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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두산태안사
지금은 태안사에 전하지 않지만 태안사의 암자인 성기암에서 제작 봉안된 지장보살도(1739년)와 성기암 칠성도(4폭, 1739년)가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태안사에 소장된 목판은 청허당대사집(1666년), 대승기신론소(1681년), 제경회요(?)이다. 태안사의 문헌 기록은 동리산태안사사적(금세기 초)과 태안사사적(1943년)을 들 수 있는데 이를 통해서 1684년부터 1948년까지의 역사가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고 있어 태안사 연혁을 살피는데 참고가 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광자선사가 32칸으로 넓혀 지었으나 고려시대 중기에 송광사가 조계종의 본산지로 지위를 굳혀 따로 제금났고, 조선시대에는 어느절이 겪었던 것과 마차가지로 불교를 억누르는 정책 바람을 탈 수 밖에 없었으나 효령대군이 머물며 왕가의 온당으로 삼기도 하였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줄곧 옛날의 영화로움을 되찾지 못한채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일제시대에는 도리어 화엄사의 말사로 격하 되었다. 그나마 6.25전쟁때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절에 딸려 있던 건물 세채가 불에 타 버렸고 지금의 대웅전은 1969년에 옛 모습을 본따서 새로 지은 것이다. 그러나 뜰에는 돌로 만들어진 혜철 스님의 부도와 광자선사를 기리는 탑과 비가 이끼 낀 채로 남아 있어 이 절의 연조가 오래됨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는 태안사는 도 문화재 자료 23호로 지정되어 있고 경내에는 태안사 바라 등 9점의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 또한 태안사로 들어가는 1.8km의 계곡은 봄에는 신록,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과 울창한 녹음, 가을에는 짙게 물들은 단풍이 아름다운 산책로로 수많은 관광객이 즐겨 찾고 있다. 지도를 꺼내놓고 보면 태안사 뒤편 해발 752.9미터의 우뚝 솟아 있는 산은 봉두산으로 표기돼 있다. 그런데 이 산 안에 깃든 태안사 일주문 현액에는 '桐裏山 泰安寺(동리산 태안사)'라 되어 있다. 왜 이처럼 이름이 다를까, 그것이 의문이었다. 앞서 인용한 태안사 안내글에서 '동리산파'라는 말이 거푸 나온다. 하지만 동리산과 봉두산은 전혀 연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산이름이 아무렇게나 지어지고, 함부로 바뀌어 불릴 까닭이 없다.
동리(桐裏)란 오동나무 속이란 뜻이다. 오동나무는 봉황이 서식하는 나무이다. 따라서 그 오동나무 속은 얼마나 포근하고 아늑할 것인지 능히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니까 태안사가 자리잡은 곳은 마치 아늑한 오동나무의 줄기 속처럼 주변 산세가 포근하게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동리산으로 불렀던 것이다. 봉황이 서식하는 오동나무 줄기 속과 같은 주변 산세 가운데 으뜸 봉우리는 봉황의 머리 곧 봉두산(鳳頭山)이라고 부를만하다.
태안사로 찾아드는 2.5㎞의 아주 깨끗하고 아늑한 오솔길에서 산사를 찾기 위한 마음의 정화를 얻고도 남음이 있다. 절에 이르는 길을 이처럼 깨끗하게 보존하고 있는 사찰의 속깊은 배려도 예사롭지 않다. 이곳에 태안사를 중창하고 동리산파를 개창한 도선국사 스승 혜철의 부도비에는 '수많은 봉우리, 맑은 물줄기가 그윽하고 깊으며 세속의 무리가 들어오는 경우가 드물어 승려들이 공부하기에 좋다"고 씌어 있다. 참으로 신성한 도량이다.
동리산의 글자 그대로 뜻은 오동나무의 줄기 속이라는 것이지만, 불가에서는 봉황이 오동나무 열매를 먹고 산다는 신성한 곳을 뜻한다. 태안사는 구산선문 중에 유일하게 선원이 남아 있는데, 이곳에서 하안거 동안거를 하겠다고 찾아드는 선승들이 너무 많아 사찰에선 힘이 부칠 지경이라는 것. 이른 아침 사찰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보게 되면 마음의 평안이 저절로 찾아질 것 같다. 더구나 능파각에라도 올라 쉬노라면 얼마나 좋을까.태안사의 보물은 사찰 경내에만 있지 않다. 봉황이 깃드는 오동나무 줄기 속과 같은, 사찰을 한 바퀴 두르고 있는 뒷산을 돌아오는 것에서 진정한 매력과 기쁨이 깃들어 있다. 태안사 앞 연못에서 올려다보면 사찰을 감싸고 있는 부드러운 육산이 마치 연꽃잎과 같다. 오대산의 축소판이라 할까. 실제로 이곳 동리산, 또는 봉두산은 바위를 거의 찾아볼 수도 없는, 잡목림만 무성한 아주 완벽한 육산이다.
봉두산은 그리 높은 산이 아니다. 사찰에서 왼쪽, 오른쪽으로 등산로가 나있는데, 어느 쪽이든 정상과 연결된다. 성기암 쪽으로 올라 충혼탑 쪽으로 한 바퀴 돌아올 수도 있고, 그 반대 방향으로 진행해도 상관이 없다. 이 산길을 한 바퀴 돌아오는 데는 3시간30분 정도면 넉넉하다. 등산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감탄할 정도로 부드럽다. 걷기에 좋은 오솔길이다. 정상이나 능선의 조망 또한 아주 빼어나다.봉두산은 웅장하거나 산세가 빼어난 산은 아니다. 기암괴석이나 거대한 암벽 등 특출한 모양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이곳처럼 부드러운 산길이 달리 또 있을까 하는 느낌이 앞선다. 마치 양탄자를 깔아놓은 위를 걸어가는 듯하여 콧노래가 절로 나올 정도이다. 오솔길을 감싸고 있는 잡목숲이 얼마나 정겨운지 잎을 모두 떨군 겨울에도 포근한 느낌이다. 사찰 입구 오솔길에서 사찰 뒷산을 한 바퀴 도는 오솔길, 모두 놓치지 말아야 한다.봉두산을 한 바퀴 돌아오면 자연히 선암사에서 조계산을 오르는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조계산 등산로는 선암사와 송광사를 잇는 것이 대표적이다.
태안사 옛길
꿈 속을 거니는 듯한 길이다. 어떤 시인은 이런 길을 데리고 살고 싶은 길이라 표현했지만 나는 동심으로 돌아가 갖고 놀고 싶은 길이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이 길은 하루 종일 걸어도 피로하거나 지겨워지지 않는 길이다. 이름 모를 산새소리를 들으면서 가는데 나무를 쪼고 있는 딱따구리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딱따구리를 카메라에 담아볼 욕심으로 숲속으로 들어가자 발자국소리에 그만 날아가 버렸다. 아쉽고 미안한 느낌이다. 딱따구리의 아침식사를 방해했다는 생각에서다. 동시에 내 머릿속에는 만공선사와 동자승과의 딱따구리 노래 이야기가 머리를 스친다. 구전되어오는 딱따구리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뒷동산의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잘 뚫는데 우리 집 멍텅구리는 뚫어진 구멍도 못 뚫는구나” 어린 동자승이 마을에 내려가 뜻도 모르면서 이 노래를 배워 왔다.
만공스님 앞에서 노래를 배워 왔다고 자랑을 하면서 부른다. 스님의 방 안에는 마침 대궐에서 심부름 차 들린 상궁나인들이 가득 있었다.동자승의 노래를 듣고 난 상궁나인들은 배를 쥐고 까르르 웃느라고 난리가 났다.만공스님 왈 " 참 좋은 노래로구나. 진리라는 것은 이미 뚫려 있는 것인데 우리 절의 멍텅구리들은 이미 뚫려있는 진리도 알지 못하는 구나” 그냥 웃고 넘길 수 없는 의미 있는 이야기다.이런저런 생각에 걷다보면 어느덧 태안사에 다다른다.내가 속세를 떠나 신선이 된 느낌이다. 어느덧 일주문을 만난다.
일주문에는 동리산태안사(桐裏山泰安寺)라고 쓴 편액이 걸려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태안사의 풍수가 한 눈에 다 들어온다. 동리산은 봉두산(鳳頭山)이라고도 불린다. 절 이름도 대안사(大安寺)로 불리어 오다 태안사로 바뀌었다. 동리(棟裏)는 오동나무숲을 뜻한다. 봉두(鳳頭)는 봉황의 머리이다. 봉황은 오동나무숲이 아니면 앉지 않는다고 하는 전설의 새다
관람포인트
1) 해회당 안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바라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지름이 92cm 되는 이 바라는 효령대군이 시주한 것이라고 합니다.
2) 적인선사조륜청정탑(적인선사 부도탑)은 우리나라 최초의 부도라고 합니다. 역사적 사실도 중요하지만 부도에 담겨있는 깨달음과 선사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나온 아름다움도 감상할 수 있습니다.
3) 6․25때 불에 타지 않은 전각은 일주문과 능파각입니다. 산사의 미는 바로 능파각안에 담겨 있습니다.
4) 선원이 들어선 자리 오른쪽 계곡안에는 신숭겸 장군을 제사하는 제단이 있습니다. 능파각 앞에는 6․25때 전사한 경찰 충혼탑이 높게 솟아 있습니다
5) 태안산 숲길은 가장 아름다우며 걷기가 가장 좋은 오솔길입니다. 오솔길에는 4개의 다리가 각각 화두를 품고 있으니 걸어보시기 바랍니다.
6) 새로 조성한 연못이 있습니다. 연못의 역할이 무엇인지 물어보십시오.
창건배경 및 역사
“동리산태안사사적(桐裏山泰安寺事蹟)”에 의하면 창건 당시의 이름은 대안사(大安寺)였으며, 천보원년(天寶元年 壬午 : 新羅景德王元年, 742) 2월, 세 명의 신승(三箇神僧)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혜철대사가 이곳에 주석하기 이전에 이곳에 사찰이 있었다는 것을 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의 기록에 의해 알 수 있다. “有舍名曰大安其寺也”라는 기록인데 사(舍)라 칭한 것으로 보아 이 당시의 규모는 매우 초라한 규모였을 것으로 보인다. 혜철대사 주석 이후 태안사는 매우 번창하게 되되었다. 혜철대사가 이곳 동리산을 선문의 장소로 택한 이유에 대해 “谷城郡 동남쪽에 산이 있어 桐裏라 하였고, 이 가운데 작은 집이 있어 大安이라 이름하였다. 그 절은 수많은 봉우리가 가리어 비치고 하나의 물줄기가 맑게 흐르며, 길은 멀리 아득하여 세속의 무리들로 오는 이가 드물고 경계가 그윽이 깊어 승려들이 머물기에 고요하였다. …… 선사가 석장을 들고 와서 둘러보고 머물 뜻이 있어 이에 敎化의 장을 열고 자질 있는 사람을 받아 들였다”라고 하였다. 즉, 경치가 좋으며, 사회와 격리되어 있어 수행하기에 좋다는 것이 이곳에 선문을 연 계기가 되고 있다.
위치와 찾아오는 길
태안사는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에 위치하고 있다. 심산유곡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만큼 깊은 산중이다. 태안사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은 여러 방향에서 가능하다.
호남고속도로의 경우 우선 석곡 나들목 혹은 송광사 나들목에서 18번 국도를 통해 보성강을 따라 태안교까지 진행해서 우회전 한 후 약 5㎞정도 진입하면 태안사 입구에 쉽게 도달할 수 있다. 또, 호남고속도로 서순천 나들목을 이용해 태안사에 도달할 수 도 있다. 17번 국도를 따라 구례방향으로 약 10㎞ 정도 진행하면 괴목 삼거리에 도달한다.
태안사 가람배치
전체적인 사찰 배치는 산간의 지형을 적절히 이용해 축대를 쌓아 올리고 이곳에 각각의 건물을 배치했다. 대부분의 선종사찰들이 넓은 평지에 자리를 잡고 이곳에서 중심건물을 중심으로 횡으로 배치하는 방법이 일반적이다. 성주사, 보림사 등이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태안사는 이와 다르게 오히려 화엄종사찰들이 선호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 일주문(一柱門) - 지방유형문화재 제 83호 ]
태안사 일주문은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두 개의 굵은 기둥 위에 앞면 1칸의 규모로 세웠으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단순한 맞배지붕이다. 기둥에는 양쪽 모두 앞뒤로 보조기둥을 세웠다.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 있는 다포식이다. 앞·뒷면의 기둥 사이에는 3구씩, 옆면에는 1구씩 공포를 배치하여 전후좌우가 포로 꽉찬 느낌이 들며, 매우 화려하다.
