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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이씨 태조 이성계의 백형 완산부원군 이원계의 모친이 후궁 한산이씨라는 온라인의 글이 검색하면 가끔 보이고 이원계를 모신곳의 비석에 모친이 한산이씨라는 글을 새겨 두었다고 하고 " 마치 한산이씨가 왕족이 된것 처럼 속으로 자랑스러워 하는 분들을 볼때마다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기분이 썩 좋은 것만은 아니다."
21세기에 왕족인가 아닌가보다 당시의 사상이나 시대상 기록물을 통해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접근해야만 오류를 범하지 않는 것이다.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폐렴 신종코로나바이러스도 마찬가지로 전 세계가 시름하고 걱정할때 정확한 정보이어야 믿음과 신뢰가 쌓이는 법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이원계
李元桂
고려출생 - 사망1330년(충숙왕 17) ~ 1388년(우왕 14)
성격무신
본관전주(全州)관련
사건위화도회군
대표관직(경력)내부령, 동지밀직
정의
1330(충숙왕 17)∼1388(우왕 14). 고려 후기의 무신.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고려의 삭방도만호 겸 동북면병마사 이자춘(李子春: 桓祖)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이씨이다. 조선의 건국자 태조이성계(李成桂)의 백형이다.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몰라도 이자춘을 검색하면 후궁 한산이씨 자 이원계라는 글이 검색되고 전주이씨들이 그 정보를 조선말 고종시대 알았다고 하고 숙종시대 선원계보기략에 있다니 하면서 소문에 소문을 더하고 가짜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다.
자신의 선조가 노비였고 백정이었다면 후궁이나 보잘것 없는 분이었다고 하면 화를 내고 모두 양반이네 하는 것이 오늘날의 세상이고 지금은 이것조차도 관심없는 신분의 차별없는 시대가 된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나간 기록만은 바르게 읽어보고 후세에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글을 남겨두고자한다.
목은문고 15권에 비명이 나온다. 한산이씨 목은이색 대학자의 비명이다. 태조 이성계의 부친 환조 이자춘의 비명이다.
측실(側室) 이씨(李氏)아들 원계(元桂)를 낳았는데, 지금 추충절의보리공신(推忠節義輔理功臣) 중대광(重大匡) 완산군(完山君)이다.
목은 이색이 지은 비명 어디에도 " 측실 이씨" 비명이후 조선건국으로 이자춘이 태조 이성계의 부친이므로 왕이되고 환조가 되여 "후궁 이씨"로 변했다해도 " 후궁 한산이씨" 라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다만 " 측실 이씨" 만이 기록되어 있고 조선초기 왕실의 기록 어디에도 이자춘의 부인이 한산이씨라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한산이씨 목은 이색 할아버지가 이상한 사람이라서 자신의 친척도 같은 혈족도 몰라보는 바보 멍청이라서 한산이씨라는 것을 고의로 빼버렸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그럴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조선초기 여러가지 다른이의 기타 자료에도 "측실 이씨" 라고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21세기 더 올라간다면 이백년도 안되는 사이 누군가가 가짜정보를 생산하였고 마치 그 정보가 진짜인것 처럼 기록하고 바꾸었다는 것이다.
고려국(高麗國) 증(贈) 순성경절동덕보조익찬공신(純誠勁節同德輔祚翊贊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문하시중판전리사사(門下侍中判典理司事)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 영록대부(榮祿大夫)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 이공(李公)의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대성(大姓)이다. 신라(新羅)의 아간(阿干) 휘(諱) 광희(光禧)가 사도(司徒)인 삼중대광(三重大匡) 입전(立全)을 낳고, 사도가 긍휴(兢休)를 낳고, 긍휴는 염순(廉順)을 낳고, 염순은 승삭(承朔)을 낳고, 승삭은 충경(充慶)을 낳고, 충경은 경영(景英)을 낳고, 경영은 충민(忠敏)을 낳고, 충민은 화(華)를 낳고, 화는 진유(珍有)를 낳고, 진유는 궁진(宮進)을 낳고, 궁진은 대장군(大將軍) 용부(勇夫)를 낳고, 대장군은 내시 집주(內侍執奏) 인(隣)을 낳았다. 집주는 시중(侍中) 문공(文公) 휘 극겸(克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장군(將軍) 양무(陽茂)를 낳고, 장군은 상장군(上將軍) 이공 강제(李公康濟)의 딸에게 장가들어 안사(安社 목조(穆祖))를 낳았다.
