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 점령군의 방약무인한 행동은 유대 백성들의 증오를 극에 달하게 하였다. 카이사레아에서 헬라주의 주민들의 반유대인 시위운동이 일어났을 때 유대인들은 로마인들에게 돈을 주면서 보호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하였으며 그들은 로마인들의 태도에 분노하였다. 지방 총독 게시우스 플로루스(Gessius Florus)의 금전욕은 끝이 없어 기원 66년에는 성전 금고에서 17탈란트를 강탈하였다. 격분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배회하면서 가련한 총독을 위하여 동냥하면서 총독을 조소하였다. 이에 게시우스 플로루스는 격분하여 군인들에게 예루살렘에서 약탈하도록 허용하였다. 그는 카이사레아에서 2개 대대를 예루살렘에 보강, 파병하면서 이들을 열광적으로 환영하도록 유대인들에게 요구하였다. 신중한 무리들, 특히 대제사장과 그의 추종자들은 이러한 요구에 거역하지 말고 복종하도록 충고하였다. 그래서 백성들은 이러한 부끄러운 치욕을 감수할 각오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명령에 따라서 로마 군인들을 환영하였을 때 이들은 총독의 명령대로 유대인들의 환영에 아무런 반응도 없이 묵묵히 있었다. 이때 굴욕을 당한 사람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리고 말았다. 재빨리 성전구역이 점령되었으며 총독은 폭도들 앞에서 카이사레아로 후퇴해야 했다. 예루살렘에는 1개 대대만이 강력한 요새인 안토니아 성에 후퇴하여 있었고 그 외의 온 도시는 폭도들의 손에 장악되었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야 했는가? 아그립파는 유대인들에게 로마에 대항하는 무장 폭동은 무모한 짓이라고 설득하려 하였다. 대제사장과 사제단, 그리고 바리새인들도 자제할 것을 충고하였다. 그러나 타오르는 불은 꺼질 수 없었다. 사람들은 매일 로마 황제에게 봉헌하던 제물을 중지하였고 그리하여 공개적인 폭동의 징표를 나타내었다. 안토니아 성도 봉기의 돌진에 저항할 수 없었다. 안토니아 성이 점령되어 이제 온 도시가 유대인들의 손에 들어왔다. 첫 번째의 성공은 처음에는 머뭇거리던 많은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그리고 의심쩍은 태도를 취하던 다른 사람들은 살해되거나 강제로 폭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불행을 막아보려고 헛되이 노력하던 대제사장은 암살되었다.
빠른 진전으로 기습을 당한 로마인들은 더 이상 이러한 상황의 주도권을 잡을 수 없었다. 시리아에 있던 로마 총독 체스티우스(Cestius)가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여 왔다. 그러나 그는 예루살렘을 점령할 수 없었다. 그는 출정을 중지해야만 했고 치명적인 타격을 받아 시리아로 회군하고 말았다. 유대인들의 환성은 커졌고, 로마인들을 그 땅에서 몰아냈으며 타국의 지배권의 멍에를 끊어 버렸다. 반격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둘러서 방어 준비를 하였다. 유격대원들로 강력한 군대가 형성되었고 갈릴리에는 강력한 요새가 구축되었다. 북부 지역에서 적절한 대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젊은 사제인 요세푸스가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파견되었다.