일주문 내부의 천장 아래에는 용의 머리를 조각하여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일주문 내부의 천장 아래에는 용의 머리를 조각하여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앞면에는 ‘동리산태안사 (桐裏山泰安寺)’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 일주문은 조선< 朝鮮 > 숙종< 肅宗 > 9년(1683) 각현선사< 覺玄禪師 >가 중수한 후 다시 1917년 영월선사< 暎月禪師 >가 중수하였고, 1980년 보수하였다. 일주문의 건축 양식은 단층 팔작집으로 전후< 前後 > 주칸< 柱間 >에는 3구< 三具 >, 측면< 側面 >에는 1구< 一具 >의 공간포< 空間包 >를 짜올린 다포식< 多包式 >으로 앙서< 仰舌 >로 된 살미첨차들로 내< 內 >·외4출목< 外四出目 >의 공포< 공包 >를 짜서 극히 화려하다. 1950년 6·25사변 때 이 일주문< 一柱門 >과 능파각< 凌波閣 >만이 소실되지 않고 남게 되었다.
일주문은 사찰과 속세의 경계를 나타내고 있는 문으로 이곳을 통과하면 공식적인 사찰의 영역이 된다. 따라서 일주문은 지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을 깨끗이 하고 천상의 세계에 들어갈 준비를 하라고 암시하고 있다. 능파각을 지나 좁고 운치 있는 길을 따라 산을 얼마쯤 오르면 태안사 일주문에 도착하게 된다. 이 건물은 937년 광자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 후 소실되었던 것을 조선 숙종 9년(1683)에 각현선사가 다시 지은 후, 1917년에 영월(映月)선사가 중수하셨고 1980년에 또 다시 보수하였다.
기단은 외벌대를 사용했고, 초석은 막돌초석을 사용했다. 기둥은 하부가 두껍고 상부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형상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만든 민흘림기둥이 아닌 원목을 약간만 가공해서 사용했다는 말이 적절할 듯하다. 굵은 기둥 2개 외에 4개의 기둥이 더 사용되었는데 매우 세장하기 때문에 이것을 구조적인 기둥이라 하기는 무리가 있다. 이들은 상부의 지붕과 공포를 지지하는 보조기둥이라 함이 타당하겠다. 기둥상부에는 창방과 평방을 결구하고 그 위에 다포의 공포를 짜 올렸다. 공포는 외4출목을 사용했고 쇠서의 모양은 4제공까지 앙서를 사용했고, 독특하게 5제공은 앙서와 수서를 한 부재에 장식했다.
대웅전(大雄展)
태안사지 편사에 의하면 광자대사 당시 태안사의 중심 건물은 금당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금당의 당주 또한 약사여래철조좌상(藥師如來鐵造坐像)이라 기록되어있어, 역사의 흐름에 따라 그 예불 대상 또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태안사의 중심 건물은 대웅전이라 현판을 걸었고, 그 예불 대상 또한 석가모니불로 바뀌어 있다. 원래 이곳에 있던 대웅전은 한국전쟁 당시 화재로 사라졌으며, 현재의 건물은 다시 복원한 건물이다.
대웅전은 정면 5간, 측면 3간의 평면을 가지고 있으며,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만들어진 건물이다. 기단은 말끔하게 다듬은 장대석을 바른층으로 쌓아올렸고 중앙에 기단을 오를 수 있도록 계단을 설치했다. 초석 또한 다듬은 초석을 사용했는데 원형 평면에 쇠시리를 조각해 사용했다.
초석 상부의 기둥은 모두 배흘림기둥을 사용했고, 중앙에 위치한 4개의 기둥 상부에 용머리를 조각해 외부로 돌출시켰다. 기둥과 기둥은 창방을 이용해 결구하고 있으며, 그 상부에 평방을 얹어 다포공포를 짜 올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공포는 외3출목, 내4출목을 이루고 있는 다포를 사용했다. 기본적으로 다포건축은 각 출목에 2개의 첨차를 사용하고 가장 바깥 쪽 첨차는 하나만을 사용하는데, 이 대웅전의 경우 내부 가장 바깥 출목에 첨차를 2개 사용한 점이 특이하다. 또한 첨차와 살미가 교차되는 모든 지점(주심은 제외)에 소로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역시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다.
가구는 1고주 5량을 사용했고, 측면에는 팔작지붕을 조성하기 위한 충량을 각각 2개씩 사용했다. 천장은 우물천장을 주로 사용하고 있으며, 반자틀에는 연꽃무늬를 단청했고,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중앙어간에는 4짝 여닫이문을 매달아 놓았고, 그 외 4간은 2짝 여닫이문을 사용했으며, 창호는 소슬빗꽃살을 사용해 조성했다.
대웅전 아미타 삼존불
대웅전의 본존불로 하품중생의 수인을 하고 있는 아미타불을 모셨다. 아미타불은 무한한 광명과 수명을 지닌 부처라는 뜻으로 무량수불, 미타불로 불리는 부처로 서방의 극락을 관장한다고 한다. 따라서 부석사 무량수전과 같이 불단을 동향으로 안치해 참배자들이 서향을 하도록 꾸미는 경우도 있다. 또한, 좌우협시보살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후불벽 또한 본존불과 어울리게 하품중생의 수인을 하고 있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한 극락회상도를 그려 놓았다.
적묵당
일주문을 지나 진입로를 따라 마당으로 들어서면 대웅전과 좌우요사(해회당, 적묵당), 그리고 보제루에 의한 넓은 공간이 형성되어 있고, 이곳이 사찰의 중심공간이 된다. 현재의 모습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사찰의 배치를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중앙마당은 아무런 탑이나 석등을 부가하지 않은 채 비어있는 공간으로 꾸몄으며, 대웅전, 좌우요사 및 보제루를 건립해 닫혀진 공간을 형성했다.
천불전
태안사는 초창부터 한국 선종사찰의 중심이었고, 이런 모습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부속된 암자 또한 9곳에 이르는데, 천불전, 성귀암, 봉천암, 가은암, 명적암, 삼일암, 보현암, 계현암, 봉서암, 야은정사가 그들이다. 이들 중 천불전은 본 사찰 영역과 매우 인접해 있으며,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어, 암자로 불리기보다는 본 영역의 일부인 것처럼 생각된다. 천불전은 본 영역 오른편으로 나있는 경사로를 따라 약 20m정도 오르면 넓은 영역이 나타나며, 이곳에 천불전, 산왕각, 요사가 건립되어 있다. 이 암자의 중심건물이 천불전으로 정면 3간, 측면 2간의 평면을 갖고 있으며, 겹처마,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기단은 막돌허튼층쌓기를 이용해 만들었으며, 정면과 오른쪽 측면에 기단을 오를 수 있는 계단을 만들었다. 초석 역시 막돌을 사용했으며, 기둥은 원통형 기둥을 사용했다. 공포는 1출목의 주심포식 건축이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 화반을 놓았다.
가구는 무고주 5량의 가구를 적용했다. 내부 천장은 종보 이하는 연등천장을 만들었고, 종보 위로는 우물천장을 가설했다. 지붕은 맞배지붕 형태를 하고 있으며 측면에 커다란 풍판을 달았다. 내부에는 “┏┓”형태로 불단을 조성했는데, 내부공간의 2/3 정도를 차지할 정도 거대하게 조성했고, 배면으로 갈수록 높이를 높였다. 이곳 중앙에 항마촉지인의 석가모니불을 모셨고, 그 외에 모든 불단은 작은 부처님 상으로 가득 메웠다.
보제루(普濟樓)
조선시대 사찰에는 많은 경우 주불전 앞에 루를 건립하고 있다. 루가 있음으로 해서 주불전 정면에 닫힌 마당 공간이 형성되게 되고, 주불전에서 마당을 바라볼 때 관람자의 일정 시야를 가려주기 때문에 훨씬 안정된 마당공간을 느낄 수 있게 하고 있다. 태안사의 경우도 주불전 앞에 보제루를 두고 있다. 태안사의 경우는 외부에서 보제루의 측면을 돌아 진입할 수 있도록 동선을 만들었다.
보제루는 도리통 5간, 양통 3간의 평면으로 구성되었으며,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기단은 자연석을 이용해 만들었으며, 초석도 막돌초석을 사용했다. 이 건물은 무고주 5량의 가구를 갖고 있다. 곧게 뻗은 대들보를 사용했고, 중심부를 위로 휘어 올라가게 만든 종보를 사용되었으며, 또한 화려하게 초각을 내어 만든 파련대공이 사용되었다.
공포는 출목이 없는 익공식을 택하고 있다. 살미는 하나의 앙서와 하나의 수서를 사용했고, 보머리 끝에는 봉황의 머리를 장식해 꽂아 넣었다. 내부는 보아지로 마감했으며 첨차는 초각을 내어 장식했다. 기둥과 기둥사이에는 처짐에 대비한 화반을 배치했는데, 꽃병에서 꽃이 피어오르는 모양으로 조각했다.
산왕각(山王閣)
태안사 부속 암자인 천불전 영역에 건립되어 있는 건물로 정면 1간, 측면 1간의 단간평면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천불전 오른편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건물로 상량문에 의하면 2001년 완성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삼성각
삼성각은 대웅전 왼편에 따로 석축을 쌓아 대지를 조성한 후, 이곳에 건물을 안치했다. 평면은 정면 3간, 측면 2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겹처마를 구성했으며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기단은 막돌허튼층쌓기를 이용해 조성했으며, 중앙에 삼성각에 오르는 7단의 계단을 만들었다. 초석 또한 막돌을 사용했고, 기둥은 원통형을 사용했다. 공포는 기둥위에만 짜서 올린 주심포식이고 초제공은 앙서, 2제공은 수서, 3제공은 운공형을 사용했다. 첨차는 마구리를 직절하지 않고 초각을 했으며, 내부는 보아지로 마무리했다.
능파각(凌波閣)
능파각은 태안사 사찰 본 영역을 진입하기 이전의 다리 역할을 하는 하나의 누각식 교량이다. 능파각이라는 이름은 계곡의 물과 주위 경관이 아름다워, 미인의 가볍고 우아한 걸음걸이를 의미해 지었다고 한다. 송광사, 선암사, 흥국사를 비롯해 이 지역 많은 사찰들이 사찰의 주 영역에 진입하기 전에 개울을 건너는 방식으로 사찰의 진입을 유도하고 있다. 이는 사찰의 본 영역에 들어가기 전에 세속에 관한 모든 일들을 물에 씻으라는 의미로 해석되며, 일종의 관정(灌頂)의식이 진행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능파각은 문성왕 12년(850)에 혜철선사가 처음 지었고, 고려 태조 24년(941년) 광자대사가 수리했다고 한다. 그 뒤 파손되었던 것을 영조 43년(1767년)에 다시 지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능파각은 정면 3간, 측면 1간의 방형평면을 가지고 있으며,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계곡의 양쪽에 석축을 쌓아 이 위에 굵은 보를 가로질러 걸치고 직각방향으로 또 다른 보를 가로질러 건물의 바닥 기본 틀을 형성하였다. 이 틀 상부에 굵은 목재를 다시 건너질러 이를 상부 기둥의 기초로 사용했다. 이 위에 기둥을 올렸고 상부는 창방으로 결구했다. 공포는 기둥상부에만 사용한 주심포식을 사용했다. 공포의 출목은 외1출목이며 내부는 출목 없이 보아지로 마감했다. 공포의 살미 형태를 보면 이미 쇠서와 더불어 쇠서 끝에 연봉을 조각하고 있으며, 최상부에 사용한 운공은 봉황의 모양을 조각하여 보머리에 꽂아 넣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전형적인 조선후기 공포의 모습이다. 공포와 공포사이에는 화반을 사용하여 처짐에 대해 보강했는데, 몇 가지 종류의 화반이 같이 보여 이 건물이 몇 번에 걸쳐 수리가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가장 오래된 듯한 화반은 화병에서 꽃이 피어오르고 있는 형상을 화반으로 이용한 것인 듯 하다.