안사는 성격이 호방하여 사방을 경영해 보려는 뜻을 지녔다. 일찍이 의주(宜州 덕원(德源)의 옛 이름)의 장관이 되어서 은혜로운 정사를 베풀었는데, 인척(姻戚)과 관계된 일로 그만두고는 강릉부(江陵府) 삼척현(三陟縣)으로 옮겨 가서 살았으니, 이는 그곳의 풍토(風土)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있다가 중원(中原)으로 들어가서는 몽고씨(蒙古氏)에게 벼슬하여 남경(南京) 오천호소(五千戶所)의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되었다. 다루가치가 천우위 장사(千牛衛長史) 이공(李公) 휘 공숙(公肅)의 딸에게 장가들어 천호(千戶) 행리(行里 익조(翼祖))를 낳으니, 행리가 부친의 직책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원 세조(元世祖)가 일본을 정벌하려고 하자 천하의 병선(兵船)이 모두 해동(海東)으로 집결하였다. 이에 우리 충렬왕(忠烈王)이 중신(重臣)을 보내어 큰 전함을 건조(建造)하게 하는 한편, 명장(名將)을 선발하여 정예 군사를 이끌고 가서 일본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때 남경(南京)의 천호(千戶)도 조정의 명을 받들고 와서는 충렬왕을 알현하게 되었는데, 두 번 세 번 횟수가 거듭될수록 더욱 공경하고 경건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왕이 이르기를 “경(卿)은 본래 사족(仕族) 출신이니 어찌 근본을 잊을 리가 있겠는가. 지금 경의 행동거지를 보건대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가 있다.” 하였다.
천호(千戶)가 등주(登州)의 호장(戶長)인 최공(崔公) 휘 기열(基烈)의 딸에게 장가들어 증(贈) 찬성사(贊成事) 춘(椿 도조(度祖))을 낳았다. 찬성사가 부친의 뜻을 계승하여 우리나라의 조정에 들어오자, 충숙왕(忠肅王)이 은상(恩賞)을 더욱 풍성하게 내렸으니, 이는 그의 충성심을 북돋우기 위함이었다. 찬성사가 증 문하시중(門下侍中) 박공(朴公) 휘 광(光)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니, 이분들이 바로 공에게 고비(考妣)가 된다.
공의 휘는 자춘(子春 환조(桓祖))이요 자(字)도 자춘(子春)이다. 7, 8세 무렵부터 벌써 범상한 아이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더니, 점점 자라나면서는 말 타고 활 쏘기를 또 잘하였는데, 부친의 직책을 이어받자 사졸(士卒)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귀부(歸附)하였다. 지정(至正) 을미년(1355, 공민왕4)에 선왕(先王)을 알현하자, 선왕이 이르기를 “그대의 조부와 그대의 부친이 몸은 비록 국외에 있었지만 마음만은 항상 왕실에 두고 있었으므로, 나의 조고(祖考)께서 실로 총애하며 가상하게 여기셨다. 이제 그대도 그대의 조고에게 욕됨이 없게 하라. 나 역시 그대를 완전하게 성취시켜 줄 것이다.” 하였다.
쌍성(雙城 영흥(永興)의 옛 이름)은 멀리 떨어진 변방이라서 관리들의 행정력이 그다지 철저하게 미치지 않았을뿐더러, 땅이 비옥하여 인구가 날로 번성하였으므로, 우리 동방의 남쪽 백성들 가운데 생활 터전이 없는 자들이 그곳으로 많이 이주하였다. 국가에서 이런 사실을 원(元)나라의 중서성(中書省)에 알리자, 성지(聖旨)를 받든 차관(差官)이 왔고, 요양성(遼陽省)에서도 차관이 왔다.
