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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어머니
잠결에 창밖에서 들리는 참새 소리가 요란하다.
‘저 놈들은 잠이나 자고 저렇게 식전에 일어난 것인가.’
엄 새동은 선잠에서 깬 다음 눈을 번쩍 뜨고는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대문 밖 살구나무 가지에서 참새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동료들을 깨우려는 소리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마당으로 나가니 참새는 어느 결에 울 밖으로 날아가 버린다.
한 보름 전 까지만 해도 나무들은 한 겨울 속에 잠겨 있는 듯 하였는데 어느 결에 잎이 피기 시작을 하더니 야산에는 벌써 진달래가 화사하게 자태를 뽐내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러고 보니 엄 새동이 타국 만리 중동에서 힘든 일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온 것이 지난 해 가을이었으니 어언 1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당시 엄 새동은 항만공사를 하는 이집트로 나가는 일원으로 차출이 되어 회사의 장비를 싣고 가는 배를 이용하여 말로만 듣던 이집트에 도착을 하였다.
회사에서 그런 엄청난 공사를 따내었다고 하자 거기에 차출되고자 희망하는 사원이 많았으나 배정된 인원이 백여 명에 불과하다 보니 간부들에게 칠념을 드는 사원이 있다는 소리가 들리긴 하였으나 회사에서는 엄격한 규정을 만들어 차출을 하게 되니 평상시에 능력을 인정받은 사원의 차출이 많이 되었다.
거기에 엄 새동이 뽑혀서 가게 된 것은 순전히 남달리 철근을 다루는데 있어 그를 따라갈 사람이 없어서도 그렇지만 자기와 함께 일을 하던 임 장호 반장님의 추천으로 가게 된 것임을 얼마 후에서야 알게 되었다.
사실 항만공사라는 것이 국내에서처럼 어떤 아파트공사를 하는 것과 같이 규격화된 공사와는 다르게 큰 배가 닿을 수 있고 어떤 강력한 태풍이 불어온다고 해도 이를 견뎌낼 수 있도록 견고하게 하는 공사이기 때문에 회사의 명운을 걸고 대들지 않으면 안 되는 사업이었다.
당시에 국내에 소개된 이집트 항만공사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카이로 발‣ 한국기업들이 이집트 지중해 항구 포트사이트 항만 공사에 투자키로 합의했다고 국영일간신문 알 아흐람이 15일 보도했다.
한국기업체들의 포트사이트 항만공사 투자 결정은 한국 측과 이집트관리들 간의 닷새에 걸친 협상 끝에 14일 이루어졌다.
포트사이트 항구는 8백 규모의 항만 개발공사가 완성되면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항구들을 연결하는 대형선박 운항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고 무스타파 시데크포트 사이드 시청이 밝혔다.
이집트 정부는 수에즈 운하처럼 정부의 주요 수입원이 될 포트사이트 항만 1단계공사를 위해 1천4백70만 달라( 약1백21억원)를 배정하였다.
이집트 주요 투자국가중 규모는1억덜라에 달하고 있다. ( 출처 부산일보)
[ 출처: 부산일보] http:www busan com /view/busan/ view.php?code=19961017000378
그곳은 우리나라처럼 사계절이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날만 새면 아침부터 뜨거운 모래바람이 불어 눈을 뜰 수가 없을 때가 많아 이런 나라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의 한여름 이상으로 따가운 햇볕이 대지를 펄펄 달구는 가운데에서 작업을 하기란 숨이 턱턱 막혀서 나무 그늘이라도 있으면 당장 찾아들고 싶지만 그 시간을 그렇게 허송할 수는 없었기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맡은 업무를 계속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아! 이럴 때는 누가 입에서 살살 녹는 아이스크림 하나라도 사다 주면 좋으련만.”
“ 똥별 장군. 참 한가하기도 하시네. 대명천지 이집트에 일엽편주마냥 버려진 것 같은 사람들이 우리들인데 어느 누가 이 불쌍한 사람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다 준단 말이냐구.”
( 내가 이집트에 떨어지자 같은 반의 장난꾸러기가 나의 모자에다가 커다란 별을 하나 달아주었는데 그 다음부터 나를 이르기를 똥별 장군이라고 불렀다.)
“ 어! 난 누군가 했더니. 만년 상사로군 그래. 자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 만년상사는 상사로 제대하고 나서도 만날 상사 배지를 허리띠에 달고 다니자 친구들이 별명을 만년상사라고 하였다. )
“ 사실을 모르다니 그게 도무지 무슨 말인데 그래."