가구는 무고주 5량을 사용했다. 3량 가구만으로 충분히 가구를 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나 5량을 사용했다. 따라서 중도리와 중도리 사이가 상당히 가까우며, 하나의 대공과 같은 부재로 중도리들을 지지하고 있고, 종도리 또한 이 부재로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약사전(藥師殿)
대웅전 오른편에 따로 높은 2단의 축대를 만들어 조성한 대지에 위치한 건물로 근래에 새로 지은 건축물이다. 평면은 도리통 3간, 양통 3간인데 어간이 협간에 비해 매우 크게 간이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정면 비례에 있어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측면의 경우, 이 정도 규모의 건축이라면 2간으로 충분히 건립이 가능하나 3간으로 간을 설정한 관계로 기둥배치가 너무 촘촘한 느낌을 준다.
기단은 낮게 구성했는데 막돌초석을 사용해 마감했다. 초석은 다듬은돌 초석을 사용했는데, 초석에 연꽃무늬를 조각해서 매우 화려하다. 기둥은 흘림을 주지 않은 원통형을 사용했고, 어간의 양쪽 기둥상부에는 용을 조각해 끼워 넣었다.공포는 외2출목, 내3출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제공, 2제공의 쇠서는 앙서형으로 마무리함과 더불어 끝에 연꽃을 같이 조각했다. 4제공의 위치에는 주간포의 경우 봉두의 형태의 운공을 사용했고, 주심포에서는 삼분두형의 보머리를 외부에 돌출시켰다. 가구는 무고주 5량을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내부는 우물천장을 사용했고, 종보 하부 높이에 이를 가설해 놓았다. 팔작지붕을 만들기 위해 내부에는 충량이 사용되었는데 좌우측에 각 2개씩 사용했고, 끝머리에는 용머리를 조각해 끼워 넣었다.
내부에 불단은 조성되어 있으나, 따로 닫집은 만들어져 있지 않다. 불단위에는 한 폭의 유화가 모셔져 있는데, 임창수(林昶壽) 화백의 그림으로 약사여래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전통 안료를 사용하지 않고 현대에 걸맞게 탱화를 번안해 그려 봉안한 예이다. 계속적인 전통의 고집만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적 요구사항에 맞춰 이를 조화시키려고 한 일례라 할 수 있다.
[ 태안사 동종(泰安寺 銅鐘) - 도지정 유형 문화재 제24호 ]
태안사 대웅전 안에 놓인 이 동종은 조선시대 전기 억불정책으로 불교가 많은 탄압을 받던 시기에 왕실의 도움없이 사찰 불사의 일환으로 조성된 범종이다.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부드럽게 한다는 음통과 종의 고리 역할을 하는 용을 새긴 용뉴가 있다. 그리고 어깨에는 1단의 연꽃무늬가 돌려 있고, 그 밑에 넓은 띠에는 방형 속에 연꽃무늬를, 아래에는 작은 원 속에 범자를 새겨 넣었다. 넓은 몸체에는 네군데에 사각형의 유곽이 있는데 그 주위는 당초문으로 장식을 하고 그 안에 9개의 유두를 연꽃속에 넣었다. 밑부분에도 어깨띠와 비슷한 넓은 띠가 있는데 연꽃무늬와 당초문을 새겨 넣었다.종 몸체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조선 세조 3년(1457)에 이 종을 처음 주조했으나 파손되어 선조 14년(1581)에 다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신라에서 고려시대로 이어지는 한국종의 독창적인 조형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이 종은 조선전기 동종양식의 과도기적 상황 속에서, 전통양식의 계승과 새로운 양식의 접목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제작과 관련된 명문이 뚜렷하게 양각되어 있으며, 주조기술도 비교적 좋은 편이다.
태안사 부도밭
일주문 오른쪽에 아담한 부도밭이 있다. 태안사를 중창한 광자대사(廣慈大師) 윤다(允多)의 부도인 광자대사탑과 탑비인 광자대사비를 비롯하여 몇 기의 부도가 있다.태안사가 간직한 보물 다섯 점 중에서 이 부도밭에 보물 두 점이 있다. 대안사광자대사탑(보물 제274호)과 대안사광자대사비(보물 제275호)다.
광자대사는 여선사의 뒤를 이은 동리산문의 제3대 조사로 동리산문을 크게 일으킨 선사이다. 법명은 윤다(允多)이고, 자는 법신(法信)이며, 광자(鑛慈)는 시호이다. 경주에서 태어나 8세에 집을 떠나 동리산에서 도선국사로부터 “도는 몸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부처는 곧 마음에 있는 것이니, 스스로 깨우쳐 찰라에 깨달음을 얻으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그 뒤 가야갑사(伽倻岬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다시 동리산으로 돌아와 적인선사의 법제자인 여선사의 법을 이었다. 뛰어난 법력으로 선풍을 크게 떨치자 신라의 효공왕(재위 897-912)이 가르침을 줄 것을 청하고, 또한 고려의 왕건도 사신을 보내어 초청하였다. 신라의 국운이 이미 다했음을 본 광자대사는 왕건의 부름에 따른다. 왕건이 크게 기뻐하면서
“임금에게 있어 국가의 행복은 무엇이고 백성의 행복은 무엇인가?”를 묻자
“오늘의 물음을 언제나 잊지 않는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광자대사는 고려 혜종2년(945)에 82세의 나이로 입적했다.이러한 광자대사의 사리를 보관해 놓은 곳이 바로 광자대사부도다.광자대사부도를 살펴보자.
[ 광자대사탑(廣慈大師搭) - 보물274호 ]
태안사 일주문 오른편 부도밭에 위치하고 있는 고려시대 초기 광자대사의 부도탑이다. 광자대사는 태안사의 2대 조사(祖師)로, 경문왕 4년(864)에 출생하여 혜종 2년(945) 82세로 입적하였다. 자는 법신(法身)이고 법명은 윤다(允多)이다. 이 부도는 광자대사가 입적한 지 5년이 지난 고려 초기 광종 원년(950년)에 세워졌다. 이 부도는 지대석 위에 하대석과 중대석 및 상대석으로 이루어진 기단을 두고, 그 위에 탑신과 옥개석 및 상륜을 올린 구조이다. 전체적으로 팔각형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지대석의 가장 아래 단을 상부와 틀어지게 구성하였음이 특징이다. 신라 말 고려 초에 유행하였던 부도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 예에 속한다.
지대석은 팔각형 평면으로 상부에 세 단의 쇠시리를 두어 기단받침으로 삼고 있다. 하대석은 상대석과 하나의 돌로 만들었으며, 상중하 세 단으로 구성했다. 하단(下段)에는 물결무늬와 더불어 날아가고 있는 용을 매우 화려하게 조각했고 그 아래 두 단의 쇠시리를 두어 지대석 상면의 쇠시리와 연속되는 기단받침을 이루도록 하였다. 구름과 용은 그 위가 구름 위의 세계, 즉 천상세계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새겨진 것이다. 중단(中段)은 지대석과 면석, 갑석으로 이루어지는 기단의 형식으로 만들었는데, 각 면에는 안상 2개씩을 새겼다. 상단(上段)은 각 면과 모서리에 하나씩 16엽의 연꽃을 복련(伏蓮)으로 새겨 상대석의 앙련과 대칭을 이루도록 하였다. 복련 위는 위로 올라가면서 좁아지는 3단의 쇠시리를 두어 중대석 받침을 이루고 있다.
중대석은 그 높이가 비교적 낮은 편으로 각 면에 상하는 직선, 양쪽은 반원을 이루는 윤곽을 만든 속에 안상을 새겼다. 중대석의 높이가 낮아 각 면은 옆으로 긴 형상을 지니므로 안상은 그에 맞추어 중앙과 좌우가 분리된 듯한 변형된 모습을 이루고 있다. 안상 속에는 다시 꽃을 새겼다.
상대석은 하나의 돌로 만들었는데, 형태상 상하 두 단으로 나누어진다. 아래는 앙련을 새긴 부분으로 아래에 3단의 쇠시리를 두어 받침으로 삼았으며, 하대석의 복련과 대칭을 이룬다. 연꽃은 각 면과 모서리에 하나씩 모두 16엽으로 연잎 속에 다시 꽃을 새겼다. 앙련 상부에는 연잎 사이마다 하나씩의 간엽(間葉)을 새겼다. 앙련 상부는 목조건축을 형상화한 탑신부의 기단을 이루는 부분으로 지대석과 면석 및 갑석으로 이루어지는 가구식 기단을 석조 부도에 맞게 번안하고 있다. 지대석 부분은 두 단의 쇠시리로 구성하여 받침으로 삼았다. 면석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각 면을 두 간으로 나누어 윤곽을 새긴 속에 안상을 새겨 넣었다. 갑석은 면석에 비해 돌출시켰고 그 위에 두 단의 쇠시리를 두어 탑신받침으로 삼았다.
기단부는 이 시기에 조영된 다른 부도에 비해 장식적인 내용이 많이 약화되었다. 또한 중대석 부분은 다른 부도에 비해 매우 낮게 만들어진 반면 복잡한 형태의 안상을 새기고 있다. 부도의 형식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는 현상이다.
탑신은 팔각형 평면의 목조건축을 표현하고 있으나 조각 수법이 경직되고 건축적 표현도 형식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모서리에는 기둥을 새겼고, 각 면의 상하에는 기둥 상하를 수평으로 연결하는 창방과 하인방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기둥과 창방 및 하인방은 탑신 각 면에 윤곽을 부여하는 의미가 강한데, 그 안쪽으로 다시 한 단의 쇠시리를 새겨 놓고 있어 그러한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고 있다. 정면과 후면에는 문하방과 상방, 문설주를 세 겹으로 새겨 문틀을 표현하고 그 중앙에 자물쇠를 조각했다. 그런데 문은 그 아래가 하인방에서 떨어져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 건축적인 사실성이 결여되고 있다. 문 양 옆에는 사천왕상을 새겼는데, 저부조로 조각수법은 같은 태안사에 있는 적인선사조륜청정탑의 사천왕상과 유사하다. 나머지 두 면에는 사천왕상의 조각과 같은 수법으로 탁자에 놓여 있는 향로를 조각했다.
옥개석은 다른 모든 부도들이 그러한 것처럼 모임지붕을 표현해 놓았다. 옥개석 하부에는 각 모서리에 추녀와 사래를, 각 면에 서까래와 부연을 조각했다. 서까래 아래쪽으로는 탑신과 만나는 부분에 만들어진 옥개받침까지 평탄하게 만들어진 부분이 있다. 다른 부도에서처럼 출목이 있는 공포대와 서까래와 부연, 추녀와 사래로 만들어지는 처마부를 표현하고 있으나 그 조각 내용은 매우 형식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특히 공포대를 이루는 부분의 모서리에 표현되었던 한대가 생략되고 있는 점은 이러한 형식화의 경향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옥개석 상면은 비교적 반곡이 심한 곡선형을 이루고 있으며 처마부에는 조로와 후림을 표현하였다. 기와골과 막새기와를 표현하였고 추녀마루를 강조했으며, 그 끝에는 굽새기와나 그와 유사한 장식기와를 올렸던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 약간 남아있다.
상륜부는 복발(覆鉢), 2개의 보륜(寶輪), 보개(寶蓋), 보주(寶珠)로 구성되어 있고, 조륜청정탑에 비해 과장된 크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 부도는 같은 태안사에 있는 적인선사조륜청정탑과는 시기적으로 100년의 차이가 있다. 그러한 시간의 차이만큼이나 두 부도는 조형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를 지니고 있다. 조륜청정탑이 전체적으로 안정된 비례를 바탕으로 소박한 조각표현을 하고 있는 반면에 광자대사탑은 전체적인 비례보다 그 장식적 표현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또한 세부적인 표현에 있어서도 적인선사탑은 목조건축의 내용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번안하고 있는 반면, 광자대사탑은 목조건축의 표현이 형식적인 것으로 변하면서 사실성이 결여된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광자대사의 일대기를 적은 광자대사비는 광자대사탑 바로 옆에 건립되어 있다. 비신(碑身)은 도괴되어 옆에 별도로 세워놓았는데, 훼손이 심하여 비문의 내용을 알아볼 수 없다. 그러나 여러 금석문 관련 문헌에서 비문에 대해 기록해 놓고 잇어서 비문의 내용은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1941년 펴낸 사적기에서 의하면 “1928년 중건 당시 광자대사비의 이수를 옮겨와 적인 선사비의 이수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어 적인선사탑비의 이수와 광자대사탑비의 이수가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아직 확실하지는 않으므로 앞으로의 연구가 필요하다.
