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쪽. 언제 나타났는지 까페 하는 언니의 애인이라는 남자가 합류했다. 그는 얼굴이 거무스레하고 덩치가 큰 삼십대 중반의 남자였는데, 혼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국적인 마스크였다. 그가 술자리에 끼자 여자들만 있던 때와는 다른 흥취가 끓어올랐다. 보드카 두병을 마신 뒤 혜련이 계산을 했고, 그들은 까페 문을 닫고 경안의 원룸으로 몰려갔다. 그 와중에 언니의 애인이라는 남자가 어디서 회까지 떠왔으므로 그들은 원룸에 남아 있던 소주병을 줄줄이 땄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까페 하는 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경안은 언제 쓰러졌는지도 모르고 쓰러졌다.
경안은 정오가 다 되어갈 즈음 일어났다. 남자는 가고 없었고, 그녀와 혜련과 선미, 이렇게 셋만 남아 있었다. 술을 섞어 마신 탓에 머리가 아팠다. 경안은 뜨거운 물에 커피가루만 넣고 타서 훌훌 마시며 담배를 피웠다. 담배 냄새 때문인지 혜련과 선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짙은 화장을 하고 잔 탓에 둘 다 팬더 같은 얼굴이었다. 혜련은 물을 마시고 다시 드러누웠고 선미는 주섬주점 주변을 치우기 시작했다.
“내버려둬.”
경안의 말에 선미도 손을 놓았다.
“커피가루밖에 없는데, 그거라도 타줄까?”
그 말에 혜련이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나 앉았다.
“그래, 일단 그거라도 마시고 우리 해장하러 나가자.”
경안이 커피 두잔을 끓여왔다. 그들 셋은 회와 초장과 쌈들이 흩어져 있는 어지러운 빨레뜨 같은 술상에 둘러앉아 커피를 마셨다.
“어제 어떻게 된 거니? 난 막판에 기억이 하나도 안 나.”
혜련이 말했다.
“나도 잘 기억이 안 나.”
경안이 말했다.
“나는 다 기억 나.”
선미가 야무지게 말했다.
“대단하다, 박선미!”
혜련이 감탄했다.
“근데 그 남자는 왜 여기까지 따라온 거니?”
선미가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기억이 생생한 선미가 더 잘 알 일이었다.
“그보다 그 언니는 언제 간 거야?”
경안이 물었다.
“그 언니는 처음부터 그냥 가겠다고 했어. 근데 그 남자만 우리를 따라온 거야.”
선미는 이렇게 말하고 입을 꼭 다물었다. 혜련은 머리가 아픈지 손을 들어 이마를 꾹꾹 눌렀다.
“커피 더 줄까?”
둘이 됐다고 해서 경안은 자기가 마실 것만 더 타왔다. 해갈을 하려면 다섯잔은 더 마셔야 할 것 같았다.
“이런 얘기 해도 되나?”
선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슨 얘기?”
“나 어제 그 언니한테 기막힌 얘기를 들었거든.”
“해봐.”
혜련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 남자, 엄청 지독한 성병에 걸렸대.”
“뭐?”
경안은 깜짝 놀랐다. 혜련도 눈을 크게 떴다. 눈화장이 번져 더 베티 블루처럼 보였다.
“처음엔 그 언니도 몰랐다나봐. 그러다 밑이 너무 이상해서 병원에 가봤더니 그 병이 옮았더래.”
“하, 참.”
“더 기막힌 건,”하면서 선미가 혜련을 보았다. 혜련은 아름답고 멍한 눈으로 선미를 보고 있었다.
“그게 너무 지독한 균이라서 그 언니가 결국 자궁까지 다 들어내 버렸다는 거야.”
“자궁까지?”
경안은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자궁이 다 녹아내릴 정도로 무서운 성병이었대.”
“아, 미친놈!”
경안은 그런 놈을 집에 들여놓은 게 화가 났다. 그놈이 집 안 구석구석에 그 몹쓸 병균을 점점이 떨어뜨려놓은 게 아닐까 싶어 불안했다.
