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28
사전에 보면 ‘상식’은 ‘일반인이 공통으로 갖고 있거나, 또는 갖고 있어야 할 보통의 지식’ 혹은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 일반적 견문과 함께 이해력, 판단력, 사리 분별 따위가 포함된다’로 정의돼 있다. 결국 상식은 사람들이 ‘일반적’이고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판단’ 혹은 ‘이해’의 기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상식’은 국경을 초월한 ‘보편적 존재’다.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상식이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것 같다. 한마디로 상식마저 진영 논리가 됐다. 특히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 이후 더욱 그렇다.
조국 사태가 한창 진행형일 때, 조국 전 장관 사퇴를 반대하는 측은 조국 수호를 외쳤다. 조국 전 장관만이 검찰개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제기되는 의혹 정도는 별것 아니라는 것인지, 아니면 조국 전 장관이 검찰개혁을 추진하려 하기 때문에 기득권 세력이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려 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조국 전 장관을 둘러싼 의혹은 기존의 기득권 세력이 행한 비정상적 부정부패 행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조국 사퇴를 주장하는 측도 마찬가지다. 조국 전 장관은 사퇴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나 검찰개혁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조국 전 장관 사퇴는 물론이고 검찰개혁은 정권의 검찰 장악 수단이기 때문에 검찰개혁마저 반대하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문제도 마찬가지다. 공수처를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 논리와 공수처 설치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서로 부딪치기만 할 뿐, 상호 간의 토론이나 고민은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저마다 자신의 주장이 이 나라 미래를 위한 진리라고 강조한다.
정치나 제도 같은 거창한 문제에서만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평양에서 열린 월드컵 예선전도 마찬가지다. 취재도 못하고, 중계도 못하고, 관중도 없는 3무(無) 경기로 열린 데다 그것도 모자라 거의 격투기 수준의 축구가 이뤄졌음에도 이를 비판한 선수에게 비난을 가하는 경우마저 발생했다. 온갖 욕설과 반칙을 겪고 집단폭력 사태 직전의 상황을 경험한 선수가 한 말에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것도 진영 간 상식이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는 우리 사회가 이제 뿌리까지 갈라졌음을 보여준다. 상식이 진영마다 달라졌음은 진영 논리가 우리 사회의 근본까지 침투했음을 의미한다. 아주 심각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 인식은 대통령의 언급에서도 나타난다. 문재인 대통령은 10월 21일 종교 지도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2년 가까이 흘렀는데, 국민 통합이라는 면에서 크게 진척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대통령의 솔직한 심정 토로일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5월 10일 취임사에서 “오늘은 진정한 국민 통합이 시작된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는데, 지금 상황은 정반대라는 것을 대통령도 인정한 셈이다.
문제는 대통령이 이런 인식을 갖고 있다 해도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데 있다. 지금 우리 사회의 균열은 대통령이 호소한다고 해결될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이런 현상이 하루아침에 발생한 것은 아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겪고 새로운 정부가 등장했지만 새로운 정부는 적폐 청산이라는 이름 아래 과거를 부정하는 데만 몰두했다고 분석하는 이가 많다. 지금 ‘과거’를 지지하고 찬성한 이들은 몽땅 적폐에 해당될 판이다. 이렇게 적폐 세력으로 몰린 이들은 억울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진영 논리에 빠질 수밖에 없었을 터다.
이뿐 아니라 이런 식으로 전개된 상황에서는 상대방을 인정할 수 없고, 대신 타도의 대상으로만 여길 수밖에 없다. 적폐 청산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적폐 청산의 속도와 범위다. 역사를 몽땅 깨끗이 청소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적폐 청산의 범위와 속도를 적절히 구사하며 진행할 필요가 있었다. 어쨌든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 결과 진영 간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고, 조국 전 장관 사태는 그런 갈등이 폭발하는 하나의 계기였다.
