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고난/믿음에로의 초대
Text Rm 5,6-8
(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1. ‘국어를 배웠으면 주제를 알고 수학을 배웠으면 분수를 알아라.’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이 말은 자기 주제를 알고 분수를 지키라는 의미에서 만들어낸 일종의 언어유희입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자기 말만 말이라 하고 남의 말은 들으려고 하지 않는 불통 현상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서로의 의견을 듣고 좋은 방안을 찾아내려고 회의를 소집해 놓고서는 혼자 떠들다 끝내는 회의는 회의가 아니지요. 상대방을 극우, 친일, 매국 세력과 극좌, 종북, 용공 세력으로 몰아세우며 서로에게 욕만 하여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실체와 주제를 파악하려 하지 않고 오로지 내편 네편으로 나뉘어져 몰아세우려고만 하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는 사순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을 기억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지키는 절기입니다. 오늘 사순절 2주일에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고 그 사랑에 자신의 영과 혼과 육을 다 맡기라는 것을 본문 롬5,6-8 말씀을 통해 나누고자 합니다.
2. 먼저, 6절을 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본문의 ‘아직 연약할 때에’는 슬픈 상황에 처해 있고 거기서 헤어날 길이 전혀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완전히 길을 잃은 상태요 회복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기약대로’는 ‘약속한 때’를 의미하는데, 인간의 타락이 시작되는 것과 함께 하나님께서 이 영광스러운 구원의 길을 상세하게 계획하신 중에,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서 타락한 인간을 온전히 구원하기 위한 완벽한 대제사장이 되게 하시기로 작정한 ’때‘입니다.(갈4,4~5 “(4)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기약대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타락하고 망가져 고통하고 있는 인간을 온전히 구원하시기 위한 고난의 삶을 사셨고 마지막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것이 본문 내용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우리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연약하고 여전히 경건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인간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뒤의 8절에서는 이를 ‘아직 죄인인 상태였을 때’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음에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사랑을 수행하시려고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그 정도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동시에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셋째도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방식입니다. 독생자에게 타락한 사람의 몸을 입혀 세상에 보내시어서 인간이 겪는 고통을 겪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랑을 눅15장에서 세 가지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타락한 인간을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 ‘타락한 아들’이 그것들입니다. 잃어버린 드라크마 이야기는 그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 온 집안을 다 뒤지는 수고를 하는 사랑을 표현하고 있고, 잃어버린 양 이야기는 양을 찾기 위해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며 자기 몸까지 상하게 하면서까지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으며, 타락한 아들 이야기는 큰 상처와 손해를 끼치고 떠난 아들임에도 그 아들을 포기하지 않고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는 무한하게 용서하시는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세 이야기 모두, 잃었다가 되찾은 것들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이 훨씬 더 많은 경비를 들여 잔치를 열고 기뻐하는 큰 사랑을 보여줍니다.
성경 전체의 요절이라 하는 요3,16에서는 한 마디로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하였습니다. 요10,10-15에서는 양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버리는 ‘선한 목자’라고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도둑이나, 양을 늑탈하기 위해 이리가 오면 피해 도망가는 삯꾼과 달리, 자기 양을 위해 목숨도 버리는 선한 목자라는 뜻입니다. 선한 목자에게 양은 단순히 재물이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용하는 수단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순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에 대하여만 아파하는 시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아파하시며 우리 인간에게 들려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우리 인간을 향한 당신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무한하게 큽니다. 그 사랑은 무한하게 영광스럽습니다. 그 사랑은 타락한 인간을 온전한 상태로 다시 만들려 하시는 사랑입니다. 그것이 사순절의 주제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떠난 인간에게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돌아오기를 주저하고 있는 인간에게 ‘나는 다 용서할 수 있다. 너를 얼마든지 새롭게 할 수도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사순절입니다. ‘돌아오는 너희를 위해 잔치까지 준비하고 있다. 돌아오기만 하여라.’라는 것이 사순절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주제입니다.
