이 내장되어 있다.
신기하게도 나는 나 자신이 그동안 담배를 한 대도 피워 보지 않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 후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금단증세가 있었지만, 심하지는 않았다. 길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뒤를 따라가며 흩어지는 연기를 들이마시기도 했지만 이런 추접스런 꼴은 내가 겪은 금단증세 중에서 경미한 사례에 속한다.
담배가 나로부터 멀어지고 나니까 이처럼 쉬운 것이 어째서 그렇게 어려웠던 것인가를 나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노스님은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고 하니까. 쉬움을 알지만 어려움은 모르실 것이다. 스님이 아는 것은 ‘쉬움’의 단순성이다. 이 단순성을 터득하고, 그것을 단순한 언어로 표현하려면 맑고 힘센 마음의 자리에 도달해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노스님은 쉬움으로 어려움을 격파하는 힘이 있었다. 노스님의 말씀을 참으로 두려워했기 때문에 담배를 멀리할 수 있었다. 나의 금연 노력은 모두 실패했고 두려움만이 성공했다. 그 두려움은 스님이 내게 준 것이라 하더라도 나의 마음이 그 두려움을 두렵게 받아들였으므로 내금연에는 나 자신의 힘도 어느 정도는 포함되었다고 자위하고 있다.
이 긴 말을 줄여서 노스님처럼 짧게 말하자면 내가 안 피우니까 저절로 끊어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가끔씩 꿈속에서 담배를 피운다. 중생의 어리석음은 한이 없는데, 나는 이 어리석음과 더불어 편안해지려 한다.
―김훈, 『허송세월』, 나남, 2024, 7~2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