이에 선왕이 성(省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의 낭중(郞中) 이수산(李壽山)을 급히 보내 그들과 만나서, 신구(新舊)의 호적(戶籍)에 편입된 백성들을 분간(分揀)하게 하였으니, 이를 일러 ‘삼성조감호계(三省照勘戶計)’라고 한다. 그런데 그 뒤에 백성을 안정시키는 계책이 타당성을 잃은 나머지 시간이 갈수록 그곳을 떠나 유랑하는 백성들이 늘어나자, 상이 공에게 명하여 그곳을 주관하게 하였으니, 이는 몇 대에 걸친 충성심을 보상하여 상을 내리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백성들이 생업에 안정을 되찾아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병신년(1356, 공민왕5) 봄에 공이 조정에 오자, 선왕이 영접하며 이르기를 “완악한 백성들을 무마하여 안정시키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은가.” 하였다. 이때에 기씨(奇氏 기철(奇轍)) 일당이 반란을 꾀한다는 비밀 보고가 들어왔는데, 쌍성의 관리 중에도 연루된 자가 나왔다. 이에 선왕이 공에게 이르기를 “경은 돌아가서 우리 백성들을 진정시키도록 하라. 그리고 혹시라도 변란이 일어나면 내가 명령한 대로 따라야 할 것이다.” 하였다. 5월에 기씨를 평정한 뒤에, 재신(宰臣) 유인우(柳仁雨)에게 명하여 쌍성에 가서 잔당(殘黨)을 소탕하도록 하면서, 평민들이 두려워하지 않도록 유시(諭示)하게 하였다.
그런데 유인우가 쌍성의 경계에 도착한 뒤에도 머뭇거리기만 할 뿐 감히 전진하지 못하자, 상이 공에게 소부윤(少府尹)을 제수하고 중현대부(中顯大夫)의 품계를 내린 뒤에, 병마 판관(兵馬判官) 정신계(丁臣桂)를 통해서 공에게 내응(內應)하도록 유지(有旨)를 전하였다.
공이 왕명을 듣자마자 그 즉시로 군사들에게 떠들지 못하도록 하무를 물리고 행군하여, 유인우의 군대와 합세한 뒤에 소생도경(小生都景)을 축출하니, 소생도경이 처자도 버려둔 채 밤에 도망을 쳤다. 이에 상이 명하기를 “쫓아낼 자를 쫓아냈으니, 이제 남은 사람들은 모두 우리 백성이다. 서로들 해치지 말고 서로들 모질게 굴지 말라.” 하니, 백성들이 다 함께 기뻐하면서 음식물을 들고 나와 군사들을 환영하였다. 이렇게 해서 이 지역의 주현(州縣)들도 모두 옛 이름을 회복하게 되었으니, 고주(高州), 요덕(耀德), 장평(長平), 원흥(元興), 정주(定州), 함주(咸州)가 바로 그것이다.
9월에 공의 품계를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올리고 사복경(司僕卿)으로 벼슬을 옮겨 주는 한편, 개경(開京)에 저택을 하사하여 그대로 머물러 살게 하였다. 이듬해 가을에 천우위 상장군(千牛衛上將軍)으로 승진하면서 통의대부(通議大夫)와 정순대부(正順大夫)로 가자(加資)되었다. 이해에 내가 간의대부(諫議大夫)가 되어 조정 안에 있다가 공의 얼굴을 보았는데, 마치 주사(朱砂)를 칠한 듯 붉고 윤이 났으며 수염이 무척 아름다웠다. 내가 감히 자리를 건너가서 서로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으나, 공의 그 풍채만큼은 아직도 나의 마음과 눈 속에 남아 잊혀지지가 않는다.