" 그 사실이라는 게 사랑과 관련이 있어.“
“사랑과 관련이 있다구. 점점 아리숭한 말만 하네 그려.”
“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정답이야.”
“ 그렇다구?”
“ 내가 이제 와서 이야기지만 나에게는 아이스크림에 얽힌 이야기가 한 가지가 있거든.”
“ 그 말을 듣고 보니 호기심이 잔뜩 긴장을 시키네.”
“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에 우리 반에는 박 선희라는 부잣집 딸이 다녔는데 이 아이의 생김새는 몸이 좀 통통하고 키가 겨드랑에 닿을 정도라서 아이들은 선희를 보기만 하면 키가 작다고 놀리는 바람에 선희는 날마다 학교엘 오게 되면 울지 않는 날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담임선생님이 놀리는 몇 아이들을 혼내주려고 눈독을 드리고 있을 때에 그것도 모르고 선희의 치마 자락를 잡고 끌고 가던 아이 세 명이 선생님에게 딱 걸렸는데 그때 내가 주동자였다.
선생님은 선희를 놀린 우리들에게 집에 돌아가서 부모님을 모셔오라고 하였으니 우리들은 집에 가게 되면 부모님께 야단을 맞을 걱정 때문에 집엘 가지 못하고 복도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끓어 앉아 있었다.
그런데 한참 후에 복도엘 나오시던 선생님이 우리를 보시고는 이놈들이 집엘 왜 가지를 못하냐면서 교무실로 데리고 들어가시더니 다시는 안 그런다는 다짐을 받으시고는 돌려보내 주셨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집에 가서 어머니께 왜 그런 못된 짓을 하였느냐고 매를 맞아도 단단히 맞았을 것이다.
사실 그때 왜 내가 선희를 못살게 굴었느냐 하면 다른 아이들은 선희를 놀렸지만 내 마음은선희가 공부도 잘 하고 특히 노래를 잘 불러서 그를 가까이 하려 하였는데 선희는 나보다는 반장 애를 더 좋아하기에 질투가 나서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날 선희가 나를 보더니 어제 선생님께 혼났다는 소리를 들었다면서 앞으로 잘 지나자며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다.
나는 그날 이후 선희와 더 가까워지고 그에게 아카시아 꽃도 따다 주고 오디도 따다주자 선희는 오디를 먹으면서 생전 처음 먹는다면서 오디가 묻은 입술을 두툼하게 앞으로 내밀며 웃는 모습이 이상하게 웃겼다.
그런데 뜻밖에도 내가 6학년이 되던 해에 우리 집이 갑자기 서울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선희와 헤어졌는데 지금도 이따금 한 여름에 아이스크림을 먹게 되면 선희가 몹시 보고 싶어진다.
내말을 골똘히 듣던 만년 상사는 생전 하지 않던 이론을 늘어놓아서 나는 깜짝 놀랐다.
“ 원래 사랑의 시작은 소소한데서 출발을 한다는데 가만히 듣고 보니 똥장군은 어렸을 때부터 사랑에 대해서 남보다 일찍 눈이 뜬 모양이구나. 그 첫사랑을 지금이라도 만나게 되면 얼마나 좋겠어. 그러나 첫사랑이란 마음속으로나 간직하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몰라 .오늘 유난히 날씨가 더 뜨거운 것 같은데 아이스크림에 얽힌 이야기를 듣다가 보니 아련한 감정 속으로 빠져들었네. 오늘 저녁에 아이스크림이나 실컷 먹도록 하세. 특별히 내가 한번 쏠 것이니까. 하하.”
열사의 나라에서 온몸에 땀이 배니 건강한 체력을 갖지 않고는 도저히 이 기간 동안을 견뎌내기가 힘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자랄 때에 집이 가난하여서 때를 굶은 적이 많았기 때문에 웬만한 악조건은 능히 이겨날 수가 있었다.
나의 출생은 자식이 귀한 집에 맏이로 태어났지만 너무 어려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희미한 것은 내가 어렸을 때에 어머니가 다른 데로 가셨기 때문이다.
자라면서 나는 할머니의 사랑을 받긴 하였지만 할머니는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하게 되면 못된 것은 느 어멈을 닮아서 그렇다면서 엄마를 욕을 하셨다.
아버지와 엄마가 없이 자라다 보니 아이들은 나를 놀릴 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이름 대신에 새똥이라고 별명을 불렀다.
아이들이 그렇게 부르고 놀렸지만 나는 역성을 들어줄 아무도 없다 보니 날마다 울면서 집으로 돌아오다가도 할머니가 아시면 혼이 날까봐서 눈물을 닦고는 집으로 들어갔다,
사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없는 집 살림을 혼자 꾸려 나가시자니 고생도 많이 하셨다.
