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인류의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사업은 “순(나무의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에 대하여 말한 스가랴의 아름다운 예언에 나타나 있다. 그는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아버지의) 위(位)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슥 6:12, 13)고 말한다.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당신의 희생과 중보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교회의 기초와 건축가가 되신다. 사도 바울은 그분을 “모퉁잇돌”이라고 지적하고,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간다고 말한다. 또한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고 한다. “영광도 얻”으리라. 타락한 인류를 구속하신 영광은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다.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영원무궁토록 부를 노래는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계 1:5, 6)는 노래가 될 것이다.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라. 아직 영광의 나라가 시작되지 않았으므로 그 영광의 위에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중보자로서의 봉사를 마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실 것인데” 그것은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고 한 그 나라이다(눅 1:32, 33). 지금 그리스도께서는 제사장으로서 아버지와 함께 보좌에 앉아 계신다(계 3:21 참조). 영원하시고 자존하신 하나님과 함께 보좌에 앉아 계신 주님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고,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므로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는 분이시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다(사 53:4; 히 4:15, 2:18; 요일 2:1). 그분께서는 당신의 무죄하신 생애와 상하고 찔림을 받은 몸을 가지고 중보하고 계신다. 그분께서는 상하신 손과 찔림을 받으신 옆구리와 상처 난 발을 가지고 죄에 빠진 인류를 위하여 탄원하신다. 그들의 구속은 그처럼 무한한 값을 치르고 이루어졌다.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성자(聖子)의 사랑보다 약하지 않은 아버지의 사랑이 타락한 인류의 구원의 기초가 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가시기 전에 그들에게 “내게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요 16:26, 27)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고후 5:19)셨다. 하늘 성소의 봉사로써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을 이루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성소의 정결
성소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성경은 분명한 해답을 준다.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성소라는 말은 첫째, 하늘 성소의 식양을 따라 모세가 지은 장막을 가리키고 둘째, 지상의 성소가 가리키는 하늘에 있는 참 성소를 말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모형적 봉사는 끝났다. 하늘에 있는 참 성소가 새 언약의 성소이다. 그런데 다니엘 8장 14절의 예언은 현대에 성취될 예언이므로 거기 말한 성소는 새 언약의 성소가 되어야 한다. 2300주야가 끝나는 1844년에는 여러 세기 전부터 지상에 이미 성소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고 한 예언이 하늘에 있는 성소를 가리키는 것임은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성소의 정결이 무엇이냐고 하는 가장 중요한 의문이 해답되지 아니한 채 남아 있다. 구약 성경은 지상 성소와 관련하여 성소를 정결하게 하는 봉사가 있었던 것을 말한다. 그런데 하늘 성소에도 정결케 할 무엇이 있을까? 히브리서 9장에는 지상 성소와 하늘 성소의 정결에 대하여 분명히 가르쳐 준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히 9:22, 23). 좋은 제물은 그리스도의 보혈이다. 모형과 실체에 있어서, 둘 다 정결하게 하는 일은 피로써 하는데, 먼저 것은 짐승의 피로 할 것이요 나중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정결하게 하는 일을 피로써 해야 할 이유를 말하면서 피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고 한다. 사유하는 일, 곧 죄를 없이하는 일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그런데 죄가 어떻게 하늘 성소와 지상 성소에 관련하여 존재할 수 있었는가? 그 사실은 표상적인 봉사에서 배울 수 있다. 왜냐하면 지상에서 그 직분을 행한 제사장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히 8:5)에서 봉사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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