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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음악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천년만세
굿의 구조 |
문화예술의 특징 |
시공간 |
보편적 구 조 |
구조언어학적 특징 |
풀이 |
음악 (청각) |
시간적 |
수평적 (통사적) |
순차적 (syntagmatic) |
놀이 |
무용·회화 (시각) |
공간적 |
수직적 (건축적) |
범형적 (paradigmatic) |
예컨대 주술, 굿의 특징인 풀이와 놀이를 오늘의 예술적 원형으로 확대해 보자(표 2).
위의 표의 검증작업으로 춤 예술을 들어보자. 춤은 음악을 동반하기 때문에 자연히 음악에 대한 비교작업도 동시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춤과 음악은 서로 가역반응의 관계에 있다.
서양 춤의 대표적인 것으로 발레를 보자. 발레는 우선 수직적 비상을 그 특징으로 한다. 또 신체적으로는 하체를 많이 사용한다. 결국 수직과 하체적 특징은 중력으로부터 자유를 확보하는 정도에 따라 춤의 가치가 평가된다. 여기엔 물론 심한 근육운동이 수반된다.
이러한 춤을 가진 서양은 음악이 음정(화음)이라는 수직적 묶음을 기본으로 한다. 이것은 매우 건축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전통 춤에는 '문무(文舞)'와 '무무(武舞)'가 있다. 문무는 선비를 나타내는 약(榙)이나 적(翟)을 손에 들고, 무무는 검(劍)이나 창(槍), 간(干: 방패)이나 척(戚: 도끼)을 손에 든다. 문(文)은 날개(새)나 책으로 상징되고 무(武)는 무기로 상징된다. 무무는 단순히 '무(武)'라고도 한다. 날개 춤과 무기 춤은 부지불식간에 습합된다(宮尾慈良, 沈雨晟 옮김, 「아시아 무용의 인류학」, pp. 180∼181. 동문선, 1991).
서양무용은 양다리와 양팔을 신축하는 형식을 많이 갖고 있다. 한편 동양(아시아)의 무용은 팔다리의 굴절과 신장을 중심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것은 수렵민족과 농경민족의 문화적 표현양식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宮尾慈良, 沈雨晟 옮김, 「아시아 무용의 인류학」, p. 203, 동문선, 1991).
서양의 발레는 전체적으로 공간의 활용과 함께 시각에 호소하는 경향이 농후하며 클라이맥스는 범형적(paradigmatic)으로 나타난다. 이때의 범형적이라는 말은 춤의 흐름 속에서 시각적으로 건축적인 이미지(새의 이미지)를 보이는 것을 말한다.
이에 비해 동양 춤 가운데 한국 춤은 수평적 흔들림을 위주로 한다. 또 신체적으로는 상체 예컨대 어깨나 팔을 많이 사용한다. 한국 춤의 수평과 상체적 특징은 중력보다는 마음의 표현을 추구하며 흥에 겨운 정도에 따라 춤의 가치가 평가된다.
이러한 춤은 한국 음악이 장단(리듬)이라는 수평적 단위를 위주로 하기 때문이기도 한데 결국 통사적(統辭的)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춤은 전체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중시하기 때문에 클라이맥스는 시각적 이미지보다는 흥(興)의 고저에 좌우되는 율동적 이미지(나비의 이미지)를 보인다.
서양의 가무는 그 건축성 탓에 그 시각적 구조를 놓치면 실패하기 때문에 고된 신체적 훈련이 성패의 판가름이 되기 쉽고 동양의 가무는 연회자가 흥에 겹지 않으면 감동을 줄 수 없다.
판소리와 오페라도 대조적이다. 판소리가 시간적·선(線)적이라면 오페라는 공간적 입체적이다.
서양화는 공간의 원근이나 화면의 건축성(덧칠하는 것)을 통해 그림의 깊이를 더하고 동양화는 선(線)의 흐름을 중시한다.
