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단편소설-김미희
바람의 제국
새벽이었다. 방 안은 어둡고, 커피포트가 끓는 소리만 들렸다. 김이 오르는 냄비 옆에서 나는 문득 삵을 떠올렸다. 형수가 그 이야기를 한 건 한 달 전쯤이었다.
집 뒤 대숲에 병아리와 오리를 백 마리 넘게 풀어두었다 했다.
“그늘도 있고, 벌레도 많고, 잘 크겠지.”
형수는 웃으며 말했다. 그 말속엔 한가로운 농촌의 시간이 느껴졌다. 하지만 어머니가 며칠 뒤에 말했다.
“얘야, 요즘 병아리 우는 소리가 안 들리더라.”
그때 형수는 대답 대신 웃음으로 넘겼다. 대숲의 일은, 늘 그랬듯 자연의 일이라 여겼을 것이다. 며칠 후, 형수가 대숲에 들어갔을 때, 닭 서너 마리가 대나무 꼭대기에 매달려 있었다. 날개가 퇴화한 몸으로 필사적으로 솟구친 흔적. 그것이 전부였다. 대숲 바닥에는 깃털과 피가 엉겨 붙어 있었고, 오리의 부리가 반쯤 묻힌 채 마른 흙에 처박혀 있었다.
“살쾡이 그놈이 다 잡아먹었대유.”
형수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백 마리가 넘는 걸 다 해쳤단다.”
그녀의 목소리엔 분노보다 허탈이 섞여 있었다. 나는
“형수님, 덫은 놓지 마세요. 삵은 천연기념물이에요.”
“허 참, 그놈이 사람도 아닌데 벌금 물어야 한단 말이가?”
형수는 씁쓸하게 웃었다.
“닭 잡아먹은 건 죄가 아니고, 삵 잡은 건 죄라니. 세상 참 요지경이다.”
계속 잠을 이루지 못했다. 창문 밖에서 바람이 대숲을 스쳤다. 서걱대는 소리가 삵의 숨소리처럼 들렸다. 어릴 적 밤마다 어머니가 내게 시켰던 일—닭장 문을 확인하라던 일—이 떠올랐다. 어둠 속에서 닭장 문을 닫고 돌아서면, 늘 대숲에서 눈부신 두 점의 불빛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삵이었다.
한 번은 진짜 닭을 훔치던 인간을 본 적이 있다. 그는 나를 보고는 내 입을 틀어막고 뒤통수를 가격하고 달아났다. 그의 숨소리, 땀과 피와 흙이 뒤섞인 냄새가 지금도 가끔 코끝에 스친다. 삵과 인간, 그 경계는 그때부터 내겐 모호했다.
그 후로 오래, 나는 도시에서 살았다. 신도시에 리산의 공장과 상가가 들어섰다. ‘리산 테크밸리’라는 간판이 세워졌다. 건물 외벽에는 큼지막한 로고가 박혀 있었다. 이산 회장의 이름이었다.
이산 회장은 내 인생의 한가운데 있었다. 시골 출신의 가난한 대학 시절, 목사였던 그는 사학재단의 이사장이었다. 그는 신앙을 빌미로 학생들에게 기회를 주었고, 나는 그의 신뢰를 받았다. 그가 그의 재단에서 비리로 쫓겨나면서도 내게 유학의 길을 터 주었다.
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8년 동안 이산 회장이 뭘 하는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LA에서 취직하려는 순간 그가, “ 정재연, 한국에 와서 함께 가자.”라고 사업의 청사진을 알려 주었을 때,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선배인 김대양 부장도 이미 중심이 되어 일하고 있었다.
그의 사업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목사보다는 사업가가 체질이었다. 그의 언어는 신앙의 설교에서 경영의 언어로 바뀌었다. 나는 그 변화를 늦게 알아차렸다.
그는 늘 말했다.
“세상은 전쟁터야. 살아남으려면 먼저 쏴야 해.”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구석이 서늘했다. 그가 말한 ‘전쟁터’가 어디인지,
그때는 미처 몰랐다.
*
이산 회장의 전화를 받은 것은 사무실에서 독대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지난번 독대에서 자금이 이상하게 움직이는 것을 검찰이 알고 있고, 나도 이런 방법은 사기며, 그만두겠다고 한 지 거의 일주일이 지나고 있었다.
“정 박사, 오늘 미팅은 다음에 합시다. 영종도 펀드는 접어요.”
목소리는 냉정했고, 말투는 낯설었다.
“이제 내게 보고할 필요 없습니다.”
말끝이 딱 끊겼다. 그가 내게 손을 떼겠다는 뜻이었다. 전화기 너머의 침묵은 묘하게 길었다.
오랜 세월 그와 함께 쌓아온 일들이 순간, 한 줄의 전신처럼 끊어졌다.