경자년(1360, 공민왕9) 봄 3월에 영록대부(榮祿大夫)로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를 맡고 있다가,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로 나갔는데, 그해 4월 갑술일에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으니, 그때 나이가 46세였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현릉(玄陵 공민왕)이 그지없이 애도하면서 사신을 보내 조곡(弔哭)하는 한편, 예법에 따라 부의(賻儀)를 전하게 하였다. 사대부들도 공의 죽음을 듣고는 모두 놀라면서 “동북면(東北面)에 이제는 인물이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해 8월 병신일에 함주(咸州) 동쪽 귀주(歸州)의 언덕에 안장(安葬)하였다.
부인 최씨(崔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해졌는데, 증 문하시중(門下侍中)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 휘 한기(閑奇)의 딸이다. 아들의 이름은 성계(成桂)인데, 지금 충성양절익찬선위정원공신(忠誠亮節翊贊宣威定遠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판삼사사 겸 판전농시사 상호군(判三司事兼判典農寺事上護軍)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이다. 딸은 순성익위협찬보리공신(純誠翊衛協贊輔理功臣) 삼중대광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 조공 인벽(趙公仁璧)에게 출가하였는데, 지금 정화택주(貞和宅主)로 봉해졌다.
측실(側室) 이씨(李氏)는 아들 원계(元桂)를 낳았는데, 지금 추충절의보리공신(推忠節義輔理功臣) 중대광(重大匡) 완산군(完山君)이다.
김씨(金氏)는 아들 화(和)를 낳았는데, 지금 성근보조공신(誠勤輔祚功臣) 봉익대부(奉翊大夫) 동지밀직사사 상호군(同知密直司事上護軍)이다.
판삼사공(判三司公)의 전부인(前夫人)은 밀직 부사(密直副使)로 치사(致仕)한 한공(韓公) 휘 경(卿)의 딸인데, 원신택주(元信宅主)에 봉해졌다. 부인이 낳은 아들로, 방우(芳雨)는 전 예의 판서(禮儀判書)이고, 방과(芳果)는 추충여절익위공신(推忠礪節翊衛功臣) 봉익대부(奉翊大夫) 지밀직사사 겸 군부판서 응양군상호군(知密直司事兼軍簿判書鷹揚軍上護軍)이고, 방의(芳毅)는 중정대부(中正大夫) 신호위 대호군(神虎衛大護軍)이고, 방간(芳幹)은 전 군기 소윤(軍器少尹)이고, 방원(芳遠)은 통직랑(通直郞) 예의정랑 지제교(禮儀正郞知製敎)이고, 방연(芳衍)은 종사랑(從仕郞) 성균 박사(成均博士)이며, 딸 둘은 모두 어리다. 후부인(後夫人)은 판삼사사 강공(康公) 휘 윤성(允成)의 딸인데, 부인이 낳은 아들로는 고공 좌랑(考功佐郞)인 방번(芳蕃)과 군기 녹사(軍器錄事)인 방석(芳碩)이 있으며, 딸은 대호군(大護軍) 이제(李濟)에게 출가하였다.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의 아들 경(卿)은 진사(進士)이고, 후(候)는 액정 내알자(掖庭內謁者)이고, 그 밖에 사(師), 부(傅), 보(保), 백(伯)은 모두 어리며, 장녀는 미혼(未婚)이고, 차녀는 내부 부령(內府副令) 임맹양(林孟陽)에게 출가하였다. 완산군(完山君 원계(元桂))은 두 번 장가들었다. 문씨(文氏) 소생의 아들로, 양우(良祐)는 전 사복 정(司僕正)이고, 천우(天祐)는 전 호군(護軍)이며, 딸은 전 중랑장(中郞將) 이인우(李仁雨)에게 출가하였다. 김씨(金氏) 소생의 아들로, 조(朝)는 진사(進士)이고, 서(曙)는 전 낭장(郞將)이며, 딸은 생원(生員) 노신(盧愼)에게 출가하였고, 다음 딸 둘은 모두 어리다. 동지(同知 화(和))는 두 번 장가들었다. 안씨(安氏) 소생의 아들 지숭(之崇)은 전 연경궁 부사(延慶宮副使)이다. 노씨(盧氏) 소생의 아들로, 숙(淑)은 진사이고, 징(澄)은 별장(別將)이고, 다음 아들 셋은 모두 어리고, 딸 하나도 어리다.