서양화는 표현의 태도에서 리얼리즘(realism)을 바탕으로 하여 입체성(오브제 작업도 포함)을 추구하며 동양화는 추상성(寫意性)을 바탕으로 하여 관념주의(idealism)를 추구하는 경향
이 있다.
이러한 도식적 분류는 동서양의 문화예술의 전체를 말하기보다 특징적인 것을 잡아내는 데 불과하다. 이것은 문화의 표현형일 수 있다. 이러한 표현형은 대개 상반되는 내용의 이면형에 의해 상호 보완되는 게 상례이다. 예컨대 시간과 선의 예술인 판소리가 끝내 격렬한 입체적 다이너미즘을 획득할 때 성공한 것이라면 공간과 입체의 예술인 서양화가 고도의 추상주의를 통해 정상을 도달한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 추상과 구체, 평면과 입체의 융합이며 순환을 말해 준다.
결국 인간의 언어(용어)는 수단(도구)에 불과하며, 그것의 권력기간이 지나면 힘을 잃는 상징의 세트(Set)에 불과한 셈이다. 그러나 앞에서 제기한 '풀이/놀이, 시간/공간' 등은 인류 문화사로 볼 때 남방 문화적 성격과 북방 문화적 성격과도 일치함으로써 우리에게 문화를 구조적인 맥락에서 뿐 아니라 역사적 맥락에서 바라보게 하는 유효성을 갖는다.
오늘의 동서양 문화는 무교(巫敎) 문화의 복합적 성격이 두 갈래로 이동한 결과가 아닐까 하는 점이다. 북방·유목·서양을 연결하는 '무(武)의 원형'과 남방 농업·동양을 연결하는 '문(文)의 원형'을 상정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무(巫)의 놀이와 풀이에 해당한다 (표3) .
표 3: 무교와 동서양 문화의 원형
굿 |
歌舞 |
문화권 |
남· 북방문화 |
文武 |
공간성 |
매체 |
풀이 |
노래 |
동양 |
남방 |
文 |
평면성 |
인쇄매체 |
놀이 |
춤 |
서양 |
북방 |
武(物) |
입체성 |
영상매체 |
노래가 신체보다는 마음을 위주로 하고 춤이 마음보다 신체를 위주로 하는 일반성과도 맞아떨어진다. 노래는 풀이의 의미, 춤은 놀이의 의미가 강하다.
한국의 굿은 풀이와 놀이로 구성되었듯이 수평성과 수직성을 고루 갖추고 있는데 수직성은 '북방-기마-무(武)'의 특성이고 수평성은 '남방-농업-문(文)'의 특성으로 결국 남방문화와 북방문화가 혼합된 탓이다.
원래 시베리아 무교(巫敎)는 북방적 특성이 강했으나 점차 남방화 되었으며 이것은 강신무 지역인 한반도의 북쪽과 세습무 지역인 한반도 남쪽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남방과 북방문화의 특성은 북방족과 남방 한족이 종적(縱的)으로 교체된 중국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을 보인다.
오늘날 북한의 춤과 음악이 전반적으로 북방적 전통을 보이고 남한의 그것이 남방적 전통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것은 회화에서 북화의 채색과 남종 문인화의 수묵 전통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세습무 집안 출신의 재인들이 전반적으로 남방적 특성을 보이면서 춤보다는 노래(사설)를 중심으로 굿을 풀어 가며 그 가무의 특징이 평면성과 문(文)의 특성으로 요약되는 까닭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거대한 인류문화의 두 흐름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연희(演戱)를 나타내는 우리말은 '노릇'이나 '짓'에서 찾을 수 있고 여기서 '놀이'나 '노래'가 연유되었다고 보여진다. 굿은 '굿것(귀신)'에서 유래됐다. 판(舞臺)의 소리(歌), 판소리는 '아니리'라는 사설부분과 창(唱)의 완급과 발림, 고수(鼓手)의 추임새에 따라 진행되는 독연 형태의 연희이다.
