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퇴계와 율곡
슬프다. 인류 중에 대화가 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자신이 눈으로 본 것을 근거로 우기려고 한다면 우리에게 대화가 왜 필요한가? 대화가 필요한 이유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면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하드웨어는 보이지만 소프트웨어는 보이지 않는다. 그냥 보면 보이지 않고 잘 살펴봐야 보이는 특별한 것이 있다. 문제는 그것을 보지 않으려고 기를 쓴다는 점이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말라는 식이다. 사실이지 내막을 들추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처음 수학을 수학을 발명한 사람은 생각했을 것이다. 이거 한번 시작되면 끝까지 가야 되는데. 내가 쓸데없이 일을 벌이는 바람에 후배들이 입시에 시달리며 얼마나 고생하겠는가? 수학을 배워 현실에 써먹는 사람은 인구의 5퍼센트 밖에 안된다는데. 한때 미국은 수학을 가르치지 않았다.
스푸트니크 쇼크로 태도를 바꾸었지만. 계산기가 있는데 왜 구구단을 외워야 하지? 이런 식이다. 우리가 진지해져야 한다. 세상은 이분법으로 잘 설명된다. 해와 달, 하늘과 땅, 상류와 하류, 빛과 어둠, 육체와 정신, 형식과 내용이 있다. 뭐든 둘로 나누면 잘 이해가 된다. 문제는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둘로 나누는 이유는 둘로 나누면 다루기가 편하기 때문이다.
물은 그냥 바다로 흘러가는데 굳이 상류와 하류로 나누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수가 물맛은 좋다지만 요리에는 수돗물을 써도 상관없다. 어차피 식당에서는 다 수돗물로 조리한다. 라면을 생수로 끓여야 한다고 우기는 사람 있다. 뭐든 둘로 나눠야 직성이 풀리는 이분법 습관 때문이다. 우월과 열등으로 나누어 차별하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는다. 그게 심하면 병이다.
조선시대에는 율곡을 인정했고 퇴계는 뒷전이었다. 근래에 퇴계가 뜬 이유는 일본 때문이다. 일본에 성리학을 전해준 강항의 스승 성혼이 퇴계 문하라지만 율곡도 퇴계 후배다. 강항이 퇴빠는 아닌데 일본이 퇴계만 숭상하므로 퇴계가 떴다. 이런 현상은 한국에도 나타난다. 중국은 양명학, 고증학 등으로 유교가 다양하게 발전했는데 한국은 오직 성리학 하나에 목을 맨다.
일본이 퇴계만 떠받드는게 변두리즘 현상이다. 예컨대 서양 그림을 들여와서 아시아 시장에 팔려면 켸켸묵은 피카소나 고흐를 팔아야지 미술의 최신 트렌드를 따라가면 안 된다. 그림을 파는게 아니라 명성을 파는 것이기 때문이다. 명품을 팔아도 품질보다는 브랜드다. 성리학의 본질에는 관심이 없고 성리학의 족보에만 관심이 있다. 일본은 주자와 가까운 것을 원한다.
율곡은 퇴계를 발전시켰다. 천도책은 과학적 태도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성리학과 근대과학의 접목에 누가 관심을 갖겠는가? 현대인의 시선으로 보면 그것은 오리지널이 아니라 중간에 변질된 짝퉁이다. 오리지널의 아우라를 팔아야 장사가 된다. 불교도 사정은 비슷하다. 불교의 발전과 성과를 부정하고 원시불교 위빠사나로 돌아가려는 흐름이 유행한다.
성철과 만해의 입장을 비교하면 알 수 있다. 만해의 불교유신론은 근대과학의 성과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과학은 과학자에게 배워야지 누가 스님한테 과학을 배우려 하겠는가? 불교유신론 따위 필요없다. 오히려 석가모니 시대로 돌아가자는 성철의 불교역주행이 먹혔다. 불교도 발전하고 유교도 발전하는데 그래봤자 과학을 이길 수 없으니 차라리 퇴행하는게 먹힌다.
개신교는 일정부분 원시 기독교로 퇴행한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의 역사에 녹아있는 카톨릭의 성과를 부정한다. 기독교의 콘텐츠 중에 상당부분은 예수와 상관없는 가짜다. 성모 숭배는 게르만족의 모계사회 습속을 반영한 것이다. 산타클로스의 순록이 끄는 썰매는 더운 나라 이스라엘에 없다. 이런 변종을 배척하고 원시 기독교로 돌아가야 하는가? 그게 퇴계사상이다.
문제는 종교적 본능이다. 인간은 원래 공동체적 본능이 있다. 인간들은 본능의 충족에 충실한 종교를 원한다. 방언이 터져야 한다. 은사를 받는데만 관심이 있을 뿐 신학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과학을 못이기는 신학이 왜 필요한가? 그들은 기적을 체험하고 직통계시를 받고 싶은 것이다. 퇴계는 주자의 아이디어를 번역했을 뿐이고 그것은 정치적인 이유로 오염된 사상이다.
문약한 송나라가 북방 오랑캐들인 거란, 여진, 몽골, 고려와 충돌하면서 한족 외에는 전부 오랑캐로 규정하고 그들을 물리칠 이론적 뒷받침으로 성리학을 만든 것이다. 단순히 관료들의 교양과목에 불과했던 유교를 종교화시켜 대중을 결집시키려 한 것이다. 본질은 동원력이다. 정복왕 윌리엄이 영국을 칠 때 동원한 병력 숫자는 7천명이다. 7천명 가지고 정복왕 행세 한다.
