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는 조선왕조 시기에 감영(監營) 소재지였을 뿐 아니라 호서와 호남을 잇는 교통과 상업의 요충지였습니다. 게다가 구한말까지는 금강 수계(군산, 강경, 공주, 부강)의 번성함에 힘입어 다른 지역보다 도시발전 속도가 매우 빠른 편이었지요. 그러나 X자형의 종관철도망(1904년 경부선, 1914년 호남선 개통)이 대전을 중심으로 건설되고, 또 1932년 10월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옮겨지면서 공주는 여러모로 ‘개발기회’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도청이전 사건은 백제의 왕도, 감영도시였던 공주의 위상을 급속히 떨어뜨리는 계기를 제공하였습니다.
요컨대, 일제시기 공주가 ‘지는 달’이었다고 한다면 대전은 그야말로 ‘뜨는 해’였습니다. 본디 대전 땅은 대전천의 잦은 범람 때문에 저습지가 많아 조선후기까지 취락 발달이 부진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1904년 경부철도가 부설되면서 대전은 신흥 상업도시로서 급속한 성장세를 지속할 수 있었지요. 경부선과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철도가 지나지 않았던 도시, 가령 공주나 강경 등은 급속히 도시세를 상실해간 반면 논산, 대전, 조치원, 천안 등은 급속한 성장세를 지속할수 있었던 겁니다. 대전에는 1905년 대전역과 신탄진역, 1911년에는 가수원역, 1914년에는 서대전역 등이 만들어졌으며, 뒤이어 철도역과 주변도시를 연결하는 사통팔달의 도로교통망이 구축되었습니다.
1932년 충남 도청이 대전으로 옮겨진 것도 결국은 철도 때문이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공주사람들은 예전부터 공주를 지나는 철도 부설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아래의 기사들은 공주사람들이 얼마나 철도를 간절히 원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치원과 공주, 혹은 공주와 강경 등을 잇는 철도 건설을 총독부에 건의했으나 번번히 묵살당했습니다. 도청이전 시기 그 보상물로 철도부설을 요구했으나 그것도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몇년 전 호남고속전철의 역사가 이인 쪽에 설치되는 걸로 결정되었지요. 그때 공주사람들이 비로소 원을 풀었다는 이야기가 나왔더랬습니다.
공주 토박이 분들은, 공주의 고루한 유생들이 철도 부설을 반대하여 이리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는 속설일 뿐입니다. 물론 1900년대 말 호남철도 부설 시기(1914년 완공), 공주 유생(특히 왕촌 경주 이씨)들이 초려 선생의 무덤을 회손할 가능성이 있다고 통문을 돌린 사실이 있기는 하나, 이 일 때문에 호남철도가 공주를 비껴 지나게 된 건 아닙니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즉 개발 이익이 별로 없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에, 호남철도 노선을 오늘날 처럼 정한 것이 봐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