동양에서 희곡(戱曲)이라는 말 자체가 '잡희(雜戱)의 가곡(歌曲)'의 축약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극의 3요소, 과(科: 동작)·백(白: 說話(설화))·곡(曲: 歌唱(가창)) 중 곡(曲)을 제일로 보며 곡(曲)이 극적 내용을 대표한다. 이것은 역시 '풀이'의 전통이다. 이에 비해서 서양의 '드라마(drama)'라는 말이 '행위(acting)'의 뜻으로 동작에 역점을 두는 것은 '놀이'의 전통이라 할 수 있다. 판소리는 동양연극의 시어트리컬리즘(theatricalism)을 나타낸다(이두현, '한국연극사', 「한국문화사 대계·4」, pp. 959∼960. 1965). 이것은 무교(巫敎) 문화의 굿이 남방화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열거된 문화예술의 유형을 보면 북방·유목문화의 '기마(騎馬) 이미지'와 남방· 농업문화의 '농사(農事)이미지'가 문화·예술의 특징과 '놀이(몸짓·춤)'과 '풀이(사설·노래)'를 결정짓는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북방·유목문화의 공간적 특징은 3차원 속에서 1차원적 표현을 하고 남방·농업문화의 시간적 특성은 1차원 속에서 3차원적 표현을 하고 있다. 전자의 1차원적 표현은 3차원을 1차원의 연장으로 보는 것을 의미하고, 후자의 3차원적 표현은 1차원 속에 3차원의 운동을 내포하는 것을 말한다. 전자는 적분적이고 후자는 미분적이다. 전자가 '자연과학·변증법(3단 논법)'으로 대변된다면 후자는 '음양오행학·태극논법(2원적 변증법)'으로 대변된다.
문화 속에서 흔히 과학(학문), 예술, 종교가 매우 이질적인 것으로 파악되는데 보기에 따라서는 일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같은 문화의 일관성은 비단 예술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인류문화의 과학적 원형에 대입해 볼 수 있다.
무교(巫敎) 문화는 시공간을 일원적으로 보면서 시간적 풀이와 공간적 놀이를 통합하는 형태(미분화성)를 보였다. 이 원형에서 오늘의 서로 다른 과학체계, 즉 음양오행학과 자연과학의 성격을 동시에 발견 할 수 있다(표 4) .
표 4: 과학적 원형에 대입한 굿의 구조
굿의 구조 |
시공간 |
과학모델 |
과학원리 |
운동법칙 |
이론 |
학문적특징 |
풀이 |
시간적 |
음향오행학 |
음양 (태극) |
교체 (순환) |
상대론 |
생물학 |
놀이 |
공간적 |
자연과학 |
변증법 (삼단논법) |
진화 (직선) |
절대론 |
물리학 |
무교(巫敎) 문화의 특징인 '풀이/놀이'를 과학적 원형으로 확대해 보자. 위의 '표 3'에서 알 수 있듯이 북방·유목문화는 삶에 있어서 공간의 이해가 필수적이었다. 공간의 이동생활은 세계를 운동체로 보게 하고 이는 자연과학→절대론→직선→물리학으로 발전한다.
공간 위주의 문화는 목표와 목표에 도달하는 직선적 방법, 다시 말하면 절대적인 신념(신앙)과 원리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공간의 연장(두께·부피)을 통해 자연히 물리학적인 우주관을 가질 수밖에 없다. 공간 위주의 문화는 또한 문화의 진화를 추구하게 된다. 여기서도 '기마의 이미지'는 여전히 나타나는데 말을 달리는 수평적 공간은 하늘을 나르는 수직적 공간으로 확대되고 말하자면 오늘의 뉴턴적 천체공간을 예약하게 된다.
절대 공간은 절대적 입자(원자)를 바탕으로 한다. 오늘의 서구과학이 이룩한 물리·화학적 세계구성은 바로 그 증명들이다.
