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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端의 追憶 #118, 동방교의 사람들(Ⅱ)
-풍운(風雲)의 사나이 이봉상 갈렙전도사-
그를 ‘풍운(風雲)의 사나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른뜻이 아니다. 생김새는 날카로웠으나 표정은 온순했고 태도는 겸손했으며 풍기는 인상은 학구적이었다. 실제로 그는 학부출신의 인텔리로 당시 세칭 동방교 신도들 내에서는 보기드문 인재감이었다. 그런 그가 좁은길, 세칭 동방교에서 남긴 족적은 가히 남다르다. 폐쇄적인 집단의식 속에 외부와 차단된 은둔의 종교였던 이단사이비 세칭 동방교의 허구를 내부에서부터 붕괴시킨 장본인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 지방별로 순회자들이 나가서 교주의 지시를 전달하고 곧 닥아올 말세의 불심판을 강조한 공포심을 부채질 한 후 지성(헌금)을 수금해서 서울의 모처로 돌아오면 그것을 일괄해서 2대 교주 노영구에게 전하고 교주의 지시를 순회자들에게 전달하던 지방순회자들의 총책을 맡았던 그가 행했던 일련의 조치들이 훗날 동방교의 은어(隱語)적 표현방식대로 말하자면 위도각도를 변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좁은길을 ‘참길’ 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교주 ‘이래 노광공’을 창조주요 재림주라고 굳게 믿고 그의 차남 ‘아브넬 노영구’를 성자 하나님이라고 떠 받들면서 그들 1,2대 교주에게 인생을 걸었던 지방순회자들에게 동방교의 적나라한 허구적 실체를 알려주고 본인들이 나아갈 길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비밀스런 이단사이비의 장막을 활짝 열어 제쳤으며 그 지방별 순회자들에 의해 해당 지방의 파송전도사들에게 동방교의 허구적 실체가 알려지게 되었고 제갈길을 찾아가도록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위의 3형제 중에서 나와 연배가 비슷한 막내동생의 후일담 하나, 그의 형이 동방교 장학사업의 일환으로 서울에 소재한 어느 신학교를 다니면서 학업을 계속 하다보니 세칭 동방교의 이단 사이비 허구성을 확연히 깨닫게 되었고 그 무렵에 심정적으로 동지적 관계에 있던 몇몇 동방교의 전도사들과 함께 동방교가 가짜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선포하고 좁은길(세칭 동방교)를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곳을 떠난이후 지명수배중에 있던 2대교주 노영구를 잡아 관계당국에 넘기기위해 그의 형과 함께 노영구의 뒤를 추적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노영구는 동방교의 신자들과 관계 수사 당국자들에게 소재가 알려진 동방교의 대기처(집단숙소)에 적을 두지않고 여신도중의 한 명을 빈집초월(무단가출)시켜 신분위장을 위해 신혼부부 행세를 하면서 셋방을 얻어 동거행각을 하고 있었는데 노영구가 이리저리 피해다니던 그런 시절에 간발의 차이로 놓친 일이 몇번 있었다고 한다. 그때 만일 그를 잡았더라면 멱살을 잡고 땅바닥에 패대기 쳐서 수사 당국에 넘겨야 했었는데... 하고 통탄하고 있었다. 그는 태권도의 고단자였다.
