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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단이태석신부님/수단어린이장학회 원문보기 글쓴이: 베로니카~☆
조선 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정하상 바오로의 사제를 보내달라는 교황께 보낸 편지가 샴(태국의 옛이름)에도 배달되었다.
그곳에 계시던 주교의 연세가 사목을 더 하실 수 없어서 보좌 주교를 한사람 두고 있었는데,
그 보좌주교가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신부로 이 편지를 읽고 잠을 못 이룬다.
이 편지를 보낼 때 이미 파리외방 전교회 장상들이 조선에 선교사제를 보내지 못하는 이유를 함께 밝혀놨기 때문으로
브뤼기에르 신부는 전전긍긍 괴로워하다가 교황께 바로 편지를 쓴다.
그 내용 또한 우리 평신도의 열의에 찬 편지처럼 기가 막힌다.
장상들이 조선에 신부를 보내지 못하겠다는 이유들이 틀렸다고 조목조목 공격한 것이다.
첫째, "돈이 없어서 못간다. 당장 뱃삯이라도 있어야지 조선선교하라고 하면서 어떻게 맨손으로 가라고 하느냐"
이에 대해서 브뤼기에르 신부는 이유 중 가장 합당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는데 돈이 필요했다면 예수 그리스도도는 재벌아들로 태어났을 것이며,
그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서도 복음을 전했는데 그를 본받아 복음을 전한다는 이들이
어떻게 돈이 없어서 무엇을 못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선교를 하자고 함에 돈이 없어서 못한다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그대들에게 진짜 없는 것이 무엇인가?
돈인가,
아니면 신앙인가..
얼마나 무서운 지적인가....
둘째, "보낼 신부가 없다,"
이것은 말은 된다. 그렇지만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할 때 열두 제자를 거느리셨다.
지금 사도로서 봉사하는 사제 수가 몇 명이냐, 열두 명은 더 되지 않느냐?
그럼 예수님 시대보다도 훨씬 많다."
셋째, "도대체 조선이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어찌 가느냐."
이에 대해서브뤼기에르 신부는 "대단히 부끄러운 얘기다.
그들은 사제도 없는 곳에서 이미 순교를 하며 목자가 있는 곳을 찾아 그 어두운 곳에서 편지까지 보냈는데,
목자라는 사람들은 양떼의 편지를 받고도 그게 어딘지 몰라 갈 수 없다니 말이 되느냐, 찾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조선까지 갈 수 있을지 그것도 문제고 또 조선은 현재 박해를 하고 있어 신부를 보내봐야 붙잡혀 죽는데 거기를 어떻게 보내느냐."
"쓸데없는 소리 이제 그만하자. 그러한 조선에 사제가 가서 교회가 손해볼 거 없다.
사제가 양떼를 만나면 사목을 해서 좋고 가서 죽는다면 순교자를 얻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한 말이 절대 맞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 백가지 이유 때문이 아니라 신앙이 모자라고 애덕이 모자라는 거다.
내 말이 안 맞아도 좋으니 실제로 조선에 사제가 한 사람 가야하지 않느냐.
한사람도 갈 사람이 없다면 나라도 가겠다."
이렇게 해서 스스로 조선파견을 자청하게 된다.
교황에게 이 편지를 발송해놓고 며칠이 지난 뒤 교황에게 두번째 편지를 다시 썼다.
"조선 평신도들의 절절한 요청에 너무 흥분하여 제가 가야한다는 이유를 앞에 적은 바와 같이 보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믿음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니고 윗분들이 결정할 일입니다.
제 논리가 맞든 안맞든 관계치 마십시오. 저는 장상이 결정하시는대로 따르겠습니다.
이제 저는 순명하기 위해서 지금부터 이곳에서 영원히 머무를 것처럼 일하면서 곧 떠날 것처럼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제의 겸손과 순명인 것이다.
이 편지가 교황청에 가는데, 당시의 시스템으로 우리나라에서 편지를 보내면 교황청 가는데 1년 걸렸다.