부디 이 사순절에 들려주시고자 애쓰시는 주님의 사랑 호소를 외면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3. 다음, 7절-8절a를 보겠습니다.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의인을 위해서 죽는 자가 쉽지 않다는 것은 무고한 자, 부당하게 처벌받는 자를 위해 죽어 주려는 자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사람을 보고 다들 불쌍하다는 생각은 하겠지만 목숨을 걸고 위험을 떠안으려는 자는 별로 없습니다. 혹 ‘선인을 위하여 죽는 자’는 있을 수 있습니다. 선인은 단지 의롭기만 한 사람보다 유용한 사람을 뜻합니다. 스스로 선하다는 자들이 남에게 무슨 유익을 끼치는 일도 찾아보기 어렵지만, 쓸모가 있다고 여겨지는 자들은 대개 사랑을 받기도 하며 때에 따라서는 ‘생명을 생명으로 바꾸려 드는 자’들을 보석으로 생각하여 몸을 몸으로 때우려는 자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의인도 선인도 못 되는 죄인인 인간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이 본문입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뿐 아니라 죄투성이요 험상궂기 짝이 없는가 하면 없어져 봤자 아까울 것 없는 인물들이요 마땅히 죽어야 할 사형 범죄자이기에 오히려 죽는 게 하나님의 공의를 풍성하게 드러낼 그러한 인간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뿐만 아닙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사신 것 자체가 예수님께는 큰 고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극치라 할 수 있는 ‘나무에 달린 자’로서의 죽음, 십자가에서 죄인으로 처형을 받는 죽음을 자초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렇게 하셨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을 때 우리는 아직 죄인이었습니다. 아니 10절에서는 우리는 원수였다고 하였습니다. 범법자일 뿐 아니라 반역자요 배신자로서 정부에 무장 도발을 단행한 자들이었습니다. 더없이 극악하고 추악한 내란 범죄자였습니다. 육신의 마음은 하나님에게 원수일 뿐 아니라 적개심 그 자체(골1,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이고. 거룩하신 하나님 편에서도 죄는 용납할 수 없는 증오의 대상(슥11,8 “한 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제거하였으니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이었음에도 이런 죄를 범한 자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셔야만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전에 없던 사랑의 표시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초대장을 받습니다. 결혼식 초대장, 생일 초대장, 중요한 모임의 초대장 등 다양한 초대장이 있지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초대장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한 형벌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초대장이며,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향한 초대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눅5,31-32에서는 “(3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열려 있는 구원의 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 초대장이다.
십자가는 누구에게나 열린 초대장입니다. 어떤 초대장은 특정한 사람들만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초대장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마11,28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죄인을 초대합니다. 십자가는 돈이 많거나 착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죄인, 상처받은 자들, 외로운 자들, 절망한 자들에게 주어진 초대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신의 십자가 앞으로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십자가는 차별 없는 열린 사랑의 초대장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우리가 마음을 열면,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사랑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초대장입니다. 죄인된 우리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믿음의 세계로 초대하는 최고의 초대장입니다. 예수님의 초대에 응하시기를 축복합니다.
4. 끝으로, 8절을 봅니다.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한 마디로 예수님의 고난받으심은 죄인인 인간을 향한 사랑의 증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혐오하거나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찾으시고, 사랑하시며, 구원의 길로 초대하셨습니다. 눅19,1-10에는 삭개오를 통하여 이런 주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여리고라는 도시에는 삭개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세리장이었고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자타공인 죄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삭개오를 싫어했습니다. 그는 점령국인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걷었고 부당하게 착취하여 부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그를 죄인이라 여기고 손가락질했지만, 어느 날 삭개오가 사는 여리고를 지나시던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싶었지만, 키가 작아 군중 속에서 볼 수 없었던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자타공인 죄인이었지만, 그도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무 밑에 멈추어 서시고 삭개오를 바라보시며 말을 건네신 것입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오늘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던 죄인에게 먼저 다가가셨습니다. 그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죄인의 집에 가실 수 있지?’라며 수군거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정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찾고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기쁨으로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셨고, 자신이 행한 잘못을 회개하며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겠고,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고난은 인간을 향한 ‘사랑의 확증’입니다. 그 사랑은 오늘도 계속됩니다. 오늘도 죄인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의 과거가 어떠하든지,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에게 다가가신 것처럼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부끄럽고 멀리 도망치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찾으러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순절에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시며 말씀하십니다.
“속히 내려오라! 오늘 내가 네 마음에 들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