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서양 미술사 공부는 빈 분리파를 하겠습니다.
독일 표현주의에서 분리되었습니다마는, 클림트는 아르 누보 회화로도 유명합니다.
빈 분리파
서양사에서 항상 중심부를 벗어나지 않았던 오스트리아였지만 미술에서는 조금 벗어나 있었다. 19세기의 빈에서는 전통적인 미술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에 반기를 든 젊은 예술가들이 ‘새로운 비엔나’를 모토로 모였다.
1897년 초에 19명의 예술가들이 모여서 루돌프 폰 알트와 35세의 젊은 클림트의 지도하에 “오스트리아 분리파 협회”를 만들었다. 이들은 49명의 오스트리아 작가와 39명의 외국 작가들이 참여하는 분리파 첫 전시회를 열었다. 이들의 캐치프레이즈는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만의 고유한 예술이, 예술에는 예술만의 고유한 자유가 존재한다." 였다. 인상주의와 아르 누보의 영향을 받은 회화 운동으로서 출발한 분리파 화가들은 기존 아카데미즘이나 관 주도의 전시회로부터 자신들의 예술을 '분리'시키려 했다. 비난과 동조가 동시에 쏟아졌다. 그러나 6만여명의 관람객이 다녀가므로 첫 전시회는 성공을 거두었다.
1903년의 전시회에는 더 많은 진보주의 화가들이 참여하였다.
1905년에는 내부에 화풍을 두고, 자연주의 계통의 화가들은 다시 여기를 떠나갔다.
분리파의 리더는 <키스>, <환희의 송가> 등으로 유명한 아르누보 미술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로, 나체에 대한 묘사, 황금색을 아낌없이 사용한 그림을 그렸으며 당대부터 대단한 찬사와 격렬한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정작 본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지만... 클림트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였던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황금공로훈장을 받은 적이 있는 데, 새로 건축된 제국극장에 천장화를 그리는 일을 훌륭하게 해냈기 때문이었다. 공예학교 출신인 클림트의 작품은 매우 장식적이고 디자인적이었다. 이외에도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 등의 작가들이 있다. 분리파들은 생활 양식에 있어서도 좋게 말하면 '자유분방', 나쁘게 말하면 '방약무인'한 스타일을 고수했다. 이 때문에 훗날 나치 시대에 분리파 예술가들의 그림은 퇴폐미술로 낙인찍히게 된다.
미술사적으로는 피카소의 입체주의나 뒤샹의 다다이즘에 비해 큰 평가를 받지 못하는 편이다. 퇴폐미와 장식적인 요소 외에 이념이나 양식적으로 딱히 주목할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 빈의 세기말적 분위기를 잘 반영한 사조로는 인정받고 있고, 표현주의로 분류되는 화가들이나, 다리파, 뮌헨 신미술가협회의 화가들이 잠시 신 분리파에 참가하기도 했다. 분리파의 성과는 오히려 현대 건축과 공예의 영역에서 찾을 수 있다. 분리파는 영국의 미술과 공예 운동, 독일의 유겐트슈틸 등과 더불어 근대 공예와 건축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클림트를 중심으로 남은 18명의 화가들이 새로운 서클을 만들었다. 그러나 클림트를 제외한 다른 화가들은 새로운 미술 운동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또 새로운 그림을 그리지도 않았다.
이로서 클림트가 자연스레 “빈 분리파”의 대표 화가가 되었다.
첫댓글 오스트리아에서 크림트의 작품을 본 적이 있습니다. 금빛이 굉장히 화려했습니다. 여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