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산장(毘盧山莊)과 백세청풍(百世淸風)
이영호
예전에는 일기 예보가 틀리기도 했는데 요사이는 과학이 발전하여 비교적 정확하게 맞춘다. 2024년 11월27일 수요일 아침 창밖에는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다.
어제 화요 문학모임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바람이 세차게 불고 차가운 공기에 우박이 떨어진다. 버스를 타고 서둘러 집에 돌아왔다. 저녁 일기 예보와 밤사이에 전국적으로 눈이 내린다고 하였는데 정말 내리고 있다. 올겨울 들어 첫눈이다.
밤사이 연이틀 내린 폭설로 전국에 대설 주의를 보도하면서 11월에 내리는 역대 최고의 첫눈이라고 한다. 특히 이번 눈은 습설(濕雪)과 강한 바람까지 불어 곳곳에 교통이 끊어지고 인명사고 가옥 건물 피해가 이어지고 있다.
뉴스특보에서 중국 동북부 지방에도 강풍과 폭설로 인명피해와 재산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고 한다. 창밖에는 함박눈이 계속 내리고 있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자니 마음은 밖으로 뛰어나가 눈을 흠뻑 맞으며 뛰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어릴 때 눈 하늘을 바라보면서 입을 벌리고 눈꽃 잎을 받아먹고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만들며 마음껏 뛰어놀던 기억들, 이제는 아름다운 추억의 마음뿐이다.
베란다 창문을 열고 내리는 눈을 손바닥에 받아 입에 넣어 보았다. 추억의 맛이 달콤하다.
나는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한참 바라보다가 오늘은 꼼짝하지 말고 방콕 신세가 되어야겠다고 생각 실내 온도를 높이고 침상용 소파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거실 중앙 벽에 백세청풍이라는 액자에 시선이 간다.
희미해진 기억과 그리움이 슬며시 파고든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2000년 겨울 방학 신년 초에, 서로 가까이 지내고 있는 김 교수의 제의로 선생님 몇 분과 속리산 금강골 비로산장에 들렀다.
속리산 국립공원 안에 자리한 독특한 숙박시설이다. 법주사에서 출발 세조 길을 따라 1시간 정도 걸어가다 보면, 속세의 마음을 씻는다는 세심정에서 계단 지옥이라는 경업대를 지나 문장대까지 이어진 계곡 중간에 아담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주인의 안내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산장 주인이 우리 일행에게 생년월일과 이름을 써달라는 것이다.
영문을 몰라 하고 있는데 김 교수가 주인이 마음이 내키는 날과 사람들에게 자기가 직접 쓴 붓글씨를 준다는 것이다. 주인과 김 교수와는 앞면이 있는듯하다. 시키는 대로 생년월일과 이름을 적어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한잔하고 있는데, 써놓은 글을 나누어 주는 것을 받아보니 나에게 써준 글이 액자 속의 백세청풍이다.
百世淸風(백세청풍)은 百代(백대)에 부는 맑은 바람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백세는 오랜 세월 (1세 30년, 백세 3천 년) 또는 영원을 뜻하고 청풍은 매섭도록 맑고 높은 군자의 절개나 덕을 비유한다. 따라서 백세청풍은 영원토록 변치 않는 맑고 높은 선비의 절개를 의미한다.
백세청풍이란 은나라가 망하자 ‘의롭지 못한 주나라 곡식을 먹을 수 없다.’.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만 캐어 먹다 굶어 죽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뜻하는 글귀이며, 네 글자 속에 들어있는 속뜻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고 맑고 높은 선비가 지닌 절개를 말한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가장 선호하는 글귀였다고 한다. 충신들의 고택에 현판으로 걸거나 거주지 바위나 비석에 새겨 기념하였다. 한반도 곳곳을 여행하다 보면 오래된 정자나 큰 바위 위에 백세청풍이란 네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흔히 보게 된다.
