것이기 때문이니라.’” |
해석하여 보자. 등정각을 이룬 것도 아니라 함은, 법신이 마침내 깨끗하기 때문이요, 상견(常見)을 여의기 때문이요, 첫째가는 이치[第一義諦]에 들었기 때문이요, 중생으로서 보고 듣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등정각을 이루지 않은 것도 아니라 함은, 화신은 언제나 시현하기 때문이요, 단견(斷見)을 여의기 때문이요, 세속의 이치[世俗諦]에 결합하기 때문이요, 근기가 성숙된 유정의 마음을 따라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보(法報)는 비록 나누어졌기는 하나 진(眞)ㆍ화(化)는 한 끝이다. |
또 법신은 두루 미치는데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모양을 따라 저마다 따로따로 두루하다. 법신이 온갖 크고 작은 모양 안에 두루 있으면서 모양을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원융하여 한데 거두어져 두루하다. 법신은 모양이 없으면서 온갖 모양 있는 것을 원만히 조화시켜 한데 거두어 한 체성에 귀착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
색신이 곧 체성의 작용으로서 두루하여 지신(智身)으로 닦아 이루어짐은, 마치 체성의 두루함과 같아서 끌어들이면 10신(身)이 그림자를 펴고 흩어놓으면 10찰(刹)의 안에 나누어지며, 한 체성이 빛을 나누되 한 티끌의 안조차 움직이지 아니한다. |
색신은 마치 해의 그림자와 같아서 세간을 따라 나타나며, 법신은 마치 햇빛과 같아서 법계를 위에서 비친다. |
또 부처님 몸의 모든 감관의 낱낱의 몸매는 모두가 법계에 두루하나니 모든 감관의 체성이 같기 때문이며, 가령 눈이 문(門)이 되는 경우, 모든 감관의 몸매와 부처의 국토가 모두 이 한 눈 속에 나타나지 아니함이 없다. |
경에서 이르기를 “중생의 몸 속에는 여래의 눈과 여래의 귀 등이 있다”고 한 것과 같다. 부처의 법신은 같은 중생의 성품으로서 구별된 체성이 없기 때문이며, 모두가 성품 없음[無性]으로부터 일어나고 일어나되 진실을 어기지 아니하며, 법계로 인하여서 생기고 생기되 현상에 장애되지 아니한다. |
그런 까닭에 모든 부처님께서는 온갖 세계에서 모두 보리의 처소를 얻으시며, 진신(眞身)으로는 성품에 일치하게 두루 미치고 응신(應身)으로는 근기 따라 널리 나타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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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까닭에 천친(天親)이 이르기를 “자세함과 간략함이 상입한다[廣略相入] 함은 모든 부처님에게는 두 가지의 몸이 있으니, 첫째는 법성 법신(法性法身)이요, 둘째는 방편 법신(方便法身)이다. 법성의 법신으로 말미암아 방편의 법신을 내고, 방편의 법신으로 말미암아 법성의 법신이 드러난다. 이 두 가지 법신은 다르면서도 나누어질 수 없고 하나이면서도 같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자세함과 간략함이 상입한다”고 했다. |
법신은 모양이 없기 때문에 모양이 되지 않음이 없다. 이 때문에 상호가 장엄되니 바로 이것이 법신이다. 법신은 앎이 없기 때문에 알지 못함이 없다. 이 때문에 일체종지(一切種智)가 바로 진실한 지혜이다. |
그러므로 『화엄론』에서 이르기를 “법신과 상호는 한 끝이요 차별이 없다”고 했으며, 효공(曉公)의 『기신론소(起信論疏)』 서문에서 이르기를 “대승(大乘)의 근본됨은 조용하여 고요히 사라지고 맑으면서 깊고 오묘하다. 깊으면서도 또 깊으나 어찌 만상(萬象)의 밖에 벗어나겠으며, 고요하면서도 또 고요하나 오히려 백가(百家)의 담론에 있다. 만상의 바깥이 아니로되 다섯 가지 눈으로는 그 형용을 볼 수 없고, 말 속에 있지만 네 가지 말로 그 모양을 말로 할 수도 없다”고 했다. 이것은 참 체성과 온갖 법은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음을 밝힌 것이다. |
『화엄경소(華嚴經疏)』의 서문에서는 “참 체성은 만 가지 변화의 영역에서 명합되고, 덕의 모양은 겹치고 겹친 오묘한 문에서 드러난다”고 했다. |
『기석(記釋)』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이것은 걸림 없는 것으로서 곧 모든 법과 동일하거나 다른 것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조공(肇公)이 이르기를 ‘도(道)가 어찌 멀겠느냐. 일에 부딪치면서도 참되다’ 함은, 역시 체성이 곧 만 가지 변화이니, 그러므로 참 체성은 만 가지 변화의 영역에서 명합된다는 것이다. |