원래 할머니는 아들이 장성해서 장가를 갈 때가 되자 사방으로 며느리 감을 알아보셨는데 어머니의 그런 마음도 모르고 아들은 어느 날 직장에서 같이 근무하던 아가씨를 장차 결혼 대상자로 삼겠다고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리러 왔던 것이다,
그러자 어머니는 그날 아무 말씀도 하시지를 않더니 다음날 지금까지 여러 모로 색시를 알아보던 중이라시면서 아들이 데려온 색시를 영 못마땅하게 생각을 하시었다.
어머니가 그러시자 아들은 자기는 이 색시가 마음에 드니 어머니가 양보를 하시면 안 되겠느냐고 설득을 하여 겨우 하락을 받고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얼마 후에 손자 (나)를 보게 되자 그 다음부터는 손자를 혼자 얻으신 양 귀여워하시고 초등학교 입학을 할 때도 할머니가 직접 나의 손을 잡고 입학식에 참석을 하시었다.
이날 학교에서는 할머니가 손자 입학식에 참석하신 분으로는 유일하다면서 여러 사람 앞에서 교장선생님이 할머니를 소개해드리고 입학식 기념으로 탁상시계까지 선물을 하시었다.
이날 학교를 다녀오신 할머니는 생전 처음으로 손자의 학교를 가셨다가 기념품까지 받으신 것을 자랑을 하시면서 동네를 돌아다니셨다.
할머니가 이렇게 좋아하시니 우리 아버지 어머니도 자식을 잘 길러야겠다는 마음을 다지셨다. 사실 아버지는 자신이 학교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해서라도 장차 나를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서 아버지가 하고 싶던 외교관의 길을 걷게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날마다 아버지가 일찍 출근을 하게 되면 할머니는 어린 아이를 밖으로 내보낼 때처럼 문 밖까지 배웅을 하시고는 들어오셨다.
그런데 그날도 다른 날처럼 아버지가 출근을 하시자 할머니는 늘 처럼 길조심을 해서 운전을 하라고 이르시었다.
아! 그런데 그날 바로 아버지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한 차 싣고 내려오던 중에 브레이크가 파열되는 바람에 차는 낭떠러지로 구르고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돌아가시었다.
그리되자 우리어머니는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자 천지가 암흑으로 변한 듯 하고 어머니의 잘못으로 아버지를 잃은 양 여러 날 동안이나 슬퍼하며 두문불출을 하였다.
한동안 할머니도 며느리와 마찬가지로 진지도 잡수시지 않고 눈물을 흘리시더니 어느 날 부터 어머니를 향하여 네가 팔자가 드시기 때문에 아범을 잡아먹었다면서 구박을 하기 시작을 하시더니 나중에는 밥도 같이 먹기 싫다고까지 하시었다.
할머니가 갑자기 이렇게 돌변을 하시니 우리 어머니는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지 난감해 하셨다.
할머니는 아들 장가를 들일 때에 신부인 우리 어머니가 할머니 마음에 들지 않아서 결혼을 파혼하려고 하였는데 아버지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할 수없이 들어준 것이 끝내는 아들을 잃고 말았다면서 이제는 며느리의 꼬락서니도 보기 싫으니 당장 이 집에서 나가라고까지 소리소리 지르셨다.
아버지야말로 우리엄마와는 사이가 좋기도 하였지만 나를 낳으신 후부터는 날마다 살아가는 것이 즐겁고 행복이 넘쳐나곤 하였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퇴근을 하고 돌아오면 날이면 날마다 세숫대야에다가 세숫물을 가득 채워 주고는 어서 세수를 한 다음에 저녁을 할머니와 겸상으로 차려드렸다.
그러면 할머니는 왜 너는 밥을 우리더러만 먹으라고 하느냐면서 수저를 주면서 같은 상에서 먹자고 하셨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어머니 걱정 마시고 어서 잡수시라면서 고등어 뼈를 발려 드리고 또 어떤 때는 삶은 계란을 까서 드리기도 하였다.
그렇게 다정하시고 자상하시던 할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부터는 며느리에 대해서 괄시를 하시기 시작을 하셨으니 어머니는 할머니가 왜 그러시는지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비록 돌아가셨다고 하지만 지금 어머니는 이 집안의 대를 이을 나를 낳아서 한참 재미있게 살려는데 그렇게 되었으니 어머니를 치근하게 생각을 하시고 더 사랑을 하셔야 하는데 할머니는 어머니를 배척을 해도 보통이 넘으니 생각할수록 눈물만 나왔다.
