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을 평가한다
조동일
이 영화는 잘 만들었다. 기발한 착상, 긴박한 전개, 극적인 전환을 잘 갖추어 관객을 사로잡으니 잘 만든 영화이다. 영화 기법의 역사에 남을 만하다. 잘 만든 영화는 곧 좋은 영화인 것은 아니다. 이것이 좋은 영화인가는 여러 모로 살펴보고 말해야 한다.
이 영화는 가족이 소중하다고 한다. 가족끼리는 서로 아끼고 사랑으로 일관하는 관계를 보여준다. 험한 세상을 편안하게 하고, 어두운 세태를 밝히는 따뜻한 불을 지폈다고 칭송할 만하다. 좋은 영화라고 할 수 있는 것 같다.
자기 가족이 소중하면 남의 가족도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이 마땅하다. 이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남의 가족에게 끼치는 피해를 자기 가족을 소중하게 보듬는 방법으로 삼는다. 가족 사랑이 지나쳐 우상숭배의 폐해를 빚어낸다. 사람의 도리에서 벗어나고, 사회 정의를 짓밟는다.
등장하는 가족을 보자. (갑) 대저택의 주인인 가족, 아내, 남편, 딸, 아들, 네 사람; (을) 반지하에서 어렵게 사는 가족, 남편, 아내, 아들, 딸, 네 사람; (병) 대저택의 가정부인 아내, 그 집 지하에서 숨어 지내는 남편, 두 사람이 있다. (갑)의 가족은 구성이 정상인지 소통에 문제가 있어 의심스럽게 한다. (을)의 가족은 구성도 소통도 나무랄 것이 없고, 생계가 막연한 문제에 대처하는 협동심이 비상하다. (병)은 파탄이 나서 궁지에 몰린 이산가족이며, 자식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없다. 이런 가족유형론을 갖춘 것만으로도 잘 만든 영화이고, 좋은 영화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이들 가족이 얽히고설키는 관련을 가지고 사건이 진행된다. (갑)에 약점이 있는 것을 간파하고, (을)이 간계를 부려 가족이 한 사람씩 그 집에 들어가 모두 기생충 노릇을 한다. (갑)의 가족들은 무엇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고 피해자가 된다. 이것은 변명의 여지가 있고, 통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을)이 승세를 확대하느라고 부당한 방법을 서슴지 않고 써서, 가련한 처지의 (병)을 파멸로 몰아간 것은 용납할 수 없는 과오이다. 그 때문에 역전이 일어나 (을)이 타격을 입은 것이 당연하다.
세 가족의 운명이 긴박하게 바뀌는 통시론적 전개에 몰두해 가족유형론을 제시한 공시론의 의의를 더 살리지 못한 것이 아쉽다. 영화를 잘 만드는 기술자의 능력을 활극으로 보여주면서 자랑하느라고, 좋은 영화를 만드는 예술가이기를 포기했다고 할 수도 있다. 세 가족 이야기만 하지 말고, 반지하의 거처마저 없어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노숙자들을 등장시켜 맨 아래의 (정)으로 삼았으면 작품이 자못 달라졌을 것이다. 가족에서 사회로 주제를 확대하는 창구를 마련할 수 있었으리라.
통시론과 공시론이라는 말은 설명이 필요하다. 선행 사건과 후행 사건은 통시론의 관계를 가진다고 한다. 선후를 가리지 않고 일관되게 존재하는 대립은 공시론의 관계를 가진다고 한다. 통시론의 관계는 긴장을 조성하고, 공시론의 관계는 사고를 촉발하는 것이 예사이다. 야단스러운 활극이 벌어져 영화를 정신없이 보고 끝난 뒤에 다시 생각하니, 무언가 찜찜하고 기분이 좋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공시적 관계에서 깨우쳐주는 생각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관점을 바꾸어 다시 고찰해보자. 이 영화는 차등의 관계를 대등으로 바꾸는 것처럼 하고서 더욱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차등의 관계가 둘이다. 재산의 차등이 있고, 지혜의 차등도 있다. 재산의 차등에서 하위인 쪽이 지혜의 차등에서는 상위여서 차등을 대등으로 뒤집는다. 이런 전환이 더욱 악화된 결과를 낳아 좋은 영화라고 하기는 어렵다.