이에 비해 남방·농업문화는 농사의 계절 주기로 시간에 대한 정교한 이해를 전제한다. 부양인구의 증가와 생태학적 적소(適所)의 확대와 정주(定住)의 생활은 한 지점에서 세계를 변화체로 보게 한다.
이는 음양오행학·상대론·순환·생물학으로 발전한다. 시간 위주의 문화는 목표보다는 과정에 초점을 두고 자연의 변화에 적응토록 하는 한편 공간 자체도 생명의 형태로 보게 한다. 음양(陰陽)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몸과 우주 전체에 해당되며 몸과 우주는 긴밀한 상관관계를 갖는다. 우주는 공간의 연장이 아니라 몸의 확대판이며 몸은 우주의 축소판으로 여기는 것이다.
인간의 몸과 우주는 서로 교체·순환하며 상대적인 세계를 이룬다. 이것은 바로 생물학적 세계이다. 여기에선 우주는 하나의 절대법칙보다는 선택과 조합을 통해 계속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된다.
과학(학문)의 의미는 고대와 현대가 매우 다르다. 옛 학문이 주로 인문학의 경전(經典)을 의미했다면 오늘의 과학은 주로 자연과학을 말한다. 경전은 오늘날 바로 종교로 취급되며 과학은 오히려 반(反)경전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전이 과거의 큰 가르침이라면 과학은 미래에 발견될 법칙을 추구한다.
생물학의 과학은 상대적 세계의 균형(balance)에 관심이 많으며 물리학의 과학은 일반이론(general theory)에 관심이 많다. 경전·생물학의 과학은 과거와 현재, 미래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며 오늘의 자연과학·물리학은 미래의 이론만 살아 남는다. 경전·생물학의 과학의 핵심내용은 생명현상(becoming의 철학) 또는 기(氣)-에너지의 균형(balance of energy)-이며, 자연과학·물리학은 운동현상(being의 철학) 또는 이(理)-절대적인 법칙(absolutivism)이다.
이(理)의 각 단계는 닫힌 상태의 기(氣)의 운동법칙이다. 반대로 기(氣)는 열린 상태의 각 단계의 생명현상이다.
경전과 과학은 결국 하나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종교와 과학이 하나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불교, 유교, 기독교, 이에 앞선 무교 조차도 경전의 철학적 원리를 파헤쳐 보면 생명 즉 생사(生死)의 문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결책이었으며 생(生)으로써 사(死)를 이해하고 사(死)로써 생(生)을 다스리며 균형 잡기를 한 내용들이었다.
오늘날의 과학은 물론 생명을 다루지만 궁극적으로 대상의 구조(크게는 우주의 구조)의 해명에 관심이 많으며 그 구조를 간명하게 설명할 이론을 찾는 게 그 목적이다. 전자 즉 경전(經典)은 주체적 과학의 소산이며, 후자 즉 자연과학은 객체적 과학의 소산이다.
경전과 자연과학이, 종교와 과학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주체·객관의 과학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주관·객체의 과학이 배제되어야 한다. 이것은 바로 신주술(神呪術)의 특성이다.
인류문화가 외형적(구조적)으로는 주술의 모형으로 축약될 수 있지만 오늘날 주술이 갖던 문화의 총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신주술(神呪術)'이라 할 수 있는 예술적 사고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즉 문화는 인간의 삶의 방식이며 그것의 세련미가 문제일 뿐 문화의 높낮이는 없다는 원초적인 명제로 돌아가는 것이다. 신주술(神呪術)은 '과학×예술'이다(신주술=과학×예술).
종교와 과학이 순환적인 관계에 있고 예술이 종교와 과학의 가교 역할을 한다면 결국 천·지·인(天·地·人) 삼합(三合)과 같다(천=종교, 지=과학, 인=예술).
