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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 순종하며 따라가는가(딤후2장3- 4)
성경본문: 디모데후서 2장 3-4
3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4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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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의 근거
부르심의 근거는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세상을 보는 관점을 완전하게 바꾸어 놓습니다.
이 세상 사람은 지금 눈앞에 일어나는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지만, 구원받은 자들은 좀 더 본질적인 문제에 집중합니다.
즉 우리를 부르신 분이,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 어떤 계획을 세우는지를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본문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군인은 죽을 각오를 하고 전쟁을 한다. 왜냐하면, 군인은 전쟁을 하기 위해 불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아니 잘 믿는 사람은, 그러므로 어떤 문제나 상황을 해결하려고 집중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신뢰합니다.
찬송가 412장을 아시나요?
"내 영혼이 그윽이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했다는 것,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그분이 우리를 먼저 아셨다는 것, 그래서 그분이 우리의 삶을 책임지실 것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우 서혜경 씨가 쓴 [속상해하지 마세요]라는 책에서 딸과의 대화가 나와 있습니다.
‘선택’ ‘구원’ ‘하나님의 사랑’을 유추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친구는 키우던 강아지가 새끼를 일곱 마리나 낳았다고 한 마리 업어가라고 했다.
나는 강아지 한 마리 입양할 참으로 친구 집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갔다.
친구: 우리 공주님, 강아지 한 마리 골라 봐, 젤 예쁜 걸로 골라.
젤 좋은 거 고르라고 이모가 젤 먼저 부른 거야.
딸: (이 강아지, 저 강아지 만져보다가 한쪽 다리가 불구인 강아지를 안으며) 이거 할래요.
친구: (깜짝 놀라는 표정) 어머! 걔는 조금 아파.
걔 말고 다른 애로 데려가. 건강하고 예쁜 아이로 가져가야지.
딸: 나는 얘가 좋아요. 얘랑 살 거예요.
친구: 왜? 하필이면 걔가 좋아?
딸: 다른 애들은 다 안 아픈데 얘만 아프잖아요.
다른 사람들이 전부 다 안 아픈 애만 데려갈 거니까
나는 얘를 데려가야 해요.
20세기 초반 소위 이 사회를 휩쓸고 간 철학 사조가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이지요.
소위 말하는 지성인들인 인간 그 자체에 대하여 고민하며 묻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아니 인간의 실존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믿음이 있는 실존과 믿음이 없는 실존이 극명하게 갈라집니다.
하이덱거와 사르트르 같은 이들은 인간의 실존을 "이 땅 위에 던져진 존재"로 보았습니다. 야스퍼스 같은 이는 "난파된 인간",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깨어진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실존을 보았고, 하나님 없이 던져진 존재로 인간을 보았던 사람들은 허무주의로 빠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던 자들의 반응이 일맥상통함을 보게 됩니다.
이사야 6장은 유명한 소명장입니다.
소명의 자리에서 이사야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5)
예레미야 1장 역시 유명한 소명장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실 때에,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렘 1:6)
출애굽기 3장은 유명한 모세의 소명장입니다. 그리고 그의 반응이 4장 10절에 있습니다.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이어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출 4:11-12)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늘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보았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옴을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고백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래서 사명자에게는 "기다림"이 있습니다.
사명자의 특징은 "왜?"라고 묻기보다는 늘 "어떻게?"라고 묻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명하신 일이면 나에게 최선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에도 "왜?"라고 묻기보다는 그 방법과 방향을 알 때까지 조금은 기다리는 여유도 갖게 됩니다.
조금 기다리는 것 같지만 정확한 방향이 가장 빠른 길임을 이제는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에게 편지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고전 9:26)
그리고 우리가 또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순종한다는 것은 '속도'가 아니라 끝까지 '완주'하는 것임을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사도 요한이 십자가 위에서 주님의 명령을 받고, 어머니 마리아를 끝까지 돌보았던 것처럼, 남들이 이름을 날리고 있을 때에도, 끝까지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이 주신 목적, 자신에게 주신 사명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사도 요한을 끝까지 쓰셨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그가 황량한 밧모섬에 유배를 갔을지라도, 주님은 여전히 그의 삶의 주인이었습니다.