네로(Nero) 황제는 그의 가장 뛰어난 용장 베스파시안(Vespasian)을 유대인들과의 전쟁을 지휘하도록 파견하였다. 베스파시안은 그의 아들 티투스(Titus)와 함께 동양으로 왔다. 그는 안디옥에서부터 강력한 힘으로 진군하여 왔고 티투스는 이집트에서부터 군대를 이끌고 왔다. 로마인의 공격은 먼저 갈릴리로 향했다. 강력한 군대가 진군하여 오자 유대인들은 불안에 휩싸여 요새지로 후퇴하여 버렸다. 그래서 평지는 싸움도 없이 로마인들의 손에 넘어갔다. 요세푸스는 그의 주민들과 함께 요타파타에서 항쟁을 하였으나 고수할 수 없었다. 유대인들의 항거는 47일간 계속되다가 허물어졌다. 혁명당원들은 모든 항거자들이 자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이러한 요구를 거절하였으며 베스파시안에게 항복하여 그가 황제의 위를 얻을 것이라는 예언을 하면서 생명을 구하려고 하였다. 베스파시안은 그를 살려주었으며 그 이후 요세푸스는 로마의 최고 사령부에 머물렀다. 이렇게 해서 그는 유대 전쟁의 목격자가 되었으며 후에 유대전쟁사를 기록한 사람이 되었다(참조, S. 102). 혁명당원의 지도자인 기샬라(Gischala)의 요하네스는 소수 무리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다. 그래서 기원 67년에 갈릴리 전체는 로마의 수중에 들어갔다.
결판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 도시에서는 과격한 그룹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기샬라의 요하네스 지도하의 혁명당원들은 성전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도시의 나머지 지역은 시몬 바르 기오라(Simon Bar Giora)에 의하여 점령되어 있었다. 두 지도자의 부하들은 적대적으로 대립하여 서로 싸웠다.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과 주저하는 사람들은 무서운 공포로 압도되었다. 이때 폭동에 참여하지 않았던 원시(原始) 공동체는 그 도시를 떠나 동부 요르단 땅에 있는 펠라로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로마인들은 예루살렘의 상황이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기원 69년에 베스파시안이 그의 군대에 의하여 황제에 추대되어 로마로 갔고 전쟁의 지휘권은 그의 아들 티투스에게 위임되었다. 수많은 축제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에 몰려들었던 기원 70년의 유월절 기간 동안에 티투스는 4개 군단과 강력한 지원군을 이끌고 진격해 와서 주민과 순례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버렸다. 예루살렘은 고지에 위치하였으며 북쪽으로부터만 평지의 공격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도성에 대한 공격이 이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무서운 위협에 직면하여 그 때까지도 예루살렘에서 한창이던 내란을 중단하고 공동으로 로마에 대한 항거를 하였다. 그러나 매우 우세한 로마의 전쟁 기술에 방어자들의 용감성과 사기는 오랫동안 버틸 수 없었다. 누가복음에 들어있는 예수의 재판 이야기에 있는 텍스트에는 이러한 가망 없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예루살렘이 군대에 포위당하는 것을 본다면 도성의 파멸이 가까운 줄 알라”(눅 21:20). “때가 올 터인데 그 때에 네 원수들이 진을 치고 너를 에워싸고 사면으로부터 공격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멸망시킬 것이다. 그리고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포개 놓이지 않게 될 것이다”(눅 19:43-44). 포로가 된 유대인 저항 투사들은 반역자들에 대한 징벌로써 로마인들에 의하여 도시를 둘러싼 성벽 위에 세워진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되었다. 그러나 도시 안에서는 혁명당원들이 지독히 엄격하게 고삐를 잡고 백성들에게 끝까지 버티도록 강요하였다. 사람들은 최후의 순간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희망에 몰두하여 있었다. 비록 성전의 바깥뜰은 이방인들에게 점령당하고 도성과 현관이 그들에 의하여 유린되어야 했지만 하나님은 성소를 그들에게 더럽히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참조, 계 11:1-2). 