인류문화의 종교와 과학은 결국 인간의 활동무대(조건)인 자연을 생명(氣)으로 보느냐, 물질로 보느냐의 문제일 뿐으로 결국 인간에게는 자연의 모방(모방성)이든, 영감의 표출(영감론)이든 예술적인 이미지만 남는다. 이것을 보다 중립적으로 표현한 것이 유희론(일종의 performance)일 것이다. 유희는 종교와 자연과학, 기(氣)와 이(理)의 중용인 이기지묘(理氣之妙)의 용어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면서 자연을 조정하는 문화적 존재이다. 이것 자체가 이(理)와 기(氣)의 상충이며 따라서 자연과 문화의 조화는 이(理)와 기(氣)의 조화가 된다. 이런 점에서 신주술은 자연과 문화의 조화가 된다(신주술=자연×문화).
무교의 문화적 성격을 문화구조(체계)론에 의해 '상부구조+하부구조'로 보면 '무교+기(氣)적 세계관'이다. 이것을 흔히 무교(shamanism)라고 불러 왔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이(理)적 세계관'='기독교+물리적 세계'와 대응된다.
'무교+기(氣)적 세계관'은 다시 '무교+물활론적 세계'라 할 수 있다.
이상을 종합하면 '문화=무교=무교+기적 세계관=무교+물활론적 세계=기독교+이(理)적 세계=기독교+물리적 세계'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문화는 그 능력을 상실할 때, 즉 퇴보할 때 항상 하부구조가 약화되고 상부구조가 관념론으로 흘러 현실성(reality)을 도외시한다.
무교도 마찬가지로 하부구조인 기(氣)적 세계관을 상실하고 단지 그 이데올로기만 남아 그 이데올로기의 틀이 점복(占卜)에 이용되고 있다. 오늘의 무당은 바로 문화의 현실성(reality)을 상실하고 점복 기능과 그 예술적 형태만 남은 원시 고대 인류문화의 잔해라 할 수 있다.
무교가 주도적 이데올로기의 자리를 상실한 뒤에도 그 예술적 형태인 굿이 의미를 갖는 까닭은 이데올로기(理)와 실제(氣)가 만나 이루는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중간적 형태인 까닭이다. 예술의 형이중학적(形而中學的)-이것은 형(形)자체의 중간적 성격을 말한다-성격은 언제나 인류문화의 중간적 형태 즉 이(理)와 기(氣)가 만나는 역동성을 회복하여 주는 힘 때문에 인간의 사랑을 받게 된다. 예술은 궁극적으로 이데올로기나 그 실제성 때문에 추앙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술, 그 자체로써 생명력을 갖는 상징적 문화형태이다.
오늘의 무당, 특히 세습무가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은 바로 예술성 때문이다. 인류학적으로 볼 때 '무교+물활론' 체계에 이어 '유교+음양오행학(한의학)' 체계가 동양문화권을 주도하고 근대 서양문화권의 '기독교+자연과학(물리학)' 체계가 오늘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물론 '선도(도교)+양생학', '불교+요가학'도 하나의 문화체계(culture system)로 인정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상의 4가지 문화체계 가운데 유교, 불교, 선도(도교), 무교는 기(氣)적 세계관을 전제하는데 반해 기독교는 물(物)적 세계관을 갖는 것이 다르다. 이것은 기독교가 절대적 신관과 자연관을 바탕으로 문화의 상·하부 구조를 합리화한 때문이다. 혹자에 따라서는 기독교의 신관이 어떻게 합리적이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기독교는 분명 로고스 중심주의(logo-centrism)에 의해 합리적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기독교가 문화의 상·하부 구조에서 이(理)를 추구했다면, 불교는 하부구조에서, 유교는 상 하부구조에서 이(理)를, 선도(도교)·무교는 상·하부구조에서 기(氣)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① 무교(선도·도교)=氣/氣 ② 유교=理/氣 ③ 불교=氣/理 ④ 기독교=理/理로 나타낼 수 있다.