▲ 문재인 대통령과 종교 지도자들이 지난 10월 21일 청와대에서 오찬 간담회 전 대화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국 전 장관이 사퇴를 했음에도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과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이 하락 추세라는 사실은 이를 증명한다. 한국갤럽이 10월 18일 발표한 정기 여론조사(10월 15~17일 전국 유권자 1004명을 대상으로 실시, 신뢰수준 95%에 표본오차 ±3.1%포인트,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참조)를 보면 여권의 지지율 하락을 보다 확실히 알 수 있다. 진영 논리가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한, 우리나라에서 중도라고 불리는 중간지대가 존립할 수 있는 여지는 더욱 축소된다. 상황이 이러니 중도적 입장을 가진 정치인, 예를 들어 유승민 전 바른미래당 대표나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가 존재감을 과시할 수 있는 공간이 점점 작아진다.
일각에서는 유승민 전 대표와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 회동 가능성을 언급하며 보수 대통합을 거론한다. 동의하기 힘들다. 유승민 전 대표와 황교안 대표 간 회동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회동 당사자들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할 확률이 높다.
유승민 전 대표가 연대하고 싶은 인물은 황교안 대표일까, 아니면 안철수 전 대표일까. 지금 유승민 전 대표에게 절실한 인물은 황교안 대표보다는 안철수 전 대표일 듯하다. 황교안 대표를 더 필요로 할 것이라는 가정은 유승민 전 대표가 한국당에 들어갈 것을 전제한다. 유승민 전 대표가 한국당에 들어갈 경우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 유 전 대표가 한국당에 입당하면 자신의 중도적 이미지를 보강하기보다는 오히려 보수 중 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각인시킬 확률이 높아진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 그나마 개척하려 했던 고유의 이미지가 훼손될 뿐 아니라, 여러 보수 후보 중 한 명에 불과해진다. 더구나 한국당에서 유승민 전 대표를 반길 가능성도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결국 유승민 전 대표가 당장 협상을 통해 한국당과 합당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현재로서는 유 전 대표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인물은 황교안 대표보다는 안철수 전 대표다. 둘이 힘을 합치면 서로의 중도적 이미지가 강화됨은 물론이고 중도 세력의 주목도가 올라가는 시너지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앞에 언급한 현재 상황에서, 유 전 대표 혼자 힘으로 중도 세력 입지를 확고히 하거나 확장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유승민 전 대표의 선택지가 많지 않은 셈이다.
그런 차원에서 유승민 전 대표는 보수 대통합이 아니라 반문 연대를 염두에 둘 수 있을 터다. 반문 연대를 추진하면 한국당에 거부감이 높은 안철수 전 대표를 끌어들일 수 있고, 한국당과도 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문 연대가 형성되면 반드시 합당을 하지 않아도 내년 총선에서 선거 연대 같은 방식으로 선거 공조를 할 수 있다. 특히 반문 연대의 장점은, 반문 진영의 ‘스타’를 총망라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반문 진영의 스타가 총출동하면 여론의 관심이 집중될 것은 물론이요, 유승민 전 대표, 안철수 전 대표, 그리고 한국당이 갖는 약점을 희석시킬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반문 연대는 보수 대통합보다 훨씬 성공하기 쉬운 또 다른 선택지다.
중산층이 두터워야 경제가 건강해지듯, 정치도 중도가 굳건해야 상식적인 정치가 가능하다. 그런 차원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우리나라에서 중도적 입장을 가진 유권자와 중도의 길을 걷고 있는 정치인이 발 디딜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권력 핵심이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반성하는 자세를 좀 더 확실히 보여줘야 한다. 동시에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의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여기서 권력 핵심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은, ‘다름’을 같게 만들려 하지 말고, ‘다름’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권력이 이런 자세를 상당 기간 보여주면 우리 사회의 이념적 양극화 현상이 약간이라도 개선되고, 중도의 목소리가 좀 더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현 정권이 주장하는 ‘한반도의 평화’도 중요하지만, ‘국내적 평화’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신율 /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31호 (2019.10.30~2019.11.05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