어머니는 할머니가 사랑하던 남편을 갑자기 잃은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해서 어머니를 괄시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어떻게 하던지 할머니를 달래 보려고 하루는 할머니께 통 사정을 하시었다.
“ 어머니 기왕에 아들은 하늘나라로 갔지만 그 대신 손자가 있으니 이 아이를 제가 길러야지 어머니가 키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가 밉더라도 아들을 키우게 해주세요,”
어머니는 사실 할머니가 너무 냉정하게 대해주시기 때문에 구구한 말씀을 드리지 않으려고 하였지만 아들과 떨어지지 않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 손을 싹싹 빌면서 간청을 하였다.
그런데 할머니는 가타부타 아무 말씀도 하시지를 않더니 어머니를 똑바로 보시고는 한마디를 하셨다.
“ 더 말할 것 없다. 나는 네 꼴이 더 이상 보기도 싫으니 어서 이 집에서 나가거라. 집을 나간 다음에는 사내를 얻든지 그것은 네 마음이고 손자는 내가 키울 것이니까 이 아이를 데려갈 생각일랑 꿈에도 하지 마.”
할머니가 단호하게 한 말씀하시고는 밖으로 나가시니 어머니는 더 이상 할머니를 향하여 사정 이야기를 할 수도 없었다.
할머니의 태도를 보면 한시라도 빨리 이 집에서 나가고 싶지만 아들을 생각하면 발걸음이 떨어질 수가 없으니 지금 한창 자라는 나를 떼어놓을 수가 없어서다.
‘아! 이 노릇을 어찌 하면 좋단 말인가.’ 새동아 엄마가 이 집에서 나간다면 너는 할머니한테서 커야 하는데 앞으로 이 엄마는 어떻게 살아야 하니. ‘
그런 생각을 하는 어머니의 눈에서는 한없이 눈물이 비 오듯 하였다.
우리 엄마가 집을 떠나기로 한날 마침 나는 학교를 갔기 때문에 어머니는 조용히 짐을 싸가지고 집을 나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뵙기로 하고 방문을 여니 할머니는 며느리를 보지 않으시려는지 돌아앉으시었다.
“ 어머니 저는 오늘로서 이 집을 나기기로 하였습니다. 아이를 어머니께 맡겨드리고 가고자 하니 발걸음이 떨어지지를 않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오래도록 아프지 말고 사세요. 어머니.”
어머니는 그리고 나서 큰 절을 올리려 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서 절을 하고 나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마루를 나서니 마당에서 졸던 삽살개가 꼬리를 흔들면서 기대려고 다가왔지만 어머니는 개를 쓰다듬어줄 겨를이 없었다.
앞마당 울타리에는 어머니가 아끼며 가꾸던 줄장미가 한창 빨갛게 무리지어 피어나고 있었다.
문득 이집으로 시집을 와서 산 날을 따져 보니 고작 8년의 세월이 흘렀으며 한때는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으나 아버지가 불의에 사고로 돌아가시게 되자 그렇게도 다정하던 할머니는 하루아침에 마치 오뉴월에 찬 서리가 내린 듯이 싸늘하게 변하셨다.
대문을 나서서 집을 다시 돌아서 보니 바깥마당에서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놀던 즐거웠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집을 나선 어머니는 곧장 학교로 향하였으니 나를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서였다.
교문을 들어서다가 문득 생각을 하니 나를 만났다가 다시 떼어놓고 떠나야 할 생각을 하니 도저히 나의 손을 놓을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철봉이 서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 어떻가지. 새동아. 엄마는 어떻게 해야 좋겠니. 응.’
그런 생각을 하니 눈물부터 쏟아지고 도저히 나를 만나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자꾸만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그런데 그때 아이들이 수업이 끝났는지 책가방을 들고 뛰는 놈에 어떤 아이는 책가방을 층계에다 놓고는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려고 아이들 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동시에 저만치서 내가 두 아이들의 뒤를 따라서 가방을 둘러메고 뛰어 나오고 있었다.
“엄 새…"
엄마는 아들 이름을 부르려다가 엄마도 모르게 입을 막고 말았다.
당장 뛰어가서 나를 얼싸안아주고 싶었는데 발걸음이 나가지를 않았다.
‘ 새동아. 엄마가 여기 있는 것 안보이니. 새동아.’
목소리가 도저히 나오지를 않고 몸은 점점 뒤로 쳐지고 있는 중에 나는 엄마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바라보던 어머니는 자기도 모르게 정신이 몽롱해지고 팽그르르 돌면서 그 자리에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얼마동안이나 있었는지 학교운동장이 조용하여 눈을 뜨고 보니 저녁노을이 서산머리에 붉게 물들고 있었다.
