行 狀(행장)
행장 (行狀)
공의 성(姓)은 이(李)씨고 휘는 정모(正模)며 자는 성양(聖養)이고 철성인(鐵城人)이며 호는 자동(紫東)이다. 시조는 황(璜)이고 중세조 휘 백(伯)에 이르러 고려 말에 벼슬하였으니 우군총제(右軍摠制)였다. 나라 일이 날로 그릇되어지는 것을 보고 벼슬을 내려놓고 의령의 세간촌에 자리 잡고 살았다. 이분이 휘 을현(乙賢)을 낳았으니 태조 2년에 소감(少監)으로 제수 되었으나 병을 핑계대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5세 휘 효범에 이르러 통례원인의를 지냈고, 이분이 휘 지(旨)를 낳았으니 호는 백암이다. 임난에 백씨인 정의공과 함께 학봉 김선생을 진양에서 종사하였으며 찬획사로 많이 다녀왔다. 이분이 휘 만승을 낳았고 벼슬은 교관이며 충효의 큰 절개를 지녔다. 이분이 휘 석생을 낳았고 벼슬은 봉직랑이다. 이분이 휘 경윤을 낳았으니 벼슬은 승사랑이다. 4대를 지나 휘 현빈 이르렀으니 이분이 바로 공의 조부이고 음덕을 지녔고 운생을 낳았다. 이분이 사인 강리흠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석곡리 세제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기품이 영오하고 재주가 뛰어났다. 겨우 말을 할 수 있을 때 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묻기를 “하늘에도 입이 있어 숨을 쉽니까?”, 또 묻기를 “수많은 별들도 모두 가정이 있습니까, 어찌하여 서로 거느리고 서쪽으로 돌아갑니까?”라고 하였다. 듣는 이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다섯 살 때 추석을 맞이하여 집안에서 중추절을 지냈으며 공도 색동옷을 입고 뒤에 서서 참례하였다. 옆 사람이 이를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 이 색동옷을 입은 아이는 하늘 보고 절을 하는가.” 이내 부끄럽기도 화나기도 해서 색동옷을 벗어 길바닥에 버리고 밟으면서 말했다, “나는 예를 몰라 비웃음을 받았다. 어찌 색동옷을 입을 수 있겠는가” 아마도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하늘로부터 받은 것 같았다. 집안에 다른 아이가 해몽집(解蒙集) 글귀를 읽고 있었다. 곁에서 듣고 있었으나 모두 이해했고, ‘학은 먼 하늘가로 날아가고, 용은 큰 바다 속에서 날아오르네.’에 이르러 웃음을 띠면서 말했다, “이 글귀가 가장 좋다” 여섯 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고, 계모 안씨가 들어왔다. 그러나 받들고 봉양하는 것이 친모와 다르지 않았다. 일찍이 새벽에 계모를 뵙는데 계모가 우연찮게 받아주지 않았다. 이내 두려워하여 거적을 펴고 회초리를 청하였다. 계모가 웃으면서 타이르니 이내 그만두었다. 이 해에 처음으로 글을 배웠는데 하는 말마다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겨우 소학(小學)만을 읽었는데도 문득 구용(九容)과 구사(九思)로 학문을 하는 요결로 삼았고 언제나 잊지 않았다. 타고난 성품이 눕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부모가 혹시라도 그가 야위어 병이 들까 두려워한 나머지 억지로 잠을 자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잠시 누웠다가 일어나 말했다. “누워있으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몸이 편치 않은 것이 마음이 편치 않은 것보다 낫습니다.” 계축년 유곡으로 이거한 이후로부터 밤낮으로 읽고 외웠으며 부모와 스승의 경계를 받지 않았으나 감히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남의 부름에 응대하고 절하며 꿇어앉고, 공손하며 공경하니 보는 사람마다 이미 비범한 아이임을 알았다. 성장하여 부친의 명으로 고부 만성 박치복의 문하에서 학문하였다. 경위(經緯)를 분별하고 글을 지었으며, 시문이 심히 향상되었다. 만성이 일찍이 말하였다, “이 아이는 나가 가장 아끼는 벗이다.” 이로부터 5,6년이 흘러 문장과 식견이 탁월하여 동남(東南)의 으뜸이 되었다. 그러나 남몰래 스스로를 닦는 실재는 아는 사람은 또한 드물다. 