판서(判書)는 찬성사(贊成事) 지공(池公) 휘 윤(奫)의 딸에게 장가들어 복근(福根)이라는 아들을 낳았으며, 딸 셋은 모두 어리다. 대호군(大護軍)은 간성 군수(杆城郡守) 최인두(崔仁㺶)의 딸에게 장가들어 석근(石根)이라는 아들을 낳았으며, 딸 하나는 어리다. 소윤(少尹)은 판도 판서(版圖判書) 민공(閔公) 휘 선(璿)의 딸에게 장가들어 맹중(孟衆)이라는 아들을 낳았으며, 딸 둘은 모두 어리다. 정랑(正郞)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민공(閔公) 휘 제(霽)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는데 어리다.
내가 계묘년(1363, 공민왕12)에 밀직 제학(密直提學)의 빈자리를 메우고 있었는데, 이듬해에 판삼사공이 와서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 그리고 신해년(1371, 공민왕20)에 삼사공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를 제수받던 날에, 내가 사공(司空)으로 있다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되었다. 이에 현릉(玄陵 공민왕)이 근신(近臣)에게 하문하기를 “문신인 색(穡)과 무신인 성계(成桂)가 같은 날에 문하성(門下省)으로 들어왔는데, 조정의 여론은 뭐라고 하던가?” 하였으니, 이는 대개 자긍(自矜)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씀이었다.
수십 년의 세월에 비추어 보면 조정의 반열에 공과 함께 있었던 시간이 얼마 되지는 않는다고 하겠지만, 나와 공의 우정이 마치 물처럼 담박하기만 하고, 오래되어도 서로가 공경하는 풍도를 보고는 사람들이 부러워하기도 하였다. 그러니 내가 감히 공의 부친을 나의 부친처럼 여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 때문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서 신도비(神道碑)의 명(銘)을 짓게 되었다.
명은 다음과 같다.
내가 전주 이씨 족보를 살피건대 / 我考李氏譜
신라의 대아간으로부터 비롯되어 / 新羅大阿干
부민한 이들이 관장을 한 그 뒤에도 / 膚敏旣祼將
후한 봉록의 고관들이 많이 나왔어라 / 膴仕多高官
오마의 수레 타고 삭방으로 나가서는 / 五馬游朔方
위엄과 은혜 조화된 선정을 펼치다가 / 威惠迺並彰
풍토 좋은 곳으로 거처를 옮겼나니 / 留居樂土風
삼척 땅이 마치 고향과 같았어라 / 三陟如故鄕
뜻이 어디 있었던가 중원의 벼슬 / 志欲仕中原
몸을 떨쳐 원나라로 망명했나니 / 挺身歸大元
오천호소의 다루가치 명을 받고서 / 授命長千夫
대대로 덕 베풀자 백성들이 사모했네 / 世德民懷恩
공경하는 자세로 옛 임금을 섬기면서 / 溫恭事舊君
얼마나 근실하게 문안 인사 드렸던가 / 朝騁何勤勤
근본을 잊지 않고 은혜에 보답한 일 / 報本又返始
세상을 일깨우며 공을 또 세웠다오 / 警俗仍樹勳
우리 시중공이야 더 말할 게 있으리요 / 矧我侍中公
현릉께서 그 충성심 크게 상을 내렸는데 / 玄陵大賞忠
하늘이 어찌 그렇게도 빨리 데려갔나 / 天胡奪之亟
인간의 운명은 정말 아무도 알 수 없네 / 孰司人窮通
시중공을 계승하신 우리 판삼사는 / 有嗣判三司
