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게 하는 영성
‘기독교 영성’은 사람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고 영혼과 삶이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무엇에서 자유롭게 되는가? 어둠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어둠이 무엇인가? 죄와 사망이 어둠이요, 교만, 정욕, 사욕, 혈기, 분냄, 시기, 질투, 음란, 미움, 원망, 의심, 탐심, 낙심, 낙담, 낙망 등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들이 어둠에 속한다. 기독교 영성은 사람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고 이러한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영혼과 삶이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영성에는 영(靈)적인 측면과 육(肉)적인 측면이 있다. 이 둘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과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의 구분이 아니다. ‘정신세계’와 ‘물질세계’의 구분도 아니다. 또한 ‘영의 세계’와 ‘현상세계’의 구분도 아니다. 영적인 측면은 사람이 삼위일체 하나님께 나아가 연합하는 것이고, 육적인 측면은 사람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자신의 삶 가운데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영성을 건축에 비유하면, 영적인 측면은 건물의 기초 놓기라 할 수 있고, 육적인 측면은 그 기초 위에 건물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영성에서 이 두 측면은 서로 분리할 수 없다. 어느 한 측면이 빠진 영성은 온전한 영성이 아니다. 영성에서 영적인 측면 없이는 육적인 측면이 이루어질 수 없다. 어둠에서의 자유를 누릴 수 없다. 또한 육적인 측면의 성취가 없이 영적인 측면만 있으면 참다운 영성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도중에 공사가 중단된 건축물과 같다. 삼위일체 하나님께 나아가 연합하는 영적인 측면의 기초 위에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육적인 측면의 성취가 있어야 온전한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영성은 순환한다. 영성의 선순환이 있고, 악순환이 있다. 영성의 영적인 측면에 머물지 말고 육적인 측면의 성취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다시 더 깊이 있는 영적 측면으로 들어가고, 전보다 더 확장된 육적 측면의 성취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한 과정을 반복하면서 처음에는 그 열매가 작고 적을지라도, 점차 크고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된다. 영성의 샘이 점점 더 깊어지고 넓어지며 더 맑고 시원하고 더 많은 샘물이 솟아나게 된다. 이것이 영성의 선순환이다.
영성의 악순환은 선순환과 반대된다. 영적 측면에서 육적 측면으로 나아가지를 못하고 신비주의 차원에 머물러 있거나, 육적인 측면으로 나아가도 그 성취가 미약하여 영적 측면으로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영성의 샘에서 물이 줄어들고 끝내는 말라버리게 된다.
선순환하는 영성의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들이다. 믿음의 바탕 위에서 행하여지는 예배, 기도, 찬송, 성경 말씀의 묵상, 그리고 말씀을 이루는 사랑과 섬김의 삶이다. 이것들이 잘 되면 영성의 샘에 물이 솟아난다. 영성이 깊어지려면 지속적으로 수련해야 한다. 수련하는 만큼 영성은 선순환하고 깊어진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잘되지 않는다. 특히 말씀을 이루는 삶이 쉽지 않다. 예배, 기도, 찬송할 때까지는 좋았는데, 말씀을 암송할 때까지는 좋았는데, 막상 말씀대로 실천하려니 잘되지 않는다. 이런저런 이유가 따라붙는다. 그래서 말씀을 버리고, 자신의 생각을 따라 행한다. 이것이 문제다. 이래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어둠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영의 자유, 삶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믿음으로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송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 위에 인생의 집을 세워야 한다.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성령 안에 있는 의(義)와 평강(平康)과 희락(喜樂)의 하나님 나라를 추구해야 한다. 사람의 힘만으로는 어렵지만,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할 때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가능한 현실이 된다. 어둠이 물러가고, 삶의 자리에 빛이 가득하게 된다.
출처 : 아산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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