덕의 모양은 겹치고 겹쳐서 오묘한 문에서 드러난다고 함은, 모양은 체성에 장애되지 아니함을 밝힌 것이다. 겹치고 겹쳐서 오묘한[重玄] 바로 이것이 본체의 체성[理性]이니, 덕 모양은 체성 위에 있을 뿐임을 밝힌 것이다. 만약 체성을 여의고 모양이 있다면 모양은 현묘(玄妙)한 것이 아니며, 훌륭한 덕[勝德]의 모양을 덕 모양이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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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치고 겹쳐서 오묘하다 함은, 노자(老子)의 말에서 빌렸다. 노자가 이르기를 ‘오묘[玄]하고 또 오묘한 것이 뭇 묘함의 문이다’라고 했으니, 그는 이름이 있거나 이름이 없는 것을 다 같이 오묘하다고 말한 것이다. |
하상공(河上公)이 이르기를 ‘오묘한 것은 하늘이니, 하늘 안에 다시 하늘이 있다’고 했다. |
장자(莊子)가 이르기를 ‘하늘이 곧 자연(自然)이니, 자연 또한 자연이다’라고 했다. 이것에 의하여 만물을 내기 때문에 묘함의 문>이라 한다고 했다’고 했다.” |
이제 종경(宗鏡)의 안 또한 그와 같아서 법마다 거두지 아니함이 없다. 덕마다 갖추지 아니함이 없으니, 마음의 지극히 미묘함은 그윽하고 오묘하다고 할 만하다. |
『청량기(淸凉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화엄경 ‘게송의 부처는 법으로 몸을 삼나니/청정하기 마치 허공과 같다’고 한 것을 인용하여 물었다. |
‘부처의 몸은 이미 허공임을 알았거늘 무엇 때문에 금색 등을 나타냈는가. 어떻게 사람들로 하여금 허공임을 알게 할 것인가.’ |
대답하였다. |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체성이 비록 모양은 없으나 물건으로 되어 모양을 나타냄은 물건이 보기에 편의하기 때문이니, 다른 이의 뜻을 따를 뿐이다. 둘째는 만약 모양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어떻게 사람들로 하여금 모양 없음을 알게 하겠는가. 마치 말을 의지하지 않으면, 어찌 말 없음의 도리를 드러내겠는가. 셋째는 허공과 같다는 말은 그것이 청정하여 모양이 없음을 취한 것이요, 모양을 여의고서 구하는 것이 아니다.모양이 곧 모양 없음이니, 허공과는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처는 매우 깊은 참 법성에 머무르되/적멸(寂滅)하고 모양 없어 허공과 같으며/그러나 첫째가는 진실 이치 가운데서/갖가지 행할 바의 일을 나투어 보인다>고 했으니 이 하나의 게송이야말로 통틀어 앞의 세 가지 뜻을 거두어들인다.’” |
『조론(肇論)』에서 이르기를 “작용[用]은 곧 고요하고 고요함이 바로 작용이다”라고 하였다. 작용과 고요함의 체성은 동일하여 같은 데서 나왔으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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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다른 것이며, 다시 작용 없는 고요함이 작용에서 주(主)로 함은 없다. 고요함과 작용은 원래 이는 동일한 체성으로서 똑같이 본체[理]에서 나왔으면서 이름에 다름이 있는 것이요, 작용을 여읜 그 밖에 따로 한결같이 고요한 작용의 주장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반야의 체성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공허(空虛)함이 비침을 잃지 않고 비침이 공허를 잃지 아니한다”고 했다. |
그러므로 이르기를 “등각(等覺)에서 움직이지 않고 모든 법을 세움은, 마치 거울이 형상을 비추면서 공허가 비침을 잃지 않은 것 같고 마치 해가 허공에 노닐면서 비침이 공허를 잃지 않는 것과 같다”고 했다. |
또 등각에서 움직이지 않고 모든 법을 세우면 고요하면서도 언제나 작용하는 것이요, 인연으로 나는 것을 무너뜨리지 않고 진실한 모양을 관찰하면 작용하면서도 언제나 고요하다. 이야말로 천 가지 차별과 만 가지 작용이 구별된 형상이면서 이름이 다른 것이나 다 똑같이 하나의 참 마음의 체성에서 나온다. |
그런 까닭에 또 이르기를 “경에서 일컫는 성인은 함[爲]이 없으면서도 하지 않는 바가 없다”고 했다. |
함이 없기 때문에 비록 움직이기는 하나 고요하고, 하지 않는 바가 없기 때문에 비록 고요하기는 하나 움직인다. 비록 고요하기는 하나 움직이기 때문에 만물을 하나로 할 수가 없고, 비록 움직이기는 하나 고요하기 때문에 만물을 둘로 할 수가 없다. 만물이 둘일 수가 없기 때문에 더욱더 움직이고 한층 더 고요하며, 만물이 하나일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더 고요하고 한층 더 움직인다. |
법의 성품은 이와 같아서 움직임과 고요함을 측량하기 어렵거늘, 어찌 그 고요함을 하나로 하고 그 움직임을 둘로 하겠는가. 그러므로 이름으로 붙일 수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다. |