지난 성지순례 때 카파도키아 지역의 '괴뢰메'라는 곳을 방문했습니다.
당시 위대한 교부들이 아니, 믿음을 지키려고 했던 사람들이 산 속에서 어떻게 은둔 생활을 했는지 보았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다가 죽어간 사람들을 실패자라고 하지 않고 "성자"라고 부른다는 것을 말입니다.
믿음을 지킨다! 부르심에 순종한다는 것은 때로 우리가 가던 길에서 방향을 돌리는 것이요, 때로는 철저하게 그분의 부르심 앞에서 우리의 삶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적어도 사도 바울에게서 부르심에 순종하는 삶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본문 3절을 보세요.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많이 묵상해 보세요.
"좋은 병사" = "고난을 받으라!"
고난을 받는 것이 목적은 아니지만 좋은 병사가 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고난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있으신가요?
제가 요즘 많이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고난이 목적은 아니지만, 고난의 과정이 없이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어 산다는 것은, 또 다른 우리 믿음의 동료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저와 함께 고난을 받지 않으시겠습니까?"
사랑의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할 때 공부를 하면서 "생활 숙제"가 있다고 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해 생활 속에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죠.
매일 아침이 되면 남편과 함께 집을 나와 돌아다니다 퇴근 시간에 맞춰 들어가는 주부에게는 매일 12시까지 꼼짝 말고 집을 지키는 것이 제자가 되기 위한 숙제입니다.
청소에 게으른 주부들에게는 매일 옷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일을 시키기도 합니다.
매일 생활에 바쁜 남자들에게 매일 성경을 읽는 것이 숙제가 되기도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산다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당연한 의무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좋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생활에 쫓기는 여러 가지 이유로 신앙에 불성실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스토리가 있다습니다!
부르심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완벽한 스토리가 있습니다.
전쟁을 하면 군인들이 작전계획에 의해 움직입니다. 때로 말단 군인들은 자신들이 목적 없이 전진하거나 총을 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치밀한 작전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명자'라는 말은 나를 위해 쓰인 각본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 각본을 쓰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그것을 방해하는 자들과 불의한 일들에 대하여 넘어지기보다는 싸워서 이겨야 함을 알게 됩니다.
아니, 우리를 창조하신 이의 스토리가 결코 쉽게 없어지지 않음을 믿고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는 대본을 외우는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대본대로 움직입니다. 인생은 많이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배운 대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만일 군인이 "군인정신" "복무규칙"을 계속 외우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전쟁터에서도 군인정신을 외우느라 정신이 없다면 정말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명자는 성경을 배우는 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배운 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명자의 삶은 치열합니다.
피가 튀기도 하고, 땀이 나기도 합니다. 때로는 헌신이라는 말이 맞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라는 말이 단순한 예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치열한 씨름을 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가는 과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찬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느낀 것입니다.
기독교의 타락은 더는 세상과 싸우지 않아도 되는 때부터 시작됩니다.
황제가 기독교를 보호하고, 태어나면서 기독교인이 되는 순간부터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치열한 싸움이 아니라 권력을 누리는 것이라고 착각하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십시오.
화려한 성전이 지어지고 난 다음 교회는 급격하게 쇠락의 길로 접어듭니다.
교회는 많은 것을 가진 것이 결코 축복이 아니듯이, 사명자에게는 편안함이 축복이 아닙니다.
사명을 잊지 않기 위해 적극적인 고난 속으로 찾아 들어가야 합니다.
적극적인 가난도 경험해야 합니다.
산에 가서 기도하던 야성을 회복해야 하고, 밤새워 기도하던 때의 치열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명자가 된다는 것은 끝까지 전쟁터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이 적절합니다.