엄마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서 어디로 향할지를 생각하다가 우선은 버스정거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버스 시간표와 행선지를 한참동안이나 바라보던 어머니는 멀리 부산 바닷가에 살고 있는 친구가 떠올라서 그곳으로 가기 위하여 표를 끊었다.
어머니가 지금 가려고 하는 곳은 어렸을 때에 함께 자라던 곳으로 다정한 친구인 윤 여선이 사는 마을이다.
어머니의 친구는 몇 년 전에 혼자된 몸으로 결혼 3년 만에 어느 날 남편이 시골에 동창회에 갔다가 오는 길에 터널 교통사고를 당하여 2년 동안이나 식물인간으로 있다가 지난해에 사망을 하였다 . 여선 이는 결혼을 하면서 5년 동안은 해외를 다니면서 관광을 실컷 한 후에 아기를 가져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얼마 후에 부부의 계획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진데다가 그의 뒷바라지를 해주시던 시아버지마저 회사경영에 대한 회의를 주재하시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친구야 말로 결혼 후에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잘 살 것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 말이 무색하게 일찍 과부가 되고 말았다.
시아버지가 장남인 남편을 믿고 경제적으로 자립을 할 수 있도록 해주셔서 앞으로 여선이가 먹고 사는데 는 지장이 없으나 이미 끈이 떨어진 이상 더 이상 그 집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어서 스스로 시댁을 나오고 말았다.
그와는 고등학교까지 같은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하였기 때문에 그의 장단점을 모조리 알 수가 있을 정도였다.
우리 어머니가 나를 낳은 후에 한번인가 아버지와 함께 친구를 만났을 때에 그는 “너는 참 행복하구나. 정말 네가 부럽다.” 하는 소리를 아마 세 번인가 네 번을 하였을 만큼 어머니는 그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행복하다는 소리를 들은 바가 있는데 그 이듬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오늘은 자식과 이별을 하고 친구를 찾게 되었으니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하였듯이 그때에 친구가 부러워하던 그 장본인이 정말 맞는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버스는 출발시간부터 3 시간 만에 목적지에 도착을 하였는데 터미널에 내리니 날은 이미 어두워 초행길도 아닌데 불빛이 사방에서 비추어서 그런지 어디가 어딘지 도통 구분이 되지를 않았다.
대합실로 들어가니 아! 거기에는 낯익은 얼굴이 그를 맞이하였다,
“ 길을 용케 찾아 왔구나, 배 고푸지.”
“아니. 이렇게 늦게 찾아와도 돠냐. 미안하다.”
“ 너는 언제나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사는 사람 같구나. 앞으로는 그런 소리하지 않기로 하자 알았지.”
어머니 친구는 환하게 웃으면서 우리 어머니의 등을 어루만졌다.
두 분은 늦은 저녁이지만 레스토랑으로 가서 우유와 빵 한쪽씩을 먹고 집으로 간 시간은 10시가 훨씬 지나서였다.
우리 어머니는 이날 모처럼 친구를 만나서 맥주를 한 잔 하시는 바람에 잠시는 나를 잃어버렸지만 막상 잠자리에 들자마자 아들 생각이 나서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날 새벽에 눈을 뜨고 보니 친구는 그때까지 한밤중이어서 조용히 그의 목에다가 노끈을 얹어놓았지만 징그러워서 깜짝 놀랄 줄 알았는데 친구는 잠을 깨지 않았다.
밖으로 나와서 마당 한쪽에 서 있는 소나무 곁으로 가서 그 옆에 의자에 앉으니 궁둥이가 차가운 느낌이었다.
하룻밤을 무의식중에 자긴 하였지만 몸은 천근만근 무겁고 어제 저녁에 엄마를 찾았을 나를생각하니 불현듯이 집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다음에 나는 하루도 엄마를 떨어져서 잔 적이 없고 저녁을 먹고 나면 초저녁부터 잠이 많은 나는 칭얼대면서 엄마품속을 찾았다.
그런데 어제 저녁은 할머니와 함께 잤을 것이며 자면서도 몇 번이나 엄마를 찾았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녹아나는 것처럼 괴로웠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또 한편으로는 마음을 굳게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나는 것이니 이미 어머니는 집을 나와서 가족이 아닌 딴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참동안이나 눈을 감고 있자니 더욱 자신이 초라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막상 친구 집을 찾긴 하였으나 오래 머무를 곳은 못 된다는 생각을 하였다.