공과 명성 한 시대의 으뜸이시요 / 功名冠一時
자손들도 모두가 귀하게 현달하였으니 / 子孫盡貴顯
하늘이 무심하지 않은 것을 또 알겠네 / 天道非無知
뿌리가 굳건하면 가지가 무성하고 / 本固枝必茂
근원이 심원하면 멀리 흘러내리는 법 / 源遠流斯長
비명 지은 졸렬한 솜씨 부끄럽긴 하오마는 / 銘詩愧我拙
밝게 빛나는 그 덕만은 천년토록 드리우리 / 千載垂耿光
[주-D001] 얼마 …… 되었다 : 이 대목이 《동문선(東文選)》 권119의 기록에 의하면, “어떤 일로 지현의 뜻을 거스르자, 지현이 그를 해치려고 하였다. 이런 사실을 누가 공에게 알려 주자, 공이 가솔을 이끌고 몽고씨에게 망명하니, 몽고씨가 남경에 거처하게 하고는 오천호소의 다루가치로 임명하였다.[以事忤知縣 知縣謀害之 或以白公 挈家奔于蒙古氏 蒙古氏處之南京 爲五千戶所達魯花赤]”로 되어 있다. 여기서 남경(南京)은 중국의 남경이 아니라, 원(元)나라의 남경 만호부(南京萬戶府) 즉 요양로(遼陽路)에 속한 함경도 지방의 종성(鍾城)을 가리킨다. 중원(中原)이라는 용어 역시 당시에 함경도 지방까지 원나라의 행정력이 미쳤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2] 두 번 …… 보였다 : 《동문선》에는 이 뒤에 “천호가 그때마다 사죄하기를 ‘전하의 신하인 저의 선조가 북쪽으로 달아난 것은 실로 호구(虎口)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일 뿐이지, 감히 군부를 저버리려고 한 것은 아니니, 바라건대 그 죄를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였다.[每謝曰 先臣奔于北 實脫虎狼之口耳 非敢背君父也 願上釋其罪]”라는 내용이 첨가되어 있다.
[주-D003] 삼성조감호계(三省照勘戶計) : 중서성(中書省)ㆍ요양성(遼陽省)ㆍ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의 3성(省)이 공동으로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원주민과 이주민을 분간해서 호적을 작성한 일을 말한다. 이 일로 인하여 원나라와 고려가 갈등을 빚기도 하였으나, 결국에는 반원 정책(反元政策)을 펼치던 공민왕 5년(1356)에 이자춘의 내응(內應)을 받아 쌍성총관부의 지역을 99년 만에 원나라로부터 수복(收復)하는 개가를 올린다. 삼성조마호계(三省照磨戶計)라고도 한다.
[주-D004] 부인 최씨(崔氏) : 《동문선》에서는 이 대목을 “공은 모두 세 번 장가들었다.[公凡三聚]”로 시작하면서, 이씨(李氏)를 첫 번째 부인으로, 최씨(崔氏)를 두 번째 부인으로, 김씨(金氏)를 세 번째 부인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본 《목은문고》에서는 최씨를 맨 앞에 소개하고 이씨는 측실로 격하시킨 것이 주목된다. 그리고 공의 자손들을 소개할 때에도 《동문선》에서는 이 순서를 따르고 있는 반면, 본고에서는 판삼사공(判三司公) 즉 이성계를 맨 먼저 소개하고 있다.[주-D005] 정화택주(貞和宅主) : 《동문선》에는 진화택주(眞和宅主)로 되어 있다.
[주-D006] 마치 …… 하고 : 《장자(莊子)》 산목(山木)에 “군자의 우정은 물처럼 담박한 반면에, 소인의 사귐은 단술처럼 달콤하다.[君子之交淡若水 小人之交甘若醴]”는 말이 나온다.