병인년 관례를 치루고 만성을 뵙다. 만성이 자설(字說)를 지어 축하해 주었다. 이미 친영(親迎)하였고, ‘예가 아니면 가정을 꾸릴 수 없다’라 했으니 만복을 빌고 편안하기를 바라는 등의 절차는 또한 가례(家禮)에 의지하여 하나하나 실행하고 자 했다. 대인공은 말했다, “의문(儀文)의 마지막 글귀는 내 달갑지 않다. 작은 것은 줄이고 근본은 도탑게 해야 한다. 부자간에는 온화한 인효의 기운이 있어야 하고 집안에서는 엄숙한 법도의 말이 있어야 한다.” 정묘년(丁卯年)년에 자미산(紫薇山) 아래 도당(陶唐) 골짜기에 작은 재실을 짓고 자도(紫陶)라 편액 하였으며, 또한 누와(陋窩)라 하였다. 새벽과 밤이 아니라면 재실에서 날마다 수양하였다. 좌우는 도서를 두었고, 꽃을 기르며 대를 심어 장차 노년을 보내려고 하였다. 신안 한주 이선생이 학문에 연원이 있고 주자와 퇴계의 종지를 깊이 얻었다는 것을 듣고 수백 리를 멀다 여기지 않고 잰 걸음으로 달려가 한주를 스승으로 따랐다. 한주가 칭찬했다,“실천하고 정밀히 생각하는 것을 나는 이군에게 보았다” 이때 공의 부친의 뜻은 과거공부에 힘쓰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미 여러 번 낙방하였으니 물러나 석류문을 지어 스스로 벗어나고자 했다. 갑술년 봄, 동지와 방장산사(方丈山寺)에서 강독을 위해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여름, 금산 동당시에 응시하였고 명망이 완연하였으니 누구도 상대할 수 없을 정도의 기대가 있었다. 과거 감독관이 합격자에 뽑고자 하여 시험지를 권두에 두게 하였다. 공이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과거로 드러나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시험지를 반납하고 바로 나왔다. 가을, 어떤 일로 한성에 이르렀고 시대의 좋지 못한 점을 보았으며, 농가집요(農家輯要)를 구입하고 돌아오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것으로 부모님을 봉양하겠다.”라 했다. 드디어 과거 공부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대인공도 또한 허여하면서 말하기를 “네가 화정(和靖)의 뜻을 가졌다면 나도 당연히 화정의 어머니가 되겠다.”라 하였다. 이로부터 공의 의지는 더욱 견고해졌고 학문은 더욱 전일할 수 있었다. 공의 벗 명원(鳴遠) 곽종석(郭鍾錫)은 일찍이 차자(箚子)로 평소 의문스런 점을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선생에게 물었고, 이를 지의록(贄疑錄)라 불렀다. 여기에는 대부분 심성리기(心性理氣)를 논의한 것들이었다. 이때 이르러 지의록을 얻었고 한 부를 베껴 써보니 심성리기에 대하여 환연히 자신할 수 있었으며,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한주 이선생의 참다운 면목을 알 수 있었다”라 했다. 겨울, 계모의 상을 당하여 여러 날 물이나 미음을 먹지 않았고 상복을 벗지 않았으며 곡읍이 끊어지지 않으니 감동하지 않은 이웃이 없었다. 장례를 치루면서 질병을 얻었으나 병이 심한 것은 아니었다. 아침저녁으로 성묘를 하였고 비바람이 불어도 그만두지 않으니 도리어 부친이 고기를 먹으라고 하였다. 인삼이나 백출 같은 보약과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은 따라 나오니 물리칠 수 없었다. 그러나 매양 이르기를 “마음이 편안하지 않으니 먹어도 맛을 모르겠다.”라 했다. 부인이 다가가서 살펴보자고 했으나 곧장 손을 휘두르면서 앉은 것조차 허락하지 않고 이르기를 “예법으로써 예방(豫防)하니, 어찌 이를 범할 수 있으리오”하고, 곧장 부인을 물리쳤다. 부친이 근심스런 안색을 보이니 어린아이가 아무 생각 없이 말을 하는 것처럼 하여 부친을 안심하게 해드리고 싶었다. 그러니 부친은 차마 근심스런 안색을 드러낼 수 없었다. 장차 세상을 떠나려 하자 부인이 비로소 나아가 뵙고 앞에서 엎드려 울었다. 그러나 공은 오히려 바른 목소리로 이르기를 “이 어찌 상례를 치를 사람으로서 할 일인가”라 했다. 이어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내가 다하지 못한 효(孝)를 그대가 대신 다하도록 하여라”라 하고 물러가라 하였다. 