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 아니 매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제주.
1,2월엔 눈 덮인 한라산이, 3월엔 벚꽃과 유채가
4월엔 튤립이 제주를 반긴다.
그리고 5월 청보리와 수국이 제주를 꾸몄다.
특히 가파도의 청보리는 섬 전체를 감싸며
제주에서 가장 빛나는 곳으로 만들었다.
초록색을 좋아하는 이유
파란색과 노란색 그 중간의 초록색, 초록색은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과 노란색 중심에 서있다. 초록색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는데, 파란색을 보면 따뜻하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는다. 또 노란색을 보며 시원하다는 느낌을 받기는 어렵다. 하지만 초록색은 내가 생각한 대로, 내가 느끼는 대로 그 생각이 맞다고 말한다. 내 기분에 따라 시원할 수도, 따뜻할 수도 있는 초록색은 내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색이었다.
청보리가 천천히 황금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황금색으로 변해가는 청보리
5월 31일까지 가파도의 청보리는 황금색으로 천천히 변해간다. 푸릇하고 생기 넘치는 청보리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천천히 천천히 황금색으로 변해가는데 마치 삶을 살아가는 우리와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생기 넘치고 푸릇한 청춘을 통해 다듬어지고, 성장해 가며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하는 것이 비슷하다 못해 똑같았다.
가파도
제주 남서쪽에 위치한 가파도는 화산섬으로 대정읍 모슬포에서 5.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섬이다.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842년 이후부터이고 지금 현재 약 100여 가구 정도만 살고 있는 작은 섬이다. 또 제주도와 여수 여행을 하며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하멜이 표류했던 곳으로 짐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가파도 가는 방법
가파도는 운진항에서 하루 왕복 6편의 배편을 이용할 수 있고, 3시 이후의 배는 편도로만 이용이 가능하다. 가파도는 운진항에서 20분 정도를 이동하면 도착할 수 있고, 배편은 미리 예매하여 이용하거나, 현장에서 선착순으로 이용할 수 있다. 청보리 축제가 열리는 시기엔 많은 관광객이 가파도를 찾기 때문에 예약을 통해 이용하는 것을 추천하고, 현장 이용을 하려면 일찍 움직이는 것을 추천한다. 또, 청보리 축제 기간엔 배편이 증편되는 것을 참고하면 좋다.
가파도 청보리 축제
18만 평이나 되는 보리밭으로 유명한 섬 가파도는 우리나라 섬 중 가장 낮은 해발 20.5m의 섬으로 섬이 낮은 만큼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이 더 높게 보인다. 또 섬 전체 면적의 70%를 청보리가 차지하고 있는 가파도는 청보리 축제 기간인 4월부터 5월까지 녹색 물결과 황금물결이 가파도를 가득 채운다. 가파도의 청보리가 유명한 것은 면적 전체의 70%가 청보리인 이유도 있지만, 그것보다 다른 지역의 보리보다 훨씬 높은 키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유명해졌다. 보통 다른 지역의 보리는 무릎 높이 정도의 크기로 자라지만 이곳 가파도의 보리는 1m가 훌쩍 넘는다. 그 덕에 바람에 넘실거리는 모습이 다른 지역의 보리보다 훨씬 아름답다.
이 보리를 홍보하고, 알리기 위해 가파도는 2009년을 처음으로 매년 두 달간 축제를 개최한다. 축제 기간 동안 보리를 주제로 가파도의 역사, 그리고 독특한 생업 문화를 배울 수 있고, 청보리 밭 사이를 걸으며 바람에 넘실 거리는 보리의 향연을 몸으로 몸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현재는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축제가 취소되어 청보리 밭을 걷는 것으로 위안 삼으며 다음 해에 축제가 무사히 열리길 기원할 수 박에 없다. 하루라도 빨리 팬데믹 상황이 끝나길 바랄 뿐이다.
심연의 기억
여행을 하다 보면 소소한 것들에 행복감과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가파도는 그런 여행지였다. 청보리의 향연만 있는 여행지가 아닌 구석구석 따뜻하고도 왜인지 모를 향수가 느껴지는 여행지였다. 이제 내년이면 서른이 되는 내게 내 머릿속 깊숙한 심연의 어느 한구석에 위치해있는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끄집어냈다. 기억하려 해도 나지 않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이곳 가파도에서 떠올랐다.
심연 속의 어린 시절 기억들이 갑자기 떠오르면서 나도 모르게 아련한 감정이 차올랐다. 그리고 구석구석 작은 것들과 소소한 것들이 그 감정을 극대화시켰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대의 중간에 살았던 나. 핸드폰을 초등학교 졸업식에 졸업 선물로 처음 받고 뚱뚱한 모니터 컴퓨터 화면에서 나오는 버디버디와 네이트온에 의지하며 내 소식을 싸이월드에 끄적였던 그 시절. 그 향수가 갑자기 떠오르더니 세세한 기억들이 하나하나 나기 시작했다.
왜인지 가파도는 2001년의 나를 마주하게 만들었다. 친구와 놀기 위해 심호흡을 여러 번 하고 친구 집에 전화해 친구가 먼저 받기를 바라던 그 시절. 어른이 먼저 받는 상황을 대비해 정중하게 인사하기 위해 몇 번을 곱씹고 전화해도 늘 긴장되었고 늘 실수를 했던 그 시절 말이다. 지금은 절대 느낄 수 없는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올 리 없는 그 시절이 그리워졌다. 어떻게든 1센티라도 늘리기 위해 허리를 펴고 키를 쟀고, 날이 좋은 주말 이불 빨래를 마치고 마당에 기다란 줄에 이불을 널었던 그 장면이 이곳 가파도에서 떠올랐다.
청보리와 황금보리 사이
어찌 보면 가파도의 푸릇푸릇 한 청보리의 녹색 향연이 내 어린 시절과 닮았고, 가파도의 모습이 내가 살았던 고향집의 모습과 비슷했기에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지금의 나는 푸릇푸릇 한 청보리와 황금색의 보리 그 사이 어딘가쯤에 서있다. 생기 넘치고, 모든 될 것이라 믿었던 겁 없던 시절을 넘어 이제는 현실을 조금씩 깨닫고 무엇이 최선인지 생각하며 다듬고 다듬으며 성장해가고 있다. 그리고 청보리가 황금색 보리로 변하듯, 나도 인생의 황금기를 맞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거름 삼아 내가 맞이할 황금기를 기대하고 또 기대한다.
가파도로 떠나자. 청보리가 황금색 보리로 변하는 모습을 감상하자. 그리고 구석구석 어린 시절 향수를 불러일으킬 집들과 고양이, 학교의 모습들을 눈으로 담고 잠시 그 시절로 회귀해보자.
가파도 건너 한라산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