(異端의 追憶 #107, 동방교의 장학생 남미선교사 중에서)
사태는 급박해지고 세칭 동방교 피해자들의 집단소송이 발생하고 그것을 수습할 인재들은 동방교를 떠나가 버렸고 교주 노광공이 사망하고 없으니 창립교주 노광공의 아들이었다는 것 밖에는 2대 교주로서의 카리스마나 행적은 전혀 없었던 ‘아브넬 노영구’는 수사당국의 지명수배를 당해 도피신세가 되었고... 그러한 시기에 발생한 갈렙전도사 이봉상 사건은, 오갈데가 없는 골수분자 대기자(무단가출하여 동방교의 집단합숙소에 거주하는 신도)들을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다보니 반강제적으로 서로 짝지워 결혼시키고, 생때같은 아이들을 빈집초월(무단가출)시켜 껌팔이나 시키지 말지 그 허울좋은 장학사업으로 분식(粉飾)을 하게 되고, 그래도 아직 미련스레 남아있는 전도사들에게는 적은 월급이나마 지급하면서 교역자를 시키는 등 크레믈린 같았던 동방교의 체제변화에 대한 단초를 제공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기처(동방교의 집단합숙소)내에 은둔하고 있던 골수 대기자 신도들과 지방의 평성민 신도들에게는 사실의 전파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어 그 거짓과 불법, 만행의 내막이 잘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완의 태풍으로 끝날 수 밖에 없었다. 좁은길을 나가더라도 입만 다물고 있으면 구원받는다는 이단사설에 철저히 세뇌당한 마약이 아직 풀리지 않았기도 했겠지만 사이비 이단사설에 맹종하는 일반신도 평성민들의 반발도 만만찮을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당시의 순회자 대다수와 대부분의 파송전도사 본인들만 동방교를 떠나게 되어 찻잔속의 태풍으로 끝나 버렸지만 그때 바뀐 위도각도의 시스템은 지금도 유효하게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거짓과 불의 위에 세워진 사이비 시스템일지라도... 그래서 지금의 세칭 동방교를 이끌고 있는 부류들 중에는 당시 천지분간을 못하던 학생신도였거나 당시의 사태를 체감하지 못하고 지방의 교회에 출석하던 평성민들이거나 당시의 사태와 동떨어져 대기처내에 깊숙히 은둔해 있었던 대기자나 연단선님(무단가출하여 껌을 팔던) 출신들이 대부분이다. 구시대의 거짓과 불의, 종교적 만행과 실정법상의 범행등 그 내막을 체감하지도 각성하지도 못한채 세월만 보내다가 오갈데가 없어진 그들이 2대교주 노영구의 사후, 주인없이 남겨진 재물(그속에는 내가 바친 지성-헌금-도 엄청 새끼쳐서 포함되어 있는) 위에 올라타고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면서 신분을 세탁하여 남녀불문하고 세칭 동방교의 본질(노광공을 섬기는)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기독교적 호칭을 흉내내어 목사네 전도사네 하면서 이단사이비 소집단의 영웅심리에 함몰되어 그 세력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그들을 상면(相面)하여 보면 이 21세기 대명천지 정보화시대에 우물안의 개구리 같은 폐쇄성과 당달봉사 까막눈 같은 흑암속에서 이단사이비의 확증편향(確證偏向)적 마약에 취한 고집불통으로 그들의 행색이나 자태는 참으로 가관 그것이다.
차이나 스타일 복식의 노광공, 지금도 세칭 동방교에서는 이 사진을 실물 크기로 확대하여 대형사진틀을 만들어 비밀스런 공간에 세워놓고 출입 할 때마다 합장하여 인사하고 숭배하는 자들도 있다.
(이단의 추억 # 2, 세칭 동방교의 주요 용어설명 중에서)
자신도 미망에 사로잡힌 장님인 것을 모르는 체로 남까지 구렁텅이의 깊은 늪으로 끌고 들어가 영원한 파멸로 밀어 넣는 우주적 공해인 이단사이비 종교집단, 그 미신적인 이단사이비 조직을 청산하지 못하고 그것을 종교라고 위장한다면 그런 종교란 그야말로 백해무익한 아편이 될 수밖에 없는데 그들은 아직도 여생을 그곳에 바치고 있다.
(이단의 추억 # 13, 기록을 이어가면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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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학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다가 서울 용산의 '수원정'으로 올라오라는 지시를 받고 나는 세칭 동방교의 본부격인 용산 '수원정'으로 올라가게 되었을 때 나와 인수인계를 한 전도사가 명명(세칭 동방교에서 지성-헌금-을 바치고 받는 새 이름)이 ‘갈렙’인 이봉상씨였다. 수년 후 이분도 2대교주 노영구의 부름을 받고 서울의 대기처로 들어가 충성스럽게 일하다가 세칭 동방교의 허구와 기만을 깨닫고 그만 출가하여 스님이 되어 수도에 정진, 어느 사찰의 주지가 되신 분이다.