[주-D007] 오래되어도 …… 풍도 :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안평중은 남과 잘 사귄 사람이다. 시간이 오래되어도 상대방을 여전히 공경하였으니.[晏平仲善與人交 久而敬之]”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08] 부민(膚敏)한 …… 나왔어라 : 신라가 망하고 고려 조에 들어와서도 높은 관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는 말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文王)에 “아름답고 민첩한 은나라 관원들이 나라가 망한 뒤에, 주(周)나라 서울에 와서 강신(降神)하는 술을 따라 올리며 제사를 돕는구나.[殷士膚敏 祼將于京]”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9] 오마(五馬)의 …… 나가서는 : 이자춘의 선조인 이안사(李安社)가 함경도 덕원(德源)으로 나가서 다스린 것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때 태수(太守)는 다섯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탔으므로, 지방 장관을 보통 오마로 비유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2
高麗國贈純誠勁節同德輔祚翊贊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門下侍中判典理司事完山府院君,朔方道萬戶兼兵馬使,榮祿大夫判將作監事李公神道碑銘。幷序。
全之李氏。大姓也。新羅阿干諱光禧。生司徒三重大匡立全。司徒生兢休。兢休生廉順。廉順生承朔。承朔生充慶。充慶生景英。景英生忠敏。忠敏生華。華生珍有。珍有生宮進。宮進生大將軍勇夫。大將軍生內侍執奏隣。執奏娶侍中文公諱克謙之女。生將軍陽茂。將軍娶上將軍李公諱康濟之女。生安社。性豪放。有志四方。嘗知宜州有惠政。以姻婭故。移居江陵府之三陟縣。蓋樂其土風也。旣而入中原。仕于蒙古氏。爲南京五千戶所達魯花赤。達魯花赤娶千牛衛長史李公諱公肅之女。生千戶行里。襲其職。 世祖征日本。天下兵船會于海東。我 忠烈王遣重臣。造大艦。選名將。領精卒往討焉。時南京千戶亦以 朝命來會。見 忠烈王至于再三。益恭益虔。 王曰。卿本仕族。豈忘本乎。今觀卿擧止。足知心之所存矣。千戶娶登州戶長崔公諱基烈之女。生贈贊成事椿。繼志來朝。 忠肅王錫齎益豐。所以勸忠也。贊成事娶贈門下侍中朴公諱光之女。於公爲考妣。公諱子春。字子春。齠齕異凡兒。稍長。善騎射。繼父之職。士卒樂附。至正乙未。朝 先王。先王曰。乃祖乃父。身雖在外。乃心 王室。我 祖考實寵嘉之。今爾無忝爾祖考。予將玉汝於成矣。雙城邊遠。吏治闊略。地且沃野。生齒蕃息。我東南民無恒產者多歸焉。 國家聞于中書省。奉 聖旨差官來。遼陽省亦差官來。 先王馳省郞中李壽山往會。分揀新舊籍民。謂之三省照勘戶計。其後撫綏失宜。稍稍流徙。則 命公主之。所以賞累世之忠也。民由是得安其業。至于今焉。丙申春。公來朝。 先王迎謂曰。撫綏頑民。不亦勞乎。時有密告奇氏謀亂者。辭連雙城官吏。 先王語公曰。卿宜歸鎭吾民。脫有變。當如吾命。五月。平奇氏。 命宰臣柳仁雨往討枝黨。且諭平民無恐。柳旣至境。逗遛不敢進。 上授公少府尹。階中顯。以兵馬判官丁臣桂傳 旨內應。公聞 命。卽刻含枚就行。與柳合兵。逐小生都景。小生都景棄妻子夜遁。於是。 上命曰。可逐者去矣。餘皆吾民也。無胥戕。無胥虐。其民相慶。壺漿以迎。州縣之名。溫恭事舊君。曰高州。曰耀德。曰長平。曰元興。曰定州。曰咸州是已。九月。