친구는 너 마음 내키는데 까지 함께 있자고 할 것이지만 좋은 일로 집을 나온 것도 아닌데 친구에게 신세를 진다는 것은 자신에게도 과히 좋지 않을 것 같았다.
몇 시나 되었는지 친구가 창문을 열더니 어서 들어오라고 하였다.
“ 너는 어디를 간다 온다. 소리도 없이 슬그머니 사라져서 깜짝 놀랐지 뭐냐. 애가 정신이 빠져서 도로 집으로 간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까지 하였지 뭐냐.”
“ 설마 내가 정신이 빠졌다 하더라도 집에를 도로 가겠냐.”
“ 네 아이를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한 소리야. 너 어제도 제대로 저녁을 먹지 않아서 배가 고플 텐데 내가 금방 흰 쌀밥을 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
어머니는 친구가 얼마나 고마운지 이 친구가 없다면 어디로 갔을까를 생각하니 또 눈물이 나왔다. 친구가 해준 조반을 맛있게 먹다 생각을 하니 또다시 아들 생각이 나는 바람에 목이 메었다.
조반을 먹고 나자 선희는 오늘은 모처럼 바다구경이나 가자고 하였다.
어렸을 때에 바다엘 가게 되면 철석거리는 파도에 정신을 빼앗기게 되고 아득한 수평선을 바라보면 행복이라는 것이 파도에 밀려 올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한없이 파도를 바라보곤 하였다.
날씨는 화창하고 유난히 파도자락은 은빛으로 빛나는데 문득 남편과 함께 아이의 팔을 붙잡고 바닷가를 거닐던 생각이 났는데 그때가 어머니에게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사람들이 행복을 입에 달고 살지만 행복이란 오래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살아가는 동안에 쌓였다가도 어느 결에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친구의 손을 잡고 바닷가를 거닐다 보니 파도가 어느 결에 발목을 적셔서 둘은 기겁을 하고 물러서다가 둘 다 한꺼번에 모래더미에 쓰러지고 말았다.
순간 친구는 하하 웃으면서 어머니를 꼭 끌어안았는데 다시 파도가 모래사장까지 덮치는 바람에 둘의 옷은 흠뻑 젖고 말았다.
“ 하하하하. 오래간만에 파도자락에 옷이 젖다니. 어쩌면 파도가 우리 둘의 몸 냄새를 맡고 사내의 음흉한 마음으로 돌변해서 달려든 것은 아닐까. 하하하하.”
어머니와 친구의 웃음소리는 순간의 파도소리에 묻혀서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간 나는 집에 있어야 할 엄마가 보이지를 않자 몇 번이나 엄마를 불렀다.
“엄마. 엄마.”
아무리 사방을 찾아도 엄마가 보이지 않자 나는 혹시 엄마가 빨래를 가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강가로 뛰어 나갔다.
엄마는 사시사철 빨래를 하실 때에는 강에 나가서 하시고 여름에는 빨래를 다 하시고 나서그 빨래를 돌밭에 말려가지고 들어오실 때가 많았다.
그런데 강엘 나가 보았지만 엄마는 보이지를 않아서 울면서 집으로 들어오는데 할머니가 읍내를 갔다 오시다가 내가 우는 것을 보시고는 손짓을 하시면서 부르시었다.
“ 새동아. 느 어멈은 오늘 이 집에서 아주 멀리 도망을 갔단다. 너는 오늘부터 이 할미가 먹여 살릴 것이니까 다시는 어멈을 찾지 말아야 해. 알았지.”
“ 엄마가 도망을 갔다고. 엄마가 할머니와 싸워서 갔지. 그렇지. 난 엄마 찾아서 갈 거야.”
내가 울면서 밖으로 나가자 할머니 말을 잘 들을 줄 알았는데 내가 엄마와 싸워서 간줄 알고 집을 나가겠단 소리를 하니 할머니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 엄마와 할미가 싸운 것이 아니고 느이 엄마가 이 집이 싫어서 간 것이니까 다시는 어멈을 찾지 마.”
할머니가 나를 달래느라 여러 말을 하였지만 나는 징징 울면서 밖으로 뛰어나갔다.
“ 새동아. 새동아.”
할머니는 내가 마음대로 고분고분 따라 주리란 생각을 하였는데 빡세게 나가자 몹시 속이 상하셨다.
나는 이날 밤이 늦어서야 집으로 들어갔는데 할머니가 밥을 먹으라고 해도 듣지를 않은 채 그냥 쓰러져 잤다.