아시아는 일단 백만대군 찍고 시작한다. 사람을 동원하려면 비전을 보여야 한다. 승산이 보여야 인원이 모인다. 갈라치기가 먹힌다. 군자당과 소인배로 가른다. 군자당은 한족이고 소인배는 오랑캐다. 조선은 이 논리를 수입해서 양반당과 상놈당으로 갈라치기를 시전한다. 일본도 성리학을 수입해서 막부를 토벌하는데 성공했다. 현대사회도 갈라치기 논법은 수요가 있다.
퇴계를 숭상하는 자가 많은 이유는 이게 무기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싸움에 진다는 것이다. 갈라치기 논리로 송나라가 몽골을 물리치는데 성공했나? 천만에. 조선이 갈라치기 논리로 청나라 토벌했나? 천만에. 이게 내전에는 먹히는데 외국과의 전쟁에는 먹히지 않는다. 성리학은 내부결집용이다. 자기편을 갈라치기 하는 똥파리 논리로 변질되는게 자동이다.
이기는 성리학이 필요하다. 그래서 율곡이 등장해준다. 성리학 본질은 동원력이다. 오랑캐의 침략에 당황한 한족이 민중을 동원하려면 뭔가 잔다르크 비슷한 것을 보여줘야 한다. 종교의 힘이 필요하다. 무함마드도 종교의 힘으로 뭔가를 보여줬다. 이란 역시 종교 특유의 동원력을 보여주고 있다.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가 영국에 백년동안 깨진 이유는 계급갈등 때문이었다.
프랑스는 귀족과 민중으로 나라가 갈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원래 귀족세력이 약했고 농민 중심이었다. 영국의 웨일즈 장궁병이 프랑스의 귀족군을 백년동안 이겼다. 웨일즈에 주목나무가 많아서 농민이 장궁으로 무장했는데 그게 먹힌 것이다. 잔다르크가 프랑스 농민을 동원하자 갑자기 강해졌다. 프랑스 혁명도 마찬가지다. 혁명의 이름으로 하층민을 대거 동원했다.
퇴계는 아군과 적군을 이와 기로 갈라치기 하는 꼼수를 냈으나 아군이 먼저 양반과 상놈으로 갈라져서 망했다. 율곡사상은 밸런스 일원론이다. 이와 기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 오로지 기의 밸런스와 언밸런스가 있을 뿐이다. 밤과 낮이 따로 있고, 해와 달이 따로 있고, 하늘과 땅이 따로 있고, 남자와 여자가 따로 있고, 양반과 상놈이 따로 있다는 생각은 현장에서 쉽게 먹힌다.
바보들을 속여먹기에 적당하지만 그게 진실이 아니다. 지구평면설이 뜨는 이유가 무엇인가? 단번에 지성과 반지성으로 갈라치기를 성공시켰기 때문이다. 만연한 지식혐오증에 편승하려는 수작이다. 지구가 평평하든 모나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지식혐오라는 시대의 유행에 빨대를 꽂아야 성공한다는 점이다. 지식으로 경쟁하면 천재만 모아도 국가가 되는 중국이 이긴다.
지식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좌절감에 호소하는 수법이다. 본질은 중국 공포증이다. 겉으로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약을 팔지만 이면에는 중국이 무서워 하는 생존본능을 팔고 있다. 이게 동물의 본능이기 때문에 장사가 된다. 호르몬이 움직이는 데는 약이 없다. 진실을 말하자. 자연의 법칙에는 오로지 기의 운행에 따른 밸런스가 있을 뿐이다. 모든 대칭은 인간의 관측오염이다.
그냥 나무가 있는데 인간은 줄기와 뿌리로 나눠야 직성이 풀린다. 풀과 나무로 나누려고 한다. 대나무는 풀인지 나무인지 헷갈린다. 바나나가 그렇다. 풀인데 나무다. 본질은 인간의 개입이다. 인간이 개입하려면 객체의 가운데를 잡아야 밸런스가 유지된다. 막대기를 잡으려면 가운데를 잡아야 한다. 가운데를 잡으면 좌우가 나눠진다. 인간을 기준으로 삼으므로 왜곡된다.
우주 안의 모든 움직이는 것은 밸런스가 있고 2항대립은 밸런스의 하부구조를 구성한다. 지렛대의 받침점을 기준으로 작용점과 힘점이 나눠지는 것은 사람이 지렛대를 움직이려고 하기 때문이다. 움직이면 변화가 일어나고 시간의 과거와 미래가 나눠지므로 이분법이 된다. 자연에는 물질이 있을 뿐 시간이 없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현재도 없고, 변화가 있을 뿐이다.
인간이 개입하여 변화의 현재 단계를 가리키려고 하므로 과거와 미래가 대립된다. 대칭은 인간이 변화를 전달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인간의 사정이지 존재 자체의 사정이 아니다. 인간의 눈이 둘이고, 손이 둘이고, 발이 둘이므로 자연의 존재도 둘씩 짝지어져 있어야 한다는 식의 우격다짐이다. 그럴 리가 없잖아. 이원론은 인간의 갈라치기 행동이지 자연의 모습이 아니다.
자연은 에너지 일원론이다. 에너지는 음양이 없고 대신 밸런스가 있다. 밸런스가 존재하는 이유는 에너지가 깨지는 형태로만 이동하기 때문이다. 자연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자발적 변화는 깨지는 변화라는게 엔트로피다. 가만 두면 깨질 수는 있어도 합쳐질 수는 없다. 저절로 합쳐진 것은 더 높은 차원에서 뭐가 깨진 것이다. 하류에 쌓인 모래는 상류의 암석이 깨진 결과다.