그리고 아우들을 불러 놓고 이르기를 “연로하신 부친을 잘 모시도록 하여라”라 하고 이내 명(命)하기를 “나를 바로 눕혀라. 내 떠날 것이다”라 했다. 또 이르기를 “누움이 이미 바르다”라 하더니, 이에 곧장 유유히 세상을 떠났다. 나이 겨우 30살인 을해 겨울 12월 17일이다. 부음이 이르자 원근의 사우들 슬피 울며 조문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혹은 그를 위해 복(服)을 입는 사람도 있었다. 이다음 병자년 3월 모일(某日)에 공동(公洞) 모좌(某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명원은 실제로 장례를 주관하였고, 장례에 참여한 몇 몇은 당시 뛰어난 선비들 이었으며, 또 나에게 행장 짓기를 부탁하였다. 아, 내가 차마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차마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아, 공의 모습은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으나 기개와 절조는 천 길 높이 깎아지른 절벽 같은 기상이고, 가슴에 품은 것은 한 가닥 맑은 얼음 이였다. 자질의 아름다움은 이미 동년배를 뛰어넘었고 그의 뜻은 선비에 있었다. 배우지 않으면 그만이겠지만 배운다면 당연히 성인을 배웠다. 어릴 때부터 자신을 단속하기를 엄정하게 하였고, 여러 사람과 함께 날을 보내면서도 정색을 하고 단정히 하였다. 게으르고 거만한 기운은 몸에 드러나지 않았고 희롱하거나 웃음소리는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곤궁할지언정 불손하게 하지 않았고, 차라리 간소할지언정 구차하게 부합하지 않았다. 비록 어린아이와 친구라도 감히 거만한 말을 할 수 없었고, 향당의 어른이라도 대문에 이르면 공경하는 마음이 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학문은 경(敬)을 주장하여 그 근본을 세우고, 이치를 궁구하여 그 지식을 지극히 하였다. 또 이르기를 ‘마음의 작용은 신묘해서 헤아릴 수 없고, 순식간에 달아나고 날아다니니 진실로 하나에서 다스리지 못하면 내 몸의 주장을 하고, 만사의 벼리를 거느릴 수 없다. 일의 종류는 앞뒤로 서로 숨겨주어 하루사이에 헝클어지고 어긋나 진실로 둘을 판별하지 못하면 내 마음의 쓰임을 바로하고 순임금과 도척(盜跖)의 기미를 살필 수 없다.’라 했습니다. 이에 일이재(一二齋)의 기문을 지어 스스로 반성하였다. 일(一)이란 무엇인가. 정자는 이르기를 ‘주일무적(主一無適)’을 ‘경’이라 한 것이 이것이고, 이(二)란 무엇인가. 주자가 이르기를 ‘지(智)는 두 가지 모두에게 속한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여기에서 자신 수양하고 깊이 반성한 실상을 증험할 수 있다. 그리고 공부의 기준으로 삼기위해 손수 「주자독서법」을 베껴 써서 「전신결(傳神訣)」라 하였다. 작은 부절을 만들어 십이지(十二支)를 그리고, 심(心)자 가운데 전서(篆書)로 기록하여 해마다 달마다 날마다 때마다 해야 할 기준으로 삼았다. 소학(小學)에서는 쇄소(灑掃)로부터 융사친우(隆師親友)에 이르렀고, 대학(大學)에서는 격물치지(格物致知)로부터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것으로 벼리로 삼았고 고금의 가언(嘉言)과 선행(善行)을 기록하였다. 사물(四勿)의 목록을 곁에 두고 일생동안 실행할 바탕으로 삼았다. 비록 책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단연코 이러한 것을 실천하고자하는 뜻은 있었다. 매야(邁埜) 서활(徐活)의 「용사집설(容思集說)」에 이르기까지 또한 일찍이 베껴 가슴에 지녔다. 일기에는 반드시 날씨의 흐리고 맑음과 춥고 더운 것으로부터 책을 읽고 강론한 내용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기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오과록(吾過錄)」은 나의 허물을 기록한 것이고, 「추확록推擴錄」은 나의 좋은 점을 넓힌 것을 기록 한 것이다. 낮에는 처와 아들에게서 이러한 것을 요구하고, 밤이면 잠자리에서 이러한 것을 증험하였다. 