귀부는 각각 세부에 수많은 조각으로 장식하고 있다. 머리의 표현에 있어서 매우 사실적이며, 목에 그려진 주름 무늬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또한 비를 받치는 받침 부분에는 구름무늬를 빼곡히 조각해 두었다. 등에는 아직도 거북의 무늬가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고, 꼬리는 하늘로 말려 있도록 조각되었다. 이수의 한 중앙에는 가릉빈가를 표시한 듯한 새 몸통이 조각되어 있으나, 얼굴부분은 사라져서 현재는 없다. 새 모양 조각 하부에는 이 탑비의 주인공 이름이 적혀있었을 것이나, 많이 파괴되어 있어 이를 확인할 수는 없다. 또 사방 모서리 부분에는 각각 용머리가 장식되어 있다. 이수의 정상부분에는 중앙과 좌우로 3개의 보주를 올려놓았다. 이것은 장식의 효과와 더불어 가릉빈가와 각 모서리에 조각되어 있는 용의 배경으로 작용하도록 조각한 듯 하다. 배면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조각을 했으며, 곳곳에 용의 몸통을 조각해 놓아 각 모서리에 조각된 용과 조화를 꾀하였다.
광자대사탑 옆에 놓인 탑비는 (해동금석원)의 기록에 의하면 높이 5.2척, 너비 3척으로 나타나 있는데 비신이 깨져 오른쪽 상부와 하부가 멸실된 비편이 귀부와 이수사이에 놓여져 있으나 판독이 가능하다. 비의 두께는 22cm, 자경은 3cm 정도로써 현재 보물 275호로 지정되어 있다.
광자대사비문
지관스님 번역, 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문고, 1994
유당(有堂) 고려국(高麗國) 무주(武州) 동리산(桐裏山) 대안사(大安寺) 광자대사비명(廣慈大師碑銘)과 아울러 서문
태상(太相) 전수례빈령(前守禮賓令) 원봉령(元鳳令) 겸(兼) 지제고(知制誥) 상주국(上柱國)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 신(臣) 손소(孫紹)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사찬(沙粲) (결락) 감(監) (결락) 사비어(賜緋魚) (결락) 는 비문을 쓰다.
대저 허공을 쳐서 메아리를 나타나게 하는 것은 진실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능력에 응하는 진실만은 취하고 소리를 감추려 한 것이니. 어찌 이것이 미혹에 처하는 술문(術門)이 아니겠는가. 비록 넓으나 피안으로 나아갈 수 없고, 비록 밝으나 그 경지를 넘기는 어려운 것이다. 지극한 이치가 그 가운데 있으니 그루터기만 지키게 하는 자는 견성할 수 없으며, 진종(眞宗)은 마음 밖에 있어서 규관(窺管)하는 사람은 심인을 전해 받을 수 없다. 여러 생(生) 동안 도아(道芽)를 심었으므로 비로소 다생(多生)의 법기(法器)를 주조하였다. 그리하여 불교가 발상한지 약 1천년 후에 비로소 중국으로 전래되었고, 그로부터 약 5백 성상을 지난 뒤에 우리나라 스님들이 중국으로 유학하러 가서 현철(賢哲)을 만나고 법을 전해 받아 귀국하였다. 그 중에는 칠정을 이어 받아 걸출하였으며, 혹은 십지를 쌓아서 높이 빼어났으니, 옛부터 희유할 뿐 아니라 지금도 존귀한데, 선과 교를 양전하여 쌍미(雙美)한 분이 계시니 곧 우리 스님이시다. 대사의 법휘는 윤다(允多)요, 자는 법신(法信)으로 경사(京師) 출신이다. 그의 조부모는 귀족으로써 고관(高官)을 역임하였으며, 효도와 의리를 소중히 여겨 충효의 본이 되었다. 이렇게 가문을 지켰지만, 난리가 나서 몰락하였다. 그러나 명성과 칭송은 많은 사람들의 귀와 귀로 들렸고, 입과 입으로 옮겨 자자하였다. 어머니는 박(朴)씨로 성품이 온화하여 사람됨이 정결하였다. 어릴 때부터 속되지 않았으며 미장(未長) (결락) 경(經) 성심성의로 불사를 닦아 산악과 같은 정기를 받고 잉태하고 또 어려움 없이 분만하였으니, 효감(孝感)을 말미암아 순산함이 마치 가을에 서리를 맞은 씀바귀가 쉽게 뽑히듯 산고없이 함통(咸通) 5년(865) 4월 5일에 탄생하였다. 대사가 처음 봉시(蓬矢)를 쏘는 날에 쌍주(雙柱)가 절윤(絶倫)하였다. 장차 강보(襁褓)의 나이를 지나 삼정(三亭)이 전려(轉麗)하여 (결락) 멀리 집 밖에 나가서 놀되, 항상 장소를 일정하게 하였고, 예의와 법도는 아무리 위급한 조차전패(造次顚沛)의 경우라도 예를 그르치지 아니하였다. 지극히 효도를 다하여 선침(扇枕)의 칭송은 어려서부터 고향 주변에 널리 알려졌으며, 추회(?灰)와 같은 민첩한 변재는 바람을 타고 멀리까지 퍼져갔다. 나이 겨우 7~8세에 이미 불교에 몸을 던져 수도할 뜻을 품었으니, 부모에게 와문(蝸門)을 이별하고 선교에 입문하기를 청하였다. 이 때 부모는 더욱 애절하여 배(倍) (결락) 전(前). 더욱 애정에 얽혀 허락하지 못하였다. 허락을 받지 못한 대사는 잠연히 실망하였고, 이를 본 어버이는 설득하되 “출가 수도하는 것도 이익이 없지 않으나 옹자(翁子)인 주매신(朱買臣)의 금의출세하는 것이 어찌 산승의 취납(?衲)인 누더기로 고행하는 것보다 낳지 않겠는가”하면서, 슬피 울며 거듭거듭 만류하여 뜻을 바꾸도록 하였으나, 어버이는 마침내 아들의 뜻이 굳고 굳어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허락하였다.
대사는 다음날 부모의 슬하를 떠나 (결락) 걷고 걸어서 구름처럼 사해로 행각하였다. 다니거나 머무름에 오직 외로운 자신의 그림자와 벗할 뿐이었다. 이와 같이 어느덧 염량(炎凉)이 바뀌어 수년이 지났다. 이로부터 다시 발걸음을 돌려 요동을 거쳐 길을 재촉하여 전라남도 곡성군 태안사가 있는 동리산으로 가서 상방화상(上方和尙)을 친견하였다. 서로 면목(面目)을 대하고 형용을 돌아보았으니 몇일 후 상방화상을 시봉하게 되었다. 화상이 말하기를 “(결락) 옛 사람이 말하되 마음이 오롯하면 돌도 가히 뜷을 수 있고, 뜻이 간절하면 땅에서 갑자기 샘물이 솟아 오르게 된다. 도는 몸 밖에 있지 않으며 부처님은 마음에 있는 것이다. 숙세(宿世)로부터 익힌 자는 순간인 찰나에 깨닫게 되고 몽미한 자는 만겁에도 생사에 윤회하여 벗어나지 못하니, 부처님께서 일러 주시되 ‘정신이 어두운 자는 재삼 여러 번 일러주어야 하지만 근기가 수승한 사람은 말을 생략한다’고 하였다.” 스스로 (결락) 가야갑신부(伽耶岬新敷)에서 구족계를 받은 후로는 다만 원숭이 같은 단단히 얽어메였고, 말 같은 의식 또한 놓아두지 아니하였다. 계를 받은 후로부터 유발(油?)을 기울어지지 않게 하였다. 계를 지키려는 굳은 마음은 주야로 한결같고, 수도하려는 강철같은 마음은 순간에도 쉬지 아니하였다. 대문과 창문을 열고 들어가지 아니하여도 대도를 보았으며, 곤륜산에 오르거나 여해(驪海)에 들어가지 않고도 쉽게 신주(神珠)를 얻었다. 도덕 또한 고매하여 아름다운 명성은 사방에 떨쳤고, 법을 배우고자하는 법여(法侶)들이 팔표(八表)로부터 모여 들었다. (결락) 법조(法祖). 서당지장은 혜철에게 전하였고, 혜철은 여(如)인 도선에게 전하였으며, 여(如)인 도선은 우리 광자(廣慈)스님에게 전하였으니, 즉 서당의 증손인 셈이다. 대사는 서당의 법통을 전해 받았으니, 수고롭게 서학을 하지 않고도 세상의 인연을 동성(東城)에 베풀었다. 참으로 실제가 본공(本空)한 줄 깨달았으며 (결락) 동인(東人)을 바른 길로 인도하였다. 무학(無學)의 종지인 선을 배우되 마침내 지야(祗夜)를 의지하고, 무사(無師)의 취지를 스승으로 하되 반드시 수다라를 가자(假藉)하였다.
드디어 일심(一心)을 닦는 자로 하여금 일음(一音)의 교리를 믿게 하며, 구결(九結)에 얽힌 사람으로 하여금 점차로 구업(九業)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여러 가지 방편으로 인도하였으니, 위력으로 사견을 꺾고 교화한 인연이 제령(?岺)에 두루하였으며, (결락) 심사구도(尋師求道)한 자취가 도야에 두루 닿지 아니한 곳이 없었다. 행각 중에 있으면서도 항상 본사(本寺)를 잊지 아니하다가 고산(故山)으로 돌아왔다. 이틀째 되던 날 밤에 갑자기 산적이 절에 침입하여 의물(衣物)을 빼앗고자 상방화상의 방으로 들어왔다. 대사는 우연히 뜻밖의 일을 당하였으나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좌(禪座)에서 움직이지 아니하였고, 위봉(威鋒)을 당하여서는 오히려 그들의 악한 마음을 버리게하여 지혜의 칼로써 마구니들을 항복시켰다. 적도들이 (결락) 충돌함이 없었다. 대사는 도적들에게 죄란 본래 없는 것이라 하여 허물을 탓하지 아니하되 스님의 말이 끝나자 도적들은 공손히 예배하고 물러갔다. 이 광경을 지켜본 대중들은 감탄하였다. 그날 밤 꿈에 한 전장(戰將)이 법당에 들어가 칠구(七軀)의 물타나(勿陀那)를 보았는데, 맨끝에 있던 물타나가 대사를 향하여 (결락) 중인(重忍)이란 두 글짜를 적었다. 꿈을 깨고 놀라 일어나 세수한 다음 단정히 앉아 생각하되 “이상하고 이상하다. 백일천하에 의심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고, 밤중에 나비의 꿈을 꾼 것은 고인이 겪은 사실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되 ‘한번 참는 것은 영원한 기꺼움을 얻게 되고, 또 한번 참는 것은 세상을 살아감에 편안함을 얻게 된다’고 하였으니, 중인이란 두 글자가 어찌 비범한 일이겠는가!” (결락) 대사는 이로 인하여 길이 참선하며 오래도록 이 절에 있게 되었다. (결락) 광파(廣波) (결락) 선의 근본을 통달하였고 성인의 말씀을 초연히 여겼으며, 성색(聲色)의 소굴을 떠나 시비(是非)의 관문을 벗어나게 되었다. 납자(衲子)들은 (결락) 스님의 문 앞에 가득하고 의리를 사모하여 인(仁)을 따르는 이들이 구름과 안개처럼 모여들었다. 참선학도하는 자들은 빈손으로 와서는 마음 가득 채워 돌아갔다. 효종대왕은 대사가 산곡에서 드날리는 도풍을 흠모하여 윤한(綸翰)을 보내어 원하옵건대 지혜의 눈을 뜨게 해 주시고 나라 또한 복되게 해주기를 발원합니다. 이미 이때에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져 자주 병화가 일어났는데, 궁예는 어지럽게 난동하고 견훤은 자칭 왕이라하여 이름을 도용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천명이 왕건에게로 돌아가 고려라는 새나라를 건립하게 되었다. (결락) 한때 낭연(狼煙)이 높이 올라 왕래하기가 고통스러웠으므로 스님들은 따로 왕을 도울 길을 찾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신성대왕(神聖大王)이 배를 타고 성주가 되어 한대(閒代)의 명군(明君)으로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세속을 편하게 하는 굉기(宏機)를 풍부하게 가졌으며, 불법을 보호하고 진리를 계합(契合)하는 신술 또한 능통하였다. 나라 일을 보는 여가에는 마음을 항상 현문(玄門)에 두었다.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대사의 명성을 널리 들었기에 랑관(郞官)으로 하여금 어찰(御札)을 가지고 스님이 계시는 동리산으로 보내어 청하되 “도덕을 앙모한 지 이미 오래되오니 스님의 거룩한 모습뵙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면서 “스님께서는 이미 연로하셔서 보행하시기 힘들 터이오니 말을 타고 구중(九重)으로 오신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하였다.