또 이르기를 “그런 까닭에 성인은 현묘한 기틀[玄機]을 아직 나타나지 않은 데[未兆]서 거두고 그윽한 운[冥通]을 이미 변화한 데[旣化]서 감추며 육합[六合]을 한데 묶어 마음을 비추고 과거ㆍ미래를 하나로 하여 체성을 이룬다. 예와 이제는 처음과 마지막에 통하고, 근본을 다하면 끝에 이르름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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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다. 함께하는 둘이 없으며 넓고 크고 고른지라 이에 열반이라 한다. 그런 까닭에 성인은 현묘한 기틀을 미래 세상의 사실이 아직 나타나기 전에 미리 살피고, 과거에 이미 변화한 인연을 그윽이 살피나니, 마음 거울은 만 가지 일을 능히 비춘다. 시방과 3세를 남김없이 현재와 과거 미래며 처음ㆍ마지막ㆍ근본ㆍ끝이 한 마음의 둘이 아닌 체성과 동일하지 아니함이 없다”고 했다. |
그러므로 『입불경계경(入佛境界經)』에서 이르기를 “여래는 본제(本際)와 중제(中際)와 후제(後際)를 사실대로 아나니, 마치 저 법의 본제는 나지 않았고 미래제(未來際)는 오지 않았으며 현재제(現在際)는 머무르지 않음과 같은 것이며, 저 법의 발자취를 사실대로 안다. 마치 하나의 법에서처럼 온갖 법도 그와 같으며, 마치 온갖 법에서와 같이 하나의 법 또한 그러하다. 문수사리여, 하나와 여럿이란 얻어질 수 없다”고 했다. |
그러므로 알라. 중생과 부처는 장엄(莊嚴)이 동일하며 인자한 마음이 동일하며 가없이 여김의 체성이 동일하다. |
『제법무행경(諸法無行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
‘일체 중생으로서 모두 대비(大悲)를 성취함을 움직이지 않음의 모양[不動相]이라 하오리다.’ |
‘문수사리여, 어찌하여 이 일을 움직이지 않음의 모양이라 하느냐?’ |
‘세존이시여, 일체 중생은 일으킴도 없고 짓는 모양도 없어서 모두가 여래의 평등한 법 안에 들며 대비의 성품에서 벗어나지 않음은 고뇌와 대비에 분별이 없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일체 중생으로서 모두 대비를 성취하면 움직이지 않음의 모양이라 하나이다.’” |
그러므로 알라. 만법은 움직이지 않거늘 대비와 고뇌가 어찌 구분되며, 하나의 진리는 옮아감이 없거늘 더러움과 깨끗함을 누가 분별하겠는가. 그렇기는 하나 장엄이 나타남은 모두가 마치 해인(海印)과 같다. |
고덕(古德)이 이르기를 “향수의 바다는 맑고 깊고 잔잔하여 움직이지 않는데 4천하(天下) 안의 색신 형상의 그림자가 모두 그 안에 있음은, 마치 도장이 물건에 찍힌 것과 같으며, 또한 고요한 물결이 한없이 넓고 맑은 하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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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구름이 없으며 벌여 있는 별과 달이 반짝거리면서 가지런히 나타나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
온 것도 없고 간 것도 없으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아니하여, 여래의 지혜 바다에는 의식의 물결이 생기지 아니하고 잔잔하고도 청정하여 지극히 밝고 지극히 고요하며, 생각하는 마음이 없어도 온갖 중생들이 생각하는 근욕(根欲)이 단박에 나타나며, 마음으로 생각하는 근욕이 나란히 지혜 가운데에 있음은 마치 바다가 형상을 머금는 것과 같다. |
그러므로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바다가 중생 몸을 널리 나타내는/이것을 말하여 큰 바다라 하듯/보리는 모든 심행(心行)을 두루 찍나니/이 때문에 정각(正覺)을 한량없다 하네”라고 했다. |
지혜가 만물과 마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지혜에 의하여 만 가지 형상이 단박에 나타나고 널리 모든 종류에게도 응한다. |
「현수품(賢首品)」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혹은 어린 사내아이와 계집아이거나/하늘과 용과 그리고 아수라며/마후라가 형상까지 나타내기도 하여/그의 좋아한 바대로 모두 다 보게 한다. |
중생들의 형상은 저마다 같지 않고/행한 업과 음성 또한 한량없으되/이런 온갖 모두를 능히 나타냄은/해인삼매(海印三昧)의 거룩한 신력일세”라고 했다. |
이 해인삼매의 힘으로 온갖 것을 단박에 나타내지만 중생들이 모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방편의 힘으로 모든 가르침의 자취를 드리운다. |
그러므로 옛 사람이 이르기를 “부처님께서 나오셔서, 중생들이 진실에 미혹되었기 때문에 법을 말씀하여 진실을 보이셨다”고 했다. |
진제(眞際)를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법을 세우면 성품은 파괴될 수 없고, 거짓 이름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실상(實相)을 말하면 모양은 파괴될 수 없다. 이것은 곧 하늘 악마와 외도들도 모두가 법인(法印)이기 때문에 파괴할 수 없다. 또한 5역(逆)과 4마(魔)조차도 오히려 법계의 인(印)이거늘, 하물며 샘이 없는 깨끗한 지혜요 하나의 참된 상호인데 실상의 묘한 뜻을 장애할 수 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