잠시라도 배우지 않을 때가 없었고, 또한 한 가지 일에서도 배우지 않음이 없었다. 행실에 드러난 것은 경(敬)으로 자신을 단속하였고, 의(義)로 사람을 대접하였다. 몸은 옷을 가누지 못할 듯하였으나 선을 행하는 데에는 용감하였고, 말은 입 밖에 나오지 못할 듯하였으나 이치를 분석하는 데에 조리가 있었다. 온후하였으나 지조를 지키는 굳건한 성품을 지녔고, 화락하지만 곧은 지조를 지녔다. 장소가 나쁘면 수레를 돌려서라도 반드시 피했고, 뜻을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한 그릇의 밥이라 하더라도 사양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시끄럽게 고루하다고 비방하였으나 공(公)은 오히려 의연히 대처하면서 돌아보지 않았다. 걸음걸이와 행위는 평온하면서 조용하였으나 법도를 지녔다. 여름 날 동료와 함께 공부를 하였는데 쇠를 녹일 듯한 더위였다. 그러나 분판을 함께 한 사람도 하품을 하거나 옷 벗을 벗는 일을 보지 못했다. 천릿길을 달려왔으니 피곤하고 초췌하였다. 그러나 지팡이를 함께 한 사람도 피곤해 하거나 의지하고자 것을 보지 못했다. 지난 날 호서지방을 유람하였는데 호서지방의 동료들이 공(公)을 비상한 사람이라고 보았다. 비로소 해학적으로 시험 하고자 마주 하였으나, 공을 마주 하고는 감히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물러나 서로 이르기를 “이 사람을 마주하니 나도 모르게 공경심이 일어났다.”라 했다. 그의 용모와 말에서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이와 같았다. 평소 산수를 좋아하는 기벽(奇癖)이 있어 명산대천을 보았다. 두루 유람을 하면서 마음에 드는 곳을 만나면 문득 가슴이 훤히 트이는 것 같았고, 표연히(훌훌 털어버리고) 속세를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을 갖기도 했다. 거처하는 재실 뒤로는 골짜기가 깊어 거닐 수 있으므로 공(公)이 좋아 하였고, 작은 단(壇)을 쌓아 이를 풍영(風詠)이라 하였다. 고을에 수회재(水廻齋)가 있었던 옛 터는 수석(水石)이 맑고 아름다워 한가한 날이면 술잔을 들면서 그곳에서 시를 읊었다. 함께하는 이들에게 이르기를 “배우는 사람이 깊은 못에 임하고 얇은 얼음을 밟는다는 생각을 지닌다면 저절로 봉황처럼 천 길이나 높이 나는 기상을 가지게 된다.”라 했다. 평소에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하며 의관을 바로 하여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공손히 하였다. 물러나서 서재에 있을 때에는 반드시 책상을 바르게 놓고 서적과 기물(器物)을 반드시 정리하였다. 음식을 먹을 때는 폐슬(蔽膝)을 하고 편안히 앉고 숟가락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의복은 단지 깨끗하게 하는 것에 힘썼지 화려한 것은 취하지 않았다. 일찍이 어느 집에 가니 밥과 떡을 아름답게 여기니, 시(詩)를 지어 통렬히 경계시켰다. 혹 출입할 적에 집사람이 옷 없음을 근심하니 곧장 이르기를 “내 군자는 충신으로 근본하고 예악으로 꾸민다는 것은 들었지만, 복식(服飾)으로 꾸민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라 했다. 공(公)이 부모 곁에 있을 때는 즐거워하면서도 삼가 하여 조금도 어기지 않았다. 부모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부모가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니 한 몸 같은 마음이니 조그마한 사틈도 있지 않았다. 비록 먼 곳에서 배우고 있었으나 마음은 언제나 부모에게 있어 기거하고 침식할 때라도 일찍이 잠시도 잊지 않았으니 공(公)같은 이를 두고 옛 사람들은 ‘소리 없는 곳에서 듣고 형체가 없는 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인져!’라고 했을 것이다. 마지막 한양길은 아마도 대고(大故)를 당하기 몇 달 전이였다. 돌아오는 길에 외나무다리를 만났는데 홀연히 마음이 요동쳐 건널 수 없었다. 