대사가 말씀하시되 “노승이 출가한 이래로 이제 80에 이르기까지 아직 말을 탄 적이 없습니다. 산승도 역시 왕의 국민이니 어찌 감히 왕명을 거역하겠습니까”하고 석장망혜(錫杖芒鞋)한 보행으로 연하(輦下)에 도착하니 임금이 크게 기뻐하면서 의빈시(儀賓寺)에 모시고 몇 일 동안 편안히 쉬시게 한 다음, 상전(上殿)으로 영입하였고 임금 스스로 상(床)에서 내려와 공손히 영접하여 빈객의 예로서 대우하였다. 군신들이 이를 보고 그윽히 놀랐다.
임금이 묻되 “옛 스승이 말하길 마음이 곧 부처라하니 이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대사가 대답하되 “만약 열반의 경지에 도달한 이는 불(佛)과 마음에도 머물지 아니합니다” 다시 임금이 묻되 “부처님께서 어떤 경지를 지나셔야 이 열반의 세계에 이르게 됩니까?”하였다. 대답하되 “부처님은 지나는 과정이 없으며, 마음도 또한 그대로일 뿐 경과함이 없습니다”하니, 재차 묻되 “짐이 하늘의 도움을 받아 난세를 구제하기 위해 흉폭한 무리들을 주살하였으니, 어떻게 하면 생민(生民)을 잘 보호할 수 있겠습니까?” 대답하되 “전하께서 오늘의 묻는 그 마음을 잊지 않으시면 국가가 부강하고, 생민이 매우 행복할 것입니다” 또 임금이 묻되 “대사는 어떠한 덕행으로 중생을 교화하십니까?” 대답하되 “신승은 힘이 없어 자신을 구제함은 가능하지만, 어찌 감히 다른 사람의 결박(結縛)을 풀어줄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이때 왕은 옥음(玉音)이 낭랑하여 구름이 일어나는 듯한 질문을 꺼리지 아니하였고, 대사는 사변(四辨)이 물이 흘러가듯하여 걸림없는 것이 마치 병에 물을 쏟아 붇는 것처럼 답하였으니 육조(六朝)스님의 뜻인 도에 저촉하려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스님의 말씀은 (결락) 삼도(三道) (결락)라 하고, 지혜도 또한 (결락) 거야(去也)라 하였으니, 이상과 같이 문답한 것을 자세히 실으려면 글이 너무 번다해지므로 총괄하여 간략하게 기록하는 바이다. 엎드려 생각하오니 (결락) 이제 상(上)께서 (결락) 대왕(大王)의 위엄이 양요(兩曜)와 같고 설법하는 소리는 건곤에 미치며, 덕이 빼어나 두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백성을 다스리되 사당(邪黨)이 없게 하고 오연(五衍)에 귀의하였으니, 어찌 중인도의 파사익왕이 삼보를 존중한 것과 다르다고 하겠는가! 서천(西天)의 계일왕(戒日王)과 함께 정법으로 나라를 일으켜 세움과 동시에 문(文)을 닦고 근본을 심은 임금이니, 이와 같이 위대한 성군은 고금을 통해 드물게 볼 수 있다고 하겠다. 대사 (결락) 삼배를 하고 물러가면서 흥왕사에 모시도록 명하였다. 그후 황주원(黃州院) 왕욱(王旭) 랑관(郞官)이 멀리서 스님의 청풍을 앙모하고 편지를 보내 제자가 되어 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자 희망한다고 하였다. 드디어 열반을 수년 앞두고 산간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의령(內議令) 황보숭(皇甫崇)과 태상(太常) 충량일감(忠良日監)이 대사의 공양구를 살피되 마치 집시자와 같이 하므로 대사는 더욱 마음이 불안하였다. 어느 날 임금께 고하되 “사슴이 들판에서 자유롭게 놀 듯 산중에서 조용하고 편안하게 있도록 놓아달라”고 간청하였다. “외람되어 어명을 받아 왕성으로 내왕하니 점차 정에 끌려 부자유함과 헌학양제(軒鶴梁?)로도 비유할 수 없나이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신승의 작은 생각을 가납하시어 그름처럼 고산(古山)에 돌아가서 마치 고기가 깊은 물에서 노는 것과 같이 하여 주시면 그 은혜 참으로 크다 하겠나이다”하였다. 이 같은 스님의 간청을 들은 왕은 허락하여 동리산으로 돌아가게 하고 본도의 수상에게 명하여 전결과 노비를 헌납하여 향적을 제공토록 하였으며, 외호의 가풍을 잊지 아니하고 항상 팔행의 예를 펴서 돈독한 단월이 되어 불교의 보존과 유지의 의무를 받아서 각기 진뇌(陳雷)를 본받았다. 진실론 (결락) 구분(舊分)
대사는 개운(開運) 2년(945) 전몽(?蒙) 대황락(大荒落) 2월 2일 대중을 불러 놓고 말씀하되 “생이란 유한한 것이며, 멸(滅) 또한 그 시기가 미정한 것이다. 내 이제 떠나고자 하니 각기 뜻있게 잘 살도록 하라. 부처님께 ‘파라제목차(波羅提木叉)는 곧 너희들의 위대한 스승이라’하였으니, 나도 또한 이 말씀으로 너희들에게 당부하노니 너희들이 이를 잘 준수한다면 내가 죽는 것이 아니다.”하고 향을 피우고 염불을 하게하고 합장하고 입적하니 속년은 82세요, 승랍은 66이었다. 이 때 스님들은 통곡하면서 나루터의 다리와 큰짐의 들보가 무너졌다 탄식하였고, 선백들은 애통해하면서 법륜의 문이 영원히 닫혔다고 슬퍼하였다.
심지어 새들마저 답답해하고, 짐승들은 슬퍼하였을 뿐만 아니라 평소 귀를 시원하게 해주던 (결락) 잔잔하게 흐르는 석간수도 애성(哀聲)으로 변하였고, 다년간 눈을 즐겁게 하던 산에 덮힌 자욱한 구름도 모두 참담한 빛으로 변하였으며, 곤충과 식물들까지도 애통해 한 이 사실을 지필로 어찌 다 적을 수 있으리오.
당시의 이러한 기조를 왕에게 보고하였더니 임금이 본산에 대사의 탑을 세우게 하되, 경비는 모두 국가에서 부담하게 하고, 역부로는 부근 주민을 동원토록 하였다. 공사를 마치고 나니 장엄이 주밀하고 조탁(彫琢)도 매우 우아하였다. 상수문인들이 다시 조정에 건의하되 “선사신(先師臣) 아모가 다행하게 임금님의 도움을 입어 탑을 세웠으니, 국은이 망극하여 생전과 사후에 걸쳐 함께 영광이오나 아직 탑에 따른 비명이 없어 선사께서 생전에 쌓은 도행이 점차로 (결락) 윤몰(淪沒)할까 두렵사오니 비를 세우도록 윤허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였다. 왕은 수비(樹碑)를 허락하시고 미신(微臣)인 저에게 비문을 지어 스님의 선화를 선양토록 하라 명하셨으나 소(紹)는 칠보시(七步詩)를 지을만한 재주도 못되며 학문도 오거(五車)의 책도 읽지 못한 변변치 아니한 선비이므로 굳게 사양하였지만 마지 못하여 주생과 같이 근부(斤斧)를 잡고 녜(?)씨를 칭찬하는 것이니 부득이하여 억지로 엮어 비문을 지었다.
명(銘)하여 가로되
위대하신 태안사 광자대사여!
진리의 방편을 요달하시고
깨치신 그 법문 심오하오며
지극한 그 이치 깊고도 깊네.
그의 덕화 해동에 널리 전하고
도덕은 해가 뜨는 동국을 덮었네.
자재한 그 행적 구름과 같고
지혜는 달빛이 맑은 물에 비치듯
파란과 이기는 하늘을 찌르듯
평등한 그 마음 대원경(大圓鏡)같아
갑자기 오늘에 열반하시니
어디서 다시 만나 선을 들으랴!
계족산 산중에서 열반하시니
운수(雲水)처럼 곳곳으로 행각하다가
이곳을 열반지로 정하고 나서
지금까지 이곳서 정진하셨네.
호랑이의 싸움을 그치게 하고
개미를 구제하듯 자비가 깊어
강설(講說)을 할 적에는 돌들도 경청하였고
나무도 그를 향해 점두(點頭)하였다.
어느 날 꿈에 양영간(兩楹間)에 누었다가
신 한 짝만 남겨놓고 홀홀히 갔네.
스님의 분상(分上)엔 설할 만한 법 없건만
광자란 그 칭호가 있게 되었네.
삼업(三業)은 청정하여 연꽃과 같고
육진(六塵)은 탕제(蕩除)되어 청량과 같아
행각을 마치고 동리산으로 돌아와
모든 대중 한 곳에 모아 놓고서
수발다라 비구가 최후 법 듣는 듯
살타파륜이 법을 구함과 같도다.
현묘한 그 말씀은 넓고도 깊어
대혜(大慧)의 지혜라야 헤아릴 수 있네.
내 이제 피안에 오르려 하니
겁화(劫火)가 이내 몸을 태울 것일세.
대중들은 우러러 쳐다보다가
하늘을 부르면서 애통하였네.
이 비석 영원토록 우뚝 솟아서
영원히 이 비문도 남아 있기를
애오라지 비명을 기록하노라.
광덕(光德) 2년 세차 경술 10월 15일 세우고
문민(文旻)이 글자를 새기다.
[ 태안사 바라 - 보물956호 ]
바라란 절에서 종교적으로 사용되거나 춤을 출 때 사용된 타악기이다. 냄비 뚜껑같이 생긴 두 개의 얇고 둥근 놋쇠판으로 만들며, 놋쇠판 중앙의 볼록하게 솟은 부분에 구멍을 뚫고, 끈을 꿰어 그것을 양손에 하나씩 잡고 서로 부딪혀서 소리를 낸다.
이 바라는 지름 92㎝의 큰 작품으로 제작 방법이 우수하며, 국내에서 제일 큰 작품으로 손상이 거의없이 내려왔다. 이 바라에는 효령대군이 세종과 왕비, 왕세자의 복(福)을 빌기 위하여 만들었다는 글이 남아있다. 크기로 보아 사람이 들고 사용하지 못하고 매달아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지름이 92㎝인 국내 최대의 거품(巨品)으로서 제작기법(製作技法) 또한 우수하며, 사전품(寺傳品)이나 손상(損傷)이 거의 없다. 다행히 작품에 명기(銘記)가 있어 제작년대(製作年代)(정통십이년(正統十二年), 세종이십구년(世宗二十九年), 서기일사사칠년(西紀一四四七年))나 인명(人名)(효령대군(孝寧大君)) 등을 알 수 있다. 이 바라는 효령대군이 세종과 왕비(王妃), 왕세자(王世子)의 수복(壽福)을 빌기 위하여 발원 제작한 것으로, 크기로 보아 사람이 손에 든채 매달아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 적인선사조륜청정탑(寂忍禪師照輪淸淨塔) - 보물273호 ]
이 탑은 태안사의 개산조사라 할 수 있는 혜철(慧徹)대사의 부도이다. 적인선사 혜철은 신라 원성왕 1년(785년)에 태어나 경문왕 1년(861년)에 입적하였다. 따라서 이 부도는 적인선사가 돌아가신 861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부도는 현 태안사의 가장 높은 곳에 마련한 대지에 있으며, 부도 옆에 탑비가 부도를 바라보면서 위치하고 있다. 또한 부도 앞에는 계단을 마련하고 배알문(拜謁門)이라는 현판을 단 문을 두어 부도가 놓인 대지의 격을 높이고 있다. 부도는 지면에 바로 놓인 것이 아니라 기단을 마련한 위에 모셔졌다. 기단은 원래 가구식으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우주가 제 위치에 있지 않는 등, 많은 부분이 교란되어 있다. 또한 기단 주변으로 초석들이 위치하고 있어, 부도를 중심으로 한 부도전이 꾸며졌을 것으로도 추정된다. 기단 정면에 위치한 갑석의 형태가 특이하게 만들어져 있는데 이것은 계단을 설치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부도는 지대석 위에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으로 이루어진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탑신과 옥개석, 상륜부를 두어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팔각형평면을 기본으로 구성한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부도 형식을 지니고 있다.