(이단의 추억 # 22, 주학교회 중에서)
이분은 부산인근의 세칭 동방교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었다. 부산을 포함해서 경남북일원의 세칭 동방교 교인들은 가끔 모이는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거의 개인사를 알뿐 아니라 멀리 있는 신도라도 안면 정도는 터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정재덕 요나단목사가 서울에서 이분을 부산으로 데리고 왔던 것이다. 한국외국어대 영어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농협에서 근무했으며 부인은 서울에서 모여중의 영어교사를 한다고 했다. 어떤 경로를 밟아 누구에게 전도를 받아 세칭 동방교에 입교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빈집초월(세칭 동방교에 충성하기 위해 무단가출하여 집을 나오는 것을 말하는 세칭 동방교의 은어-隱語)을 했기 때문에 가족과 멀리 떨어지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부산으로 보낸 것으로 추정할 뿐 자세한 내용을 묻는 것도 금기시 되어있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그냥 지내고 있었는데 내가 주학교회를 맡고 있을 때도 숙식은 '초량12교회'에서 했기 때문에 '초량12교회'에서 한솥밥을 먹고 숙식을 같이하면서 서로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는데 내가 서울로 올라가면서 나의 후임으로 주학교회를 맡게 된 것이다.
(이단의 추억 # 58, 이환스님 중에서)
부산의 주학교회에서 나의 후임으로 일하던 이봉상 갈렙전도사가 드디어 2대교주 노영구의 부름을 받고 세칭 동방교의 본부로 올라와 사주(四柱)목사와 중간간부들이 없어진 자리에 노영구 2대교주를 바로 보필(?)하는 지근거리에서 일하게 되었다. 순회자들이 각 지방을 나누어 매 주일 해당지역으로 가서 교주의 지시를 하달하고 지성(헌금)을 모아오면 이봉상씨가 이들을 은밀한 장소에서 만나 모두 보고를 받아 취합하여 교주에게 보고, 전달하고 지시를 받아와서 하달하는 중요한 일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이단의 추억 # 59, 한창 시끄럽던 그때 중에서)
노영구가 2대교주가 된 후 세칭 동방교 내, 외부의 여러 가지 사건(인터넷검색자료 #1)에 연루되어 지명수배를 당해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는 기존 세칭 동방교의 간부들이 수배되거나 투옥되었으며 기갈이 세어서 다루기 힘든 일부 간부들은 지시라는 명목으로 다시 부를 때까지 본래의 자기 집이나 절간 등으로 가 있으라고 내 보내었던 시기라 그 빈자리에 2대교주 노영구를 최측근에서 보좌하던 명명이 갈렙이고 본명이 이봉상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나이는 나보다 몇 년 연배라고 짐작되지만 사람이 온순하고 학구적이었다. 대학을 나와 결혼도 하고 직장생활 하던 중 어떤 연유로 세칭 동방교에 들어와 빈집초월(무단가출)하여 나와는 절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당시 부산지방의 세칭 동방교 지교회인 ‘주학교회’에서 일하고 있던 이봉상 갈렙전도사를 서울로 불러올려 최측근에 두고 2대교주 노영구가 직접만나 지시를 하달하고 그 지시를 하부조직에 전달하고 전국 지교회에서 거둬들이는 지성(헌금)을 직접 교주에게 전달하는 등 최측근에서 보좌하던 중 세칭 동방교가 가짜요, 사이비 이단종교라는것을 알게 되어 회의를 느끼고 이분은 그 후 세칭 동방교를 떠나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이단의 추억 # 71, 유스도, 김 여사에 대한 소고(小考) 중에서)
어찌해서 스님이 되셨는가?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다. 이야긴즉 이렇다. 세칭 동방교에서 한창 시끄럽던 그때(별도의 설명이 필요한 부분) 머리도 식힐 겸 어느 절간으로 바람을 쐬러가서 산사의 뒤편 조용한 마루턱에 걸터앉아 쉬고 있는데 뒤쪽에서 갑자기 “어허 아깝도다∼! 아깝도다∼!” 하는 소리가 들리더라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는데 또 “어허 아깝도다아∼! 아깝도다∼!”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뒤를 돌아다보니 어느 노(老)스님이 죽장을 짚고 서서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길래 이 스님이 말씀하셨는가 보다 하고 “스님 누구보고 그러십니까” 하고 물으니 그 노(老)스님 왈 “누구긴 누구라, 중이 되었어야 할 사람이 그러고 앉았으니 어찌 아깝지 않으리. 어허 아깝도다아∼!” 하고는 가 버리더라는 것이다. 그 순간에 문득 자기를 뒤돌아보니 자기가 분명 스님인데 그러고 앉아 있더라는 것이다. 어떤 종교체험의 무아경이었던가 보다.