이에 연빙시(淵氷詩)를 짓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지극한 정성은 앞날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이것이 아마도 조짐이었는가, 어찌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제사에는 정성을 다하였고 재계(齋戒)는 가례(家禮)를 따랐다. 무릇 땅이나 물에서 나는 맛있는 음식이라도 선친에 먼저 드리지 않았다면 먼저 먹지 않았다. 아우들은 심히 꾸짖지 않고 스스로를 다스리게 하니 묻지 않아도 형이 아우를 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부인과는 직접 주고받지 않았고 빈객의 예로 마주하였으며 벗의 도리로 이끌었다. 즐거운 마음은 동정(動靜)에 드러나지 않았고 사사로운 감정은 마음속에 두지 않았다. 일찍이 규미(閨楣)에 쓰기를 「제가조단齊家造端」이라 했다. 예부터 ‘어려움을 말하였고, 규문이 있지 않았다면 내 어찌 볼 수 있으리오’라 했으니, 이를 보면 공(公)은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보았음을 알 수 있다. 독서법은 오로지 주자성설(朱子成說)를 따랐다. 소학과 대학부터 주역(周易)과 사기(史記)까지 반복 숙독하였다. 논어는 3,4년간 다른 책으로 바꾸지 않았고, 이르기를 “조존함양(操存涵養)의 실체는 이 책보다 나은 것이 없다.”라 했다.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전서(全書), 계호유집(溪湖遺集)까지 침잠하여 궁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명쾌한 재기를 지녔기에 문리(文理)가 긴요한 곳이라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이해하였다. 남들이 의심스럽고 어려워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묵묵히 듣기만 하다가 천천히 한마디 말로 결정하니 사람들이 그의 이도(理到)에 감복했다. 또 구이지학(口耳之學)을 경계하여 일찍이 가볍게 말하지 않았다. 글을 짓지만 날카로움을 드러내지 않았고 속으로 함축하는 것에 힘썼으니 온화하면서도 세련된 문장이고, 성대한 인의의 말이었다. 그리하여 일찍이 ‘저술은 오, 육십을 기다려도 늦지 않다.’라 하고 가슴에 쌓기만 하고 드러내지 않았다. 무릇 느낀 것은 오로지 시(詩)로 드러냈으니, 진실하고 담박하여 언제나 울림이 쟁쟁하였다. 세상에 시에 능하다고 소문 이들도 모두 두 손을 공손히 마주잡고 승복하였다. 생각건대 근세에는 이런 시를 짓는 사람은 없었다. 시를 짓는 법도는 밖으론 졸(拙)하지만 안으론 공교로웠다. 때때로 붓을 잡으면 마음과 손이 서로 응대하여 자연스럽게 저절로 얻어지는 묘한 것이 있었으니 어찌 덕성에 관계된 것이라고 이르지 않겠는가? 그가 발표한 모든 논지(論旨)는 “강우의 학자들이 꾸준히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공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아무도 없는 캄캄한 방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갓을 바로 쓰고 꼿꼿이 앉아 이르길 “군자의 학문은 근독(謹獨)으로부터 시작된다,”라 했다. 또 이르기를 “인심은 지극히 위태로우니 모름지기 경계하지 않으면 얼리지 않아도 차가워지고 불을 붙이지 않아도 뜨거워져 만길 구덩이로 떨어진다. 참으로 생사의 관두이니 위의(威儀)를 삼가야 하고, 미미한 일이라 하더라도 방과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이에 친한 벗이 혹 세세한 일까지 번거로이 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내 이르기를 “거경수정(居敬守正)이외에 나는 어떠한 꾸밈도 모른다.”라고 했다. 집안을 다스리는 데는 엄한 것을 주로 하여야 한다. 허물없이 지내는 것을 경계하기를 “규방에 있을 때는 당연히 신중하기는 산악과 같아야 하고, 심후하기는 천지와 같아야 한다.”라 했다. 또 이르기를 “효는 처자 때문에 쇠해지니 경계해야 할 것이다.”라 했다.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도리를 논의하면 곧장 이르기를 “ 천도는 강건함을 숭상하고, 일월은 밝음을 숭상하며, 임금의 도는 이러한 하늘을 본받았으니 밝음과 강건함뿐입니다. 