우리는 하류에 쌓인 모래를 보고 모래가 합쳐졌다고 착각한다. 자갈과 모래가 저절로 굳어서 역암이 되는 일은 없다. 그러려면 뚜껑을 닫고 무언가가 위에서 눌러줘야 한다. 위에서 눌러주는 무언가는 또다른 뭔가가 깨져서 만들어지므로 엔트로피는 언제나 증가한다. 율곡은 성리학을 발전시켰지만 인간들은 성리학 발전에 관심이 없다. 그래봤자 근대과학을 이기지 못한다.
문제는 퇴행이다. 율곡의 일원론은 서양의 근대과학을 이기지는 못하는데 퇴계의 이원론은 민주당을 친명과 반명으로 갈라치기 하는데 요긴하게 쓰인다. 시장에서 수요가 있으므로 공급이 있다. 거짓말은 언제나 일정한 수요가 받쳐준다. 거짓말은 즉시전력감이다. 이것은 상업적 동기에 의한 오염이다. 장사를 하려면 먹히는 거짓말을 해야 한다. 고객이 왕이기 때문이다.
왜 종교가 있을까? 왜 음모론이 있을까? 정치적 오염 때문이다. 중앙의 정치권력에 대항하려면 변방의 종교권력과 음모론 권력이 먹힌다. 인간들이 그렇다. 컴퓨터가 보급된 80년대 한국인들은 열심히 주산학원에 다녔다. 컴퓨터는 뭐다? 계산기다. 계산은 뭐다? 주산이다. 이런 식의 역주행을 하는게 한국인의 근성이다. 서양의 과학이 소개되자 한국에 서당이 번성했다.
강증산의 천지도수는 서양수학의 아이디어를 훔쳤다. 서학쟁이들이 수학을 배워서 계산을 잘한다는데 그렇다면 우리 동학쟁이들은 아주 미래를 계산해버려. 뭐 코쟁이들이 별자리의 운행을 계산한다고? 우리는 연도별로 사주팔자를 계산해버려. 강증산이 천지도수의 숫자를 슬쩍 바꿔서 한반도의 운명을 바꿔버려. 아프리카 차드에는 알비노 아이들이 팔을 잘린다고 한다.
백인은 힘이 있다. 백인의 힘은 피부색에서 나왔다. 피부색이 백인과 같은 알비노 어린이의 팔을 잘라 간직하면 백인의 힘을 얻을 수 있다. 이런 거짓말은 먹힌다. 우주 안의 모든 대칭은 인간의 관측에 의해 오염된 거짓이다. 대칭은 에너지의 전달이 일어나는 연결고리다. 대칭은 연결의 형식이고 내용은 에너지다. 지연은 오직 에너지의 밸런스와 언밸런스가 있을 뿐이다.
의사결정은 언제나 밸런스가 복원되는 방향으로 일어난다. 언밸런스는 잠정적인 모습이고 자연의 본질은 밸런스 일원론이다. 왜 이게 문제가 되는가 하면 정치적으로 오염된 이원론이 상대를 배척하는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이원론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데모크리토스의 일원론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원자론을 구조론과 비교하면 틀린 생각이지만 반은 맞다.
복잡한 것이 단순한 것으로 환원된다는 것은 맞다. 그러나 단순하지 않다. 더 이상 환원될 수 없는 완전성이 있다. 최소한의 복잡성은 유지된다. 그것은 변화를 결정하는 밸런스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갈등은 근래에 한국이 일본을 추월해서 일어난 밸런스 변화의 문제다. 옛날에 서양인들은 아내가 남편에게 대들어도 반역이고 하인이 주인을 공격해도 반역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인들의 무의식을 들여다보면 열등한 한국이 우월한 일본에 대들었으니 반역과 같다는 것이다. 밸런스의 역전을 두고 한국인들은 종자가 원래 그렇다거니 자이니치들이 일본 국내법을 안지킨다느니 한다. 조선족들이 언제 한국 법 지키는거 봤냐? 탈북자들은 남한에 와서도 김정은 수령 대신 윤석열 수령을 섬기잖아. 하는 짓이 북한과 같다. 이렇게 되는 것이 자동이다.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밸런스 조절문제를 절대 해결될 수 없는 이항대립 문제로 단정하고 상대방을 죽여 없애려고 한다. 이가 기를 눌러야 한다고 여긴다. 양반이 상놈을 누르고, 남자가 여자를 누르고, 상관이 부하를 누르고, 경상도가 전라도를 눌러야 나라 꼴이 제대로 돌아간다고 여긴다. 이러면 답이 없다. 결국 전쟁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전쟁에 진다.
적을 갈라치려는 의도는 좋은데 입맛대로 안된다. 적은 버겁고 결국 만만한 자기편을 갈라치기 하는 결과로 되기 때문이다. 남을 갈라치기 하려다가 자신을 갈라치기 해서 자멸하는게 퇴계병이다. 갈라치기의 달인 송시열이 화양동계곡에 암서제를 짓고 퇴계의 계상서당을 똑같이 모방한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똥파리나 수박이나 하는 짓이 같으면 본질이 같은 것이다.