내가 이러니 할머니는 이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조그만 놈이 할머니 말을 듣지도 않고 반항을 하니 할머니는 어찌해야 좋을지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며칠간 나로 해서 골이 아프게 되자 할머니는 때도 챙겨 드시지를 않게 되고 나중에는 몸져누우시고 말았다.
‘ 그럴 줄 알았으면 손자고 뭐고 어멈을 딸려 보낼 것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할머니는 사실 어머니를 미워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는데 아들이 죽고 나자 어디서 생긴 마음인지 자신도 모르게 며느리가 미워져 그렇게 모질게 대한 것이 나중에는 손자까지 저리 나오게 되자 후회가 되기도 하였다.
이렁저렁 거의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할머니가 아침에 일어나려고 하였지만 정신이 몽롱해지고 있었다.
손자를 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나중에는 안개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알게 된 것은 내가 학교를 갔다 오고 나서의 일이다.
할머니가 며칠 전부터 밥만 겨우 해주셨는데 이날 아침에는 일어나시지를 않아서 나는 밥도 먹지 않고 학교를 갔다 왔는데 그때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셔서 동네 사람들이 와서 장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 엄마가 집을 나가지 않았다면 할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후에 당숙모 댁에 가서 자랐는데 당숙모는 나를 고등학교 졸업을 시켜 주셔서 난 그 후에는 직업을 찾아서 뛰어다니다가 현대중공업에 입사를 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수년간을 철근 콩그리트 작업을 하는 기술자가 되어 중동까지 가서 건설현장을 누비다가 돌아와서는 장가를 들어 아들만 삼형제를 두었다.
나의 아내는 그동안 집의 살림을 잘 하여 지금은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고 있으니 이는 모두 당숙모께서 의지가지없는 나를 잘 길러 주셨기에 가능하였다.
세월은 흘러 어느 듯 나도 60을 바라보게 되었다.
직장을 고만두고 집에서 놀다가 보니 몸도 아픈 데가 있어서 어느 날 부터는 무슨 일이라도 할까 생각중이다가 밤늦게 자고 났더니 목이 이상하여서 아내에게 말을 하자 목을 유심히 살피던 아내는 이상하게 목이 좀 부은 것 같다고 하여 즉시 병원엘 가서 진찰을 받아보니 의사는 심각하게 표정을 짓더니 아무래도 갑상선에 이상이 생긴 것 같다며 정밀검사를 하라고 하여 피를 뽑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병원엘 가니 의사는 검사결과를 자세히 설명을 하는데 갑상선암이라면서 우선 입원을 하고 경과를 보아서 수술을 서둘러야 된다고 하였다.
건강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아무 이상이 없던 사람인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갑상선암이라니. 마침내 수술 날짜를 다음 주로 정하고 입원을 하라고 하여 하룻밤을 자고 났는데 다리거 퉁퉁 붓고 숨이 찬기가 있어 의사에게 다시 진찰을 받으니 당뇨가 심한 것 같다면서 당분간은 경과를 보고 나서 수술을 할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당뇨라는 것은 없다고 자부하고 살아왔는데 당뇨의 진단을 받게 되니 혹시 오진은아닌가 하여 재차 검사를 하였는데 당뇨가 벌써 오래 전에 생긴 것을 방치해서 그렇다고 하였다.
자금까지 건강하게 잘 지나왔는데 갑자기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을 하였다니 공연히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이다.
당분간 입원을 하고 경과를 보자고 하여 그날 이후 6인 실에 입원을 하였다.
그런데 매일같이 조용한 집에서 생활을 하다가 환자들이 들락거리는 입원실에 있어 보니 오랜 기간 있어서는 안 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곳을 탈출하는 길은 얼른 수술을 마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입원 이후에 거의 누워서 이 공상 저 공상을 하다가 이런 때에 어머니가 계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서 어렸을 때에 어머니와 헤어지던 일이 어렴풋이 생각이 나는 것이었다.
나는 기억은 아득하지만 어려서 어머니와 헤어졌으며 그동안 살면서 어머니에 대한 애정을 그리 느끼지 못하였는데 막상 몸에 이상이 생기게 되자 갑자기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사실 사람이 깊은 중병에 걸려 생명이 위독하게 되면 별별 생각을 다 하는 중에 가장 그리운 것은 가장 가까운 혈육이며 그 중에도 어머니가 제일 먼저 떠올랐으니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다.
어쩌면 개가를 하셨을 어머니는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마음속에는 전실 자식인 나를 만나고 싶어도 눈물만 흘리셨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다른 가정을 가졌으니 마음은 생각이 있어도 그것을 입 밖에 내지도 못하고 살아오셨을 것이다.
