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달리며
이지원
부안 격포항에서 영광으로 가는 길이다. 전날까지 날씨가 무척 추웠으나 그새 날이 조금 풀렸는지, 남쪽이라 그런지 전날만큼 춥지는 않다. 오른쪽으로 펼쳐진 바다는 해질녘 노을이 아름다운 곳이라고 한다.해안도로가 길게 이어지는 국도 30번길, 동해안에는 아름다운 7번국도가 있다면 서해안은 이곳쯤 될까? 아름답기는 이곳도 7번국도 지않다. 그 어느 곳에 서서 바라보아도 멋진 노을을 볼 수 있다는 안내문과 포토존이 군데 군데 설치돼 있다. 초행길에서 만나는 이런 즐거움을어디다 비길까?
영광 백수 해안에 있는 대신등대가 목적지다. 도착하면 해질녘이라등대에서 멋진 노을 속에 들 수 있을 것도 같아 가슴이 뛴다. 십이월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두고 있다. 이곳에서 한 해가 저무는 해넘이를 보고싶은 소망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등대가 가까워질수록 하늘이 흐려진다.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언제 또 하늘이 얼굴빛을 바꿀지알 수 없는 일이라 아직 포기하기에는 이르다.
일주일 전, 서해안 일대에 눈이 엄청나게 왔었다. 내심 걱정이 되었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고속도로는 이미 제설작업이 말끔하게되었고 국도도 응달진 곳에 잔설이 남아 있을 뿐, 차가 달리는 데에는큰 지장이 없었다. 멀리서 바라보는 것과 뉴스로만 세상을 읽는 사람들은 걱정이 태산이겠지만, 예전에 나도 그랬지만 나와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길 위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몇 년 전부터 등대를 찾아다니고 있다. 이번 시즌에는 서해안에 있는둥대를 찾아 길을 나섰다. 전날 밤, 울산에서 경기도 화성까지 올라갔다. 서해안으로 쭉 내려가는 일정이다. 화성 제부도와 궁평항, 서산간월도, 홍성 남당항, 보령 대천항과 무창포, 서천 홍원항과 마량진항, 부안 격포항을 거쳐 영광 대신등대로 가고 있다.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까지 세 개 도를 두루 거쳐 내려왔다.
해안도로가 끝나고 저 멀리 등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도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등대 전경이 너무나 아름다워 탄성이 절로 나온다. 무엇이든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라볼 때가 좋은 것이다. 사람관계도 마찬가지다.거리 두기가 쉽지 않아 갈등하고 반복하지 않던가.
대신등대 입구까지 차가 들어갈 수 있어서 접근성은 아주 좋다. 대문없는 입구 양쪽에 높지 않은 기둥이 세워져 있다. 나무 계단을 내려 몇발자국 걸으면 다시 계단을 오르게 되어 있는데 그곳에 하얀 몸통을 가진 대신등대가 무심한 얼굴로 내방객을 맞이한다. 미끈한 일자 몸통이지만 가로 삼등분으로 나뉘어 있어 단조로움을 피했다. 그 위에 등롱이있다. 간결미가 돋보이는 등대다.
하늘은 먹구름이 들락날락 변덕을 부린다. 기다리면 노을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이곳을 쉬 떠나지 못한다. 어제 일정이 강행군이어서 오늘은 느긋하게 잡았다. 이곳에서 목포로 가면 오늘의 일정이 마무리되기에 등대에 오래 머물 수 있는 것이다. 서해안까지 와서 황홀한 노을속에 빠져 봐야 제맛이지만 이 또한 하늘이 주관하는 일이라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다.
결국 먹구름 사이로 비껴든 노을 한 자락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섭섭해하지도 투정 부리지도 않는다. 그 모습은 그 모습대로 아름다웠기때문이다. 황홀한 순간을 쉽게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아닐 수 있기에.
등대에서 제법 오래 머물렀다. 겨울 바다의 시린 파도 소리를 들으며등대 벤치에 앉아 먼 바다를 응시한 채 전날 달렸던 길을 돌이켜 본다.한밤중에 도착한 제부도는 바닷길이 열려 있었다. 차로 들어갈 수 있는곳이었지만 주변이 칠흑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무서워서 머리가 쭈뺏거릴 지경이었다. 춥기는 또 얼마나 춥던지! 무서워서 떨리고 추워서 더 떨렸다. 시키지도 않는 이 일을는가 싶어서 실소가 절로 나왔지만 나 좋아서 하는 일이라 웃고 말았다. 물이 들 시간은 꽤 남았지만 서둘러 제부도를 빠져 나왔다. 세부도 인근에 있는 전곡항을 거쳐궁평항까지 오니 아슴프레 동이 트기 시작했다.
궁평항에서 멋진 일출을 맞이했다. 여기서 해돋이를 볼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길 위에서 우연히 마주친 아침해를 보며 새벽에 돌아들었던 마음이 따사롭게 풀려버렸다. 등댓길에서 만난 인연들도 행복한 시간이 되었기를 빌어 본다. 서산 간월도를 거쳐 보령 무창포 서천 마량진항에서 다시 부안으로 그리고 30번국도를 따라 영광까지 내려왔다. 우연히 마주한 궁평항의 해돋이를 생각하면서 대신등대에서 만나지 못한노을에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다. 아름다운 서해안을 달려 보았고 그 해안을 다시 찾게 될 날이 있기를 기약하며 등대와 작별 인사를 한다.
어둠 내린 길을 달리고 있다. 목포로 가는 중이다. 내일은 또 어떤 하루가 펼쳐질까? 낯선 길이든 익숙한 길이든 나는 길 위에서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떠날 수 있음에 행복을 느낀다. 하여 이 시간이 조금만 더내게 머물러 주기를 소망한다. 이순의 중반에 꾸는 꿈이 너무 과하다고나무라지는 마시라!
첫댓글 2023년 3월 『월간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