여기서 유교의 이는 관념의 절대주의이고, 불교의 이(理)는 자연의 상대주의이고, 기독교의 이(理)는 관념의 절대주의(상부구조)이고 자연의 절대주의(하부구조)였다. 한편 기(氣)는 상대주의 또는 해체주의를 나타낸다. 위의 네 유형을 합리성의 순서로 보면 기독교·유교· 불교·무교의 순이다.
그러나 비합리성의 순으로 보면 그 반대이다. 근대(modern)가 지나고 후기 근대는 상대주의(relativism)나 관계주의(relationism) 또는 해체주의(deconstructionism)를 추구한다. 이런 점에서 무교는 가장 해체주의에 가깝다. 이것은 매우 포스트모던(post-modern)한 현상과도 통한다.
무교의 상·하부구조가 기(氣)로 구성된 것은 해체주의가 결국 기(氣)를 추구하는 것임을 말한다. 흔히 기(氣)는 상대주의 즉 음양(陰陽)으로 구성되는데 기(氣)의 합리적 표현인 셈이다.
결국 음양은 이(理)와 기(氣)의 중간적 존재로 결정적 의미를 갖지 못하고 표류하는 대립적인 의미를 생산함으로써 대상을 파악하는 인식수단이며 존재양태이다.
유교와 불교는 음양론과 상대주의로 이(理)를 달성했다. 그러나 무교는 그것마저 부정하는 기(氣)를 핵심내용으로 한다.
그러나 인간 경학(經學)과 자연 과학(科學)은 한편에서는 차별적이지만 다른 한편에선 통일적이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초의식(superego)과 무의식(libido)의 일치에 비유할 수 있다. 자연은 때때로 초자연성을 갖는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문화의 이중성은 상호보완적이다. 기독교가 성령(일종의 氣)을 존중한다던가 무교가 기독교의 원형을 공유하는 것도 주의할 만하다.
무교에서 기독교까지의 과정은 주체에서 대상으로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무교의 신(神)이 생성 소멸을 거듭하는 것은 오히려 신(神)의 주체성 때문이며 기독교의 절대신은 신(神)의 객체성 때문이다. 신(神)은 인간의 주체에서 객체로의 과정이며 이것은 문화구조에서 인간 경학(經學)과 자연 과학(科學)과 일치한다.
경학은 인간의 생명(生命)을 위주로 한 과학이고 자연과학은 물질의 운동(運動)에 대한 과학이다.
이(理)와 기(氣)는 궁극적으로, 전자는 우주의 원리(原理)를 말하고 후자는 우주의 실재 (reality)를 뜻해 결국은 하나가 될 운명에 처해 있다. 이(理)와 기(氣)는 '이(理)=기(氣)'라는 등식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종교의 학(인문학)은 교(敎) 중심의 것이고 과학의 학(자연과학)은 학(學) 중심의 것이다. 중세와 근대의 차이가 있다.
경전의 과학은 자연을 생명체로 즉 주체적으로 이해하게 되는데 따라서 신(神)의 성격도 합리성(정신의 극대치)과 야수성(진화의 과거)을 동시에 보이게 된다. 이것은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에 대응한다.
흔히 범신의 신들은 사람과 동물의 이중(二重)의 모습으로 신화 속에 나타난다. 이것도 의식과 무의식의 합작품(미분화)이다.
확실히 인간은 자연과 문화 사이의 존재로 역치성(liminoid)을 갖는데 언제나 진보와 퇴보의 기로에 서 있다.
인간이 자연을 대할 때 합리적으로 외형(형식)을 취하는 것은 모방이고 느낌으로 내용을 취하는 것은 생명(에너지)을 취하는 것이다. 그런데 형식은 내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어 형식은 내용의 차이를 드러내기도 한다. 형식은 내용의 표현형일 따름이고 이는 '이(理)가 기(氣)의 표현'임을 말한다. 이(理)는 기(氣)의 조리(條理)이며 기(氣)의 일분수(一分殊)이기 때문이다.