강건하면 흔들리지 않고 밝으면 현혹되지 않는다.”라 했다. 또 이르기를 “제왕의 학문은 교만하지 않은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 극진히 말하자면 순임금과 우임금은 천하를 가졌어도 상관하지 않은 것이 이것이다.”라 했다. 이러한 것은 공(公)이 대학에서 얻은 것이고, 나는 함께하면서 공에게 들은 것이다. 나에게 공은 나이로는 공이 조금 떨어지지 만, 덕(德)은 나의 사표(師表)이다. 이에 오랫동안 함께하였고 실로 벗의 도리를 지켰으며, 그리우면 말을 하고 얻은 것이 있다면 반드시 알렸으니 정리(情理)를 다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처음으로 공이 어려서 행보(行步)할 때 반드시 손가락을 펼치는 것을 보았다. 내가 이를 지적하면서 이르기를 “손은 물건을 부리는 것이다. 지금 펼치는 것은 무용(無用)에 가깝다.”라 했다. 이에 공이 부끄러워하였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뒤늦게 한주선생의 논설(論說)로 거듭거듭 어려운 점을 분변하였고 처음에는 어긋나는 것 같았지만 끝내는 확연히 분별하였다. 갑술서(甲戌書)를 보면 이를 근거로 알 수 있다. 아! 나는 어떠한 사람이기에 이 시기에 공을 만날 수 있었는가. 사람마다 성인의 학문이 피폐함으로부터 풍속이 모두 그러하였지만 공만이 유독 자신을 비우고 남을 받아들이니 군자다운 도량의 넓음과 덕(德)의 증진이 아니라면 능히 할 수 있겠는가. 공의 큰아들이 울면서 찾아오니 쓸쓸하게도 사람으로서 배우는 것에 의미를 잃었다. 어느 날 공의 병이 심하다는 소리를 듣고 눈보라를 무릅쓰고 달려가 보니 공은 오히려 띠를 두려고 절하며 예를 다하였다. 만류하였으나 일어나 이르기를 “저는 생사(生死)에 있어 확연히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맹자는 이른 ‘일찍 죽고 오래 사는 것에 의혹을 품지 않고서 몸을 닦으며 기다리는 것은 명을 기린다’라 했으니 제가 바라는 것입니다.”라 했다. 뜻하지 않게 말이 안자(顔子)는 어질고도 장수하지 못했다고 하니, 공이 이르기를 “배우는 사람은 단지 어짐에 이르지 못할까 근심해야지 안자의 장수하나 그렇지 않나 는 논의할 것이 못됩니다.”라 했다. 책상위에 어류초본(語類草本) 몇 권이 있었으니 병중(病中)에 손수 쓴 것이었다. 어찌 살아있는 순간까지 조금도 게으름을 용납하지 않았다고 이르지 않을 수 있겠가. 어떤 배우는 사람이 와서 ‘곧으면서도 온화하다’라는 의미를 물었다. 공이 놀라면서 이르기를 “사람으로 살아가는 이치가 정직한 것이다. 정직한 사람은 살아간다고 할 수 있으나, 정직하지 못하면 비록 살아도 산다고 할 수 없다.”라 했다. 내 속으로 생각하니 이 말은 주부자(朱夫子)가 세상을 떠날 때 한 말이다. 그대의 말이 여기에서 함축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마음으로 느낀 바가 있었는가. 탄식하면서 돌아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이 떠났다. 떠나기 하루 전, 홀연히 도움 없이 바로 앉아 이르기를 “내 오랫동안 책을 읽지 못했다.”라 하고, 이내 맑은 소리로 ‘학문의 도는 다른데 있지 않고 놓친 마음을 찾는데 있다’라는 글귀를 외웠다. 글 읽는 소리가 방에 가득하였고, 곁의 사람들이 그의 눈빛을 보니 ‘반짝반짝하여 사람을 쏘는 것 같다’고 하였다. 아! 군자가 돌아감을 종(終)이라 하는데, 공(公)이 이를 얻었다. 문집 몇 권이 후손에게 전해지고 있다. 부인은 창령성씨(昌寧成氏)이며 어진 행실이 있었다. 딸 하나 두었으나 아직 어리다. 아! 공은 어려서부터 개연히 성인의 도를 배울 뜻을 가졌으니, 성인의 도가 아니면 말하지 않고 성인의 일이 아니면 행하지 않았다. 일찍이 이르기를 “성인의 학문을 보길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퇴계로부터 시작해야한다.”라 했다. 처음부터 마음을 세우고 행실을 바르게 한 것이 이미 저절로 이 같았다. 심성리기호발(心性理氣互發) 등의 논변에 이르러서는 감히 먼저 주장하지 않았다. 단지 마음으로 생각하고 힘써 실행할 뿐이였다. 