그러나 항거의 노력과 희망은 헛된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도성을 둘러싼 세 성벽 주변을 모두 돌파하여 방어자들의 격노한 항거를 곧장 밀어버렸다. 성전은 최후의 전투에서 불타버렸다. 티투스는 지성소가 파괴되기 이전에 지성소에 침입할 수 있었다. 일곱 촛대와 젯상은 승리의 기념물로 후에 개선 행군을 할 때 가져가기 위하여 보관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오늘날도 로마에 있는 티투스 개선문 위에 있는 모상이 증언하고 있다. 마태복음은 왕의 혼인 잔치의 비유 묘사에서 예루살렘이 불에 타서 파괴될 것을 언급하고 있다. 즉 왕은 사람들이 그의 초대를 거절하고 그의 종들이 수치스럽게 죽임을 당한 것에 진노하여 “그의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도성을 불살라 버렸다”(마 22:7). 아직도 항거를 하려고 하였던 최후의 방어자 무리들은 탄로되어 기샬라의 요하네스와 시몬 바르 기오라는 포로가 되어 승리의 축제를 위하여 로마로 압송되었다. 성전과 도성이 파괴됨으로써 유대교는 가시적(可視的)인 중심점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여기저기서 항거는 계속되었다. 소 무리의 폭도들은 몇 개의 견고한 성으로 후퇴하였다. 마사다 요새가 가장 오랫동안 버텼다. 사해 바닷가에 있는, 접근하기 힘든 고지의 이 성을 로마인들은 포위하였다. 로마 공격의 흔적과 헤로데스 왕의 건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유대인 요새의 기초가 최근에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의 철저한 탐사로 발견되었다. 유대의 독립투사들은 그들의 상황이 도저히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자결하기로 결정하였다. 얼마 후 요새로 밀고 들어온 로마인들은 시체들만을 발견하였다. 다섯 어린이와 함께 지하의 상수도관에 숨어 있던 두 명의 여자들만이 유대인들의 반항의 종말을 치켜 보았다. 기원 73년-아마도 74년 초 일수도 있다-에 마사다가 함락됨으로써 최후의 항거는 분쇄되었다. 승리를 거둔 후 베스파시안은 팔레스틴의 형세를 정리하였다. 유대는 사마리아에서 분리되어 황제의 식민지로 되었으며 그의 총독은 다시 카이사레아에서 집무하였다. 이곳에는 로마의 제10군단이 예루살렘에 진영을 두고 상주하였다.
유대교는 그 안에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강력한 힘을 생생하게 갖고 있었기 때문에 무서운 참변을 견디어 낼 수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현저히 사두개적이었던 사제단과 날카롭게 대립하여 있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파괴될 때 사두개인들은 많이 죽임을 당하였다. 율법학자들에 의하여 인도된 바리새파의 운동은 참변 이후에 다시 모여든 유대인 공동체의 설립을 수행하였으며 이들에게 뚜렷한 모습을 새겨 주었다. 성전과 함께 희생제의(祭儀)도 몰락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숭배는 그 이후 회당에서 계속될 수 있었으며 회당의 예배에서 성전의식의 단편들이 전승되었다(참조, 137-138면). 야브네(얌니아: Jamnia)에서는 사제와 장로들은 회원이 못되고 오직 율법학자들로만 구성된 새로운 산헤드린이 회집되었다. 로마인들은 원칙적으로 유대교에 귀속되는 권리를 침해하지 않았다. 그래서 회당들은 그 후 국가 관청의 보호를 받게 되었으며 공동체의 삶을 새로이 전개시킬 수 있었다. 그 이후 예루살렘에서 제의를 거행하는 비용을 지불할 수 있도록 팔레스틴과 디아스포라에서 모든 유대인들의 성전세는 증가하였고, 그것을 이제는 로마인들에게 바치는 세금으로써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기원 2세기에 팔레스틴의 유대교는 한 번 더 로마의 멍에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였다(기원 132-135). 바르 코흐바의 지도하에 있었던 폭동 기간 동안 생긴 사건들에 대해서는 관계있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이 두 번째 유대인 폭동은 이를 기록할 역사 기록자가 없었다. 고대 문헌의 인용 구절에서 인정되는 개개의 짤막한 진술들에 팔레스틴의 고고학 탐사에서 나오는 새로운 발굴물들이 첨가되었다. 폭동의 흔적과 그에 대한 서신들, 그리고 문헌적인 기록들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이 사건의 과정은 다소 확실성을 가지고 재구성될 수 있다.
