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가 2조 혜가에게 깨달음을 전하다
도(道)를 배우는 자, 종지(宗旨)를 알아 의혹을 끊게 하노라
달마와 양 무제의 문답
달마대사를 환대한 양 무제(武帝, 503~559)는 남북조시대에 남조 양나라의 황제다. 독실한 불자로 역경과 불사를 적극 후원했다. 무제는 여러 차례 출가하기도 했으나 황실과 신하의 만류로 환속했으며, 아쇼카대왕과 같은 전륜성왕을 지향했다. 이런 신심의 황제가 부처님 나라 인도에서 온 조사를 만났으니 매우 기쁘게 공양하고 법을 물었다.
이 문답은 <조당집>에 기록되어 있는데, ‘ 선종 제일서’로 평해지는 <벽암록> 제1칙에 나올 정도로 선(禪)의 특색을 잘 드러낸 매우 유명한 이야기다.
“어떤 것이 가장 성스럽습니까?” “성(聖)이라 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짐을 대하고 있는 그대는 누굽니까?” “모릅니다.”
“짐이 즉위한 뒤 오늘까지 스님을 만나고 절을 짓고 경을 쓰고 불상을 조성했는데, 어떤 공덕이 있으리까?” “공덕이 없습니다.”
“어째서 공덕이 없습니까?” “이는 인천(人天)의 작은 과보요 번뇌의 원인이어서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착한 인이 있다고는 하나 실상(實相)이 아닙니다.”
“어떤 것이 진실한 공덕입니까?” “맑은 지혜는 묘하게 둥글어서 본체가 원래 공적(空寂)하니 이런 공덕은 세속 일로는 구할 수 없습니다.”
무제는 자신이 정성을 들여온 불사에 잔뜩 칭찬을 기대했으나 뜻밖에 공덕이 없다고 하자 화가 나서 아무 말도 못했다. 무제는 달마대사의 고준한 법문을 알아듣지 못했고 더 배우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양 무제는 복을 비는 불사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승단이 고분고분하지 않자 권력으로 승단을 장악하고 스스로 경을 설하고 저술을 하며 나라를 불국토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양나라 수도 남경(南京)에만 500개, 전국에 2600여개 사찰을 짓고 탑을 쌓았다. 또한, 계율을 지키기 위해 나라의 모든 행사에 육고기 사용을 금지하고 스스로도 채식을 했으며, 동아시아 여러 나라 사신을 보내어 불법을 전했다. 백제에도 양나라 사신이 불법을 전하러 왔다고 한다. 남방불교가 육식을 허용하는 데 비해 북방불교에 육식을 금하는 것은 이 양무제시대 불교정책의 영향이 컸다.
그런데, 무제의 이러한 불사의 비용은 거의 국고에서 지출됐다. 무제는 국사(國事)보다 불사(佛事)에 더 진력하여 백성의 혈세를 사찰에 집중했다. 양나라의 외양은 불국토였다. 하지만, 모양만 그러했지 마음은 불사를 통해 끝없이 복(福)을 구했다. 불교와 불사에 대한 집착도 병이란 것을 양 무제는 몰랐던 것이다. 불법의 정수를 몰랐던 무제는 말년에 부하의 배신으로 황제에서 쫓겨나 비참하게도 굶어 죽었다. 그가 그렇게 불사하며 구한 복은 어이없게도 오지 않았다.
숭산 소림사로 가서 때를 기다리니
달마는 나라의 황제를 만나 대화한 결과 오로지 복을 구할 뿐 불교에 대해 무지한 것을 알고는 양자강을 건너 북쪽으로 갔다. 양자강 위는 남조 양나라와 필적하는 북조 북위(北魏) 땅이다. 달마대사는 낙양을 거쳐 숭산 소림사 -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정주시(鄭州市) - 로 가서 은거했다. 북위의 효명 황제 역시 돈독한 불제자였다. 황제는 달마대사의 소식을 듣고 세 차례나 사자를 보내 초청했으나 모두 가지 않았다고 <전등록>에 기록되어 있다.
달마대사는 황궁에 가는 대신 소림사 동굴에서 9년 동안 면벽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9년간 면벽 참선하여 깨달았다’고 하는데, 대사는 이미 인도에서 27조와 문답하는 가운데 확철대오하여 깨달음을 인가 받아 동쪽으로 왔다.
