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서다 (11) -출가재일
새로운 왕자의 탄생을 축하하며 밤낮으로 이어진 칠 일 동안의 떠덜썩한 잔치가 끝났다. 모든 이들이 지쳐 잠이 들었다. 넓은 궁전에 깨어 있는 사람이라고는 태자 한 사람뿐이었다.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고요한 달빛을 받으며 태자는 생각에 잠겼다.
‘ 한 나그네가 광야를 거닐다가 코끼리를 만나 도망치고 있었다.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인 눈빛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리고 있다. 마을은 아득하고 나무 위나 돌 틈이건 안전한 곳은 없다. 숨을 곳을 찾아 사방으로 내달리다 겨우 발견한 곳이 바닥이 말라버린 우물이다. 저 곳이면 그래도 괜찮겠지, 우물 곁 등나무 뿌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다가 그는 다시 소스라치게 놀랐다. 컴컴한 바닥에 시커먼 독룡이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는 것이다. 그때서야 먹잇감을 노리며 사방에서 혀를 널름거리는 네 마리의 독사가 눈에 들어왔다.
다시 위로 올라가야 할까, 그는 하얗게 질려 버렸다. 쫒아온 코끼리가 코를 높이 치켜들고 포효하고 있었다. 올라오기만 하면 밟아버릴 태세다. 믿을 것이라고는 가느다란 등나무 뿌리 한 줄기뿐이다. 그러나 그 뿌리마저 흰 쥐와 검은 쥐가 나타나 번갈아가며 갈아먹고 있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한, 두려움과 공포에 질린 얼굴 위로 무언가 떨어져 입으로 흘러들었다. 등나무 덩굴 위에 벌집이 있었던 것이다.
똑 똑 똑 똑 똑, 다섯 방울의 달콤함과 감미로움에 취해 그는 눈을 감아버렸다.
바람에 나무가 흔들릴 때마다 벌들이 쏟아져 나와 온몸을 쏘아대고, 두 마리 쥐가 쉬지 않고 뿌리를 갈아먹고, 사방에서 독사들이 쉭쉭거리고, 사나운 들불이 일어나 광야를 태우는 데도 그는 눈을 꼭 감고 바람이 다시 불기만 기다렸다.
다섯방울의 꿀맛만 기억하고, 그 맛을 다시 볼 순간만 기약한 채 그는 모든 고통과 두려움을 잊고 있었다.
나의 삶도 이 나그네와 다를바 없지 않은가?‘
“일어나라 찬나야.“
“태자님, 이 밤에 무슨 일이십니까?”
“깐타까(Kanthaka)에게 안장을 얹어라, 갈 곳이 있다.”
쥐죽은 듯 고요한 까삘라성의 문턱을 넘으며 태자는 다짐하였다.
‘늙고 병들어 죽어야만 하는 이 고통과 근심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 죄상의 진리를 얻기 전엔 결코 나를 키워주신 마하빠자빠띠와 아내 야소다라를 찾지 않으리라’
동쪽 하늘이 밝아올 무렵 태자는 아노마(Anoma)강가의 은빛 모래언덕에 다다랐다.
강 너머는 말라(Malla)의 땅이었다.
말에서 내린 태자는 깐타까의 새하얀 갈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제 너희들이 할 일은 끝났다. 곁에서 시중드느라 수고 많았다.
찬나야, 까타까와 함께 궁으로 돌아가라.“
찬나는 나무둥치 같은 두 팔을 벌려 태자의 앞을 막아섰다.
“안됩니다. 뜻을 거두고 왕궁으로 돌아가십시오. 부디 부왕과 왕비님, 태자비님과 새로 태어난 왕자님에게 슬픔을 안겨주지 마십시오.”
도도한 강물의 흐름 같은 태자의 결심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태자는 몸에 지녔던 장신구들을 하나하나 풀었다.
“이것은 왕비께 드리고, 이것은 태자비께 드려라, 부디 슬픔에 오래 잠기지는 마시라고 전해다오”
“만나면 헤어짐이 있기 마련이다.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와도 이레 만에 죽음으로 이별해야 했는데 너와 헤어짐이 없을 수 있겠느냐. 더 이상 부질없는 연민으로 괴로워 말라. 깐타까와 함께 왕궁으로 돌아가 내 말을 전해다오. 너에게 하는 마지막 부탁이다.”
태자는 황금 신발을 벗었다. 완전한 진리를 찾아 영겁을 떠돈 자신의 모습을 되찾은 보살은 피를 토하는 찬나의 울음을 뒤로 하고 낯선 풍경속으로 걸어갔다.
스물아홉 되던 해인 기원전 595년 2월 8일이었다.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바로 출가재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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