(이단의 추억 # 58, 이환스님 중에서)
그래서 의논 끝에 불가에 출가하기로 하고 사내아이 둘의 교육비는 할아버지(이봉상씨의 부친)가 뒷바라지 해주기로 했으며 생활은 교사인 부인이 책임지기로 하고 이봉상씨는 세칭 동방교를 청산하고 안양에 있는 삼막사로 출가해서 수계 받고 받은 법명은 이환(떠날離자, 꿈幻자)이라 받았더란다. 지금은 아들 둘 모두 장성해서 서울대를 졸업했고 부인은 퇴직해서 강원도 어는 해변 언니 집에서 지내고 있으며 결혼한 두 아들은 명절 때마다 부부동반해서 이곳 절의 아버지에게 인사하러 온다고 한다.
(이단의 추억 # 58, 이환스님 중에서)
창업교주가 사망하고 없는 세칭 동방교를 무작정 끌고 나가기에는 역부족이라, 불안한 진로의 타개책으로 앞으로는 빈집초월(무단가출)한 대기자및 각 지방에서 전도사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결혼도 시키고(그때까지 대기자들은 결혼이라는 게 없었다) 차츰 일반 기성교회처럼 운영방법을 바꾸어 나가거나 어떤 영력 있는 단체나 법사에게 맡겨 운영하거나 하는 방안을 심도 있게 고려하는 중이었다고 한다. 여하튼 피해 집단의 고소고발, 지명수배, 창업교주가 사망하고 없는 세칭 동방교의 진로불안 등으로 긴장도가 높아진 이봉상씨가 머리도 식힐 겸 어느 절간으로 바람 쐬러 떠나서 산사의 뒤편 조용한 마루턱에 걸터앉아 쉬고 있는데 뒤쪽에서 갑자기 “어허 아깝도다아! 아깝도다!” 하는 소리가 들리더라는 것이다. ‘한창 시끄럽던 그때’란 이런 골치 아픈 시절을 말하는 것이다.
(이단의 추억 # 59, 한창 시끄럽던 그때 중에서)
이런 와중에 2대교주 노영구의 행동이 제약을 받게 되므로 이봉상씨가 중간에 나서서 대신 보고를 받고 교주의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세칭 동방교의 2대교주 노영구는 피해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때 노영구는 서울의 J 여고와 E 여대를 다닌 얼굴 반반한 여신도 한사람(세칭 동방교의 명명은 유스도)을 빈집초월(무단가출)시켜 동거하고 있었다. 그녀는 일반 기독교 집안 장로의 딸이었다. 세칭 동방교에 전도되어 출입하던 그녀를 노영구가 눈여겨 보아오면서 좋아하던 사이였고 후에 불러내어 동거하게 되었던 것이다. 감히 누구의 명이라고 거절할 수 있었겠는가. 이즈음 이봉상 갈렙전도사는 세칭 동방교내의 중요한 소임을 맡아 일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내가 이게 무슨 짓인가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하여 세칭 동방교내에서 전설처럼 전해오는 이적기사가 있었다는 곳에 사람을 보내어 사실을 알아보게 한 결과 여러 가지가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더라는 것이다.
(이단의 추억 # 59, 한창 시끄럽던 그때 중에서)
세칭 동방교에서는 후일 ‘이봉상 사건’이라는 것이 터지게 되는데 2대교주 노영구의 바로 측근에서 일을 보면서 매주 전국의 순회자들을 서울의 비밀스런 장소에서 만나 전국에서 수금한 지성(헌금)을 챙겨 받아 2대교주 노영구에게 전달하고 각종 지시, 시달사항을 순회자들에게 전달하던 이봉상 갈렙전도사가 교주 노영구의 동거 행각, 각종 잡종교리로 뒤범벅이 된 비성서적이고 비상식적인 행태, 주장하는 이적기사의 탐문결과 알게 된 허구, 무단가출 연단선님들의 껌팔이 행상, 일부 이탈신도들의 관계당국 진정사건등으로 인해 좁혀오는 수사압박등 세칭 동방교의 사이비 이단성을 깨닫고 전국의 순회자들에게 사실을 실토하고 각 순회자별로 맡은 지역에 내려가 전도사들에게 이러한 내용을 사실대로 알려 그들이 각자의 판단대로 처신하거나 그래도 좁은길(세칭 동방교)이 참길 이라고 믿어 계속 남기를 원하는 사람은 남아서 적은 월급이라도 받으면서(그때까지는 아무도 월급 받는 사람은 없었음) 계속 전도사 일을 할 사람은 하고 혼기가 찬 사람들은 결혼도 하도록 길을 터 주도록 하자는 의논 결과, 많은 전도사들이 그때 세칭 동방교의 사이비 이단성과 허구를 깨닫고 떠나게 되었던 사건을 말하는데...