재산의 차등을 지혜의 차등으로 뒤집는 방향이 빗나가 대등이 더욱 간악한 차등이게 한다. 대등을 욕되게 한 것을 나무라지 않을 수 없다. 재산의 차등은 모습이 급격하게 달라지지 않고 횡포를 예상할 수 있다. 지혜는 간계로 변질되어 전연 예상하지 못하고 감지할 수도 없는 끔찍한 피해를 끼치는 것을 보여주면서 즐거운 구경거리로 삼도록 한다.
블랙 코미디라는 이유로, 반어라는 변명으로 잘못을 합리화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차등을 뒤집는 대등이 새로운 횡포이게, 더욱 간악한 차등이게 하는 것은 악성의 허무주의이다. 대등의 명예를 훼손하고 가치를 부정하는 반역을 자행해, 차등이 오히려 정당하다고 하게 만는 것을 용서하지 못한다.
이 영화는 “돈이 많으면 비정상이다”고 일깨워주는 상품을 팔아 돈을 번다. 돈의 힘을 최대한 발휘해 영화를 제작하고, 영화관을 장악해 관객 수를 마음대로 늘이고, 대외적인 평가를 크게 얻어, 무력한 경쟁자들은 영화를 만들지 못하고, 만들어도 개봉할 수 없게 하는 사태를 조성한다. 이중삼중의 비정상이다.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상을 받는 자리에 제작자가 나와서, 감독의 신체 이곳저곳까지 하나하나 들어 칭송했다. 장수가 준마를 칭송하는 소리로 들렸다고 하면 말이 지나친가. 금의환향해 더욱 기고만장한 장수가 훈장이 빛나는 그 준마를 몰고 어디든지 호기롭게 내달으며, 재능만 믿고 영화를 만들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고 하는 포고령을 내리는 것 같다.
허무주의를 나무라는 이 글이 절망으로 끝날 수는 없고, 희망을 말해야 한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 (을) 가족의 아들, 시종일관 의식의 중심 노릇을 한 주인공이, (갑)의 가족이 떠나가고 없는 대저택을 사서 자기네가 소유하고 싶다는 말로 작품을 끝낸 것이 가장 아쉽다. 이것은 차등이 정당하다는 말이다. 자기 가족은 무엇을 차지하든 정당하다는 말이다. 이 둘이 겹쳐 가치의 전도가 끔찍한 수준에 이른다.
그 대저택을 사서 밖의 정원은 누구나 자기 것으로 여기는 공원으로, 안의 건물은 노숙자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거처로 삼고 싶다고 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악성 허무주의니 가치의 전도니 하고 나무란 모든 잘못이 일거에 시정된다. 아낌없이 박수를 칠 수 있는 참으로 좋은 영화가 된다.
이렇게 하려면 반지하의 거처도 없어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정) 수준의 노숙자들의 모습을 이따금 보였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작품의 한 대목을 자세하게 살펴보자. 반지하에서 빤히 내다보이는 곳에서 소변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반지하의 주거 환경이 열악함을 알리자고 한 것은 공연한 짓이다. 거기서 소변을 보는 사람들은 노숙자여서 이용이 허용된 화장실마저 없을 만큼 딱한 처지임을, 반지하에는 제 자리가 아닌 곳에라도 변기가 놓여 있는 것과의 대조를 통해 부각시켰어야 했다.
노숙자들을 이따금 등장시켜 가족에서 사회로 나아간 창구를 마련해 둔 것을 마지막 대목에서 활짝 열어야 했다. 문제의 대저택을 사서 밖의 정원은 공원으로, 안의 건물은 노숙자들의 거처로 삼고 싶다고 했더라면, 참으로 좋은 영화가 되었으리라는 말을 다시 한다. 감독은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감독을 수익용 준마로나 여기는 제작자가 반대해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아닌지 감히 의심해본다.
좋은 영화는 사치품이라 필요하지 않다고 하고, 영화를 잘 만들어 돈을 많이 벌 수 있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일제히 매진해야 한다는 것은 크나큰 사회악이다. 세상이 잘못된 것을 영화가 집약해 보여준다. 영화가 스스로 이에 맞서 싸우는 것은 너무 힘겨우니, 다른 쪽에서 의병을 일으켜야 한다. 작은 힘이나마 보태려고 이 글을 썼다.
영화 제작자를 공격하려고 하지 말고, 정부의 직무유기를 먼저 규탄해야 한다. 영화에서는 독과점 금지의 일반 원칙이 무시되는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 예술 창조가 다른 모든 창조를 선도하는 것을 알고 지원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요구 사항을 내걸고 뜻 있는 사람들이 함께 투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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