進公階大中大夫。移司僕卿。賜開京第。因留居之。明年秋。進千牛衛上將軍。加通議,正順二大夫。是年。穡爲諫大夫在廷中。見公顏如渥丹。美鬚髯。不敢歷位相與言。然其風彩尙在吾心目。不能忘也。歲庚子春三月。以榮祿大夫判將作監事。出爲朔方道萬戶兼兵馬使。四月甲戌。病歿。年四十六。惜哉。訃聞。 玄陵悼甚。遣使弔哭。致賻如禮。士大夫咸驚曰。東北面無人矣。其年八月丙申。葬于咸州之東敀州之原。夫人崔氏。封三韓國大夫人。贈門下侍中永興府院君諱閑奇之女也。生男曰成桂。今爲忠誠亮節翊贊宣威定遠功臣,三重大匡,判三司事兼判典農寺事,上護軍,完山府院君。女適純誠翊衛協贊輔理功臣,三重大匡,龍原府院君趙公仁璧。今封貞和宅主。側室李氏生男曰元桂。今爲推忠節義輔理功臣,重大匡,完山君。金氏生男曰和。今爲誠勤輔祚功臣,奉翊大夫同知密直司事,上護軍。判三司公先娶密直副使致仕韓公諱卿之女。封元信宅主。生男曰芳雨。前禮儀判書。曰芳果。推忠礪節翊衛功臣,奉翊大夫知密直司事兼軍簿判書,鷹揚軍上護軍。曰芳毅。中正大夫神虎衛大護軍。曰芳幹。前軍器少尹。曰芳遠。通直郞禮儀正郞知製敎。曰芳衍。從仕郞成均博士。女二人。皆幼。後娶判三司事康公諱允成之女。生男曰芳蕃。考功佐郞。曰芳碩。軍器錄事。女適大護軍李濟。龍原府院君生男曰卿。進士。曰候。掖庭內謁者。曰師。曰傅。曰保。曰伯。皆幼。女長在室。次適內府副令林孟陽。完山君再娶文氏。生男曰良祐。前司僕正。曰天祐。前護軍。女適前中郞將李仁雨。金氏生男曰朝。進士。曰曙。前郞將。女適生員盧愼。次二人皆幼。同知再娶安氏。生男曰之崇。前延慶宮副使。盧氏生男曰淑。進士。曰澄。別將。次三人皆幼。女一人幼。判書娶贊成事池公諱奫之女。生男曰福根。女三人皆幼。大護軍娶知杆城崔仁㺶之女。生男曰石根。女一人幼。少尹娶版圖判書閔公諱璿之女。生男曰孟衆。女二人皆幼。正郞娶判典校寺事閔公諱霽之女。生女。幼。穡在癸卯。承乏密直提學。明年。判三司公來爲副樞。歲辛亥。三司公拜知門下。余以司空改政堂。 玄陵問近臣曰。文臣穡。武臣成桂。同日入省。廷議以爲如何。蓋自矜也。數十年間。同列少在者。而吾與公如水之淡。久敬之風。人或慕之。敢不視公父猶吾父乎。是以不敢辭而銘其神道云。銘曰。 我考李氏譜。新羅大阿干。膚敏旣祼將。膴仕多高官。五馬游朔方。威惠迺竝彰。留居樂土風。三陟如故鄕。志欲仕中原。挺身歸 大元。 授命長千夫。世德民懷恩。溫恭事舊君。朝騁何勤勤。報本又返始。警俗仍樹勳。矧我侍中公。 玄陵大賞忠。天胡奪之亟。孰司人窮通。有嗣判三司。功名冠一時。子孫盡貴顯。天道非無知。本固枝必茂。源遠流斯長。銘詩愧我拙。千載垂耿光。
한산이씨 대종회에서는 이런 사실을 알고도 대응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취부한다면 이것은 분명 역사에 죄를 짓는 행위일것이다.
한산이씨 " 큰뫼" 나 읽을 것을 통해 정확한 기록은 전달될 필요가 있지 안나 싶다.
몇해전 오래된 시기에 목은집을 보고 연구한 목은아카데미 대표 안유제 교수님은 "側室李氏生男曰元桂" 측실이씨 이원계가 태어났다는 사실의 기록이 명백이 있는데도 온라인에 온갖 한산이씨 음해에 가까운 이자춘 후궁 한산이씨, 이원계 모친 후궁 한산이씨 라는 기록에 분개하며 대응하며 맞선 시대를 사셨는데 필자도 알고도 잊고 살다 우리 한산이가 중에 이제는 제발 정확한 정보를 알아달라는 취지로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을 위해 시간을 내어 한자 글을 남겨두고자 한다.
2020.2.8 정월대보름에 한산이씨 판중추공파 후손 이대원 삼가 글을 짓다.
#한산이씨 #전주이씨 # 태조 이성계 # 이원계 # 이자춘 # 환조 이자춘 # 목은 이색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