지대석은 방형인데, 2단으로 만들었음이 특색이다. 또한 상단의 지대석은 모를 살짝 죽인 점도 다른 석조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하대석은 팔각형 평면으로 상하 두 단으로 만들었다. 아래 단이 넓은데, 각 면에는 2개씩의 안상을 새겼다. 하대석 상단은 아래에 비해 위를 넓게 하여 각 면이 사다리꼴을 이루도록 함으로서 형태적인 안정감을 강하게 부여하고 있다. 각 면에는 안상 없이 사자를 고부조로 새겨놓았는데, 뛰어노는 모습, 웅크리고 있는 모습 등 매우 역동적인 자세를 하고 있다. 중대석은 아래에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평면 크기가 줄어드는 쇠시리 4단을 마련한 위에 중대석 본체를 만들었다. 4단의 쇠시리 중 맨 아래 단의 쇠시리를 다른 단에 비해 높게 만들어 안정감을 강하게 부여하고 있다. 중대석 본체 부분에는 각 면에 안상 하나씩을 새겼다.
상대석은 크게 두 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 단은 탑신이 놓인 곳의 격을 높이기 위해 연화좌를 표현한 것으로서 아래에 3단의 층급받침을 새기고 각 면에 3개씩 모두 24엽의 앙련을 새겼다. 연꽃은 3중으로 구성한 위에 間葉까지 새긴 화려한 모습이다. 연꽃 위에는 가구식으로 구성된 기단을 형상화하고 있다. 팔각형 평면으로 지대석과 갑석, 그리고 그 사이의 면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면석에는 우주나 탱주를 새기는 대신 각 면에 2개씩의 안상을 새기고 그 안쪽에 아래에서 피어오르는 꽃을 새겼다. 갑석 상면에는 3단의 쇠시리를 두어 탑신받침을 이루도록 하였다. 목조건축의 기단을 석조부도의 형식에 맞춰 번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탑신은 팔각형 평면으로 아래에 비해 위를 약간 좁게 만들어 형태적인 안정감을 부여하였다. 기둥과 인방, 문비 등을 조각해 팔각형 평면의 목조건축을 표현하고 있다. 각 모서리에는 기둥을 새겼고, 상하에는 기둥을 연결하는 수평재를 조각했다. 아래의 것은 하인방이 분명하나 위에 있는 수평재는 탑신석 상면에서 아래로 약간 내려온 곳에 위치하고 있고 그만큼 기둥이 위로 솟아있어 창방인지 상인방인지의 구분이 모호하다. 또한 이 수평재 위에는 중앙에 기둥형의 부재 하나씩을 두었는데, 수평재에 대한 해석에 따라 이 부재의 기능에 대한 해석도 달라질 수 있다. 탑신 정면과 후면에는 같은 모양의 문을 조각했다. 하인방에 의지해 기둥과 좀 떨어뜨려 문설주를 세웠고, 상부의 수평재와 좀 떨어뜨려 문상방을 걸어 장방형의 문틀을 만든 모습이다. 문설주와 문상방에는 양각(陽刻)된 선을 하나 더 그었고, 문설주와 문상방이 만나는 곳에는 사선(斜線)을 양각해 쌍사와 연귀맞춤을 연상시키고 있다. 문 중앙에는 자물쇠를 선각(線刻)으로 새겼다. 문 좌우에는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인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했는데, 풍화로 인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윤곽만 조각하고 있음이 특징이다. 나머지 두 면에는 사천왕상을 조각한 것과 마찬가지 수법으로 향로를 조각했다.
옥개석은 팔모지붕을 표현하고 있다. 옥개석 하부에는 각 모서리를 따라 추녀와 사래를 표현했고, 각 면마다 서까래와 부연을 촘촘히 조각해 놓았다. 서까래 아래쪽으로는 볼록한 부분이 1단의 쇠시리로 구성된 옥개받침까지 연속되고 있다. 이 부분의 모서리에는 살미로 보이는 부재가 양각되어 있다. 목조건축의 출목이 있는 공포대를 간략하게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붕 상면 역시 기와지붕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지붕면은 반곡이 심한 편이며 내림마루를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밖에 기와골과 막새기와까지 모두 표현했다.
가릉빈가
연곡사의 동부도와 북부도처럼 새의 목이 떨어져 나가 가릉빈가인지 봉황새인지를 정확하게 구별을 할 수가 없다. 이수의 네 귀퉁이에는 용머리가 새겨져 신성함을 더한다.
일주문에서 보면 아래로는 꽤나 넓은 연못이 있다. 연못의 중앙에는 작은 섬을 꾸미고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이 탑은 고려 초기의 석탑이다. 새로 만들어 끼운 부재가 너무 많아 아쉬움을 더한다. 섬으로 건너가는 나무로 만든 다리도 놓았다. 원래 이 탑은 부도밭 옆에 있던 것을 연못을 꾸미면서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렇게 연못을 꾸민 것을 두고 고찰의 무게를 깎았다고 비판하는 사람과 풍수상으로 볼 때 비보 차원에서 필요하다는 사람들로 말이 많았다고 한다. 내 풍수 실력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아무리 비보 차원이라지만 조잡한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대웅전을 나오면 오른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 천불전이 자리하고 있다. 천불전에서 오른쪽으로는 선원이 왼쪽으로는 염화실이 있다. 선원 앞에 높은 계단이 있고 계단을 오르면 배알문(拜謁門)이란 편액이 달린 작은 문이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편액의 拜謁門이란 글씨는 조선 후기 명필인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1770-1847)의 작품이다. 대둔사 천불전 출입문인 가허루의 현판글씨와 이미지가 비슷하다.
배알문 안으로 들면 정면에 잘생긴 부도가 나타난다. 이 부도야말로 태안사를 대표하는 얼굴이다. 바로 이 부도의 주인공이 태안사를 창건한 혜철선사의 부도인 적인선사조륜청정탑(보물 제273호)이다.
귀부꼬리
적인선사의 법명은 혜철(慧徹, 785-861)이고 일찌기 중국으로 건너가 서당 지장(西堂 智藏;735-814)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따라서 우리나라에는 서당 지장의 제자가 세 분이 있다.가지산문을 연 도의국사, 실상산문을 연 홍척국사, 동리산문을 연 적인선사이다. 여기에서 이들 세 분들의 관계를 알아보자.도의선사의 생몰연대는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으나 선덕왕 5년(784년) 당나라 오대산으로 떠난 후 37년간 중국에서 머물고 돌아와 진전사에서 40여 년간 수도한 사실로 미루어 서기 760년에서 770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증된다.현존하는 가장 완전하고 오래된 선종사 문헌인 조당집(祖堂集)에 도의선사에 대한 다음의 기록이 있다.
"설악 진전사 원적선사는 서당의 법을 이었고, 명주(강릉)에서 살았다. 선사의 휘는 도의(道義)이고 속성은 왕씨였다. 북한군 사람이었다. 건중 5년 갑자년에 사신인 한찬호 · 김양공을 따라 바다를 건너 입당하였다. 곧장 오대산으로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여 허공에서 종소리가 산을 울리는 소리를 듣고 신기한 새가 날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강서의 홍주 개원사에 가서 서당지장(西堂智藏)을 스승으로 모셨다. 서당지장은 마치 돌 가운데서 옥을 고른 듯 조개 속에서 진주를 채취한 듯이 기뻐하여 말했다. ‘진실로 법을 전한다면 이런 사람이 아니고 누구에게 전하랴’ 그리고는 이름을 道義라 고쳐 주었다.” 라고 되어 있다.
홍척(洪陟)국사는. 헌덕왕 때(809-825) 당나라에 건너가 서당 지장(西堂 智藏)의 문하에서 법을 전해 받고, 826년(흥덕왕 1년)경에 귀국했다고 한다. 최치원이 지은 경북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적조탑비에 의하면, 그가 당나라에 가서 법을 전해 온 것은 도의(道義)보다 뒤이지만, 절을 짓고 문파를 이룬 것은 구산선문 가운데 가장 먼저라고 한다. 적인선사는 신라 원성왕 1년(785)에 태어나 경문왕 1년(861)에 입적하였다.
그럼 여기서 세 분의 연대순으로 추증을 해보자.도의선사가 760-770년 사이에 태어났다고 추증된다. 그리고 784년에 당에 건너가 821년에 귀국했다.홍척국사는 헌덕왕(809-825)때 당나라에 건너가 826년(흥덕왕 1)경에 귀국했다.적인선사는 탑비에서 정확한 생몰 연대가 기록되어 있다(785-861). 따라서 도의선사-홍척국사-적인선사의 순으로 서장 지장의 제자가 된 것으로 추증할 수 있다.구산선문에서 말하는 선의 출발은 석가모니 부처의 수제자라 할 수 있는 마하가섭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부처님이 설법을 하면서 연꽃 한 송이를 들자 가섭 혼자 빙그레 웃었다. 이것이 바로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인 것이다. 염화시중의 미소를 선의 시작으로 본다. 이는 부처님과 제자인 가섭 사이에 마음과 마음으로 법을 전한 즉 이심전심의 방법으로 전한 것이 선이다.
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寂忍禪師照輪淸淨塔碑)
귀부는 당당하게 앞발을 들어 무거운 비신을 당당히 버티고 있는 모양으로 조각했고, 등에는 매우 가는 선으로 거북의 등껍질을 표현했다. 귀부의 등껍질은 다른 탑비의 것과 다르게 끝부분을 단순히 원형으로 만 조각된 것이 아니라, 호형을 그리며 물결치듯이 마감되어 있어 독특하다 할 수 있다. 또한 비좌에는 구름무늬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고, 그 상부는 연꽃으로 조각했다. 또한 꼬리는 말아 올리지 않고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다.
이수는 양편에 각각 2마리의 용이 구름을 사이에서 서로 등을 대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고, 정면 한 중앙 두전(頭篆)에는 적인선사(寂忍禪師)라고 써넣었다. 배면 정면과 유사한 모양을 보이고 있는데, 4마리의 용이 구름을 배경으로 조각되어 있다. 정상에는 보주를 얹어 마감했다.그런데 1941년에 편찬된 사적에서는 ‘1928년 중건 당시 광자 대사비의 이수를 옮겨와 적인 선사비의 이수로 사용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광자대사탑비의 이수와 바뀌었을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더욱 더 면밀한 조사 및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적인선사 조륜청정탑비문
지관스님 번역
무주(武州) 동리산(桐裏山) 대안사(大安寺) 적인선사비송(寂忍禪師碑頌)과 서(序)
대당사은겸숙위판관(大唐謝恩兼宿衛判官) 한림랑(翰林郞) 신(臣) 최하(崔賀)가 왕명을 받들어 선하다.