내가 어느 날 학교를 갔다가 오니 어머니는 안 계시는데 할머니는 느 어멈은 도망을 갔다고 하셔서 어린 마음에도 할머니와 싸우고 가신 것으로 생각이 되었다.
날마다 울면서 엄마를 찾으면 할머니는 엄마에게 욕을 하시면서 그런 어멈을 왜 찾느냐고 야단을 치셨다.
어머니가 다른 데로 가신 것은 순전히 할머니 때문에 가신 것이 확실하다는 생각을 하면 지금이라도 죽기 전에 어머니를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느 날 나는 큰아들에게 이야기를 하자 그러면 방법을 알아보겠다고 하더니 나에게 듣고 싶으신 노래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네가 더 잘 아는 것 아니냐.”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가 늘 흥얼거리시던 노래 “어머님의 손을 놓고” 가 듣고 싶지 않으냐고 하였다.
“ 그래 바로 그 노래가 듣고 싶지.”
“ 그러면 알았습니다. 제가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이 노래를 어디에다가 신청을 해보겠습니다.”
“ 노래를 신청하다니 어디로 한다는 말이냐.”
“ 아버지. 매주 월요일 날은 가요무대가 펼쳐지는 날인데요. 이날 사연을 보내면 그 사연에 따라서 노래를 들려주기도 하고 옛날에 잊어버린 사람을 찾을 수도 있대요.”
그런 푸로가 있다는 말을 나는 처음 들었다. 날마다 날이 새면 일터에 나가서 일을 해야 식구들이 먹고 살수가 있었으니 그런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나에게는 사치일 뿐이었다.
나의 말을 들은 아들은 내가 술만 한잔 먹으면 찾아보고 싶다는 할머니에게 편지를 쓰라고 하여 나는 내 심중의 말을 편지로 써서 아들에게 주자 바로 가요무대에 사연과 함께 보냈다고 하였다.
“보고 싶은 어머니”
어머니 !
부르고 싶던 어머니를 이제야 부르게 되니 가슴이 메어지질 듯 아픕니다.
어머니는 저를 아주 잊어버리셨는지 모르지만 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어머니를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여덟 살 때 어머니는 할머니가 자꾸만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시는 바람에 어머니는 아들인 저를 두고 가시지 못하다가 하도 할머니가 만날 욕을 하시고 꼴도 보기 싫다고 하시자 어머니는 제가 학교를 간 사이에 아주 집을 나가시고 말았습니다.
학교를 갔다가 와서 어머니가 안 계셔서 저는 강으로 빨래를 하러 가신 줄 알고는 달려가 보았으나 어머니는 거기에도 안 계셔서 저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학교 가기도 싫고 할머니가 아무리 달래주셔도 할머니가 싫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할머니도 돌아가셔서 저는 당숙모님 댁으로 가게 되었고 당숙모님은 저를 형제들과 차별하시지 않고 고등학교까지 졸업을 시켜 주셨으니 그 은공을 어찌 다 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어머니.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요.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면 하늘 끝까지라도 찾아가서 어머니 무릎에 안기고 싶습니다. 지금 제 생각으로는 어디를 가셨다면 거기에도 제 동생들이 여럿이 생겼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머니. 저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는 추억이 한 가지 있습니다. 언젠가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바닷가를 거닐었는데 어머니는 그때 제게 먼 바다를 가리키시면서 이다음에 바다처럼 넓은 세상에 나가서 멋지게 살라고 하신 것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어머니. 저는 지금 갑상선암이 몸에 침투를 하여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처지에 와 있습니다. 지금 생각을 하니 살아생전에 그리운 어머니를 한번만이라도 뵙는다면 여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 보고 싶어서 이 편지를 드리는 것입니다. 어머니를 뵙게 된다면 나에게 닥친 병도 금방 나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제발 어머니 모습을 한번만 뵙게 해주셔요. 어머니 사랑합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노래 한곡을 띄워 드립니다. 곡목은 “비 내리는 고모령입니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아들 엄 새동 올림.
아들이 나의 사연을 보낸 지 한 달 만에 답이 왔다고 하였다,
우리 어머니는 아직 생존해 계시며 아들의 사연을 들으신 어머니는 아무 때고 아들을 만나고 싶으니 어서 답변을 달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아버지. 아버지가 찾으시는 할머니가 연락을 해 오셨다는 방송국의 연락이 왔습니다. 아버지가 만나시고 싶은 날을 연락을 해달라고 하니 언제가 좋을까요.”
“ 아이고, 어머니.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니요….”
어느 결에 내 볼에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어머니의 희미한 환영이 저녁노을 속으로 번지고 있었다.
김 두 수 (金 斗 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