하드리안(Hadrian) 황제(기원 117-138)의 통치하에서 유대인들의 갑작스런 봉기가 일어났다. 원인은 아마 하드리안이 내린 두 가지 명령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기원 130/131년에 동양을 여행하는 중에 새로운 건축을 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때 그는 또한 예루살렘의 폐허된 성전 터에 쥬피터 신전을 세우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하드리안은 할례의 금지와 함께 거세(去勢)도 일반적으로 금지시키는 포고를 내렸다. 성소에 이방 신전을 세우는 일과 이스라엘의 계약의 징표를 빼앗겨야 했던 일은 유대인들 사이에 커다란 격분을 일으켰다. 폭도들은 유대와 예루살렘을 기습하여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사람들은 희생 예배를 다시 드렸으며 새로 얻은 독립의 표시로 동전을 주조하였으며 봉기가 발발한 첫해를 시작으로 하는 새로운 기원(紀元)을 계산하기 시작하였다. 폭동의 지도자는 당시에 가장 존경받는 율법학자인 랍비 아키바(Aqiba)에 의하여 민수기 24장 27절에 약속된 별의 아들이라고 환영을 받았다. 메시아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으로 보았다. 팔레스틴에 살았던 유대 기독교인들은 바르 코흐바의 메시아적인 요구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바르 코흐바와 그의 추종자들로부터 잔학한 박해를 받았다. 바르 코흐바가 메시아라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누구나 체포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다(참조, Justin Apologia I. 31).
로마인들은 야전(野戰)에서는 맞서지 않는 폭도들에게 서서히 진격하여 갔다. 그들이 숨어 있는 은신처를 찾아내 포위하고 굶주리게 하여 항복하도록 강요하였다. 유대 투사들의 항거력은 서서히 소멸되어 갔다. 바디 무라바아트(Wadi Murabba𐐽at)에서 바르 코흐바 시대의 많은 문헌들이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는 폭동의 몇몇 지도자들이 사해 해변에 있는 사령관 요수아 벤 길골라에게 써 보낸 서신 한통이 들어 있다. 서신에는 이방인들이 진격하여 왔기 때문에 그에게 갈 수 없을 것이라고 쓰여 있다. 또한 시몬 바르 코흐바가 동일한 수신자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그가 갈릴리 사람들과 관계를 끊지 아니하면 그의 발에 사슬을 채울 것이라고 그를 협박하고 있다. 아마도 그 갈릴리 사람들은 폭동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했거나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폭동의 지도자는 모든 힘을 기울여 그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도록 강요받았음이 틀림없다. 처음에 많은 유대인들이 이 봉기를 이스라엘의 해방으로써 환영하였던 환성 대신에 실망이 점점 더 확대되어 나갔다. 로마인들이 폭도들에게 계속하여 진격해 가자 바르 코흐바는 그의 충성스러운 부하들과 함께 사해변의 벹-테르(Beth-Ter)에 보루를 쌓았다. 그러나 요새는 로마인들에 의하여 점령되고 바르 코흐바는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로써 그가 메시아로서 구원의 시대를 열 것이라는 희망은 사라졌다. 불행한 사건들이 바르 코흐바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증명해 주었기 때문에 랍비적 유대교는 후에 그의 이름을 거의 거론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모욕하였다고 비난을 받지는 않는다. 유대교에 있어서는 거짓 메시아에 대해서는 죄를 묻지 않고, 유대인들의 견해에 따라서 하나님의 유일성을 모독할 때에만 비로소 죄를 묻게 된다(참조, 요 5:18, 10:36).
예루살렘의 폐허 위에 로마의 식민 도시가 건설되어 이름을 콜로니아 앨리아 카피톨리나(Colonia Aelia Capitolina)라고 불렀다. 쥬피터를 위한 신전이 세워졌다. 새로운 도성에는 비유대인들만이 거주하였으며 유대인들이 들어오는 것은 금지되었다. 유대인들은 아브(Ab: 7월 말이나 8월초) 9일에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 파괴를 매우 커다란 슬픔으로 회상하였다. 기원 4세기에 와서야 그들에게 이 슬픔의 날에는 도성에 들어가서 헤로데스의 성전 가운데 남아 있는 벽에서 통곡의 기도를 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이 때 유대교는 또 다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폭동을 지지하였던 많은 율법학자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랍비 아키바는 무시무시한 고문을 당하여 그의 육신은 쇠빗으로 빗질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대인이 “들어라, 이스라엘아, 주 우리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신 6:4)를 그의 신앙고백의 표현으로 말해야 할 그 시간이 왔을 때 아키바는 “한 분”이라는 말을-공적으로 인정되는 기도에서 하는 것처럼-아주 길게 말하고는 이 말과 더불어 죽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그의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율법에 대한 성실성을 지켰다. 고통당하면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율법에 대하여 취했던 이러한 확고한 태도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벅차게 하였으며 어렵게 타격받은 공동체를 다시 율법을 중심으로 모이게 하여 선조들의 신앙을 고수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첫댓글 에드워드 로제 지음, 박창건 역 <신약성서배경사>입니다.