편지가 갔을 때는 레오 교황이 돌아가시고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었다.
전에 레오 교황이 계실 적에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딴 교황이 받으니 편지내용을 알 수가 있겠나.
그런데 이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바로 조선에서 온 편지를 받고 가장 감동했던 바로 그 카펠라리 추기경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름 모를 한 신부가 그렇게 열렬한 편지를 보내오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주저하지 않고 바로 1831년 9월 9일 두개의 교서를 동시에 발표한다.
첫번째 교서는 "조선교구를 완전히 독립시켜서 독립된 교구로 설정한다"는 것이고
두번째 교서는 "그 최초의 독립된 교구의 초대교구장으로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한다."는 것이었다.
보통은 교서가 '시스티나 성당'에서 발표되는데 이 교서는 9월 9일 '마리아 성당'에서 발표되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주보가 마리아가 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내 양떼가 기다리는 조선으로
조선은 1910년에 한일합병이 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그 15년 전, 청나라에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라고 요청한 일이 있었다.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조선이 독립국이 되면 일본이 조선을 쳐도 중국이 참견을 못하는 이유때문이었다.
청나라는 일본의 등살에 못이겨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 아니고 독립국임을 선언한다.
이것이 국제적으로 우리나라가 독립국임을 선포한 유일한 선언이라고 한다.
이 창피스러운 역사를 얘기하려면 한이 없지만,
어쨌든 한일합방이 되기 60여년 전인 1831년 9월 9일에 교황청에서는 이미 조선교구를 독립교구로 인정했다.
그것은 무슨 의미겠는가..
조선을 하나의 독립국가로 인정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 외교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하겠다.
교황청에서 이렇게 발표하던 때에 당사자인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신부는 태국에 있었다.
그는 근 1년 뒤인 1832년 7월 25일 그 소식을 듣고 3일 만에 바로 출발한다.
근데 이때 브뤼기에르 신부는 조선이 어디인지 조차도 모르고 돈도 없었다.
그가 보낸 편지의 마지막 구절을 보면, "영원히 일할 것처럼 머물면서 곧 떠날 것처럼 준비하겠다."고 했었다.
브뤼기에르 신부가 태국을 위해 얼마나 헌신적으로 사목을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영원히 머물 것처럼 일했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교구 교구장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 딱 3일 만에 떠난다.
곧 떠날 것같이 준비를 했다는 이야기이다.
출발할 때 조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말레시아 페낭의 신학교에 공부하러 왔다가
졸업을 못한 왕요셉이라는 자에게 길 안내를 부탁하였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샴(태국)에서 갖고 있던 돈을 다 주고 중국에 들어가는 배표를 달라고 했다.
샴에서 중국에 가려면 홍콩을 거쳐야 하는데 상당히 먼 거리에 돈을 세어보니 거기 가는 표를 못주겠다고 한다.
그러자 "그럼 이 돈 가지고 갈 수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
"마닐라입니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기가막히게도 마닐라로 간다.
마닐라에는 스페인이 전교를 해서 교구가 이미 세개나 있었다.
주교가 세분이나 계신데 주교 한분이 또 오시는 형국이니,
아, 필리핀에 교구가 하나 더 생겨 교황님 교서를 들고 오는가 보다 하며 정중히 모신다.
"어느 쪽에 교구가 새로 생겼습니까?"
"조선 입니다."
마닐라 주교는 조선이 어디 있느냐고 다시 묻는다.
만주 남쪽, 중국 옆에 있다고 대답하자 마닐라 주교가
"길을 잘못 들었다 한다. 홍콩으로 가시지 왜 이리로 왔습니까?'
"내가 가진 뱃삯으로 여기까지밖에 올 수 없었습니다."고 하자 마닐라의 세분 주교가 힘을 모아 여비를 구해주고,
그렇게 중국으로 출발했는데 이 배가 상해에 도착하기 전에 해적에게 잡히고 만다.
