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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말씀:디모데후서 2:1-13
오늘부터 디모데후서 2장 말씀을 공부하겠습니다. 본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의 자세와 힘써야 할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디모데후서 2장 말씀을 공부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의 바른 자세와 힘써야 할 일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기를 권면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1-2절 말씀을 보면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먼저 디모데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은혜’(cavri", 카리스)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구원의 은총은 물론 하나님의 모든 은사까지도 내포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강하고’(ejndunamovw, 엔뒤나모오)라는 말은 ‘능력으로 충만해지다’라는 뜻으로 본절에서는 인간의 힘으로 강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채워 주시는 힘으로 강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는 말은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강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우리 모두를 위한 은혜가 충족하게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 속에서 강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 안에서 강하거나 혹은 우리가 이미 받은 은혜 안에서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게 되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6:10절 말씀에도 보면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하여지고”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디모데는 비록 믿음이 신실한 자였지만 우리가 디모데전서를 통해서 본 것처럼 그는 육체적으로 유약하였으며, 성품 또한 여렸습니다(딤전 5:23). 그러므로 바울은 이러한 디모데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를 힘입어 강건하며 담대해지라고 권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를 힘입게 될 때 강하고 담대해지며,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디모데가 많은 증인 앞에서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디모데가 많은 증인들 앞에서 들은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 본 바와 같이 바울에게서 전해 들은 복음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많은 증인이라고 했는데 그들이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가 이 복음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충성된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부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전적으로 교역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의 복음을 들었다면 복음의 증인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이 말씀을 이원화 시키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역자는 전적인 사역자이고, 자신은 일반 직업을 가졌으니 전적인 사역자인 교역자들과는 다르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목사는 전적으로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야 하지만 자신들은 적당하게 신앙생활을 해도 된다고 합리화를 하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의식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식은 잘못된 것입니다. 목사나 성도들이나 다 함께 복음을 받은 자라면 그 복음을 또 다른 충성된 자들에게 증거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떤 직업으로 사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구약에서의 부르심이란 특별한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부름을 받았고, 또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이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특별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우리는 사도들이라고 합니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계시의 전달자 역할을 하기 때문에 특별한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듯이 교역자나 성도나 간에 신분적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원리 중의 하나가 만인제사장설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다 이 세상에서 제사장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역자가 목회를 하고, 성도들이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 자아의 실현이거나, 부의 축적이거나, 세상의 성공이 목적이라면 부르심을 입은 자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목사는 목회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여야 하고, 성도는 자기 직업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은 전하는 저나 이 말씀의 권함을 받는 여러분이나 우리 모두가 동일하게 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이 복음의 말씀을 누구에게 부탁하라고 합니까? 2절을 다시 보면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네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복음을 충성된 자들에게 부탁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충성된 자’(pistov")는 신실한 자를 말합니다. 그런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신실하게 복음을 증거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복음에 충성되고 신실한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 우리가 복음에 충성된 자가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또 다른 충성된 자들에게 복음을 부탁 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말씀에서 신실한 자를 세 가지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군인입니다. 3-4절 말씀을 보면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바울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합니다.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매이지 아니합니다. 그 이유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주님의 군사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목적이 너무나 분명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목회의 현장에서, 성도들은 삶의 현장에서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 삶을 통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12:1절 말씀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라면 이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왜 일을 합니까? 무엇을 위하여 돈을 법니까? 과연 주님의 기쁨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자기 자신의 기쁨을 위한 것입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심각한 질문을 해 봐야 합니다.
둘째는, 경기하는 자입니다. 5절 말씀을 보면 “경기하는 자는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신실한 자를 경기하는 자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바울 사도가 자주 사용하는 비유입니다. 그 당시에도 올림픽과 같은 경기가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경기를 잘 해도 법대로 하지 않으면 탈락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경기하는 자는 법대로 해야 합니다. 법대로 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점수를 받고 일등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실격이 됩니다.
이처럼 운동선수가 경기를 법대로 해야 하는 것처럼 복음을 증거 하는 자도 복음의 방법대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방법은 언제나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볼 때 ‘어떻게 그래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이 나오겠는가’, ‘그렇게 목회하다가는 망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도 복음의 방법대로 하기 위해서 복음을 증거할 때에 세상적인 방법들을 간구하지 않습니다. 그로인해서 죽은 정통이라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 즉 십자가의 도의 선포를 통하여 믿는 자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법입니다.