“그런 얘길 왜 지금 해?”
“그럼 그 남자가 안 가고 계속 버티고 있는데 어떻게 해?”
“커피 마시고 변기부터 닦아야겠다.”
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그 언니라는 여자는 왜 아직도 그따위 놈을 만나고 있는 거야?”
“글쎄……”
경안은 선미가 뭔가 더 말해줄 줄 알았지만 그냥 그러고 그만이었다. 혜련은 말없이 커피잔을 돌리면서 커피잔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그렇게 가까운 것을 본다는 건 혜련이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들에게야 이 정도 일이 대수롭지 않은지 몰라도 경안은 점점 신경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그 남자가 마신 술잔 젓가락, 앉았던 자리, 누웠던 자리, 덮었던 이불까지를 생각하자 경안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욕실로 달려들어갔다. 고무장갑을 끼고 락스를 풀어 변기를 닦았다. 바닥도 락스를 풀어 닦고 샤워기의 뜨거운 물로 벽까지 씻어내렸다. 그 남자가 썼을지도 모르는 수건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경안이 땀을 흘리며 나왔을 때 거실에는 선미 혼자 앉아 있었다.
“혜련이는?”
“갔어.”
“어딜?”
“집에.”
경안은 어리둥절했다.
“혼자?”
“응. 너 변기 닦으러 가자마자 가겠다 일어나더라.”
“해장하자더니.”
“그럴 기분 아니래.”
“그래?”
그들은 잠시 동안 잠자코 앉아 있었다. 혜련이 왜 말도 없이 가벼렸는지, 선미는 또 왜 같이 가버리지 않았는지 경안은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고 세상이 지겨워졌다. 경안은 문득 이물감을 느끼고 귀에 걸려 있던 커다란 링 귀고리를 뺐다.
“오늘 새벽에,”하고 선미가 경안을 힐끔 보았다.
“새벽에 뭐?”
“무슨 소리 못 들었니?”
“무슨 소리?”
“아니야.”
“무슨 소리?”
선미는 말없이 앉아 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그만 가볼게.”
경안은 선미를 올려다보았다.
“덕분에 잘 놀았다, 경안아.”
선미는 가방을 메고 현관에서 회색 구두를 신었다. 경안이 일어나 현관 쪽으로 가자 선미가 문을 열려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혜련이가 너무 걱정돼, 경안아. 아직 애도 없는데.”
이렇게 낮게 속삭이듯 말하고 선미는 돌아서서 문을 열고 나갔다. 블라우스와 치마가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그것이 그나마 선미에 대한 경안의 참을 수 없는 경멸감을 다소 누그러뜨려주었다.
(나의 생각) 셋은 여고 동창이다. 경안은 공부를 잘했고, 혜련은 부잣집 딸이고 지독한 원시이고 얼굴이 예쁜 것에 비해 선미에게는 특별한 재능이나 특징이 보이지 않는다. 비 오던 날 선미와 혜련이 경안을 따돌리고 자기들만 춤을 추러갔었던 것이 경안의 기억 속에 떠오른다. 나중에 보니 선미의 의도가 많이 개입했었다. 나는 셋 중에 선미라는 인물이 안타깝다. 세상 어느 누구도 선미를 채워주지 못한다. 어렸을 때는 부모도 못했고 결혼해서는 남편도 채워주지 못했고 폼새를 보면 자식도 그럴 것이다. 자신에게 몰두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책임지지 못하는 인물 같다. 내가 단정 짓기 어려운 인물이다. 중간에 선미 같은 친구가 끼어 있으면 피곤하고 누군가 불행해질 것 같다. 2017년 7월 30일
첫댓글 덕분에 잘 읽었어요
저도 슬슬 도서관에 가서 빌려와야겠네요
더위에 잘 지내시죠?
시원한 계곡에 발 담그고 읽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