여러 번 연재되어 책 이름을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확실히 올려 주시니 고맙습니다.
좋은 포스팅입니다.
tv에 교수가 나와서 바이타민, 바이타민 하니까 생소한 것처럼 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 하다가 팔레스틴이라고 하니 조금 생소합니다. 지명과 인명에 대한 어느 정도 통일적 표기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네,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
플로루스
52~60년 여러 명의 대제사장을 임명해 반대파들의 증오를 사기도 했다. 그리스화된 사람들과 분쟁을 겪고 있던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의 권익을 옹호했지만 유대에서는 어떠한 정책도 시행하지 않았는데, 이는 유대에 테러 집단인 열심당원들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60년 사도 바울로가 체포되자 그곳의 지방 행정관은 아그리파에게 바울로의 처리문제에 대해 조언을 구했으며 아그리파는 바울로의 무죄를 입증했다. 66년 지방 행정관 ///게시우스 플로루스///가 카이사리아에서 유대인을 대량학살하자 예루살렘에서 열심당원들이 봉기했다.
아그리파가 ///플로루스///를 지지하면서 자제할 것을 촉구했으나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고 열심당원들은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의 왕국 내에서도 점차 위협이 고조되었다. 66년 여름 그가 예루살렘으로 파견한 군대가 패배했고 반란군들은 로마군을 섬멸했다. 67년 티투스의 군대가 도착하자 아그리파는 로마군의 작전을 도왔다. 70년 아그리파는 티투스의 아들을 도와 예루살렘을 최종적으로 점령했다. 전쟁이 끝난 뒤 아그리파의 영토는 티투스에 의해 더욱 확장되었으며, 아그리파는 93년까지 생존했던 것 같다.
출처: "헤로데 아그리파 2세", Daum 백과사전
@장코뱅 다음과 네이버 사전만 잘 찾아뵈도 옛날에 쓴 책 못지 않거나 오히려 더 나은 내용이 나오네요.
@노베 공감합니다.
달란트(<영> Talent ; <히> '킼카르' <헬> '탈란톤')
구약 시대에는 34.27㎏ 무게와 동일한 중량을 가리켰다. 신약 시대에 와서는 돈의 단위로서(실제로 주조된 화폐는 아니다) 약 6,000 드라크마와 동일한 가치를 표시하였다.
출처: <GODpia 성경사전: 아가페출판사>
탤런트 그러면 tv 배우를 생각하는데 성경과 역사에서는 돈과 무게의 단위이군요.
네로와 베스파시아누스
베스파시아누스는 능력을 인정받아 즉위 전까지 트라키아, 히스파니아, 갈리아, 게르마니아, 브리타니아, 북아프리카, 이집트에 파견돼 공적을 쌓았다. 따라서 그는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신임 아래 계속 군부에 남아있었는데 네로 치세 말기에 유대 지역에서 종교적 민족주의 세력인 열심당에 의해 발생한 유대 독립전쟁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명장 코르불로 휘하의 시리아 속주로 파견됐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 반란을 평정할 지휘관으로서 새로이 임명을 받고 유대땅으로 파견된 이후, 지략과 용맹성으로 유대 북부 갈릴레아 지역을 점령하게 되고 요셉이라는 유대인 지도자를 포로로 잡게 된다. 후에 로마로 들어가 시민권을 얻게 되는 요셉, 즉 로마인으로서의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로마와 유대 간의 절충안을 제시하며 양쪽의 공존을 모색하게 하고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의 도움으로 유대를 무리없이 통치하였다. 물론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의 정치를 도운 요세푸스를 보호하여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여튼, 이 반란을 진압하던 중 내란이 일어나 네로가 자결하자 시리아 속주 총독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와 로마의 동방 관리들, 동맹국 국왕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또한 비텔리우스에게 쌓인 원한을 풀기 위해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한 도나우 군단장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가 로마에 입성해 비텔리우스를 죽이고 로마를 평정하여 베스파시아누스는 정식으로 황제에 즉위하게 된다.