기(氣)의 일분수(一分殊)인 인간의 이(理)는 기(氣)로 돌아가려는 힘과 이(理)를 유지하려는 힘의 균형 잡기를 한다. 이는 기(氣)와 기일분수(氣一分殊) 즉 기(氣)의 부분과 전체의 힘 겨루기이며 이것을 음양(陰陽) 이라고 동양 사람들은 갈파한 바 있다.
음양은 태극을 전제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듯이 기(氣)와 태극(太極)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신(神)은 때로 이(理)의 신(神)이기도 하면서 기(氣)의 신(神)이기도 하다. 이신론(理神論)이 전자이고 범신론(凡神論)이 후자이다. 이(理)와 기(氣)의 초월신은 유신론(唯神論)이다. 이(理)와 기(氣)를 포용하는 것은 유기신론(唯氣神論)이다. 유기신은 지기일원론(至氣一元論)적 자연관의 산물이다.
인문학(종교)과 자연과학(과학)의 통일은 이 지기일원론에 의해, 인문학이든 자연과학이든 학(學)을 기일분수(氣一分殊)의 이(理)로 봄으로써 지평이 열린다.
이 같은 분류들은 문화체계(구조)로 보면 그 원형을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표 5) .
표 5: 이(理)와 기(氣)의 문화체계
굿 |
상부구조 |
文 |
정신(마음) |
양반체재(덕치) |
2박자 |
理 |
하부구조 |
武(物) |
신체(몸) |
민중반체재(민주) |
3박자 |
氣 |
문화의 구조도 인간의 신체구조나 컴퓨터의 구조처럼 상·하부구조로 나눌 수 있다. 문(文)이 상부구조, 무(武)가 하부구조로 나누어지는 것은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정신이 상부구조, 신체가 하부구조로 됨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흔히 사회계급(계층)적으로 볼 때 양반이 상부구조, 민중이 하부구조, 정치적으로 볼 때 체제 지향적 정치는 덕치(德治), 반체제지향적 정치가 민주(民主)정치이다.
이 같은 문화·사회적 구조는 서양과 동양사회에 그대로 적용되는데 특이한 점은 동양은 체제에서 정치적 비중을 더 두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다분히 유교의 덕치(德治)주의의 영향이다. 이것은 또한 문치(文治)주의, 인치(人治)주의, 그리고 역사의 발전보다는 정체(停滯)주의에 빠지기 쉽다.
이와 반대로 서양의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민중(民衆)의 힘에 의해 정치적 발전을 달성해 가는데 서양의 양반 계급은 기사도 정신에서 보듯이 무반지향(武班志向)을 읽을 수 있다. 이는 반체제의 정치적 비중을 더 두고 있는 맥락으로 끊임없이 제도(制度) 개선이 수반된다.
동양은 크게 상부구조, 서양은 하부구조에 문화 사회적 힘의 중심을 두고 있다고 보여진다.
한국의 경우 동서양의 세계사적인 흐름이 묘하게 역전되고 있는데 남북문화의 공존이 신라의 삼국통일 후 문치화(文治化) 되면서 덕치(德治)를 지향한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삼국강역의 반(半)통일에 불과했지만 반도사를 중국사와 격리(독립) 시키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사는 남북 횡축의 교체사라 하지만 문화적으로는 남방(농업) 문화중심이었다. 이에 비해 한국사는 신라의 통일이 남·북방 문화를 교묘히 절충케 했으며 이것이 중국 남방문화의 큰 흐름 속에 한반도를 지킨 의미가 있다.
백제는 중국과 인접해 중국 남방문화에 너무 빠져 들어가 있었고 고구려는 너무 가까이서 북방족의 일원으로 중국(수·당)과 세력 경쟁을 벌였던 것이다.