한주 이선생의 리일분수(理一分殊)을 설을 들은 뒤 성인의 종지(宗旨)를 더욱 믿게 되었고 이외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세상이 쇠퇴하고 도(道)가 미미한 시대에 하늘이 공을 낳았으니 우연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어찌하여 나이를 주지 않아 큰 공업이 이루어지지도 않았는데 하루아침에 떠나게 하는가. 어찌 호천(昊天)이 돌아오니 않으니 기수(氣數)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군자들의 근심은 이러한 일들에서 끝이 없다. 그러나 하늘이 인의예지의 덕으로 온전히 공에게 주었고 공은 온전히 하여 돌아가니 공은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인져!
후산(后山) 허유(許愈) 삼가 행장(行狀)을 짓는다.
行 狀
公姓李。諱正模。字聖養。鐵城人。紫東其號也。始祖璜。中世至諱伯。仕麗末。官右軍摠制。見國事日非。棄官遁居于宜之世干村。生諱乙賢。我太祖二年。除少監。托病不就。後五世。至諱孝範。通禮院引儀。生諱旨。判官。號柏菴。壬辰之亂。與伯氏貞義公。從鶴峯金先生于晉陽。多所贊畫。生諱曼勝。敎官。有忠孝大節。生諱錫生。奉直郞。生諱景潤。承仕郞。歷四世而至諱賢賓。寔公之祖。有隱德。生雲逵。娶士人姜理欽之女。憲廟丙午。生公于石谷里第。公生而姿稟穎悟。才調絶倫。甫學語。見風起。問曰。天有口噓息乎。又問衆星。皆有家乎。何相卛而西去也。聞者異之。五歲而當秋夕。家行節祀。公衣斑斕。從後參拜。傍人譏之曰。斑衣兒。向天拜乎。卽憤然脫斑衣。納諸汚中。踐踏之曰。我以失禮見笑。焉用此衣爲哉。其羞惡之心。天植然也。家有他兒。讀解蒙集句。從傍而悉通之。至鶴舞長天外。龍飛大海中之句。喜動于色曰。此句最好。六歲姜氏見背。繼母安氏入。卽承奉無間於己母。嘗晨謁母。母偶未頷可。卽恐懼。席藁請撻。母笑諭之。乃止。是年始上學。發語驚人。纔讀小學。輒以九容九思。爲爲學要訣。念念不忘。性不喜卧。父母或慮其羸悴生病。強令就枕。少卧輒起曰。卧則心不安。與其身不安。不若心安爲安也。家居誦讀。不待父師程督。而俛焉日孜孜。不敢少懈。應對拜跪。溫恭順恪。見之者已知非凡兒矣。稍長。以親命。就學于其姑夫朴晩醒之門。辨經摛文。藻思大發。晩醒嘗曰。此兒吾之畏友。自是還往五六年。文章見識。卓然爲東南之秀。而其闇然自修之實。則知之者亦或鮮矣。丙寅加冠。見晩醒。晩醒作字辭以祝之。旣迎婦。謂非禮。無以爲家。至如萬福安置等節。亦欲依家禮一一行之。大人公曰。儀文末節。吾不屑也。畧細微敦本實。父子之間。藹然仁孝之風。而閨門之內。森然法度之言也。丁卯。築小齋于紫微山下陶唐之谷。顔之曰紫陶。又曰陋室。晨昏外。日遊處其中。左圖右書。栽花種竹。蓋將老焉。聞新安李寒洲先生。學有淵源。深得朱李宗旨。不遠數百里。徒步往從之。寒洲稱之曰。實踐精思。吾於李君。見之矣。時公以親志。黽勉于擧業。而旣屢擧不中。退而作釋遊文以自解之。甲戌春。約同志講會于方丈山寺。夏赴金山東堂試。聲譽菀然。有專塲之望。考官要欲擢置榜中。使之通券頭。公笑曰。吾耻爲呈身擧子。納券卽起。秋。以事至洛。見時象不佳。貨農家輯要以歸曰。吾欲以此養親。遂決意廢擧。大人公亦許之曰。汝有和靖之志。則吾當爲和靖之母矣。自此公之志益堅。而學問益專一矣。公之友郭鍾錫鳴遠。嘗箚平日疑義。質之於寒洲。名曰贄疑錄。錄中蓋多心性理氣之論。至是得是錄。校寫一通。渙然自信曰。吾今日始識寒洲面目。冬。遭繼母喪。水漿不入口者累日。時當盛寒。而日終日于殯外。衰麻不釋。哭泣不絶。鄰里莫不感動。葬而有疾。而非病甚也。朝夕上墓。風雨不廢。旋以大人公命開素。蔘朮之餌。腥膩之味。隨進不卻。然每曰。心所不安。食不知味也。夫人出欲診視。輒揮手不許坐曰。禮防何可犯也。竟卻之。見大人公有憂色。則爲言兒無重慮。願父安焉。大人公不忍作憂戚之色。將革也。夫人始出見。伏泣于前。公猶正聲曰。此豈喪者事乎。因顧曰。吾之未了之孝。君其代而終之。命之退。呼諸弟謂曰。善事老親。旣而命曰。正我卧。我將死。曰。卧已正矣。卽悠然而逝。年纔三十。時乙亥冬十二月十七日也。家貧。殯于山。訃至。遠近士友莫不失聲相弔。或有爲之服者。以明年丙子三月日。葬于唐洞某坐原。鳴遠實經紀之。會者若干人。皆當時名勝。旣又命愈以狀德之文。嗚呼。愈忍爲是哉。忍爲是哉。嗚呼。公狀貌不踰中人乎。而氣節則壁立千仞也。胷懷則一條淸冰也。資質之美。已逈出等夷。而其志則曰士不學則已。學則當學聖人。自童穉時。律身嚴厲。羣居終日。正色端坐。惰慢之氣。不設於軆。嬉笑之聲。不出於口。寧隘。而不爲不恭也。寧簡。而不爲苟合也。雖童孩朋舊。不敢加之以慢語。鄕黨長老之至其門者。莫不肅然。其爲學也。主敬以立其本。竆理以致其知。謂心之爲用。神妙不測。馳騖飛揚於頃刻之間。若不主乎一。無以爲吾身之主。而統萬事之綱。事之爲物。頭緖不同。紛綸雜錯於日用之間。苟不判之爲二。則無以正吾心之用。而察舜蹠之幾。於是作一二齋記以自省。一者何也。程子所謂主一無適之謂敬。是也。二者何也。朱子所謂智屬乎兩。是也。於此。可驗其涵養省察之實。而其用工節度。則手寫朱夫子讀書法。號曰傳神訣。小符書十二辰。篆心字於中。爲逐年逐月逐日逐時程式。於小學則自灑掃而至于隆師親友。於大學則自格致而至于平治天下。列之爲綱。引古今嘉言善行以實之。四勿之目。置簿如右。爲一生受用之資。雖未及成書。而斷然有事斯之志。以至徐邁埜容思集說。亦嘗抄得而佩服。日必有記陰晴寒暑之節。讀書講論之實。靡不畢載。而吾過錄。所以記其過也。推擴錄。所以廣其善也。晝而徵之於妻子。夜而驗之於夢寐。蓋無一時不學。而亦無一事非學也。其見乎行者。持己以敬。處物以義。身若不勝衣。而勇於就善。言若不出口。而辨於析理。溫厚而有狷介之性。雍容而有直截之氣。地有惡名。則回車必避。人非同志。則簞食必辭。世方譁然以固滯譏之。而公且毅