수컷이 암컷보다 큰 이유
수컷의 몸집이 암컷보다 큰 이유는 전쟁 때문이다. 종의 유지에는 암컷의 번식과 수컷의 영역이 필요하다. 무리에 수컷은 하나만 있어도 종족보존이 가능하므로 번식은 암컷의 역할이 크다. 영역의 확보는 역할분담이 필요하며 수컷의 역할이 크다. 암수가 전쟁과 육아를 함께 하는 집단보다 역할을 분담하여 수컷만 전쟁을 하는 종이 살아남을 확률이 높은 것이다.
전쟁을 하면 수컷이 죽을 확률이 높으므로 수컷의 몸집을 키운 집단의 생존확률이 높다. 암수가 고르게 죽은 집단과 수컷만 죽은 집단 중에 어느 집단의 생존 확률이 높겠는가? 수컷은 한 마리만 살아남아도 암컷의 번식능력이 살아있으면 금방 집단의 세력을 회복한다. 원시시대 기준으로 남녀간 성비는 불균형했으며 전쟁으로 남자의 수명이 짧아졌다고 봐야 한다.
근친혼 방지도 중요하다. 수컷이 암컷을 찾아 돌아다니는게 보통이다. 암컷은 자기 영역을 지키며 동료와 협력하는데 비해 수컷은 발정기에 멀리까지 혼자 돌아다니므로 전투력이 약한 수컷은 죽는다. 포유류는 발정기에 암컷이 수컷을 유혹하는 구조이므로 수컷이 암컷을 찾아 돌아다니다 죽는다. 암컷은 새끼를 키워야 하므로 영역을 버리고 무리를 떠나지 않는다.
본질은 밸런스다. 종합적으로 암수간 신체의 차이는 그 정도의 비율이 그 종의 유지에 적합했다는 의미다. 밸런스는 단순히 남자와 여자로 비교하면 안 된다. 남자 대 여자와 아이로 비교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원시시대 기준으로 성인 남자는 혼자 돌아다니는데 여자는 모계사회라서 항상 아이가 딸려 있다고 봐야 한다. 남자 대 (여자+아이)로 보면 균형이 맞아진다.
검색해보면 성선택을 강조하는데 허튼소리다. 암컷이 강하고 건강한 자손을 낳기 '위해' 크고 건강한 수컷을 선택했다고? '위하여'가 들어가면 일단 개소리다. 수컷은 강하고 건강한 자녀를 갖고싶지 않나? 포유류 429종 중에 수컷이 큰 것은 45퍼센트, 암컷이 큰 것은 16퍼센트, 나머지 39 퍼센트는 비슷하다. 다윈의 성선택설은 틀렸다. 옛날 노인네가 뭘 알어?
진리의 길을 가는 사람은 이런 부분에 과감한 의문부호를 던져야 한다. 편견과 고정관념에 도전장을 내밀어야 한다. 수컷의 몸집이 큰 경우는 사자, 코끼리, 개코원숭이, 코끼리 물범, 고릴라 등 몇몇 유별난 종들 뿐이다. 동물원에서 인기가 있다. 암컷이 큰 토끼, 박쥐, 쥐, 하이에나 등은 인기가 없다. 새끼를 많이 낳는 동물에는 암컷의 몸집이 더 큰 경우가 많았다.
수염고래는 암컷이 크고 범고래는 수컷이 크다. 호랑이, 사자 등 사나운 종의 수컷이 큰데 이는 필자의 전투이론과 통한다. 암말이 당나귀 수컷과 교미하면 곤란하다. 암컷은 수컷이 동족인지 확인하는데 이 부분이 성적 표지를 강화하여 성선택으로 오해된다. 성선택이 아니고 성적 조절장치의 다양한 발전이다. 남자가 성선택으로 미녀만 선택하면 흑인은 뭐지?
틀린 생각 - 수컷간 경쟁에 의해 좋은 수컷이 암컷에 선택된 결과로 수컷이 커졌다.
반론 1.. 수컷은 왜 좋은 암컷을 선택하지 않는가?
반론 2.. 남자가 미녀만 선택하면 흑인 여성은 왜 존재하지?(남부 아프리카는 한때 황인종으로 분류된 적이 있을 정도로 피부색이 밝은 사람이 많다.)
구조 진실 - 성적 조절장치의 기능이다. 짝짓기 조절장치는 종에 따라 다양하지만 수컷의 성적 표지를 강조하여 이종간 결합을 막는 것이 성선택과 같은 결과를 끌어낸다. 암컷은 발정기에 냄새를 풍기므로 성적 표지가 필요없다. 인간은 발정기가 따로 없으므로 가슴과 엉덩이 등에서 여성의 성적 표지가 강조된다.
동물 수컷은 발정하지 않는 대신 성적 표지가 강조되어 덩치가 커지는 경향이 있고, 동물 암컷은 발정기가 있으므로 성적 표지가 필요없다. 다만 인간 암컷은 발정기가 없으므로 가슴과 엉덩이를 강조해서 수컷을 유인한다. 이는 번식의 조절장치다. 조절장치는 과잉 짝짓기와, 과소 짝짓기, 그리고 이종간 잘못된 짝짓기를 방지하는 기능이 있다.
정리하면 인간 수컷이 여자보다 몸집이 큰 이유는
1. 영역확보에 따른 전투에 의해 몸집이 큰 수컷이 살아남았다.
2. 근친혼 회피에 의해 수컷이 다른 부족의 여성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사망할 확률이 증가한 만큼 생존한 개체의 몸집이 커졌다.(모계사회에서 껄떡대다가 오빠나 남동생한테 맞아죽는 것은 다반사다.)
