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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신자와 초보 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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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신자 신학공부 신약성서배경사(8) 유대 전쟁과 바르 코흐바의 폭동
코람데오 추천 4 조회 274 24.04.01 07:41 댓글 24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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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4.04.01 07:43

    첫댓글 에드워드 로제 지음, 박창건 역 <신약성서배경사>입니다.

  • 24.04.01 08:07

    여러 번 연재되어 책 이름을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확실히 올려 주시니 고맙습니다.

  • 24.04.01 08:11

    좋은 포스팅입니다.

    tv에 교수가 나와서 바이타민, 바이타민 하니까 생소한 것처럼 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 하다가 팔레스틴이라고 하니 조금 생소합니다. 지명과 인명에 대한 어느 정도 통일적 표기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 24.04.01 08:13

    네, 공감합니다.

  • 24.04.01 19:59

    공감합니다22

  • 24.04.01 08:19

    플로루스

    52~60년 여러 명의 대제사장을 임명해 반대파들의 증오를 사기도 했다. 그리스화된 사람들과 분쟁을 겪고 있던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의 권익을 옹호했지만 유대에서는 어떠한 정책도 시행하지 않았는데, 이는 유대에 테러 집단인 열심당원들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60년 사도 바울로가 체포되자 그곳의 지방 행정관은 아그리파에게 바울로의 처리문제에 대해 조언을 구했으며 아그리파는 바울로의 무죄를 입증했다. 66년 지방 행정관 ///게시우스 플로루스///가 카이사리아에서 유대인을 대량학살하자 예루살렘에서 열심당원들이 봉기했다.

    아그리파가 ///플로루스///를 지지하면서 자제할 것을 촉구했으나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고 열심당원들은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의 왕국 내에서도 점차 위협이 고조되었다. 66년 여름 그가 예루살렘으로 파견한 군대가 패배했고 반란군들은 로마군을 섬멸했다. 67년 티투스의 군대가 도착하자 아그리파는 로마군의 작전을 도왔다. 70년 아그리파는 티투스의 아들을 도와 예루살렘을 최종적으로 점령했다. 전쟁이 끝난 뒤 아그리파의 영토는 티투스에 의해 더욱 확장되었으며, 아그리파는 93년까지 생존했던 것 같다.

  • 24.04.01 08:20

    출처: "헤로데 아그리파 2세", Daum 백과사전

  • 24.04.01 16:24

    @장코뱅 다음과 네이버 사전만 잘 찾아뵈도 옛날에 쓴 책 못지 않거나 오히려 더 나은 내용이 나오네요.

  • 24.04.01 20:00

    @노베 공감합니다.

  • 24.04.01 08:23

    달란트(<영> Talent ; <히> '킼카르' <헬> '탈란톤')

    구약 시대에는 34.27㎏ 무게와 동일한 중량을 가리켰다. 신약 시대에 와서는 돈의 단위로서(실제로 주조된 화폐는 아니다) 약 6,000 드라크마와 동일한 가치를 표시하였다.

    출처: <GODpia 성경사전: 아가페출판사>

  • 24.04.01 16:29

    탤런트 그러면 tv 배우를 생각하는데 성경과 역사에서는 돈과 무게의 단위이군요.

  • 24.04.01 08:29

    네로와 베스파시아누스

    베스파시아누스는 능력을 인정받아 즉위 전까지 트라키아, 히스파니아, 갈리아, 게르마니아, 브리타니아, 북아프리카, 이집트에 파견돼 공적을 쌓았다. 따라서 그는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신임 아래 계속 군부에 남아있었는데 네로 치세 말기에 유대 지역에서 종교적 민족주의 세력인 열심당에 의해 발생한 유대 독립전쟁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명장 코르불로 휘하의 시리아 속주로 파견됐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 반란을 평정할 지휘관으로서 새로이 임명을 받고 유대땅으로 파견된 이후, 지략과 용맹성으로 유대 북부 갈릴레아 지역을 점령하게 되고 요셉이라는 유대인 지도자를 포로로 잡게 된다. 후에 로마로 들어가 시민권을 얻게 되는 요셉, 즉 로마인으로서의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로마와 유대 간의 절충안을 제시하며 양쪽의 공존을 모색하게 하고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의 도움으로 유대를 무리없이 통치하였다. 물론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의 정치를 도운 요세푸스를 보호하여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었다.