경남 함안의 채미정과 서산서원에 있는 현판,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 있는 산 강 강당에 있는 현판, 충남 금산군 부리면 불이리,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 있는 청풍계에 있는 바위에 새겨져 있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자 장렬히 순절한 김상용의 옛집 터 자리에 있고 주희가 썼다고 전해지는 백세청풍 각자가 암벽에 남아있다.
조선 후기 화가 겸재 정선이 청풍 계도를 많이 그렸는데, 인왕산, 한양과 금강산을 주제로 한 청풍계(淸風溪)의 풍경과 청풍지각(淸風池閣)을 표현한 진경산수화를 남겼다.
우리 역사 속에 남아있는 한 시대 한세월이 그만큼 어렵고 힘겨웠으며, 그 고통스러운 시대에 맞서 온몸으로 저항한 절개 높은 선비가 많았다는 뜻이다.
맹자는 ‘伯夷의 청풍을 들으면 완악한 사람은 청렴해지고 나약한 사람은 뜻을 세운다’라고 하여 그 뜻을 새긴 인물이 안중근 의사가 쓴 글에도 남아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백세청풍은 나의 생년월일과 운명, 올곧은 나의 성품에 적용하는 글귀라 생각하여 지금껏 액자로 만들어 걸어놓고 있다.
나에게 글귀를 써준 분은 속리산 금강골 비로산장(毘盧山莊), 김태환(金太煥) 서예가 모정선생(茅亭 先生)이다.
김태환 서예가는 원래 공무원이었는데 어느 날 친구와 함께 속리산에 왔다가 산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그길로 직장을 그만두고 시골 땅을 팔아 속리산에서 기념품을 시작으로 사업을 하였다. 장사 경험이 없었던 그의 사업이 순탄할 리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어 움막 생활을 하면서 우여곡절 고생 끝에 지금의 산장이 되었다.
1965년에 문을 연 비로산장은 여행객에게 따뜻한 밥과 잠자리를 내어 주었고, 안주인 이상금 여사는 지나가는 여행객 중 목마른 사람들에게 손수 물을 떠다 주기도 하고 항상 따뜻한 마음으로 대했다는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생전에 비로산장에 여러 번 방문했는데 그의 휘호, 좌우명으로 유명한 대도무문(大道無門)이 바로 이곳에서 탄생하였다고 한다. ‘큰길에는 문이없다’ 라는 뜻으로 큰 깨달음이나 진리에 이르는 데는 정해진 길이나 방식이 없음이다.
김영삼이 대선에 패배 직후 1988년 속리산에 방문 비로산장에 들러 주인에게 써준 글이 대도무문이다. 그 화답으 로 김태환이 써준 글은 백인만화(百忍萬和), 백번 참으면 만 가지가 화목해진다는 뜻이다.
새해가 되면 정 재계인사들과 학자들이 붓글씨 받으려고 선생을 찾아 사훈, 가훈, 원하는 글씨를 써주고 글 값을 주려고 하면 ‘나는 글씨 장사하는 사람이 아니다’라며 그냥 보냈다고 한다.
소리 소문이 외국에까지 알려져 독일의 헬무트 콜 총리도 다녀갔다고 한다.
속세를 떠나 50년 넘게 평생 지극한 불심으로 부처님을 받들며 산장을 지킨 부부는 2010년 안주인이 88세로, 2012년 김태환 선생은 93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고 막내딸이 산장을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비로산장 처마 끝에는 현판과 붓글씨가 가득하다. 모두 김태환 선생의 작품이다. 지금도 비로산장에 가면 누구나 따뜻한 커피를 무료로 마실 수 있다고 한다.
그때 같이 동향했던 김 교수님도 세상 떠나고, 박 선생도, 오 선생도 떠났다. 뒤돌아보니 허망하기로 연극 같은 인생이다.
나의 건강이 더 힘이 빠지기 전에 시간을 내어 김태환 선생을 뵈려 비로산장에 가 봐야겠다.
2024. 11.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