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 갈매기
일렁이는 바닷물에 몸을 맡긴 채 갈매기들은 대기하고 있었다. 저만치 수평선 쪽으론 중천을 약간 비낀 태양이 쏟아붓는 햇살에 해면이 반짝반짝 은비늘처럼 빛났지만 눈앞의 갈매기들은 그쪽엔 관심이 없는 듯했다. 코로나로 여객선 운항횟수가 줄어들어 스무 마리 정도의 이곳 마산항 갈매기들은 지금 한창 시장기를 느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녀석들은 지금 여객선이 빨리 출항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역광 탓으로 여객선에서 보기엔 바닷물이 검게 보여 갈매기들도 색상이 비둘기처럼 어두웠다. 바다 속엔 물고기가 없지 않을 텐데 살아있는 것을 잡기가 쉽지 않은지 녀석들은 여객선 바라기만 하고 있는 것이다.
갈매기들이 혹시라도 여객선을 놓칠 새라 바짝 붙어 있는 것은 오로지 새우깡 때문이다. 새우깡에 새우가 들어있지 않다는 걸 알 리 없는 녀석들이라 딱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제 곧 배가 출항하면 뒤따르면서 새우깡 식사를 맛있게 할 터인데 노인네가 별걱정을 다한다고 오히려 그들은 날 타박할는지도 모른다. 여객선 안에서 자신들의 식사인 새우깡을 팔고 있다는 것쯤은 그들도 알고 있을 터이다. 새우깡이 든 상자는 여객선 두 선실 사이 노천 통로에 놓여 무인판매를 하고 있어서 녀석들은 마음만 먹으면 봉지채로 낚아채갈 수 있는데도 그런 짓은 하질 않았다. 사람들은 갈매기들의 곡예에 빠져보고 싶어 새우깡을 집어 든다.
드디어 여객선은 10분 걸리는 돝섬을 향해 출항했다. 오랜만에 해맑은 하늘이 열려서인지 갈매기들은 환성을 질러대며 군무를 펼쳤고 그들을 카메라에 담느라 셔터를 눌러대는 사람도 신이 났다. 어린이와 어른 가릴 것 없이 새우깡을 던져주는 사람에게 솟구치고 곤두박질치면서 비명까지 질러대며 비행을 이어갔다. 여객선이 진행하면서 일으키는 바람에 공중에 던져진 새우깡은 빠른 속도로 휘날리는데도 주둥이로 낱개 하나하나를 실수 없이 낚아챘다. 가끔씩 성질 급한 녀석은 손에 들고 있는 새우깡까지 접근해서 과감하게 쪼아갔고 아이들은 놀라면서도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인간과 갈매기가 더불어 행복한 시간이었다.
보름 전 답사여행을 왔던 날은 날씨가 잿빛으로 흐려 바닷물 색상마저 칙칙했었다. 그날도 갈매기들은 여객선을 따랐지만 오늘 같은 풍광을 보여주진 못했다. 난 그날 마스크로 입을 틀어막은 인간들의 사정을 갈매기들은 알기나할까 걱정하며 잠시 비감에 젖기도 했었다. 이제 ‘가고파의 고장’이 마산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렇다면 ‘가고파’란 아름다운 이름을 얻은 마산 시민들에게 노산 이은상 선생은 은인일 수도 있을 터이다. 그런데도 선생의 이름이 붙은 그 흔한 문학관 하나 없는 게 마산의 오늘이다. 몇 차례나 기공식을 가졌지만 그때마다 친일 프레임을 씌워 무산시켰던 것이다.
“오늘은 휴전선 행각 마지막 날. 나는 지금 동부전선에서도 가장 치열한 격전을 치룬 향로봉을 오르고 있다. 설악산 한계령으로부터 흘러내리는 개울이 이어진다. 발길은 북쪽을 향하면서도 눈은 연방 설악의 동쪽 골짜기를 향한다. 30년 만에 다시 보아도 밝은 빛 맑은 기운이 굽이쳐 흐르는 물보라와 함께 가슴속 티끌을 단번에 씻어주기 때문이다. 얼마나 아름답고 시원하냐. 그런데 이런 데서 그렇게 피비린내를 풍겼더란 말이냐. 친소도 없이 은원도 없이 싸우다 말고 총을 던지고 폭포수에 발이라도 담그고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고 싶은 데가 아니더냐….”
노산의 기행문 「피어린 육백리」 앞부분이다. 6.25남침이 휴전으로 막을 내리고 나서 선생은 한반도의 허리를 두 동강으로 자른 휴전선 155마일을 직접 밟은 후 이 기행문을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당시 난 서울 서대문 쪽에서 이 글이 실린 신문을 배달하고 있었기에 자연스레 읽을 수 있었다. 그땐 이미 작가의 「가고파」와 「옛 동산에 올라」 「봄의 교향악」과 같은 명시들이 불후의 명곡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뒤였다. 40여 일 동안 신문에 연재되는 글을 가슴 졸이며 읽었고 휴전선에 대한 한은 그만큼 점점 깊어만 갔었다. 노산 선생의 시비는 김해 신어산 등산로에도 서있지만 문학관은 요원하니 걱정이다.
갈매기를 대중에게 널리 알린 일등공신은 부산 시민들일 것이다. 1980년대 초 프로야구가 등장했을 때 부산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체할 수 없는 기질을 말해주듯 경기장이 떠나가라 ‘부산 갈매기’를 합창했었다. 이제는 반세기 동안 몸담았던 도시를 추억할 수 있게 만드는 부산 갈매기이기도 하다. 자갈치시장 뒤 전망대엔 불빛 때문인지 밤에도 갈매기들이 나른다. 이들이 새우깡에 목을 매지 않고 유유자적하는 것은 자갈치엔 그만큼 먹이가 흔하기 때문일 것이다. 연전엔 우리 직장 은퇴자 단체에서도 합창단을 만들면서 '부산 갈매기'란 이름을 붙였었다. 합창단도 2년을 못 채우고 코로나에 갇히고 말아 아쉬움을 남겼다.
결혼 50주년 금혼식. 보름 전 반세기 전 결혼예식을 올렸던 마산 불종거리를 둘러본 후 금혼식 여행은 마산 앞바다 돝섬으로 정했다. 아내는 코로나를 걱정하며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하늘이 도왔는지 다시 마산을 찾은 날은 날씨마저 청명하여 제대로 된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처녀시절 아내가 자주 찾았다는 고려당 빵집에선 화려하게 장옷을 갖춰입고 '한복 나들이 패션쇼'를 펼치는 일군의 남녀 시니어모델을 만났다. 그들은 우리 부부가 금혼식 여행을 왔다는 걸 알고 기꺼이 카메라 앞에 함께 포즈를 취해 주었다. 영하를 오르내리는 차가운 날씨에도 세상 곳곳에 이처럼 온기를 품은 사람들이 있어 여행은 행복했다.
-글쓴이 : 소설가/수필가/여행작가/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