무릇 종이란 두드려 소리나게 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들어서 능히 생각을 안정시킬 수 있게 하고, 거울이란 갈아서 빛나게 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비추어서 모양을 분별하도록 하기에 족하다. 물건인 무정(無情)으로도 오히려 묘용(妙用)이 이와 같거늘, 하물며 전생부터 공덕을 쌓아 기(氣)를 사이에 태어나 신령스러움을 쌓으니 그 원력의 마음은 망령된 마음이 아니요, 행동은 진실한 행동이며, 공(空) 가운데서 유(有)를 설하고 색(色)의 경계에서 공함을 알며 바야흐로 육진(六塵)을 깨끗이 하고 스스로 십지(十地)를 넘어 체득한 바는 허공보다 크며 헤아린 바는 바다의 깊음보다 깊고, 신통함은 식(識)으로써 알 수 없으며 지혜는 지(知)로써 알 수 없음에 있어서이랴. 바로 선사가 그러한 사람이다.
선사의 이름은 혜철(慧徹)이고 자는 체공(體空)이다. 속성(俗姓)은 박(朴)씨이며 경주인이다. 그의 아버지는 어려서 수사(洙泗), 즉 공자의 발자취를 탐착하였고 자라서는 노자와 장자의 말을 익혔으므로 얻고 잃음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으며 명예와 이익을 세상에서 완전히 잊어 혹은 고상한데 의지하여 멀리 바라보며, 혹은 붓을 적셔 소감(所感)을 읊을 뿐이었다. 할아버지도 마찬가지로 그 일을 고상히 여겨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삭주(朔州) 선곡현(善谷縣)에서 한가히 살았으니, 곧 태백산 남쪽의 연기와 아지랑이가 서로 어우러지고 좌우에 소나무와 바위가 널려 있는 곳에서 거문과와 술잔으로 스스로를 벗하는 사람이다.
선사를 임신했던 처음, 어머니의 꿈에 어떤 호승(胡僧)이 나타났는데, 위의(威儀)와 모양이 엄숙하고 우아하였으며 법복 차림으로 향로를 들고 서서히 와서 침상에 앉았다. 어머니가 의아하고 이상하여 이로 인해 꿈을 “반드시 법(法)을 지닌 아들을 얻어 마땅히 국사(國師)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선사는 강보에 싸여 있을 때부터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보통 사람과 달랐다. 심지어 소란스럽게 노는 가운데에서도 시끄럽지 않았으며, 편안하고 조용한 곳에서는 스스로 고요히 하였다. 노린내와 비린내를 맡으면 피를 토하였고 도살하는 것을 보면 마음을 아파하였으며, 앉을 때는 결가부좌하였고 사람에게 예를 표할때는 합장하였다. 절에 가서 부처님의 주위를 돌 때에는 범패를 불러 승려를 본받으니 전생의 업에 그윽하게 부합함을 단연코 알 수 있다.
15살이 되었을 때에 출가하여 부석산(浮石山)에 머물며 화엄경강의를 들었는데 한번에 5줄을 읽어 내려가는 총명함이 있었다. 반자(半字)와 삼여(三餘)의 학(學)이 없으면 어찌 화엄경을 연구하겠으며, 깊은 뜻을 찾고 은미한 뜨슬 찾은 것을 내가 어찌 할 수 있겠는가만은 한 길 되는 담장 안을 엿본 것은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글과 뜻을 엮어 책을 만드니 고황(膏?), 즉 옛날에 풀지 못하였던 것을 해결하였고 뭇 배우는 사람들의 몽매함을 없애주었다. 동료들이 “어제는 절차(切磋)하던 벗이었는데 지금은 이끌어주는 스승이 되었으니 진실로 불교계의 안자(顔子)로다.”라고 말하였다.
22살에 이르러 대계(大戒)를 받았다. 전날 꿈에 5색 구슬을 보았는데 누구나 소중히 여길만한 보물로, 갑자기 소매 속에 들어와 있거늘 풀이하여 “나는 이미 계주(戒珠)를 얻었다”라고 말하였다. 계를 받던 처음에 회오리바람이 하늘에까지 뻗쳐 일어나 흩어지지 않았다. 계단(戒壇)에서 내려오자마자 고요하고 조용해졌다. 십사(十師)들이 일러 “이 사미(沙彌)의 감응이 기이하고도 기이하다”라고 말하였다. 구족계를 받고 나서는 마음을 닦고 행동을 깨끗이 하여, 생각은 부낭(浮囊)을 중히 여겨 계율 지키기를 생명 얻듯이 하였고 몸은 풀에 묶여 있는 비구처럼하여 모든 반연에 법(法)을 해침이 없었고 바깥 경계로 인하여 진실을 어지럽히지 않았다. 율(律)을 잘 지켰고 또 선(禪)을 닦았으니 승려들의 귀감이었다.
가만히 생각하기를, “부처는 본래 부처가 없는데도 억지로 이름한 것이고 나는 본래 내가 없는 것이므로 일찍이 어떤 물건도 있은 적이 없다. 자성(自性)을 보아 깨달아 마치니 법(法)이 본래 공(空)하면서도 비공(非空)임을 비유한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므로 묵묵한 마음이 곧 진심(眞心)이고 적적한 지혜가 곧 진혜(眞慧)인 것이니, 문자 밖의 이치는 반드시 곧바로 지남(指南)을 얻는 것이다.”라 하고, “본사 석가모니께서 남기신 가르침과 여러 조사의 은미한 말씀은 이 땅에 뛰어난 사람이 없다.”라고 탄식하셨다.
원화(元和) 9년(814) 가을 8월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찾아 서쪽으로 멀리 갔다. 그 때에 하늘도 지극한 정성을 막지 못하고 사람도 그의 장한 뜻을 빼앗지 못하였다. 천 길 물 위로 진교(秦橋)가 멀리 지나감에 여름과 가을이 바뀌었고, 만 길 산 끝에는 우(禹)임금의 발자취 역력한데 서리와 눈을 무릅썼다. 발길 달리 가는 곳 없이 공공산(?公山) 지장대사(地藏大師)에게 나아갔으니, 즉 제6조는 회양(懷讓)에게 법을 전해주었고, 회양은 도일(道一)에게 전하였으며, 도일은 지장대사에게 전하였다. 대사는 여래장을 열어 보살심을 얻고 오랫동안 서당(西堂)에 머물며 사방에서 자신을 찾아오는 자를 깨우치니 대략 만명을 헤아렸는데, 모두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뛰어난 승려가 아닌 사람이 없었다. 선사가 “저는 외국에서 태어났기에 하늘과 땅에 길을 물어 중국을 멀다 하지 않고 일부러 와서 법문 듣기를 청합니다. 만일 후일에 말 없는 가운데의 말과 법 없는 가운데의 법이 바다 밖에 유포된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라 말하니 대사가 그의 뜻이 이미 굳고 품성이 잘 깨달을 만함을 알았으며 한 번 보고도 옛날부터 알고 있던 듯하여 비밀리 심인(心印)을 전하였다. 이에 선사가 적수(赤水)에서 잃어버린 것을 얻어서 마음자리가 환하게 밝아지니 마치 태허의 아득히 넓음과 같았다. 무릇 이(夷)와 중국의 말이 다르고, 깊고 중요한 이치는 은미하니, 베는데 도끼를 잡지 않는다면 누가 능히 여기에 함께 할 수 있겠는가.
오래지 않아 서당이 입적하였다. 이에 빈 배에 머물 이유가 없어 외로운 구름처럼 홀로 떠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니 몸에 그림자만이 따랐다. 순력(巡歷)한 이름난 산과 신령스러운 경계는 생략하고 싣지 않는다. 서주(西州) 부사사(浮沙寺)에 이르러 대장경을 열람하는데, 아침, 저녁으로 오로지 정진하였고 짐시도 그만두지 않았다. 눕지도 않으며 자리도 펴지 않고 3년에 이르니, 경문(經文)의 오묘함을 궁구하지 못한 것이 없었고 이치는 은미하되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혹은 묵묵히 문장과 구절을 생각하여 깊이깊이 마음에 새겨두었다.
고국을 떠난 지 오래되었고 법을 선양하고자 하는 마음이 깊어져 드디어 군자의 나라에 돌아갈 것을 말하고, 신기루와 같은 파도를 가로질러 개성(開成) 4년(839) 봄 2월에 귀국하였다. 이날 많은 신하들이 함께 기뻐하였으며 동네 사람들도 서로 경하하며 “그 당시에는 구슬이 떠나 산과 계곡에 사람이 없더니, 오늘 그 구슬이 돌아옴에 개울과 들이 보배를 얻었도다. 부처님의 오묘한 뜻과 달마의 원만한 종지가 모두 여기에 있도다. 비유하건데 공자께서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온 것과 같다.”라 말하였다.
드디어 무주 관내의 쌍봉난야(雙峰蘭若)에서 여름 결제때 날이 가물어 산이 마르고 내가 말랐으며 비가 오지 않을 뿐 아니라 조각구름조차 없었다. 주사(州司)가 선사에게 간절히 청하니 선사가 고요한 방에 들어가 좋은 향을 사르며 하늘과 땅에 빌었다. 잠시 후 단비가 조금씩 내려 무주관내의 들을 적시더니, 얼마 후 큰비가 내렸다. 또 이악(理嶽)에 머물면서 묵계(?契)할 때 골짜기에서 갑자기 들불이 일어 사방에서 타들어 와 암자를 태우려고 하였는데, 사람의 힘으로는 구할 수 없었으며 또한 도망할 길도 없었다. 선사가 단정히 않아 묵묵히 삼매(三昧)에 든 동안 폭우가 쏟아져 불이 꺼지니, 온 산이 불탔으나 오직 일실(一室)만이 타지 않고 남았다. 일찍이 천태산(天台山) 국청사(國淸寺)에 머무를 때에 화가 있을 줄 미리 알고 옷자락을 떨치면 떠났는데 사람들이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 오래지 않아 온 절에 전염병이 돌아 죽은 자가 10여명이었다. 중국에 가던 처음에 죄인의 무리들과 함께 배를 타고 취성군(取城郡)에 도착하였다. 군감(郡監)이 이를 알고 칼을 씌워 가두고 죄상을 조사하였으나 선사가 사실을 말하지 않으니 역시 함께 감옥에 가두었다. 군감이 내용을 갖추어 상주하여 왕명에 따라 30여 사람을 목베고 선사의 차례가 되었을 때, 선사는 얼굴이 평화스러워서 죄인과 같지 아니하고 스스로 형을 집행하는 곳에 나아가니 군감이 차마 바로 죽이지 못하였다. 조금 있다 다시 명령이 있어 석방되니 오직 선사만이 죽음을 면하였다. 이와 같은 선적(禪寂)의 힘은 생각하기 힘들고 얻기도 힘들도다. 하늘의 운행을 돌려 해를 붙잡으며 땅을 줄여 산을 옮기었다. 선사는 또한 오개(五蓋)에 걸림이 없었으며, 빛을 감추고 세상에 섞여 살며 명성을 드러내고자 하지 않았다.
곡성군 동남쪽에 산이 있어 동리(棟裏)라 하였고, 이 가운데 작은 집이 있어 대안(大安)이라 이름하였다. 그 절은 수많은 봉우리가 가리어 비치고 하나의 물줄기가 맑게 흐르며, 길은 멀리 아득하여 세속의 무리들로 오는 이가 드물고 경계가 그윽히 깊어 승려들이 머물기에 고요하였다. 용신(龍神)이 상서로움과 신이함을 드러내고 독충과 뱀이 그 독 있는 모습을 감추며, 소나무 그림자 어둡고 구름은 깊어서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은 따뜻하였으니 바로 삼한에서 수승한 곳이었다. 선사가 석장을 들고 와서 둘러보고 머물 뜻이 있어 이에 교화의 장을 열고 자질이 있는 사람을 받아들이니 점교와 돈교(漸頓)를 닦는 사람들이 사선(四禪)의 집에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근기가 뛰어나거나 낮은 사람들이 팔정(八定)의 문에 귀부하였다. 비록 마왕의 무리들과 브라만의 무리들일지라도 어찌 정견(正見)에 돌아가서 요임금을 보고 짖은 개의 잘못을 깨닫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나부산(羅浮山)의 고적(古蹟)을 회복한 것이며 조계산(曹溪山)의 오늘을 이룩한 것이다.