셋째로, 농부입니다. 6절 말씀을 보면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바울 사도는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그런데 농부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신실하고 부지런하여야 합니까? 농사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때를 놓치면 농사를 망칩니다. 그러므로 농부는 신실하고 부지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농부를 보자면 가장 많이 노동을 하고 가장 적은 수입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적자가 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정말 농사꾼이라면 그저 농사짓는 일이 천직인줄 알고 신실하고 부지런히 농사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상의 세 가지 비유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충성됨과 신실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러한 자들에게 복음을 부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또다른 사람들에게 증거 할 수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같이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과연 이런 방법으로 되는 일이 있을까요? 신실하고 충성되게 자기를 부르신 자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우직한 군인처럼, 경기에 다른 사람들은 다 심판의 눈을 피해가며 반칙을 쓰는데 미련하게 경기규칙대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남는 것이 별로 없는 뻔한 농사를 위하여 부지런히 농사지을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오늘날은 복음을 신실하게 하나님의 방법대로 증거 하는 사람도 찾아보기 힘든 세상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신실하게 받아들이는 사람 역시 찾아보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이것이 말세의 현상입니다.
디모데후서 3:1-5절 말씀을 보면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자들에게서 돌아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충성되고 신실한 자로서 복음에 참예하는 자들은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농부가 신실하게 농사를 지으면 열매를 얻듯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받을 열매는 무엇이겠습니까? 일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했습니다(신 25:4). 이것은 일하는 자가 제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충성 되게 전하는 자는 자기가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열매를 얻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9:23-27절 말씀을 보면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했습니다. 군사로, 경기하는 자로, 농부의 자세로 신실하게 충성되게 복음의 증인이 되는 자는 그 열매로 복음에 참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의 관심사는 복음에 참예하게 되는 것, 이 것만이 가장 큰 열매로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쳐서 복종하게 하는 것도 자기가 전파한 후에 버림이 될까 두려함이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복음에 참예함이 복이요, 열매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의 방향과 목표가 무엇입니까? 복음에 참예함이 우리 인생의 방향과 목표가 되어 있습니까? 그 방향과 목표를 향하여 바르게 달음질 하고 있는 것입니까?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으로 기쁨을 삼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을 신실하고 충성되게 지켜나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된 신약 시대에도 우리 스스로의 신실함과 충성됨으로 결코 이루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약의 명령문은 성령이 임하지 않아서 지키지 못하였지만 신약의 명령문은 성령이 임하였기에 우리가 지켜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주체입니까? 성령이 주체입니까? 내가 주체라면 내가 열심히 하는데 성령이 내가 잘 안 되는 일을 도와주어서 일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면 결국 자기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주체가 되어서 일하시면 언제나 인간이 왜 안 되는가를 드러내시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성령이 임하게 되면 나는 아니요, 오직 주님의 은혜라는 고백이 겸손하여 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이기에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이나 신약이나 간에 주님의 명령은 주님께서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명령들을 우리가 스스로 지켜나가게 되면 인간이 얼마나 신실하지 못하고 충성되지 못한가를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신실하신 주님만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7절 말씀을 보면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생각하면 주님께서 총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복음입니다. 8절 말씀을 보면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나의 복음과 같이’라는 말은 디모데가 생각하여야 할 내용이 바울의 복음인 것입니다. 그 내용을 다시 증거 하는 것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곧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따라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총명을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약속을 누가 하시고 누가 이루어내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하나님께서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충성되라고 하면서 군인과 경기하는 자와 농부처럼 신실하고 충성되게 주님의 복음의 증인이 되는 일도 주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이기에 환난과 핍박을 두려워말고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비록 자신이 갇혀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9).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낙심치 아니하고 더욱 소망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참음은 주님의 택하신 자들이 함께 구원을 얻고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예하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10).
11-13절 말씀을 보면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찌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보면 ‘미쁘다. 이 말이여!’라고 합니다. 여기서 ‘미쁘다’는 말은 ‘미덥다’, ‘신실하다’라는 말입니다. 곧 이 복음의 내용이 미쁜 것입니다. 신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와 함께 죽으면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주를 부인하면 주님도 우리를 부인 할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주와 함께 죽을 자가 있습니까? 누가 오래 참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수시로 주를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주님의 요구를 알면서도 무시하고 마는 것입니다. 애써 외면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다들 그렇게 살아 하면서 자기를 합리화 시켜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전부 주님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소식 곧 기쁜 소식은 우리 주님은 일향 미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늘 한결같이 미덥고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그들의 신실함으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한결같은 신실하심으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주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의 믿음이 더욱 굳건하게 되고, 우리의 믿음이 굳건하게 될수록 걱정과 염려에서 감사와 찬양으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일향 미쁘신 주님을 믿는 믿음을 허락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택하신 자를 구원하시는 신실하신 주님의 은혜 위에 굳게 서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복음과 함께 고난 받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