마닐라 주교들께 얻은 그 귀중한 돈을 홀라당 털리게 되고, 돈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가장 부자라고 생각한 해적들은
더 털면 나올지 모른다 생각하고, 꽁꽁 묶어 배 밑에 처넣기까지 했다.
배 밑바닥에서 배가 고픈거는 둘째 문제고 3일인가를 물한모금도 먹지 못했으니 얼마나 목이 타 죽을 지경이겠는가.
입 안에 침이 말라 버리면 혓바닥이 입천장에 붙어서는 잘 안떨어지는 법,
안붙게 하려고 손가락으로 시시각각 입천장에서 혓바닥을 떼어내는 고통을 겪으면서 조선사목길에 올랐던 것이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혓바닥을 떼면서 부잣집 빵 부스러기 주워 먹던 나자로를 묵상했다.
"나는 부자보다 낫다. 나는 목은 말라도 불 속은 아니다."
얼마나 대단한 신앙인가...
그 배 밑바닥에 버려진 채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중국에 도착해서 여행을 시작하는데
놀라운 것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를 적어 두었다는 사실이다.
일기에는 천문, 지리, 풍토, 그 지역의 민속, 심지어 식물채집까지 다 들어 있다.
브뤼기에르 신부의 해박한 지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중국에 도착해 첫번째 호소하는 것이 먹을 음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중국음식 이름을 몰라 기록하지 않았지만 재미있는 것은 그 설명을 읽으면 어떤 음식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도대체 주는 것마다 먹을 수가 없는데 먹을 수 있는 것을 하나 발견하였다.
중국사람들은 밀가루로 빵을 찌는데 우리처럼 그냥 찌면 얼마나 좋으랴. 종잇장처럼 얇게 찐다.
그리고 그 안에 고기와 온갖 채소를 넣어 딱 감아 싼다.
이걸 먹으려고 터뜨리니 그 안에 마늘과 온갖 향료가 들어 있어서 도저히 못먹겠다.
안의 것을 모두 빼고 빵을 먹어보는데 냄새가 빵에 배어 먹을 수가 없다."
그러니 노상 굶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기막힌 고통 속에서도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가야 한다. 내 양떼가 기다리는 곳으로.
내가 가야 할 곳이 얼마나 멀고 얼마나 험난한지 모른다.
단 하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당신이 내게 맡기신 당신의 양을 만날 수 있을 때까지 가야한다는 것이 나의 임무임을 안다."
1년이 지난 뒤에 그의 편지 속에서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제 내가 가지고 왔던 마지막 차도 다 마셨다. 먹을 것은 하나도 없다.
왕요셉이 비록 신학생이었지만 이 극악한 상태에서 나를 주교로 대접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내 몸무게는 샴을 출발하던 때의 절반으로 줄었다."
2년이 지난 어느 날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내 몸무게가 출발할 때의 3분의 1이다. 내 몸에는 털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다 빠졌다.
온갖 짐승과 곤충들과 기후변화로 피부도 성한 곳이 없다. 이제 내가 갈 수 있을런지 하느님만이 아신다.
나는 다만 양떼가 기다리는 곳을 향하여 하느님만을 의지하며 가고 있다."
박해가 있으니 그나마 낮에 못 간다.
낮에는 어디든지 숨어서 자고 밤에 또 걸어야 했다.
어디가 길인지 모르는 밤길을 그렇게 걷다가 샴을 떠난지 2년 2개월 17일 만에 브뤼기에르 신부는
북만주의 펠리구라는 교우촌에 도착하였다.
밤새 걷다가 12시쯤 도착했다 한다.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데 굶주렸어도 먹을 수가 없다.
그의 설명을 보면 아마 호박인 것으로 짐작된다.
"호박 삶은 물을 두 모금 마셨다.
나는 지금 나무 밑에서 자둬야 오늘 밤에 또 출발할 수 있다."
그 편지의 마지막 구절이다.
그 글을 남기고 주무셨는데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셨다.
조선의 초대 교구장은 이렇게 돌아가셨다.