(이단의 추억 # 12, 김인경 입다목사 중에서)
노영구는 갓 결혼한 신혼부부인 것처럼 신분상의 위장도 할겸 유스도를 빈집초월(무단가출)시켜 이미 알려진 세칭 동방교의 각 대기처(천국을 가기위해 이 땅에 임시로 머물며 대기하는 곳, 집을 나온 세칭 동방교 신도들이 집단으로 머무는 곳을 말하는 은어-隱語)를 택하지 않고 따로 집을 얻어 한곳에 오래 거주하지 않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도피성 동거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렇게 숨어 지내면서 충성된(?) 이봉상 갈렙전도사등 몇 사람들을 내세워 세칭 동방교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이단의 추억 # 71, 유스도, 김 여사에 대한 소고(小考) 중에서)
어느 날, 부산지방의 세칭 동방교 주학교회에서 일하다가 2대교주 노영구의 부름을 받아 서울의 대기처(천국을 가기위해 이 땅에 임시로 머물며 대기하는 곳, 집을 나온 세칭 동방교 신도들이 집단으로 머무는 곳을 말하는 은어-隱語)로 올라가 그의 최측근에서 일하게 된 이봉상 갈렙전도사는 그 일을 미리 알고 있었던 관계로 “이제 ‘할머니’가 생길 것 같다” 라는 아리송한 말을 하고 있었다. 그때는 무슨 소린가 난해했지만 유스도 김 여사는 족보로 치면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할아버지(2대교주 노영구)의 부인이니 할머니가 아닌가, 자칭 하나님(노광공)의 며느리요 성자 하나님(2대교주 노영구)의 마누라가 되어 이 땅에서 성자 하나님(?)과 살을 맞대고 살았던 유스도 김 여사, 그녀도 이제 70줄의 밑자리를 깔았으리라, 그리고 자칭 하나님의 자식들을 이 땅에서 낳고 살아가며 온갖 만고풍상을 겪었으리라. 우주만물을 한손에 요리할 것만 같았던 자칭 하나님들(초대교주 노광공과 그의 아들 2대교주 노영구)도 이 땅에서 요절, 단명으로 생을 마감하지 않았던가.
(이단의 추억 # 71, 유스도, 김 여사에 대한 소고(小考) 중에서)
지금도 세칭 동방교내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이봉상 갈렙전도사를 엄청 나쁜 사람으로 선전하고 욕을 퍼붓고 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 ‘75년 이봉상 사건’이 터졌을 때 부산, 경남지방에서 그것을 잘 수습하여 막지 못한 책임이 김인경 입다목사에게 있다고 하면서 김인경 입다목사는 지옥에 갔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후에는 다시 지옥에서 건져 올렸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 . . , 지옥에 집어넣었다 꺼냈다도 마음대로 하는 재미있는 이단사이비 종교집단의 세계. .
(이단의 추억 # 12, 김인경 입다목사 중에서)
세칭 동방교 내부조직에 말세와 불 심판을 비롯한 공포심과 위기감을 불어넣어 방대한 대기처(천국을 가기위해 이 땅에 임시로 머물며 대기하는 곳, 집을 나온 세칭 동방교 신도들이 집단으로 머무는 곳을 말하는 은어-隱語)의 대기자들과 일반 신도들을 이끌어 갈 만한 카리스마가 없었던 2대교주 노영구는 각 지방의 세칭 동방교 주요 거점 교회마다 믿을만한 신도중에 밀정을 심어놓고 순회자의 일거수일투족과 설교내용등을 기록하여 상부에 보고하라는 밀명을 내려놓고 비밀리에 감시체계를 가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직운영의 한계를 느끼고 영적 지도력이 있는 외부 인사에게 세칭 동방교 조직을 맡겨서 위탁 관리하는 방안, 대기처안의 남녀 대기자(가족과 생이별하고 무단가출해서 가족과 연락을 끊고 세칭 동방교 안으로 들어와 생활하는 신도들을 통칭하는 동방교의 은어-隱語)들끼리 결혼시켜 외부로 내 보내는 방안, 일반 제도권 교회 식으로 교역자들에게 적은 월급이나마 지급해 가면서 운영하는 방안, 선교를 빌미로 외국으로 무작정 출국시켜 개척하라는 등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하게 되는데 이때 학구적이고 충성스럽던, 부산의 주학교회를 나와 인수인계한 이봉상 갈렙전도사가 서울 본부로 불려 올라가 2대교주 노영구를 보필하면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데 이때 그는 세칭 동방교의 여러 가지 기밀을 알게 되고 몰라도 되는 것 까지 다 알게 되어 버렸다.