3. 번식 조절기능에 의해 성적 표지가 두드러져야 유리하다. 나체생활을 하는 부족민 남자는 고추가 커야 유리하다.
4. 인간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는 발정기가 없는 대신 가슴과 뺨과 엉덩이의 성적 표지가 발달했기 때문이다. 성적 표지를 발정기와 바꿔먹었다.
5. 성적 표지에 의한 번식 조절장치는 과잉 짝짓기, 과소 짝짓기, 이종간 잘못된 짝짓기를 막아준다.
짝짓기는 수컷의 신체가 암컷의 신체에 삽입되는 공격적인 형태이므로 짝짓기 경험이 없는 암컷이 불안감 때문에 거부할 수 있다. 짝짓기를 원하지만 무지에 의해 수컷의 접근을 거부할 수 있다. 수컷이 큰 신체로 암컷을 제압하는 폭력적인 짝짓기가 일어날 수 있고 그게 결과적으로 짝짓기 성공확률을 높일 수 있다. 이런 점은 조절장치의 기능으로 봐야 한다.
인공지능에게 한국어로 게이는 평균보다 키가 작은지를 질문하면 성적지향과 키는 무관하다고 대답한다. 같은 질문을 영어로 하면 차이가 있다고 한다. 이는 한국 지식인들이 썩었다는 증거다. 도전정신이 없다. 과학자의 자격이 없고 정치적 물타기 행동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 게이라고 여성호르몬만 나오는게 아니므로 평균 1~2센티 차이는 유의미한 차이다.
수컷과 암컷의 키 차이는 수컷의 전투 호르몬에 의한 본질적인 차이가 맞다. 이는 성선택이 틀렸다는 증거다. 물론 아주 틀렸다는건 아니다. 필자의 성적 조절장치 이론도 성선택 개념과 유사하다. 중요한것은 자의적인 선택이 아니고 메커니즘적인 조절장치라는 말이다. 위하여가 아니고 의하여다. 자의적 선택이 아니라 구조적 필연이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구조론 선언
우리가 우주를 이해하는 근본은 환원주의다. 복잡한 것은 단순한 것의 집합이다. 고장난 자동차는 분해해 보면 된다. 환원주의는 일단 옳다. 그러나 함정이 있다. 가장 단순한 것은 0이다? 0은 집합해도 0이다. 가장 단순한 것은 1이다? 그럼 0.1은 뭐지? 단순이라는 개념 자체가 엄밀하지 않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집합이라는 개념도 문제가 있다. 집합을 정의하는 조건을 다시 정의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그것이 있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경로다. 변화의 경로를 역으로 되짚으면 근원에 도달한다는 것이 환원주의다. 문제는 비가역성이다. 소수는 되짚을 수 없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 전체와 부분의 합과 사이를 메우는 것은 추적되지 않는다. 환원주의가 아주 틀린 것은 아니고 해석이 틀렸다. 세상은 단순한 것의 집합이 아니라 완전한 것의 복제다. 전개하는 방향이 다르다.
단순한 것의 집합은 관측자 시점이고 객체 자체의 질서로 보면 세상은 완전성의 복제다. 작은 씨앗이 큰 나무로 자랐다면 단순한 것이 복잡해졌다. 천만에. 이는 피상적 관찰이고 큰 태양이 작은 나무를 키웠다. 완전한 세포가 복제되었다. 작은 것이 커진게 아니라 큰 것이 잘아졌다. 우리가 아는 환원주의는 관측자의 개입에 의한 오염이고 자연의 진리인 객체에 내재한 질서와 에너지의 방향이 반대다.
환원주의 반대는 전체주의holism다. 전체주의 사상과 헷갈리므로 전체론이라 하자. 전체론은 구조론의 완전성과 가깝다.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작다. 큰 것을 분해하면 요소들 사이의 관계를 잃게 된다. 문제는 어디가 전체냐다. 쪼갤 수 없는 한계가 아니라 절대 쪼개면 안되는 한계가 있다. 그것이 구조다. 구조를 쪼개면 관계가 사라진다. 쪼개진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작아지지 않는 한계가 구조다.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작은 이유는 구조의 공유 때문이다. 분해하면 공유가 깨져서 작아진다. 1이 2의 역할을 하는 부분이 있다. 그 부분을 쪼개서 0.5로 만들면 망한다. 솔로몬의 재판과 같다. 아기를 둘로 잘라서 나눠가지면 생명을 잃게 된다. 생명은 세포들이 공유한다. 구조는 공유의 구조다. 공유를 훼손하면 안 된다. 건물은 많은 서까래가 대들보 하나를 공유한다. 공유를 잃으면 건물이 무너진다.
구조론은 환원주의와 전체론을 통합한다. 틀린 환원주의를 바로잡는다. 플러스 방향의 해석은 틀렸다. 마이너스 방향의 환원주의가 옳다. 마이너스는 세상이 처음부터 일정한 정도로 복잡했다는 뜻이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소한의 복잡성을 처음부터 갖추고 출발하는 것이 완전성이다. 선은 잘라도 선이고 면은 잘라도 면이다. 복잡성을 유지하면서 세포분열처럼 무한히 복제된 것이 세상이다.