문성대왕(文聖大王)이 이를 듣고 상법(像法)과 말법(末法)시대에 걸쳐 많은 몸을 나타냈다고 이르고, 자주 글을 내려 위문하면서 겸하여 머물고 있는 절의 사방 밖에 살생을 금하는 당(幢)을 세우기를 허락하였다. 이에 사신을 보내어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를 묻거늘 선사가 봉사(封事) 약간의 조항을 올리니, 모두 당시 정치에 급한 일인지라 왕이 매우 가상하게 여겼다. 선사가 조정을 도와 이롭게 하고 왕후들이 예를 행한 것도 이루 말할 수 없다.
당시 연세 77세인 함통(咸通) 2년 봄 2월 6일 병 없이 앉아서 돌아가시니, 사지와 몸체가 흩어지지 아니하고 얼굴빛이 평상시와 같았다. 곧 8일에 절 부근의 송봉(松峰)에 안치하고 돌을 다듬어 부도를 세웠다.
슬프도다. 물질의 모습은 본래 공(空)하여 오고 감에 항상 고요해 삶과 죽음을 보이지 아니하니 널리 미혹한 중생을 제도하고, 전에 제도하지 못한 중생은 문득 전생의 모든 인연을 소멸케하고 후일에 제도를 얻는다. 이미 이치를 통달한 사람은 업보가 다하여 육체와 하직한다고 하여 슬퍼하겠는가. 어느덧 대패를 거두고 거문고 줄을 끊었도다.
죽기 전에 살고 있던 산 북쪽에 세 번 가서 삼나무를 베어내게 했는데 그 크기가 네 아름쯤 되었다. 선사가 “어떤 사람이 죽으면 이것으로 관을 만들어 장사지내라”하고 절에 돌아와 벽 위에 관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또 제자들에게 “만물은 봄에 나고 가을에 이별하나 나는 그와 반대이다. 앞으로는 너희들과 선을 말하고 도를 맛볼 수 없을 것이다.”라 일렀다.
돌아가실 때에 들짐승이 슬피 울부짖어 산과 골짜기가 모두 흔들렸으며, 갈가마귀와 참새가 모여들어 모두 슬피 울었다. 부도 가까이에 한 그루 소나무가 있었으니 푸르고 울창하고 무성하여 산 안에서 짝할 것이 없었으나, 무덤길이 열린 후부터 봄여름에는 하얗고 가을 겨울에는 누러니 길이 죽음을 슬퍼하는 빛을 띠었다.
임금님이 선사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일을 듣고 세월이 오래되면 그 자취가 티끌처럼 흐려질까 염려해서, 즉위 8년(868) 여름 6월 어느 날에 왕명을 내려 비문을 지어 장래의 거울이 되게 하였다. 이에 시호를 내려 적인(寂忍)이라 하고 탑을 조륜청정(照輪淸淨)이라 이름하니, 조정의 은혜로운 대우가 넉넉하였고 선사의 빛나는 행적이 갖추어졌도다.
그 송사에서 말하기를
우리 스님 크게 깨달으심이여! 많은 몸을 나투었도다.
자성이 본래 공적함이여! 그 묘용은 나날이 새롭도다.
이미 계율을 지키고 또 선을 하셨음이여! 무아한 사람이도다.
높은 산처럼 우러러 봄이여! 더불어 짝할 이가 없도다.
보배로운 달처럼 항상 원만함이여! 중생의 길을 비추도다.
선의 물줄기가 맑게 흐름이여! 중생의 육진을 씻어내도다.
교학을 배우고 선을 배우는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듬이여! 손님으로 여기지 않으니 모두 주인공이 되도다.
때로는 설법하고 때로는 묵묵하여 근기에 따름이여! 영원히 참된 구슬이로다.
비로 내려 산불을 끔이여! 절을 구하였도다.
당시의 가뭄을 걱정함이여! 용신을 감응시켰도다.
죄인이 아니로되 형장에 임함이여! 나중에 살려주라는 명이 이르렀도다.
미리 재앙을 피함이여! 까닭을 알지 못하도다.
갑작스러운 돌아가심이여! 큰 참죽나무가 꺾어진 듯하도다.
백명이 넘는 문도들이여! 두건을 피로 물들였도다.
시호를 적인이라 하사함이여! 탑은 조륜이라 하였도다.
이 은혜가 세상에 영원함이여! 어찌 만년 뿐이리오
中舍人臣 克一이 왕명을 받들어 쓰고, 함통 13년 임진(872) 8월 14일에 세우다. 沙門 幸宗
碑末 : 복전수와 법석. 당시 복전은 40명이고 항상 신중법석을 행했다.
법석 : 본래 정해진 특별한 법석은 없었다.
本傳 : 食 2,939石 4斗 2升 5合
밭 논 柴地 : 논 밭 합해서 494결 39부
坐地 : 143결
荳原地 : 염전 43결
노비 : 노 10명, 비 13명
삼층석탑(三層石塔)
일주문 왼쪽에 넓게 연못을 만들고 그 중앙에 배치한 고려시대 석탑이다. 원래는 광자대사 부도 옆에 있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새롭게 조성했다고 한다. 원래는 기단의 한쪽 면과 탑신의 1층 옥개석과 2, 3층의 탑신 부위가 없어진 상태였다고 하는데(돌의 재질로 보아 3층 옥개석이 신재인 것으로 생각되며, 2, 3층 탑신 또한 원래 이 탑에 사용되던 부재로 생각된다), 이곳으로 옮기면서 새로이 복원하여 만들었다 한다. 현재 부도밭에는 석탑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옥개석을 하나 볼 수 있는데, 이 부재가 혹시 이 석탑에 사용되었던 부재가 아닌가 추정된다.
기단 아래에는 원래 탑에 사용되지 않았던 방형의 지대석을 3단 놓아 원래 탑에 비해 높이가 높아졌다. 기단은 가구식 기단을 사용하고 있다. 탑신도 역시 네면 각 모서리에 기둥형태를 조각해 두었다. 2층 옥개석은 많은 부분이 깨져 있으며 각층의 탑신석도 많은 부분이 깨져있다. 3층 옥개석과 상륜 부위는 신재로 교체해 복원한 듯 돌의 재질이 달랐다. 다만 상륜부 중 노반은 원래 탑의 부재로 생각된다. 이 탑은 기단과 옥개석의 양식으로 보아 신라양식을 계승한 고려초의 탑으로 추정되는데, 전체적으로 안정된 체감을 갖고 있다.
조태일시문학관 김 대 근
우리나라에 대처승 제도가 도입된 것은 일제 때 일본에 의해서였는데 1200년 고찰 태안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주지를 대처승이 맡고 있었다. 조태일은 태안사 주지이며 대처승이었던 조봉호와 모친 신정임 사이의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의 시에서 느껴지는 불성은 시인의 이러한 배경이 영향을 미친 것일 것이다. 그의 형제들의 항렬이 ‘기基’인데도 그의 부친은 그에게 태안사의 첫 자인 ‘태泰’를 따서 이름을 지어주었다. 시인과 태안사는 남다른 인연으로 엮어있음을 알 수 있다. 태안사는 여순반란사건과 6.25 전쟁의 주요무대가 되었는데 시인의 인생 역시 거듭된 연행과 구금, 투옥 등으로 질곡의 삶으로 점철되어 이 땅의 현대사를 보는 듯하다.
피묻은 피묻은 처녀막을 나부끼며
아프고 피비린 냄새를 풍기며
광화문 네거리 한복판에
내가 섰다 내가 섰어.
삼천만 개의 쌍눈을 번뜩이며
삼천만 개의 쌍귀를 세우고
삼천만 개의 가슴을 비벼 불꽃 튀는
불꽃 튀는 단일화된 외침을 가지고
삼천만의 기념비처럼
내가 섰다 내가 섰어. ― 「나의 처녀막 3」 중 (『식칼論』1970 )
이 작품은 조태일 시학이 지향하는 바를 두루 보여준다고 하겠다. 시적주제로 다루기 어려운 처녀막이라는 우화적 설정을 통하여 현실적 억압으로 훼손된 소중한 가치, 정신적 불모성의 초래를 상정하고, ‘쌍눈’, ‘쌍귀’, ‘불꽃 튀는’ 시적 주체의 결연한 의지로 극복하고자 한다. ‘자유’와 ‘민주’가 말살된 시대상황을 이 한편의 시편으로 비판하고자 했던 것이다.
시인의 중기 작품들은 막연한 현실부정에서 좀 더 심화되고 농익은 역사의식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조국의 분단 현실과 독재 체제의 극복이라는 구체적인 목표에 천착하고 있는 것이다. 초기 시편들이 피판적 주체의 목소리가 강했던 반면 중기의 작품들은 주체의 목소리 보다는 타자의 몫을 배려하면서 시의 구체성을 확보했다.
1970년대 중반 시인은 연작시 <국토>에 열정을 쏟았다. 연작시에서 하나하나를 떼어 놓아도 하나의 시편으로서 작품 되는 일반적 의미의 연작시도 있고 이질적 요소들이 포괄적으로 함유된 복합적 연작시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흐름이 일정해서 독자가 손쉽게 이해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너무 평면적이라는 부정적인 면도 있다. 후자는 언뜻 보면 모순인 부분이 서로 유기적으로 흘러 변화무쌍한 재미를 준다. 시인의 연작시들은 후자에 가깝다. 시인은 초기부터 일관되게 인간세계의 폭력성을 비판하고 저항하는 시를 써왔다. 시인의 시에서 남성적인 이미지를 강하게 느끼는 것은 시인만의 독특한 저항정신이나 소극적 표현보다는 거칠고 강인한 숨결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후기 작품들에서는 자연과의 교감을 통하여 완성된 자기긍정과 회귀 의식이 돋보인다. 그의 시편 전편을 흐르던 강물 같은 ‘저항성’이 많이 지워지고 ‘천진성’이 부각하게 된다. 천진성은 불교에서 선의 궁극에 이르는 선승들에게서 많이 보이는데 시인의 종교적 성향과도 결코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풀씨가 날아다니다 멈추는 곳
그곳이 나의 고향,
그곳에 묻히리.
햇볕 하염없이 뛰노는 언덕배기면 어떻고
소나기 쏜살같이 꽂히는 시냇가면 어떠리.
온갖 짐승 제멋에 뛰노는 산속이면 어떻고
노오란 미꾸라지 꾸물대는 진흙밭이면 어떠리.
풀씨가 날아다니다
멈출 곳 없어 언제까지나 떠다니는 길목,
그곳이면 어떠리.
그곳이 나의 고향,
그곳에 묻히리. ― 「풀씨」(『풀꽃은 꺾이지 않는다』1995)
이 시편은 질곡 많았던 자신의 생을 갈무리하려는 시인의 ‘천진성’이 돋보인다. 시인은 부정적 현실을 바꾸려는 열정의 과거와는 달리 자연으로의 회귀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 고향을 생각하고 어머니의 품이 간절해지는 것처럼 시인도 역시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회귀를 꿈꾼 것이다.
시인의 태안사와의 인연으로 태안사 입구에 그의 시문학관이 건립된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태안사 계곡의 물들이 이 계곡을 떠나기 전 마지막 몸을 단장하느라 부산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단층의 넓고 길게 지어진 시문학관의 입구에서 고은 시인이 쓴 시편 하나를 만난다. “이 조가야, 그 체구엔/노동을 하는게 썩 어울리겠는데/시를 쓰다니 허허허 우습다, 조가야” 를 통해 거구였던 시인의 풍모가 엿보인다.시문학관의 출입구는 균형이 조금 틀어져 있다. 사각의 틀이 조금 틀어져 있다는 것은 시인의 저항정신의 상징 같은 느낌이 든다. 문학관의 내부는 특이하게 길고 다른 곳 보다 천정이 높아서 시원하다. 지반의 높낮이대로 바닥을 깔아 바닥은 계단처럼 조금씩 오르막을 가지고 있다. 문학관 내부에는 조태일 시인의 유품과 작품, 시인을 기리는 문학작품 등 2,000여점이 전시되어 있으며 현대 한국 문학사에 대한 계통도, 시인의 집무실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특히 시인이 산을 좋아 했는지 직접 사용했던 등산용구가 눈을 끈다.
시문학관을 나오면 찻집이 있고 간단하게 차를 마시면서 시화를 감상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사무실 공간은 2층 건물인데 아래층에 있는「시집전시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시집인 최남선의 <백팔번뇌>, 최초의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 등 희귀본에서 최근 작품까지 3,000여점의 시집이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