그의 이야기에 의하면 세칭 동방교의 일반 신도들은 아무도 모르는 부산 해운대의 세칭 동방교 어느 주택에는 마당을 파고 금괴를 묻어 두었는데 그것을 다시 파서 묻어 두었던 금괴를 찾아오기도 하고 노광공의 이적기사가 있었다는 곳의 실상을 상세히 알아본즉,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등 세칭 동방교의 많은 허구와 기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세칭 동방교의 새로운 운영방안을 두고 순회자들과 대기자들을 설득하고 의논하는 작업을 하는 와중에 회의를 느껴 세칭 동방교를 청산하고 불가에 출가, 안양 삼막사에서 수계를 받고 여생을 스님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부산의 주학교회를 책임 맡아 전도사로 일하고 있다가 서울의 세칭 동방교 본부격인 용산 소재 '수원정'으로 부름을 받아 올라갈 때 그 후임 전도사로 온 사람이 바로 이봉상 갈렙전도사다. 요즈음 세칭 동방교에서 소위 ‘이봉상 사건’이라고 일컫는 바로 그 주인공이다. 아마도 이분에 대해서도 다른 여타 이단사이비 종교집단들이 실상을 알고 회의를 느껴 탈출한 이탈신도에 대하여 퍼붓는 숱한 중상모략을 뒤집어씌우고 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다.
(이단의 추억 # 58, 이환스님 중에서)
이환스님,
떠날 이(離) 자, 꿈 환(幻) 자, 이환스님.
삼막사에서 수계 받고 서해바닷가 절집의 주지스님이 된
내 친구 이환스님.
젊은 날 어느 한 시절
한솥밥 먹고 뒹굴다가 소식이 끊긴지 30여년,
친구는 주지스님이 되어 나에게 나타났다.
30여년 만에 만나 법당 부처님 앞에 앉아
우리는 회포를 풀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자네와 나는 아홉 번의 전생인연이 있네"
나는 잘 모른다.
단지 그가 말했을 뿐이다.
그의 부음을 들었다.
허약한 육신이 결국 방황을 끝냈는가.
그의 말 데로라면 이생은 10번째의 인연,
만일 11번째의 인연이 온다면
나는 단연코 그에게 복음을 들으라고 강권하리라.
잘 가거라, 그대여. . .
죽음이란 한조각 구름이 멸하는 것일 뿐.
(이단의 추억 # 62, 자미대제의 여섯째 공주 중에서)
첫댓글 제가 고 2쯤 되었을 때 소위 이봉상 사태가 터져서 어수선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이리교회는 골수분자였던 송계선(드다)씨가 담임전도사로 있었기에 무사(?)했고, 군산과 전주교회는 흔들거리다가 우여곡절 끝에 군산교회는 일시 폐쇄되었다가 정말덕이라는 여자 장로가 막노동을 하면서 사귄 사람을 주축 으로 산비탈에 단칸방 교회를 개척하여 명맥을 유지하다가 지금은 사라지고 말았더군요. 전주교회도 지금은 제 후배들이 주축이 되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나이는 먹어가지, 발전은 없지... 앞길이 막막한데도 혹시나?하며 노광공의 불심판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그들을 볼 때 참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카페의 멤버중에 '우공'이라는 필명을 쓰시는 분이 세칭 동방교의 전주출신이신데 혹 아시는 사이인가요? 어린 시절 동방교에 빠졌다가 비교적 일찍 탈출해서 지금은 어느 대학에 교수로 재직중이라 하셨는데 소상한 이야기를 카페에 올린적이 있습니다.
우공이라는 필명으로는 전혀 어떤 분인지 짐작이 되지 않네요. 글고 동방교의 특성상 타교인과의 교류를 막았기에 제가 알지 못하는 분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공님은 세칭 동방교의 전주교회 출신으로 중학시절에 동방교에 빠졌다가 요행히 비교적 젊은 나이에 동방교를 탈출했다고 하였으며 지금은 모두 동방교를 탈출한 당시의 동방교 친구들과 아직도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잘 아는 처자 송O덕, 납달리가 세칭 동방교의 전주교회 전도사로 일하던 시기였다고도 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