나는 천천히 커피를 내렸다. 주전자 속에서 끓어오르는 물이 작은 울음을 냈다. 머그잔에 커피를 붓는 순간, 손끝이 떨렸다. 누군가가 내 뒤에서 나직이 말했다.
“이산 회장님, 결국 박사님도 자르셨나요.”
비서 이수연이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이산 회장의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내가 온 뒤로 내게 붙여져 감시원 역할을 했다. 나를 제대로 감시 못 한 그녀도 권고사직을 당하는 중이었다.
“그래요.”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시게요?”
“글쎄요.”
나는 커피를 들었다. 쓴맛이 혀끝을 태웠다.
사무실 창문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오전 다섯 시, 도시의 불빛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바람 한 줄기가 스며들어 서류 더미를 뒤흔들었다. 내 자리 위에는 며칠 전 검색해 둔 삵의 사진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쥐를 문 삵. 눈빛은 투명했고, 잔인했다. 입가의 피가 마르며 털에 들러붙어 있었다. 사냥을 마친 짐승의 눈빛. 내가 알고 있는, 이 도시의 사람들과 닮아 있었다.
나는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책상 서랍을 열자, 회사의 공증 서류와 계약서, 그리고 이산 회장 명의의 계좌 복사본이 들어 있었다. 리산 재단의 비자금 내용이었다. 나는 한참을 바라보다가 종이 한 장을 찢었다. 손끝에 걸린 종이의 감촉이 묘하게 부드러웠다.
비서가 들어왔다. 밤새 그녀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 박사님, 그거…. 그대로 두세요. 다칩니다.”
“이젠 상관없어요.”
나는 웃었다.
“이 일의 끝이 어디인지 보고 싶어요.”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더 묻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의 비밀을 오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가자, 나는 다시 삵의 눈을 바라보았다. 삵은 산짐승이었다. 하지만 이제 도시의 골목에서도 살아간다. 천적이 사라진 땅에서, 삵은 무소불위의 왕이 된다. 그의 눈빛은 인간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잡히지 않는다. 누군가 그를 보호한다. 그것이 권력이다.
컴퓨터가 부팅되는 동안, 나는 커피를 다시 내렸다. 모니터 바탕화면은 여전히 삵의 눈이었다. 커서가 깜빡였다. 그 순간, 마음속에서 한 문장이 떠올랐다.
“삵은 절대로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 문장이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내 책상 위에 놓인 계약서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서명란엔 내 이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엔, 이산 회장의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그 순간, 삵의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쥐를 물고도, 배고픈 짐승의 눈이었다. 나는 그 눈빛에서 스승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나 자신도.
오전 열 시, 재단 본관 회의실.
길게 뻗은 유리 창문 너머로 회색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이산 회장이 들어섰다. 그는 오늘도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한쪽 눈썹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정 박사.”
그는 내 이름을 짧게 불렀다.
“이사회 보고서, 수정했습니까?”
“네. 투자처 명단만 정리했습니다.”
“다시 가져오세요. 거긴 빠져야 할 이름이 있습니다.”
그가 탁자 위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빠져야 할 이름’.
그 말속엔 이미 결론이 들어 있었다. 나는 조용히 서류를 밀어냈다. 그는 문장 몇 줄을 훑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이 회사는 당신의 경영에 달렸어요. 내가 있어야, 당신도 있습니다.”
그의 말은 늘 단순했다. 하지만 그 단순함 속엔 냉혹한 확신이 있었다. 그가 자리를 뜨자, 회의실엔 커피 냄새만 남았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었다. 내가 언제부터 이 사람의 그림자처럼 살아온 걸까.
리산 재단의 사무실은 늘 조용했다. 그러나 그 고요함엔 묘한 긴장이 깔려 있었다. 누가 누구를 감시하고, 누가 누구의 편인지 알 수 없는 곳이었다. 복도의 CCTV, 비서의 눈, 보고서의 문장 하나까지도 모두 누군가의 검열을 통과해야 했다.
나는 책상 위 파일을 하나씩 정리했다. ‘프로젝트 L-13’, ‘연구지원 2차’, ‘펀드 회계’. 모두 이산 회장의 이름 아래 있었다. 그 이름 아래에선 어떤 비리도 숨었다.
김대양 부장이 찾아왔다. 그는 나보다 먼저 리산에 입사했고, 나이도 많은데, 늘 말끝을 아꼈다.
“정 박사, 이사장이 리산 재단 자금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돌린다고?”
“예. 영종도 펀드가 가산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이름만 다르고, 돈은 같아요. 그걸 이산 회장이 직접 지시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도 쉽게 믿지 못했다. 하지만 김 부장은 서류를 내밀었다. 계좌 거래 내역서였다. 도장 찍힌 숫자들이 서류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이걸 어쩌자고 나한테 가져왔습니까.”