세상이 복잡하지만 근원은 간단하다. 그러나 알파벳은 적어도 스물여섯 자는 된다.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관계 때문이다. 소리를 만드는 구조가 있다. 자음과 모음이 볼트와 너트처럼 서로를 공유하므로 더 이상 쪼개면 안 된다. 만약 모음이 없다면 성대를 사용하지 않는 무성음이 되어 큰 소리를 낼 수 없다. 존재는 공유하므로 기능을 획득한다. 구조를 쪼개면 기능이 훼손된다.
존재의 본질은 첫째 변화, 둘째 공유다. 존재는 원래 움직인다. 움직이면 충돌하고, 충돌하면 꼬이고, 꼬이면 공유한다. 거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서로를 공유할 정도로 자원이 충분해야 압력이 발생한다.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외부 작용에 반작용할 정도의 압력이 있다는 의미다. 압력은 공유되므로 균일하다. 닫힌계 내부의 균일성이 밸런스다. 우리가 존재를 감지하는 것은 밸런스다.
여기에 하나의 존재가 있다고 하면 하나의 밸런스가 있는 것이다. 밸런스는 외부의 작용을 삼켰다가 뱉어낸다. 반작용이 존재의 기본 단위다. 작용했는데 아무런 반작용이 없다면 그것은 무다. 반작용이 가능한 구조가 존재의 최소단위가 된다. 원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쪼개면 반작용을 못하는 밸런스의 최소단위, 외부의 작용에 대한 반작용의 최소단위로 정의되어야 한다.
부분의 합과 전체 사이에는 관계와, 공유와, 밸런스가 있다. 그것이 구조다. 구조를 쪼개면 공유를 잃고, 밸런스를 잃고, 관계를 잃는다.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이유는 재결합이 안되어 자발적으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환원주의가 틀렸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러나 구조를 건드리지 않는 한도 안에서의 환원주의는 옳다. 구조만 건드리지 않으면 부분의 합은 전체와 같다.
열역학 1법칙 - 구조를 건드리지 않으면 환원된다.
열역학 2법칙 - 구조를 건드리면 환원되지 않는다.
세상의 비밀은 변화다. 변화는 환원된다. 환원은 공유의 고리를 따라간다. 공유는 관계다. 관계는 구조다. 구조는 밸런스다. 공유를 쪼개면 작용 반작용의 밸런스가 기능을 잃는다. 쪼갤 수 있지만 쪼개면 안 되는 것은 닫힌계, 밸런스, 가속도, 관성력, 마찰열이다. 닫힌계 내부에 압력이 걸려 있다. 변화는 외력의 작용으로 내부 압력이 불균일할 때 밸런스가 이동하여 균일해지는 밸런스의 복원이다.
자발성의 이해
존재는 물질과 성질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물질은 아는데 성질을 모른다. 물질은 원자의 집합으로 생각되었다. 0+0=0이다. 크기가 없는 원자를 집합시켜도 여전히 0이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원자에 크기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 성질이다. 물질은 어떻게 크기를 획득하는가? 밸런스로 크기를 획득한다.
우주 안의 모든 힘은 궁극적으로 척력이다. 서로 밀어내므로 크기가 만들어진다. 밀어내는 이유는 내부에서 움직이다 충돌하기 때문이다. 원자가 있다면 움직임을 내포한 것이어야 한다. 움직임이 관측기준과 나란하면 멈춤으로 보인다. 우주 안에 절대적인 멈춤은 없고 움직임의 결맞음에 의한 상대적 멈춤이 있을 뿐이다.
물질의 본질은 밸런스다. 두 움직임이 구조로 얽혔을 때 결맞음에 의해 멈춘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멈추지 않는다. 멈추면 외력의 작용에 반작용을 할수 없어 존재를 성립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란한 것은 밸런스다. 밸런스는 대칭에 의한 축의 공유다. 움직이는 둘이 서로의 일부를 공유하면 밸런스가 만들어진다.
우주는 움직이는 둘이 서로를 공유함으로써 비로소 탄생한다. 외부 작용에 반작용하여 자기 존재를 방어할 수 있다. 변화는 공유해제에 따른 밸런스의 붕괴절차다. 작용 반작용에 따라 밸런스가 찢어지고 다른 밸런스로 옮겨간다. 우리는 인과법칙을 알지만 원인이 밸런스의 붕괴이며 결과가 밸런스 복원인 것을 모른다.
작용 - 반작용
밸런스 붕괴 - 밸런스 복원
원인 - 결과
구조가 다섯인 이유는 작용에 맞서 반작용하는 절차 때문이다. 밸런스의 붕괴와 복원과정에 질량과, 가속도와, 관성력을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냥원인 다음에 결과가 오는게 아니고 내부에서 질량과, 가속도와, 관성력을 결정한 다음에 결과가 도출된다. 이 과정은 닫힌계 안에서 일어나므로 자발성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구조를 모르는 이유는 닫힌계 내부의 자발적 변화에 대해 말해준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막연히 선입견에 의해 모든 변화는 외부 작용에 의한 변화라고 단정하고 들어가는 실수를 저지른다. 뜨거운 물체와 차가운 물체를 나란히 두면 온도가 같아져 있다. 외부에서 작용하지 않아도 저절로 변화가 일어난다.
신세계가 있다. 자발적 변화의 세계라는 지금까지 과학에 의해 규명된 바 없는 거대한 신대륙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다. 과학자들은 강제적 변화만 다루었다. 갈릴레이가 관성력을 논했을 때 이미 자발적 변화 개념이 탄생했지만 눈치챈 사람이 없다. 열역학이 자발적 변화를 다루지만 열이라는 울타리를 가두어져 있다.