  • 24.04.01 08:30

    여튼, 이 반란을 진압하던 중 내란이 일어나 네로가 자결하자 시리아 속주 총독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와 로마의 동방 관리들, 동맹국 국왕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또한 비텔리우스에게 쌓인 원한을 풀기 위해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한 도나우 군단장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가 로마에 입성해 비텔리우스를 죽이고 로마를 평정하여 베스파시아누스는 정식으로 황제에 즉위하게 된다.

    출처: "베스파시아누스", 나무위키

  • 24.04.01 16:42

    @장코뱅 정권이 불안정하니 황제 밑에서 유능한 장군으로 종사하다가 기회를 잡고 황제가 되는 경우가 로마 역사에서 종종 보이는 것 같습니다.

  • 24.04.01 20:00

    @노베 네, 공감합니다.

  • 24.04.01 08:34

    티투스

    로마 제국의 10대 황제이자 두 번째 세습왕조인 플라비우스 왕조의 두 번째 황제. 황제로서 풀네임은 티투스 플라비우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Titus Flavius Caesar Vespasianus Augustus).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장남이자 도미티아누스의 친형. 그의 재위기간 2년 동안에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 완공되었고, 로마 시대 대참사 중 하나인 베수비오 화산 폭발이 있었다. ...

    티투스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마 유대 전쟁일 것이다. 네로 시대에 유대의 민족주의자 집단인 열심당[4]이 일으킨 이 전쟁은 가장 큰 반란 사건 중 하나였다. 이때 아버지였던 베스파시아누스가 67년 유대 반란을 진압하는 지휘관으로 임명되면서 팔레스타인으로 파견될 당시 형제 도미티아누스와 달리 티투스는 아버지를 따라갔다. 티투스의 직책은 중무장 보병 지휘관이었으며, 재무관으로서도 병영에서 활동했다.

    출처: "티투스", 나무위키

  • 24.04.01 16:48

    로마-유대 전쟁에 대해 아는 것이 신약성경의 배경을 아는 것으로 연결되니 하나님의 역사 경영의 섭리가 오묘한 것 같습니다.

  • 24.04.01 20:00

    @노베 네, 그렇네요. 공감합니다.

  • 24.04.01 08:35

    야브네Jabneh

    요약 고대 팔레스티나(지금의 이스라엘)의 도시.
    (그). Jamnia. 지금의 이브나(Yibna). Yavne라고도 함.

    텔아비브야포에서 약 24㎞ 남쪽, 지중해에서 6㎞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필리스틴인들이 살던 곳이었으나 BC 8세기 우지아 시대에 유대인들이 차지했다. 야브네 항구는 주민들의 적대적인 반감에 분노한 유다스 마카베오(?~BC 161)에게 침략당하기도 했다.

    70년 로마인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로 요하난 벤 자카이가 세운 야브네대학교가 유대인의 가장 중요한 학문의 전당이 되었다. 100년경 이곳에서 열린 유대인 랍비 회합에서 히브리어 성서가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12세기 십자군들이 세운 요새가 있다.

    출처: Daum 백과

  • 24.04.01 16:52

    히브리어 성경이 확정된 곳이라고요? 너무나 중요한 곳이군요.

  • 작성자 24.04.01 20:26

    @노베 네. 얌니아회의에서 정경을 확정했습니다.

  • 24.04.01 16:55

    이 연재물을 통해서 신약배경사를 아는 것은 물론이고 일반 역사에 대해서도 아울러 알게되어 일석이조가 되는 좋은 포스팅이라고 생각합니다.

  • 24.04.02 07:27

    공감합니다.

  • 작성자 24.04.02 13:25

    바르 코흐바 같은 바리새인이 자신을 메시아라고 인식하였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네요. 구약 성경이 완전히 확정되기 전이어서 경전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아서였을까요? 메시아에 대한 예언들을 익히 알고 있었음직 한데...그렇다면 자신이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을텐데 메시아라고 주장한 것은 그래야 사람들이 자신을 믿고 추종해줄 거라고 생각했겠죠. 유대교에서 거짓선지자에 대한 죄를 묻지 않는다고 하니...얼마나 빗나간 예언들이 많았으면 저랬을까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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