“이사장님께 직접 말할 수도 없잖아요.”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당신이라면, 알고도 가만있을 겁니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말이 나를 겨누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 나 자신이
더 비겁해 보였다. 이미 내게도 넘치고 넘치는 자료가 있었다. 김 부장은 내가 내 손으로 그걸 꺼내 놓기를 바랐다.
이산 회장에게서 문자가 왔다. 짧은 문장이었다.
“예전의 우리 사이엔 말이 필요 없지요. 퇴사는 안 됩니다.”
나는 한참을 그 문장을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움직여 답장을 썼다.
“예전의 저는 이제 없습니다.”
그 문장은 끝내 보내지 못했다. 보내기 버튼 위에 손가락이 머물렀다. 오래된 습관처럼.
컴퓨터 바탕화면 속 삵의 눈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문득, 그 눈이 이산 회장의 얼굴로 겹쳐 보였다. 그리고 동시에 내 얼굴 같기도 했다. 한때 그는 나의 스승이었다. 나의 장학금, 나의 첫 직장, 나의 연구실—모두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는 언제나 말했다.
“기회를 잡으려면, 물리지 말고 물어라. 잡은 걸 놓치면, 네가 잡히는 거다.”
그것은 목사가 할 말이 아니었는데, 그 말이 교훈이라 믿었다. 멍청하고 아둔한 것은 나였다. 종교집단도 아니면서도 우리는 신앙으로 뭉쳐서 그를 신격화하고 있었다.
회계팀 여직원이 내 방으로 찾아왔다.
“이산 회장님이 지금 강당에 계십니다.”
“전 직원회의가 잡혔나요?”
“아뇨, 오늘 기자 미팅한다고 합니다.”
그녀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 있었다.
“기자요?”
“예. 외부 공시 발표를 한신답니다. 리산의 미래를 말하신대요.”
“그런데, 왜 저에게 온 겁니까?”
“회장님이 기자 간담회 끝날 즈음 강당으로 오시라고 합니다”
“알았어요. 문자나 전화로 하지?”
나는 책상 서랍에서 USB를 꺼냈다. 거기엔 재단의 숨겨진 회계 내용과 이산 회장의 개인 비자금 파일이 들어 있었다. 아직 아무도 모르는 기록들이었다. 나는 그것을 주머니에 넣었다.
손끝이 떨렸다.
회의실에서 이산 회장은 활짝 웃었다. 기자들과 재단 관계자들이 앉아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힘이 있었다.
“리산은 더 투명해질 겁니다. 우리의 목적은, 국가와 사회의 미래를 위한 것입니다.”
박수 소리가 터졌다. 나는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그의 웃음은 무대 조명처럼 번쩍거렸다. 그러나 내 눈엔 그가 삵의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내 손 안의 USB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그건 단순한 증거가 아니었다. 오랜 세월 누적된 관계의 무게였다. 나는 그것을 내려놓을 수도, 쥐고 있을 수도 없었다.
퇴근길, 지하 주차장에서 김대양 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이산 회장, 오늘 발표로 자기 이름 세웠어요. 이제 언론도 그의 편입니다.”
“그래서요?”
“이젠 우리가 움직일 때입니다.”
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당신이 가진 자료, 다 가지고 있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끝까지 가야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무실로 올라가며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그가 낮게 던졌다.
“정 박사, 삵은 자기 영역 안에서만 사냥합니다. 당신은 그 경계를 벗어나야 살아남습니다.”
그 말이 오래 남았다. 그가 떠난 뒤에도, 주차장에 남은 담배 냄새가 숨을 막았다.
아파트 불빛이 바다처럼 일렁였다. TV를 켰다. 뉴스 속에 이산 회장의 얼굴이 나왔다.
‘청렴 재단의 모범 사례’.
그 밑 자막이 화면을 채웠다. 나는 조용히 웃었다.
밤이 깊어져 갔다. 창밖엔 도심의 불빛이 흩어지고, 그 위로 안개가 내려앉았다. 그 안개는 마치 대숲의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그날 밤, 나는 잠들기 전 노트를 펼쳤다. 표지에는 오래전에 적어둔 문장이 있었다.
“진실은 늘 숨어 있는 것보다, 너무 가까이 있다.”
그 글씨는 내 손 글씨였다. 젊은 시절의 나였다. 그 문장 아래, 삵의 눈을 그린 연필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천천히 펜을 들어 덧썼다.
“삵은 인간보다 오래 버틸 것이다.”
그리고 노트를 덮었다. 창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었다. 도시의 어둠이 대숲처럼 흔들렸다. 그 속에서 나는 무언가의 발소리를 들었다. 삵인지, 인간인지 알 수 없는 소리.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이 세상엔 너무 많은 삵이 산다. 그리고 나는, 그 중 한 마리였다. 다시 노트를 펼치고 나는 한 문장을 적었다.