그렇지만 그의 사도적 열의와 2년에 걸쳐 대륙을 횡단한 기막힌 노력은 조선 평신도들의 열의와
세계교회의 응답이라는 차원에서 우리에게 깊고도 깊은 감명을 준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로부터 조선교구 설정과 함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주교는
그의 첫 사도직 임무를 꼽으라면 조선인 사제 양성일 것이다.
그 첫 결실이 바로 한국인 사제의 맏배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이다.
선교사로 지원하기 전 프랑스 남부 카르카손 교구 대신학교 교수로 재직했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교구자립을 위해 조선인 성직자를 양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자각했다.
그는 신학교 교수 경험이 있던 중국 쓰촨교구 선교사 앵베르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영입하고,
또 중국 선교사 중 누구보다 열정적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를 받아들인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게 조선 국경 인근 지대에 어느 곳에나 조선인 신학교를 설립하고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 보장을 위해 중국 요동 지방에 파리외방전교회가 관장하는 교구를 설정해 줄 것도 청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또 교황에게
조선인 사제들이 라틴어를 능통하게 하지 못할 경우 약식 전례를 할 수 있도록 관면해 달라고 청하고,
자신뿐 아니라 조선교구 소속 사제들이 모든 교회 직분과 교회법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줄 것을 건의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이 모든 건의를 수락하고,
조선인 사제 양성과 조선교구 자립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않았다.
그 결과,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훈을 받고 조선에 입국한 첫 서양인 사제 모방 신부는
곧바로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세명의 조선인 신학생을 선발해 마카오로 유학 보내 사제로 양성한다.
"조선 왕국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우리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 삶을 바칠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위하여 성사를 거행하고, 성교회의 경계를 넓혀 나갈 조선인들을 사제로 서품할 것입니다"
(브뤼기에르 주교 1832년 6월 26일자 편지 중에서).
초대 조선교구장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입국을 위해 말레이시아 페낭에서 출발해
중국 대륙을 횡단하는 힘겨운 여행 중 1835년 10월 20일 중국 땅 마찌아쯔에서 영양실조와 병마로 급서했다.
초대 조선교구장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1792~1835) 주교의 문장
조선교구 초대교구장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주교의 불타는 사제적 열의와 기막힌 일생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회자되게 만든다.
브뤼기에르 신부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받기 전 태국에서 포교활동을 어떻게 하셨는지 알면,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문명의 혜택도 문화의 혜택도 받을 수 없는 시대인데다 태국은 미신이 특히 심해 사람 목숨을 가벼이 보았다.
이런 경향은 태국뿐 아니라 환태평양 연안 아시아지역이 거의 같았다.
아기를 낳아도 이름을 곧 짓지 않았는데 그것은 곧 죽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갓난이'라 부른다.
그러다가 그 아기가 죽고 둘째 아기가 태어나면 또 '갓난이'..
그런데 갓난이가 안죽고 새로 동생이 태어나면 동생은 '햇 간난이' 형은 '묵은 갓난이'가 된다.
이러다가 먹고 살기 어려우면 애 하나를 내버리게 되는데,
외국 선교사들이 애를 버리는 것, 그리고 애가 너무 쉽게 죽는 것을 제일 비참하게 느끼며 정성을 다해 집들을 방문하지만
남자가 여자같이 시커먼 원피스를 입고 있으니 이상하게 여기고 기분 나빠한다.
"빨리 나가라"고 내쫓고 나면 물 뿌리고 소금 뿌리고 천대를 받기 일쑤였다.
만나 주어야 교리설명을 하든지 말든지 할텐데..
프랑스 같은 천주교 국가에서 자라고 수도생활을 하다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겠다는 지극히 거룩한 마음으로 왔는데
소금 뿌리며 "가라" 그러면 누구든지 좌절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 교회 초대 선교사들은 이런 현장에서 실망하지 않고 꿋꿋이 이겨냈다.
브뤼기에르 신부도 전교는 고사하고 태국 사람을 만날 수조차 없는데도 선교를 포기하지 않았다.
브뤼기에르 신부님의 선교활동은 좀 독특했다.
