題 : 玩 月
明 月 出 雲 端 (명월출운단) 밝은 달이 구름 끝에서 나오니
淸 光 照 蒲 團 (청광조포단) 맑은 빛이 이불을 비추는 구나
庭 前 有 梧 桐 (정전유오동) 뜨락 앞에 오동나무가 있어서
此 夜 更 好 看 (차야갱호간) 오늘 밤 달 구경이 더욱 좋구나
* 玩 月 : 달 구경
* 蒲 團 : 부들로 만든 둥군 자리, 이불
<지은 이>
윤증 (尹拯, 1629~1714), 字는 자인(子仁), 號는 명재 (明齋), 본관은 파평이다.
공은 부친 윤선거(尹宣擧) 선생과 유계(兪棨)에게 글을 배우고, 뒤에는 장인인 권시(權諰)와
김집(金集) 선생에게 배웠다. 29세에는 송시열 선생 문하에서 공부를하였다. 그야말로 당대의
석학들에게서 정통 성리학을 깊이 공부하였다.
그런데, 공의 나이 8세에 병자호란을 당해 부모님과 함께 강화로 피난을 갔는데, 강화가 일찍
적들에게 함락되면서, 불행하게도 어머님은 그곳에서 별세하고 공은 부친과 함께 돌아왔으나,
부친은 부인의 죽음에 대한 자책감에 시달리면서 칩거하다싶이 하며 여생을 고통스럽게 보냈다.
이러한 부친의 아픔을 지켜보면서, 공은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 결과 공은 예론(禮論)에 정통한 예(禮)학자이자, 성리학자로도 명성이 높았다. 공의 부친 별세
후에는 아버지의 일로 인해, 스승 송시열과의 인간관계가 악화되면서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마침내, 같은 서인으로 지내던 공과 송시열 선생은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을 대표하는 정치적,
사상적 지도자로 대립하면서, 우리 사회에 적지않은 충격과 영향을 남겼다. 공은 조정으로 부터
여러 차례 출사(出仕)하여 나라 일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끝내 사양하고 포의(布衣)로
일관하였다. 학문과 경륜이 깊었던 선생께서 전란에 따른 불우한 가정사로 인해, 조정에 나와서
국사를 다루지 않고 초야(草野)에서 살아간 것은 나라를 위해서도 아쉬운 일이었다.
위의 시는 공의 문집인 '명재유고'에 보이는 詩로, 달 구경을 하며 느낀 소회를 시로 표현하였다.
간결한 표현이지만 달 구경의 즐거움을 담담하게 피력한 멋진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