然不顧也。步趨起居。安徐有度。夏月羣課。炎蒸熱鑠。而同槧者。未見有欠伸裸裼之事。千里徒行。困頓憔悴。而聯筇者未見有惰怠偏倚之時。嘗過湖西。湖中流輩。見公之非常人也。始欲以戲謔試之。及對。不敢出一言。退相謂曰。對此人。不覺敬心自生。其容皃辭氣之間。感人有如此者。雅有山水之癖。所歷名山大川。遊覽殆遍。遇會心處。輒胷襟浩浩。飄然有出塵之想。所居齋後。洞壑深邃。可以盤旋。公愛之。築小壇。名之曰風詠。郡有水迴齋舊址。水石明媚。暇日携酒。嘯詠其間。顧謂從者曰。學者有臨深履薄之意。則自有鳳翔千仞氣像。平居未明而起。盥櫛衣冠。定省惟謹。退坐書室。几案必正。書籍器用必整。飮食則蔽膝盤坐。不作匙箸聲。衣服則務要潔凈。不取華美。嘗至人家。食餠而美。作詩而痛戒之。或出入。家人患無服。則曰吾聞君子。質之以忠信。文之以禮樂。未聞以服飾爲文也。其在親側。怡愉婉謹。不少違拂。親之所好樂好樂之。親之所憎惡憎惡之。一軆爲心。靡有間隔。雖遊學於外。其心常在於親。起居寢食。未嘗頃刻或忘。如公者。眞古人所謂聽於無聲。視於無形者歟。最後西行。蓋在於遭故前數月。而歸路遇獨木橋。忽心動不能渡。作淵冰詩以戒心。至誠前知。此其兆也。豈偶然而云者哉。誠於祭祀。齊戒如禮。凡於水土嘉味。非薦不食也。敎諸弟。不甚責厲。而自底規矩。不問可知爲乃兄之弟。與夫人不親授受。待之以賓禮。規之以友道。讌安之意。不形乎動靜。情私之感。無介乎容儀。嘗題閨楣帖曰。齊家造端。古云其難。不有閨門。吾何以觀。觀於此。公之爲二南。可知也。讀書之法。一依朱子成說。自小大學。以至易史記。循環熟讀。而於論語則四三年不易佗書曰。操存涵養之實。無過於此書。如洛閩全書溪湖遺集。無不潛究。而才思明透。雖文理肯綮處。自然融釋。嘗曰吾讀書。別無可疑。見人有疑難紛紜者。必默然參聽。徐以一言而剖決之。人皆服其理到。又以口耳爲戒。未嘗輕發於言。爲文章。不露鋒穎。務爲含蓄。溫然老成之文。藹乎仁義之言也。然嘗謂著述。俟五六十爲之未晩。蘊而不發。凡有所感。一於詩發之。忠厚淡泊。終響鏗然。世之以能詩聞者。無不斂手就服。以爲近世無此作。筆法則拙於外而工於內。有時揮灑。心與手應。天然有自得之妙。豈非所謂德性相關者歟。其發諸議論。則曰江右學者。不能長進。格致不足故也。暗室之中。必正冠危坐曰。
君子之學。自謹獨始。又曰。人心至危。斯須不戒。則不冰而寒。不火而熱。墮落萬仞坑塹。眞是生死關頭。謹於威儀。雖細微事。不敢放過。人或規其煩瑣。則曰居敬守正外。吾不知有許多巧飾。治家以嚴爲主。戒在褻狎曰。處閨房。當凝重如山岳。深厚如天地。又曰。孝衰於妻子。戒之哉。論治平之道。則曰天道尙剛。日月尙明。君道體天。明與剛而已。剛則不撓。明則不惑。又曰。帝王之學。莫過於無驕。極言之則舜禹之有天下而不與焉。是也。此皆公之所得於大學者。而愈之所與聞於公者也。愈於公。從遊之久。實有友道。有懷則必言。有得則必告。未嘗不盡情焉。始公之丱角也。見行步。必展開了手指。愈規之曰手是使物底。今展開了。似近於無用。公悚然起敬。不復爲也。晩以寒洲之說。反復辨難。始若參差。終底爛漫。觀於甲戌書。可據而知也。嗚呼。人人自聖之弊。習俗皆然。公獨虛己以受人。非君子之量之洪德之進。能然乎哉。愈自哭長子來。索然無意於人事。而一日聞公病甚。卽冒雨霧。徒步往見之。公猶絰帶。拜稽如禮。留與卧起曰。吾於死生。確然不動心。孟子曰。夭壽不貳。修身以俟命。吾庶幾焉。偶語及顔子仁而不壽曰。學者。只患仁不及顔子。其壽不壽。不須論也。案上有語類草本數卷。蓋病中手寫者也。豈所謂一息尙存。不容少懈者歟。有一學者。來問直而溫之旨。公蹶然曰。人生也直。直者生。不直者雖生。非生也。愈心以爲此朱夫子臨終之言也。君言之若是警切於此。何也。其有所感于中耶。歎息而歸。未幾公歿。歿之前一日。忽不扶而正坐曰。吾久不讀書矣。因朗然誦學問之道無佗。求放心而已之句。音韻滿一室。傍人見其目。光閃閃射人云。嗚呼。君子曰終。公其得之矣。有文集若干卷。足以傳後。配昌寧成氏。有賢行。生一女適八溪鄭龍鉉。嗚呼。我東自退陶以來。道統始明。羣賢相望。莫不以洛閩爲準則。然獨於理氣心性之說。尙多聽瑩者。公早年。已有志於退陶之學。而未得要領。徘徊於文章聲詩之間。及從遊寒洲。獲聞主理之旨。又得湖學輯成以折衷之。然後始信陶山一統。昭如日星矣。意者。天之生公於世衰道微之日。似不偶然。而柰之何天不假年。大業未究而一朝止此。豈皓天之不復而氣數之使然耶。君子之憂。於是乎無疆矣。然天以仁義禮智之德。全付與公。而公能全而歸之。公其無愧於天也夫。
后山 許愈 謹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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