신라는 지리적으로도 중국과 가장 멀었지만 화랑이라는 종교적 기사(騎士·武士)를 주축으로 북방 유목문화적 전통과 남방 농업문화를 교묘히 절충하며 한반도식 문무(文武)문화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신라 이후 점차 문화의 문치화(文治化) 현상에 빠져들어 고려·조선조에는 그것이 심화됐던 것이다.
한반도의 국내 상황은 통일신라와 그후 고려, 조선에 이르면서 줄곧 경상도 지역(북방·남방문화가 교차하는 곳)이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농업지역인 한반도의 서쪽(남북 종축을 기준으로)을 반체제 지역으로 성격을 굳힌다. 이 서쪽 지역이 농업지역임에도 사회·문화의 하부 구조적 특성을 보이는 것은 세계 문화의 한반도 지역 교차설(太極設)을 가능하게 한다. 바로 이 서쪽지역에 세습무·판소리·민속악이 왕성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농업-문적(文的) 취향의 반체제-민속예능 문화의 커넥션 뒤에 숨은 암호(暗號)를 파악해 보는 것이 우리의 중요한 주제이다.
지금까지 문화 또는 문명에 대한 공시적(synchronical) 요약과 통사적(dichronical) 흐름을 파악해 보았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언제나 통합될 때 온전한 모습과 이해를 우리에게 준다. 그런 점에서 앞에서 열거된 이원적 분류들은 결국 일원적으로 되어야 한다. 이것은 마치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가 인(人)에서 하나(一體)가 되듯이 인간(人)의 문화는 결국 인(人)에서 순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표 6).
표 6: 인(人)에 의한 일원적 순환
일원적 |
人 |
문화 |
理氣之妙 |
굿 |
시공간 |
이원적 |
天 地 (자연) |
의식 무의식 (자연) |
理 氣 (자연) |
풀이 놀이 (자연) |
시간 공간 (자연) |
그러나 일원화의 과제는 또 다른 거대한 인류학적 논제가 되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결국 예술 인류학이 무교(巫敎)를 대상으로 할 경우 무교 인류학이 되고 이 같은 무교 인류학의 관점은 인류문명의 원형에 대한 계보학을 넘어 유전학이 된다.
인류문명의 해부학은 이러한 계보학을 지나 유전학에 도달할 때 신화적 원형을 달성한다. 우리는 이러한 문명의 원형에서 다시 인간과 자연, 종교와 과학이 태초에 하나였던 것을 배우고 다시 하나가 될 신주술(神呪術)의 연금술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기(氣)가 왜 하나의 이(理)에 에너지를 집중시키고 새로운 힘의 균형 잡기를 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 이(理)는 기(氣)의 조리(條理)이다. 그러나 기(氣)는 무한대이므로 이(理) 또한 무한대일 수 있다. 우리는 문명의 새로운 신화를 무교 인류학을 통해 쓰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의 이(理)에 있으며 기(氣) 또한 모든 것이다. 아마 예술가들이 이것을 가장 잘 알 것이다. 그래서 인류학의 접두어로 예술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문명의 벽을 깨는 인류학, 기(氣)의 커뮤니케이션을 달성하는 열린 사회의 새로운 인류학, 예술 인류학이 된다.
위의 북방·무(武)·놀이, 남방·문(文)·풀이의 문명 구조 이외에도 인간의 신체적 구조에 의거한 문화구조도 이 글의 중요한 패러다임이 된다.
예컨대 신체·무의식·자연(하부구조), 정신·의식 문화(상부구조)가 그것이다. 이것을 다시 문화 자체의 구조, 예컨대 상부 구조적인 것과 하부 구조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이데올로기(정치)·종교·양반·소프트웨어(프로그램)-상부구조'와, '기술(경제)·과학·민중·하드웨어(기계설비)-하부구조'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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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국악의 맥이 잇는다는것이 얼마나 어려운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