사명자의 삶에서 누리는 특권
그러나 치열함이 고난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치열함 가운데 경험하는 기적의 일들이 있습니다.
가만히 사명자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그들의 능력으로 해결된 문제들이 아닙니다.
이상하게도 "해결된 문제"가 많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이 그분의 계획 가운데서 철저하게 이루어져 가고 있음에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무능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혼자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무능한 인간과 늘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아십니까?
사명자들이 누리는 삶의 특권이 있습니다.
아주 단순하고 가볍다는 것입니다.
명령이 떨어졌을 때 언제든지, 어디든지 갈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기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많이 양보하고, 많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단지 자신을 부르신 이를 기쁘시게 할 준비만 되어 있으면 됩니다.
단순함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입니다.
모세는 지도자로 불림을 받았을 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거두어 가시고 난 후에 지도자로 부르셨습니다. 그에게 오직 있는 것은 '지팡이'였습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가 지팡이를 가지고 행한 기적입니다.
지팡이를 들어 홍해가 갈라지고, 지팡이로 반석을 쳐 물이 나오고.
아닙니다.
그가 들고 있었던 것은 정말 단순한 지팡이입니다.
기적은 그 지팡이를 사용하신 하나님의 몫일 뿐입니다.
사명자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압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면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는 담대함 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사명자가 되면 계속해서 불어오는 인생의 파도 앞에서, 파도 타는 법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부르심은 섬김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명자들이 종종 착각하는 때가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부르심에 대하여 신뢰하지 못하는 때도 있지만, 부르심이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정당화될 때도 있다는 것이죠.
빌 하이벨스 목사는 [너무 바빠서 기도합니다]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이렇게 점검하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대체로 섬김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거짓 인도들은 분별하기 꽤 쉽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자기 자신을 높이거나 자기의 이익만을 도모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과도 연결되지요.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것은 우리를 부르신 이를 기쁘시게 하기 위함인데, 어느 날 우리의 모습을 보니 나를 위해 열심히 뛰고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목사이기에 이런 예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종종 주변에서 동료 목사님들이 고민하는 것을 봅니다.
"교회를 옮길까?" 아니 동료 목사님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저도 종종 그런 생각을 합니다.
"개척할까?"
그런데 이런 생각은 언제 들어오는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할 때, 힘들다고 느낄 때, 좀 더 다른 길이 있다고 착각할 때 찾아옵니다.
내가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섬김을 받지 못하는 것 때문에 서운한 감정으로 찾아옵니다.
사실 부르심의 가장 큰 축복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묵묵히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새로운 부르심으로 우리를 인도할 때 담대하게 응답해야 할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에 대하여 우리가 얼마나 성실하게 섬기는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가 "부르심"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것이 우리에게 명예와 돈 그리고 다른 많은 것을 약속하고, 섬김보다는 번영 쪽에 무게가 가 있다면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기보다는 사단의 유혹일 때가 결국 많을 것입니다.
솔직하게 악한 영이 우리를 "누구를 섬길까? 어떻게 나를 겸손하게 할까?"라는 길로 인도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2-23절에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내게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성령이 내게 일러 주시는 것뿐인데, 어느 도시에서든지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과 다른 것을 함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당할 수 있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분명하게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분은 하나님은 우리의 가진 것을 사용하실 때가 많습니다.
우리를 특별한 곳에서 부르시기보다는 우리의 삶에서 부르시고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흔히 말하는 우리의 은사를 하나님께서 쓰시기를 원하시는 때가 많습니다.
교인들은 보면서 종종 안타까운 것 중의 하나는 늘 "새로운, 아주 특별한 부르심"을 기대하며 꿈을 꾼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아무리 들어도 그 정도로는 노래가 안 되는데 하나님께서 찬양사역자로 부르셨다고 가시밭길을 갑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것을 싫어하고, 자신의 자녀도 버거워하면서 어린이 사역에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셨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일단, 신학교로 부르시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태생적으로 부지런하지 못한 사람, 그것을 고칠 수 없는 사람이 목회자가 되면 많은 사람이 피곤합니다.