출처: "베스파시아누스", 나무위키
@장코뱅 정권이 불안정하니 황제 밑에서 유능한 장군으로 종사하다가 기회를 잡고 황제가 되는 경우가 로마 역사에서 종종 보이는 것 같습니다.
@노베 네, 공감합니다.
티투스
로마 제국의 10대 황제이자 두 번째 세습왕조인 플라비우스 왕조의 두 번째 황제. 황제로서 풀네임은 티투스 플라비우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Titus Flavius Caesar Vespasianus Augustus).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장남이자 도미티아누스의 친형. 그의 재위기간 2년 동안에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 완공되었고, 로마 시대 대참사 중 하나인 베수비오 화산 폭발이 있었다. ...
티투스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마 유대 전쟁일 것이다. 네로 시대에 유대의 민족주의자 집단인 열심당[4]이 일으킨 이 전쟁은 가장 큰 반란 사건 중 하나였다. 이때 아버지였던 베스파시아누스가 67년 유대 반란을 진압하는 지휘관으로 임명되면서 팔레스타인으로 파견될 당시 형제 도미티아누스와 달리 티투스는 아버지를 따라갔다. 티투스의 직책은 중무장 보병 지휘관이었으며, 재무관으로서도 병영에서 활동했다.
출처: "티투스", 나무위키
로마-유대 전쟁에 대해 아는 것이 신약성경의 배경을 아는 것으로 연결되니 하나님의 역사 경영의 섭리가 오묘한 것 같습니다.
@노베 네, 그렇네요. 공감합니다.
야브네Jabneh
요약 고대 팔레스티나(지금의 이스라엘)의 도시.
(그). Jamnia. 지금의 이브나(Yibna). Yavne라고도 함.
텔아비브야포에서 약 24㎞ 남쪽, 지중해에서 6㎞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필리스틴인들이 살던 곳이었으나 BC 8세기 우지아 시대에 유대인들이 차지했다. 야브네 항구는 주민들의 적대적인 반감에 분노한 유다스 마카베오(?~BC 161)에게 침략당하기도 했다.
70년 로마인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로 요하난 벤 자카이가 세운 야브네대학교가 유대인의 가장 중요한 학문의 전당이 되었다. 100년경 이곳에서 열린 유대인 랍비 회합에서 히브리어 성서가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12세기 십자군들이 세운 요새가 있다.
출처: Daum 백과
히브리어 성경이 확정된 곳이라고요? 너무나 중요한 곳이군요.
@노베 네. 얌니아회의에서 정경을 확정했습니다.
이 연재물을 통해서 신약배경사를 아는 것은 물론이고 일반 역사에 대해서도 아울러 알게되어 일석이조가 되는 좋은 포스팅이라고 생각합니다.
공감합니다.
바르 코흐바 같은 바리새인이 자신을 메시아라고 인식하였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네요. 구약 성경이 완전히 확정되기 전이어서 경전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아서였을까요? 메시아에 대한 예언들을 익히 알고 있었음직 한데...그렇다면 자신이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을텐데 메시아라고 주장한 것은 그래야 사람들이 자신을 믿고 추종해줄 거라고 생각했겠죠. 유대교에서 거짓선지자에 대한 죄를 묻지 않는다고 하니...얼마나 빗나간 예언들이 많았으면 저랬을까 싶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