스프링을 눌렀다 떼면 복원되는 것이 자발적 변화다. 빛의 반사는 연구되어 있다. 거울 뒷면에 칠해진 알루미늄 속의 자유전자가 광자를 먹었다가 도로 뱉어내기 때문에 빛이 반사한다. 우주 안의 모든 자발적 변화에 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른다. 거울 뒷면에 알루미늄이 있듯이 존재 뒤에는 밸런스가 있다.
원인 - 빛이 입사했다. 결과-거울이 반사했다. 이 정도로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것은 과학자의 자세가 아니다. 거울 뒷면에 칠해진 금속에 박혀 있는 자유전자의 행동을 구체적으로 말해줘야 한다. 문제는 그러한 구체성의 부재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냥 작용-원인, 반작용-결과로 만족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더 깊이 들어가면 피곤하다. 회피한다. 구렁이가 담을 넘어 이웃집으로 가버려서 다행이야 하는 식이라면 과학자 자격이 없다. 작용에 의한 변화는 규칙이 없다. 우리가 아는 모든 법칙은 닫힌계 안에서 일어나는 자발적 변화다. 닫힌계를 걸면 에너지 보존에 의하여 무조건 법칙을 따라야 한다. 딱 걸리는 지점이 있는 것이다.
공간이든, 시간이든, 회전이든 닫힌계 안의 모든 변화는 보존이라는 전제를 충족시키므로 법칙을 따른다. 보존은 밸런스를 이탈한 에너지가 거리나 속도에 숨는 것이다. 무언가 줄었다면 반드시 압력이 증가해 있다. 수도꼭지를 빠져나온 물줄기가 가늘어진다. 물이 어디로 사라졌지? 물은 속도에 숨어 있다. 속도는 수압이다.
자연에는 예측가능한 변화와 예측불가능한 변화가 있다. 예측불가능한 변화는 예측가능한 변화로 바꿀 수 있다. 단 이때 차원을 끌어올려야 한다. 1차원에서 예측불가능한 변화는 2차원에서 예측이 가능하다. 2차원은 압력이 증가해 있다. 정확히 말하면 공유하는 정도가 높아져 있다. 무언가 사라졌다면 공유가 증가했다.
자취생 두 사람이 침대 두 개에 화장실 두 개를 쓴다. 화장실과 침대가 하나씩 사라졌다면? 자취생 두 사람이 결혼해서 화장실 한개, 침대 한 개를 공유하게 된 것이다. 자연계의 모든 보존은 공유에 의해 일어난다. 우주 안의 모든 법칙은 공유에 의해 일어나며 공유의 형태는 다섯 개이다. 곧 질, 입자, 힘, 운동, 량이 그것이다.
차원을 계속 높이면 닫힌계가 된다. 닫힌계 내부에는 반드시 압력이 걸려 있다. 자원들이 충돌하여 압력이 걸려야 닫힌계다. 압력이 걸렸다는 것은 공유한다는 것이다. 공유하면 결맞음에 의해 균일해진다. 압력이 걸리지 않으면 에너지가 전달되지 않아 자발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작용에 반작용하지 못하고 통과한다.
1차원 선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전진과 후진 밖에 없으므로 예측이 가능하다. 만약 예측이 빗나갔다면? 2차원 면에서 일어난 변수를 추적해야 한다. 2차원에서 무엇이 건드렸다. 면에서 선을 휘어놓았다. 직선이 곡선으로 바뀌었으므로 결과가 달라졌다. 모든 예측가능하지 않은 변화는 반드시 예측가능하게 바꿀 수 있다.
질-4차원 계는 균일성
입자-3차원 체는 밸런스
힘-2차원 각은 가속도
운동-1차원 선은 관성력
량 - 0차원 점은 마찰열
변화는 순서대로 일어나므로 사건의 다음 단계가 예측가능하다. 균일성을 잃고 밸런스를 얻는다. 밸런스를 잃고 가속도를 얻는다. 가속도를 잃고 관성력을 얻는다. 관성력을 잃고 마찰열을 얻는다. 우리가 아는 원인과 결과는 외부 관측자의 시선이고 내부 자발성으로 보면 5회 다른 형태로 정렬하며 에너지 방향이 바뀐다.
구조가 5인 이유
구조가 5인 이유는 에너지가 통과하기 때문이다. 구조는 밸런스의 그릇에 에너지를 담아서 전달한다. 수압이 걸려야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온다. 수도관 내부에서 압력의 균일이 밸런스다. 수도꼭지를 열면 압력이 낮아져 밸런스의 변화가 일어난다. 그 전에 수압의 밸런스가 만들어져 있어야 한다.
5는 밸런스다. 밸런스가 5인 이유는 스스로 움직이는 자발적 변화이기 때문이다. 밸런스는 계와, 축과, 대칭과, 움직임과, 멈춤의 5로 구성되어 자발적 변화를 일으킨다. 자발적 변화는 법칙을 따르므로 추적할 수 있다. 우주 안의 모든 법칙은 닫힌계 안에서 자리바꿈 형태로 일어나는 자발적 변화다.
자발적 변화는 외부개입이 없이 닫힌계 내부의 모순에 의해 일어나는 변화다. 내부에는 밸런스가 있고 밸런스는 복원된다. 외부개입이 있어도 외부에서 들어간 만큼 내부에서 빠져나오면 자발적 변화다. 우주 안의 모든 법칙은 닫힌계 내부에서 밸런스를 복원하여 모순을 제거하는 자발적 변화다.