말씀을 전해야 하는 사람이 책을 읽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싫어한다면 여러 사람이 힘들어질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에 부르시기를 원하시고, 내가 어떻게 쓰임 받아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며, 다른 사람에 유익이 될 수 있는지를 말입니다.
올바른 부르심이 더 나은 크리스천으로 우리를 만들어 갑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찰스 스탠리 저)]이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가는데 몇 가지 주의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 어떤 인도가 당신의 인생 전체를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을 단시간 내에 결정하라고 요구한다면 의문을 제기하십시오.
- 주변에 있는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는 인도하심이 혹시 이기심이나 독선은 아닌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 어떤 인도가 당신으로 하여금 꽤 큰 빚을 지게 한다든지, 다른 사람을 곤란하게 하거나 타협해야 하는 상황, 혹은 위험에 처하게 한다면, 의문을 제기하십시오.
- 하나님은 사명자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기 원하시지, 누군가 상처받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때로, 부르심은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고, 준비하는 기간이 필요합니다. 병사로 모집한 사람을 바로 전투에 투입하지 않습니다. 훈련의 시간이 있어야 작전을 지시하는 상관의 명령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 어떤 인도가 당신의 가족 관계나 여타 중요한 친구 관계를 뒤흔든다면, 의문을 제기하십시오.
- 좋은 그리스도인은 좋은 관계를 맺습니다. 아니 좋은 관계를 통해 좋은 하나님의 영향력이 미치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여러분이 감수해야 하는 관계의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하나님께 쓰임 받기 때문에 깨어져야 하는 관계들이라면 그것이 분명한 인도하심인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 당신이 그 인도를 성숙한 그리스도인 친구나 상담자에게 이야기했을 때, 그들이 불안해한다면, 의문을 제기하십시오.
- 주변에서 종종 그런 사람을 봅니다. 상담을 하지만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변에 좋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감사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에서 믿음의 동료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말씀의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요즘 많이 느끼는 것입니다. 말씀이 없이 뜨거운 사람, 말씀과 관계없는 성령의 은사는 위험합니다. 하나님이 쓰시고자 했던 많은 사람이 사명자로 쓰이지 못하고 버림받는 경우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이런 표현을 쓰고 싶습니다. "정상적인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
사명자가 된다는 것은 나의 허황된 꿈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철저한 신뢰와 믿음 가운데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요즘 저는 교회를 건축하는 일들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많은 목회자가 큰 교회를 건축하고 싶어 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필요하셔서 담아내야 하는 큰 그릇이 있습니다. 필요한 일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모든 교회를 크게 부르시지는 않습니다.
유럽과 미국의 큰 교회들이 건물만 덩그렇게 남겨놓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들의 이유가 무엇일까요?
동방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성당>이 오늘날 박물관이 되어버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건물은 있지만 인도하심과 사명이 없기 때문이지요.
왜 역사 속에서 십자군 때문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오늘날 이슬람에 증오의 씨앗을 남겨 두게 되었나요?
힘을 자랑하려고 했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험하고 순종합니다.
이러한 점검이 사명을 가지고 가는 여러분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시지만, 그 이후에는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기를 원하십니다.
때때로 우리의 이성과 상식을 뛰어넘는 음성이 들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들이지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 불림을 받은 병사는 "자신의 삶에 얽매이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곰곰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불림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정말로 나의 삶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하나님의 일인지.
존 비비어의 책 [순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누구의 사역을 하고 있느냐?
존 비비어는 큰 교회의 고등부 담당 목사직을 제의받고,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고등부 사역의 경험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등부 사역에 관한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습니다. 그중 루이지애나에 있는 교회의 고등부 담당 목사가 쓴 책에 도전을 크게 받았습니다.
