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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7년 당시 쇼군인 #도쿠가와-요시노부 (맨 위에 혼자 앉아있는 사람)가 무사들 앞에서 천황에게 통치권을 반환하겠다고 발표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에요.
위키피디아
당시 전국에는 270여 개 정도의 번이 있었는데요. 그중에서도 서남 지역에 있던 #사쓰마번, #조슈번 은 세력이 큰 번이었어요. 그렇지만 이들은 1600년 전국의 다이묘들이 두 세력으로 나뉘어 벌인 ' #세키가하라전투 ' 때 #히데요시가 (家) 편을 들면서 도쿠가와 막부를 세운 #도쿠가와-이에야스 (1543~ 1616)에게 처벌을 받았고, 이 때문에 도쿠가와 #막부시대 내내 중앙 정치에 깊숙이 참여할 수 없었죠. 이들은 개국 문제로 나라가 혼란스러워지고, 민중 봉기가 발생하며 막부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커지자 이를 자신들의 세력 확대 기회로 삼았습니다.
사실 조슈번은 #소금 · #종이 등 #특산물 을 많이 생산하고 있었고, #항구 #시모노세키 를 끼고 있어서 #교역 으로 얻는 #수입 이 컸어요. 그래서 개항을 하려던 막부 정부에 반대하기 위해 ' #존황양이 (천황을 높이고 #오랑캐 ( #서양 ) 를 배척한다)'라는 입장을 세웠지요.
반면 사쓰마번은 막부를 지지하는 것이 더 이익이 된다고 생각해 개국을 지지했어요. 사쓰마번은 막부가 조슈번을 정벌하러 갈 때에도 막부에 협력했어요.
◇메이지 신정부 시대 열어
#쇄국정책 을 주장하던 조슈번은 결국 영국 등 #서양 #연합함대공격 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서양 무기의 우수성을 눈으로 확인하고 이를 기회로 군비를 정비하는 등 개혁을 실시해 나갔지요. 사쓰마번도 #군비 #확충 을 꾀하는 개혁을 실시했어요.
막부도 프랑스의 도움으로 군사력을 강화하는 등 나름의 개혁을 추진했어요. 그러나 그 방향은 쇼군의 절대권을 강화하는 것이었지요.
결국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막부의 독단적인 정책에 반발하며 ' #막부타도 ' ' #왕정복고 ' 방침을 내세우고 손을 잡았습니다. 여기에는 도사번 출신이자 오늘날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인물'로 평가받는 #사카모토-료마 (1835~1867)가 중요한 중재자 역할을 했어요. 그의 도움으로 조슈번은 사쓰마번을 통해 외국에서 다량의 무기를 구입했고, 1866년 양 번은 #군사동맹 을 맺었습니다.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왕정복고 라는 구호를 내세웠지만 사실은 자신의 번 세력을 유지하고자 했어요. 전 도사번주였던 #야마우치-도요시게 는 갈등을 수습하기 위해 막부의 통치권을 천황에게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이 같은 의견서를 받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다이묘들이 막부에 적대적인 상황에서 이를 수용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1867년 천황에게 통치권을 돌려주는 대정봉환을 단행했습니다.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이듬해 초 #무력정변 을 일으켜 천황이 직접 왕정 복고를 발표하게 만들었어요.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사직하게 하고 막부를 폐지하며 천황 조정 내에 총재, 의정, 참여 3직을 설치하는 등의 내용이었지요. 이렇게 일본의 정치 체제는 ' #메이지 신(新)정부'로 넘어가게 되었고, 683년에 걸친 막부 정치(1185~1868)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후 메이지 #신정부 는 #서구근대국가 를 모델로 하는 대대적인 #제도개혁 에 나섰답니다.
출처: 프리미엄조선|[서민영]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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