아무 소리 안하고 아침식사를 하고 나면 골목골목을 다는데, 무수히 많은 아기들이 여기 저기서 죽어갔다.
그런 곳마다 찾아가서 아기의 마지막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며 도와주었다.
자식이 죽는 것을 보며 울고 있는 엄마가 죽어가는 자식을 돌봐주는 사람을 물러가라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도와주면서 기회만 생기면 그 아기의 이마에 대세를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과 장소, 아기의 본명을 적어 두었다.
대세를 주고 이름을 적고, 대세를 주고 이름을 적고 온종일 다니면서 이 일을 수차례 반복했다.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오면 제대를 차린 뒤, 그렇게 종일 적은 것을 제대 위에 올려놓고 미사를 봉헌하면서 이렇게 기도했다.
"어린 천사들이여,
나는 어쩔 수 없습니다만 당신 민족을 하느님께서 구원해주실 수 있도록 어린 천사 당신들이 천국에서 기도하십시오."
방콕에서 첫 6개월 동안 이분이 사목을 하시면서 이렇게 세례 준 어린이가 1,600명이나 되었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일하는 곳마다 조선의 평신도들이 열렬히 사제를 청원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며
그를 만난 모든 사제들이 감동을 받아 조선사목을 자청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상황으로 조선에 올 수 있다는 신부가 한분도 없던 상태에서
브뤼기에르 신부의 그 열의가 조선사목을 지원하는 사제들이 생겨나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브뤼기에르 신부가 주교로 임명되어 우리나라로 오기 전에 베이징의 사라이바 주교가 두분의 신부를 파견한 적이 있는데
한분은 국경에서 병들어 돌아가시고 또 한분은 병 때문에 난징으로 되돌아가서 더 못 오셨다.
밖에서는 이처럼 눈물겨운 노력을 하고 있었지만,
온전히 바깥 세계와 막힌 조선의 심산유곡에서는 교우촌을 만들고 사제영입운동을 시작한 천주교 신자 2세대들은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아무리 신부를 보내달라 해도 소식은 없고 적막강산이었으니 말이다.
이럴 때 포교성성에서 중국에 있는 한 신부를 우리나라에 파견한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으로 오고 있으니 영접 준비를 하도록 한 것인데,
이 때 파견된 신부가 누구냐 하면 파치피코라는 스페인식 이름을 가진 유방제라는 중국 신부였다.
유방제 신부가 한국에 들어오던 해가 1834년이다.
1801년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신 지 33년 만에 신부가 다시 들어온 것이었다.
포교성성 장관으로부터 교구장인 주교를 영접할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받고 들어왔는데,
이 양반이 기가 막히게도 현실을 모르는 행정명령이다라고 생각하여 삐닥하게 사목을 하게 된다.
중요하게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주교도 사람이니까 잘못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주교라는 사람은 잘못 판단해도 하느님과 성령은 잘못 판단하지 않으시는 분..
하느님은 인간의 실수와 죄마저도 구원사업에 유익하게 쓰신다.
유다의 배반마저 십자가의 공로로 연결되었던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신자들은 여기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하며, 이것이 바로 곧 교회정신인 것이다.
(하늘로 가는 나그네...발췌)
첫댓글 그대들에게 진짜 없는 것이 무엇인가?
돈인가, 아니면 신앙인가..
지금부터 이곳에서 영원히 머무를 것처럼 일하면서
곧 떠날 것처럼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나는 가야 한다. 내 양떼가 기다리는 곳으로.
내가 가야 할 곳이 얼마나 멀고 얼마나 험난한지 모른다.
단 하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당신이 내게 맡기신 당신의 양을 만날 수 있을 때까지 가야한다는 것이 나의 임무임을 안다.
나는 다만 양떼가 기다리는 곳을 향하여 하느님만을 의지하며 가고 있다.
하느님은 인간의 실수와 죄마저도 구원사업에 유익하게 쓰신다.
유다의 배반마저 십자가의 공로로 연결되었던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