그래서 직접 그 교회에 방문하여 예배에 참석해보았는데 1,500석의 고등부 예배실에 자리가 다 차고 학생들은 예배에 깊이 빨려들고 있었습니다.
담당 목사를 만나 인터뷰를 하였는데 학생 수가 계속 놀라운 속도로 불어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역의 성공비결은 매주 금요일 밤 100개가 넘는 교회 밖의 셀 그룹 파티에 십대들을 초청하여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비비어 목사님은 기도하며 8개월에 걸쳐 계획을 세우고 70명의 리더를 세워 훈련했습니다.
그중에서 24명을 뽑아 제자훈련을 시키고 비전을 심어주고 모든 것을 혼신의 힘을 다해 준비했습니다.
예배당에 십대 청소년 2,500명으로 가득 찬 모습을 상상하며 비전과 열정으로 충만하여 첫 파티를 열기 3주 전에 교역자 회의에 담임목사님이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성령께서 우리 교회의 방향이 가정 셀 그룹을 하지 않는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현재 집에서 하는 모든 소그룹 모임을 중단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모든 과정에서 구상을 목사님께 보고하여 허락도 받았는데 아니겠지! 하여 "목사님, 고등부는 제외하시는 것 맞지요?"
"비비어 목사님, 성령께서 우리 교회 방향이 셀 그룹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설득을 하려 해도 담임목사님은 같은 말만 되풀이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불만으로 가득 차고 몹시 화가 나서 집으로 돌아와 창밖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담임목사가 틀렸다는 생각만 계속하는데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존, 너는 지금 누구의 사역을 하고 있지?"
"그거야 주님의 사역이지요!"
"아니다. 너는 네 사역을 하고 있다."
"주님, 구원받지 못한 학생들을 파티에 데려와 효과적으로 전도할 수 있습니다."
마치 주님이 아무것도 모르시는 것처럼 분통을 터트리며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존, 나는 너를 이 교회에 데려와 그 목사를 섬기게 했다. 내가 그 목사에게 맡긴 사역의 연장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나는 너를 그 사람의 손발이 되라고 너를 불렀다. 이 교회의 책임자로 세운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존, 내가 너로 이 목사를 섬기게 한 그 기간에 대해 심판 날 네가 내 앞에서 맨 먼저 할 말은 올랜도에서 학생들을 얼마나 많이 구원했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네 위에 세운 목사에게 얼마나 충성했느냐 하는 것부터 심판받을 것이다."
그래서 즉시 반항적 태도를 회개하고 담임목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존 비비어입니다. 하나님은 제가 목사님의 권위에 반항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가 큰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리더들을 불러 보아 자신감 있고 열정이 담긴 목소리로 "얘들아, 기쁜 소식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해 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일을 시작하고 추진할 뻔했어. 성령께서 담임목사님을 통해 우리 교회의 방향이 셀 그룹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어. 그래서 파티가 취소되었다."
아이들도 모두 기쁨으로 수용하여 아무 문제 없이 마무리되고 그 24명 대부분이 후에 전임사역자로 훌륭하게 사역하게 되었습니다.
"부르심에 대한 순종"이 무슨 의미입니까?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나님이 부르신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때때로 우리의 생각과 강하게 부딪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음성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강권적으로 들릴 때는 "순종"이 필요합니다.
필연적으로 순종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시는지 이유를 모를 때도 있습니다.
이유를 모를 때는 순종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근거한 것이라고 성경이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다"라는 사실입니다.
믿음이 우리의 이성과 상식에 늘 반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따르기에는 버거울 경우가 많을 뿐이지요.
우리가 인도하심을 따라 역동적이고 흥미진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자 원한다면 성령님께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령이 말씀하시도록 기회를 드리는 사람은 연속적인 모험을 경험합니다.
우리의 삶에 전율이 일어날 만한 깜짝 놀랄 만한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