밸런스는 저울이다. 천칭저울이든 대저울이든 모든 저울은 다섯 개의 구성요소를 가진다. 밸런스는 지렛대다. 저울과 지렛대는 구조가 같다. 지렛대는 막대와 물체 사이에 힘점, 받침점, 작용점이 있어서 합쳐서 다섯이 된다. 막대는 에너지 입력, 물체는 출력이다. 그 사이에서 세번 방향이 꺾어진다.
1회의 의사결정은 5회 에너지의 방향을 바꾼다. 컵을 살펴보면 역시 구조가 다섯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담는 그릇이 있고 담기는 물이 있다. 물이 없어도 물을 담을 수 있는 형태가 있다. 컵은 사람이 쥘 수 있고 따를 수 있는 형태다. 컵에 물을 따르든, 저울에 물체를 계량하든, 지렛대를 쓰든 같다.
에너지의 의사결정 구조가 5인 이유는 계 내부 압력 때문이다. 돈을 빌려도 은행, 계좌, 신용, 담보, 이자가 필요하다. 컵이 물을 전달하든, 지렛대가 힘을 전달하든, 저울이 무게를 계량하든, 은행이 신용을 전달하든 위상이 같다. 신용이 계 내부 압력이다. 수압과 같고, 질량과 같고, 지렛대의 힘과 같다.
영화나 드라마는 돈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돈 있는 사람의 배부른 소리다. 돈은 신용이다. 신용이 없으면 살 수 없다. 신용은 압력이다. 압력이 없으면 살 수 없다. 압력은 의리다. 의리가 없으면 동료와 함께 할 수 없다. 압력은 사랑이다. 사랑이 없으면 가족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갈 수가 없다.
가족은 사랑이 압박하고, 동료는 의리가 압박하고, 물은 수압이 압박하고, 은행은 신용이 압박하고, 물체는 질량이 압박하고, 지렛대는 작용이 압력을 이룬다. 언제나 어디에나 압박이 있다. 압력은 유체다. 유체는 그릇에 가두어야 하며 그릇의 형태는 축과 대칭을 갖춘 밸런스 구조이므로 다섯이다.
어떤 하나가 있다면 실제로는 다섯 개가 있다. 어떤 하나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냥 있는게 아니라 자리에 올라타고 있다. 끌어내리려면 그 자리를 때려부숴야 한다. 나뭇가지에 올라앉은 참새를 해결하려면 나무를 잘라야 한다. 의외로 일은 간단치 않다. 항상 배후에 숨은 하나가 더 있다.
보이는 것과 배후의 것을 통일하는 제 3의 것이 또 있다. 보이는 하나와, 배후의 하나와, 이를 통일하는 제 3의 하나 사이에 또 하나씩 더 있어서 합치면 다섯이 된다. 거기에 또 뭔가 더 있는게 아니냐고 따질 수 있지만 거기서 멈춘다. 왜냐하면 에너지가 연결된 상태에서의 변화는 단절이기 때문이다.
하나가 더 있다는 말은 관측자 사정이고 객체 자체의 내부 질서로 보면 하나씩 잃는다. 변화는 원래의 완전한 상태가 깨지는 과정이다. 깨지면 단절되고 단절되면 멈추므로 여섯이 되는 일은 없다. 문제는 관측자인 인간의 위치다. 인간은 외부에서 관측하므로 내부에 잠복한 5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무언가 존재하여 있다는 것은 내부에 밸런스가 있다는 것이고 밸런스의 변화는 깨질 뿐이므로 6이 되지 않는다. 5는 갖추어진 것이며 4, 3, 2, 1은 파괴되는 과정이다. 공유를 잃는 과정이다. 5는 균일한데 4는 불균일하다. 질은 균일한데 입자는 불균일하다. 변화의 시작점에서 균일을 잃은 것이다.
3은 변화가 시작되면서 출발점인 코어를 잃는다. 2는 가속도를 얻었으므로 지렛대의 받침점을 잃었다. 1은 관성력을 얻었으므로 작용점을 잃는다. 숫자는 존재가 주변과 연결되는 촉수의 수다. 5는 자신을 제외하고 주변의 4와 연결된다. 3과, 2를 거쳐 1에 이르면 주변과 단절되고 자신만 남게 된다.
5는 균일성을 얻어서 완전하므로 구조를 복제한다. 4는 균일성을 잃고 균형점이 되는 코어를 얻어 출발점을 이루고, 3은 코어를 잃는 대신 가속도를 얻고, 2는 가속도를 잃는 대신 관성력을 얻고, 1은 관성력을 잃어 고립되므로 더 이상 변화를 일으킬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사건은 완전히 종결된다.
5에서 4, 3, 2를 거쳐 1로 갈수록 하나씩 잃고 하나씩 얻지만 최종적으로는 모두 잃는다. 최종적으로는 엔트로피 증가에 의해 부서져 있다. 그것을 모아서 다른 사건을 일으킬 수 있지만 그것은 별도의 에너지 투입이 필요한 다른 사건이므로 논외다. 자발적 사건은 0차원에서 완전히 종결되는 것이다.
눌린 용수철이 원위치 되는 것은 닫힌계 안에서 일어나는 자발적 변화다. 들어온 에너지는 빠져나가므로 질량보존의 법칙을 어기지 않는다. 자발적 변화는 법칙을 따른다. 자발적 변화는 뇌터의 정리에 따라 공간, 시간, 회전에 대해 대칭성이 있다. 모든 보존법칙과 등가원리에는 밸런스 구조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