“삵은 물지 않으면 죽는다.”
컴퓨터를 켰다. USB를 꽂았다. 모니터 속에서 삵의 눈이 다시 떠올랐다. 검은 동공이 천천히 나를 삼켰다. 마치 나의 결심을 시험이라도 하듯.
파일 이름은 ‘L13_리산 비자금_최종’이었다. 손끝이 떨렸다. 나는 전송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화면에 작은 창이 떴다.
“업로드 완료.”
모든 것이 끝났다. 하지만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
아침 여덟 시, 재단 본관 12층.
이산 회장은 평소처럼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신문 한 부가 놓여 있었다.
‘리산 재단, 내부 비자금 의혹’.
제목이 굵은 활자로 찍혀 있었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나 곧 평정을 되찾았다.
“누가 한 짓이지?”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방 안 공기가 싸늘해졌다. 비서가 대답하지 못했다.
“김대양 부장과 정 박사 불러.”
그의 말은 칼날 같았다.
그 시각 나는 이미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짐은 하나도 챙기지 않았다. 책상 서랍엔 서류 몇 장과 사진 한 장이 남아 있었다. 젊은 시절, 이산 회장과 함께 찍은 사진.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그의 손이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공항은 붐볐다. 모두가 자신만의 목적지를 향해 걷고 있었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돌아왔다. 나는 그 틈에서 가볍게 숨을 고르며 표를 확인했다. LA행. 출국 게이트는 23번이었다.
휴대폰을 켰다. 뉴스 알림이 쏟아졌다. ‘리산 재단, 자금세탁 의혹 전면 수사 착수. 이산 회장, 오후 긴급 기자회견 예고.’ 그의 이름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내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천천히 휴대폰을 끄고 유심칩을 뺐다.
23번 게이트 앞에서 대기하던 승무원이 말했다.
“탑승하셔도 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비행기가 활주로 위를 미끄러졌다. 좌석 벨트를 매며 창밖을 바라봤다. 구름이 천천히 걷히고 있었다. 도시의 윤곽이 흐릿하게 물결쳤다.
비행기가 이륙했다. 진동이 몸 전체를 흔들었다. 내 심장도 함께 떨렸다. 하늘로 떠오르는 동안, 나는 문득 형수의 대숲을 떠올렸다. 닭과 오리, 그리고 대나무 사이를 오가던 바람. 그곳엔 정말 삵이 살고 있을까.
그 짐승은 사람의 법으로도, 신의 법으로도 재단되지 않는다. 잡으면 죄가 되고, 놔두면 먹힌다. 생태계는 어쩌면 그런 균형 위에서만 유지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눈을 감았다. 기체가 흔들릴 때마다 기억이 깜박였다. 이산 회장의 얼굴, 그의 손, 그의 목소리.
“세상은 전쟁터야. 먼저 쏘는 자가 살아남는다.”
그 말이, 이제는 한낱 잔향처럼 남았다. 그가 내게 가르친 건 살아남는 법이었지만, 나는 이제 살아남는 대신 떠나기로 했다.
‘배틀필드’.
그가 늘 쓰던 단어였다. 그 전쟁터에서 나는 무기를 내려놓았다. 그가 쏜 총알이, 결국 그 자신을 향하길 바라며.
“기상 난기류로 잠시 흔들릴 수 있습니다.”
기내 방송이 들렸다. 창밖으로 구름이 뒤틀렸다. 그 속에 검은 그림자가 스쳤다. 그 순간, 삵의 눈이 떠올랐다.
쥐를 물고도 허기져 있던 그 눈. 맑고 투명하지만 잔인했던 눈. 그 안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나는 미소 지었다. 삵은 살아남았다. 그 누구보다 오래, 끈질기게. 하지만 그가 잃은 것은 자유였다. 자신의 영역 안에 갇혀 사는 왕. 나는 이제 그 영역 밖으로 나간다.
비행기 창에 내 얼굴이 겹쳤다. 그 속에서 삵의 눈이 천천히 사라졌다. 마치 나를 대신해 남겨진 짐승처럼.
LA 공항에 도착한 나는 밖으로 나오자 천천히 걸었다. 짐도, 목적지도, 계획도 없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비어 있었다. 그 비어 있음이 오히려 평화로웠다. 정면의 유리 벽 너머로 햇빛에 번지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들은 누구의 이름도, 어떤 재단도 몰랐다. 그저 오늘의 삶을 살 뿐이었다.
“삵은 여전히 산다. 그 짐승의 눈은 세상을 지켜본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눈빛에서 벗어났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 줄기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그 바람 속에서 어릴 적 대숲의 냄새가 났다. 나는 그 냄새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멀리서, 삵의 울음 같은 소리가 들렸다. 짧고 낮은, 그러나 단단한 울음. 그 소리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그저 바람에 흩어져 사라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