그럼 어째서 9년 동안 면벽하고 있었을까? 이는 대사가 법을 설하지 않고 굴에서 간절한 구도자를 기다린 기간이 9년이란 의미이다. 지금도 소림사에는 대사가 발심 구도자를 기다린 달마굴이 그대로 있다.
혜가가 팔을 끊고 법을 구하고
이때 신광(神光)이라는 스님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유교와 노장의 많은 경전을 두루 공부했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불문에 출가했다. 오랫동안 많은 경전을 보았으나 여전히 마음이 불안했다. 마침 인도에서 대선지식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낙양에서 달마대사를 만나 소림사까지 따라와서 불법을 물었으나 대사께선 한 마디도 답해주지 않았다.
이에 신광스님은 도를 구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어느 겨울 눈 내리는 날 소림사 달마의 처소 앞에 서서 밤새도록 말씀을 기다렸다. 다음 날 날이 밝아 눈은 무릎까지 쌓이도록 스님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를 본 대사께서 드디어 처음으로 신광과 묻고 답했다.
“네가 눈 속에 섰으니 무엇을 구하느냐?” “바라옵건대 화상이시여, 감로의 문을 활짝 열어 중생을 널리 건져 주십시오.”
“부처님들의 위없는 깨달음은 여러 겁을 수행한 것인데, 네가 작은 뜻으로 큰 법을 구하려 해도 끝내 될 수 없느니라.”
신광이 이 말을 듣고는 바로 날카로운 칼을 뽑아 자신의 왼팔을 끊어 대사 앞에 놓았다. 신광은 대사에게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신념을 보여준 것이다.
이를 본 대사가 말했다. “부처님들과 보살들이 법을 구할 땐 몸으로써 몸을 삼지 않고, 목숨으로써 목숨을 삼지 않았는데 네가 이제 팔을 끊었으니 법을 구할만하구나. 이제 신광이란 이름을 고쳐 혜가(慧可)라 하여라.”
이에 혜가가 말했다.
2조 혜가스님의 구법이야기 무대인 소림사 입설정.
“화상께서 마음을 편안케 해 주십시오.” 대사가 답했다. “그 마음을 가져오너라. 편안케 해 주리라.”
“마음을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벌써 너의 마음을 편안케 하였다.”
혜가는 이 말씀에 활연대오하고 대사께 말하였다. “오늘에야 모든 법이 본래부터 공적(空寂)하고, 깨달음이 멀리 있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인도 제28조가 해동 제1조가 되다
달마대사는 혜가의 깨달음을 인정하고 부처님으로부터 전해온 가사를 전하고 이렇게 말했다.
“안으로 법을 전하여 마음을 깨쳤음을 인증하고, 겉으론 가사를 전하여 종지(宗旨)를 확정한다. 비록 가사를 전하지만 법에는 관계가 없다. 이는 삼세의 부처님들이 서로서로 전하시던 터이다. 나 이제 또한 가사를 전하여 그 신표(信標)를 삼아 후세에 법을 전하는 자로 하여금 법을 받은 근원이 있음을 알게 하고 도를 배우는 자로 하여금 종지를 알아서 의혹을 끊게 하노라.”
이렇게 하여 인도에서 동쪽으로 건너온 부처님의 제28조 달마는 제29조 혜가의 깨달음을 인가하고 가사를 전했다. 이것은 동쪽 해동에서는 달마대사가 제1조가 되고 혜가가 2조가 되는 역사다.
달마는 이렇게 전등(傳燈)의 소임을 다하고는 이조 혜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땅에 온 뒤에 여섯 번 독약을 받았으나 모두 집어냈는데 이제 집어내지 않으려 하니 사람을 만나 법을 전했기 때문이다.”
말끝에 단정히 앉아서 가셨다.
선종의 초조 달마는 이렇게 독살됐다. 당시 승단의 지도자인 광통율사와 보리류지삼장의 소행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형상을 떠나 마음을 바로 보라는 달마의 법문을 늘 시비했는데, 점점 대사의 가르침이 퍼져 도저히 이를 감당할 수 없자 악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달마는 이를 알고도 ‘형상은 모두 허망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며 그렇게 갔다. 이조 혜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