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샘 사랑 / 박선애
맑은 물이 넘쳐 흐른다. 흐름에 따라 바닥에 붙은 파래 같은 물이끼가 나부낀다. 타일로 된 벽에 붙은 이끼는 단단히 뿌리내려 손으로는 뜯어지지 않는다. 주변에는 윗집의 감나무에서 떨어진 잎들이 마르고 부스러져 지저분하다. 추석에 가서 본 고향의 큰샘 모습이다. 버려진 것 같은 샘을 보니 마음이 안타깝다.
이렇게 두면 안 되겠다 싶어 집으로 가서 수세미, 삽, 빗자루를 챙겼다. 바지를 걷고 물속에 발을 담그니 여전히 시원하고 상쾌하다. 먼저 이끼를 삽으로 밀어서 벗겨 냈다. 수세미로 타일로 된 샘 벽과 바닥을 닦았다. 물속을 여러 번 휘저었더니 가라앉은 찌꺼기와 모래 등이 물을 따라 흘러 나간다. 그렇지 않는 돌멩이와 큰 찌꺼기는 건져 내고 가라앉기를 기다려 손이 안 간 부분을 찾아 닦았다. 빗자루로 주변을 쓸어 치웠다. 드디어 맑은 물속으로 하얀 바닥이 보인다. 내 마음이 개운하고 편안하다.
첨찰산 아래 있는 우리 고향 마을은 진도에서는 물이 좋기로 유명하다. 우리 동네 사람들이 오일장에 가서 어디 사냐는 질문을 받으면 장마철에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공손하게 ‘향동 삽니다.’라고 하는데, 가뭄에는 몸을 뒤로 한껏 젖히며 목에 힘을 주어 ‘향동 사오.’라고 대답한다는 전해 오는 이야기만으로도 물이 얼마나 풍부한지 짐작할 수 있다.
큰샘은 이런 우리 동네의 상징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이백 가구가 넘는 큰 마을이었다. 한가정에 식구도 많던 그 시절에 어떤 가뭄이 와도 동네 사람들이 모두 먹고 쓰고도 남던 샘이었다. 이곳 주변을 큰샘골이라고 불렀는데 동네 사람들이 모두 살고 싶어해서 집값도 비쌌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신다. 그렇게 큰샘은 우리 마을의 중심이었다. 가늘고 깨끗한 모레와 함께 펑펑 솟아나는 물을 위 칸에 모아서 식수로 먹고, 넘쳐서 흐른 물은 그 아래 칸에 모아 그 곳에서는 채소도 씻고, 빨래도 하고, 세수도 했다. 땅속 깊은 곳을 파서 만든 우물이 아니라 평지에서 물이 솟는 샘이라서 두레박으로 힘들게 길어 올릴 필요도 없이 바가지로 푸면 되었다. 아침이면 여인네들이 물동이를 들고 와서 물을 긷고, 텃밭에서 뜯어온 푸성귀들을 씻어갔다.
일찍 날이 새는 여름날 졸린 눈으로 와서 세수하고, 어머니가 시킨 방 청소 마루 청소를 하고 걸레를 빨러 나오던 곳도 이곳이었다. 또 선생님께서 효 실천을 강조하신 날이면 할머니 고무신을 돌로 빡빡 문질러 새하얗게 닦아내던 곳도 이곳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작은 물동이로 서로 품앗이하며 물을 긷고 여름철 화덕에 건 그을린 작은 백솥(검은 가마솥과 구별하여 알루미늄 솥을 그렇게 불렀다)을 누가 더 반짝이게 닦나 내기하고, 소꿉놀이를 하던 추억이 깃든 놀이터이기도 하다. 여름에는 손을 담그면 어깨까지 아려서 얼른 손을 빼게 차갑지만 겨울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랐다. 시원하고 달기까지 한 물이 여름철 온 마을 사람들의 고달픔과 갈증을 풀어 주었고, 겨울이면 문도 없던 마루에서 밤새 꽁꽁 얼어 딱딱해진 걸레를 사르르 녹이고 고무장갑도 없던 우리 어머니들의 시린 손을 따뜻하게 감싸주던 고마운 샘이었다.
그때는 샘을 깨끗하게 쓰도록 서로 경계하고 혹시 더러워지면 누구랄 것 없이 치웠다. 또 명절이 되면 부역으로 마을 곳곳을 정비하면서 온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샘도 청소했다. 샘 바로 옆집에 사시던 할머니는 샘을 자신의 집보다 더 아끼고 깨끗이 치우곤 하셨다. 샘 가까이에 살던 사람들은 어린 아이들까지도 샘을 참 소중하게 여겼다.
세월 따라 샘도 변했다. 1990년대쯤부터는 샘을 세 칸으로 만들어 맨 위 칸의 물은 퍼 갈 수 있도록 하고, 가운데 칸에는 호스를 연결하여 각 가정으로 물을 끌어가게 되면서 물 긷는 일은 없어졌다. 마지막 칸은 전과 같았다. 몇 년 전부터 우리 마을도 상수도 시설을 하여 장흥 유치댐 물이 들어온다. 큰샘물 대신 멀리서 오는 수돗물을 먹는다. 물동이 이고 물 길러 다니던 어머니들은 빈집만 남겨 놓고 떠나가셨다. 샘을 아끼시던 옆집 할머니도 몇 년 동안 요양원에 계시다가 작년에 돌아가셨다. 남아 있는 사람들도 더 이상 샘으로 빨래하러 나올 필요도 없이 집에서 세탁기를 돌리고, 수돗물로 편리하게 채소를 씻는다. 샘은 그렇게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고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계절이 바뀌어 옷을 정리해야 할 때 입던 옷을 한 보따리 싸 가지고 간다. 가끔씩은 이불도 싸 들고 간다. 우리 어머니는 세탁기로 빨면 될 걸 힘들게 왜 그러냐고 말리시지만 흘러가는 맑은 샘물에서 흔들흔들 빨래를 하면 행복해진다. 지난봄 어느 날 샘에 갔더니 모르는 아저씨가 생수통을 몇 개 가져와서 물을 담고 있었다. 먼저 인사를 건넸더니 해남 우수영에서 사시는 분인데 물맛이 좋아서 몇 년 전부터 떠간다고 했다. 우리 큰샘의 가치를 알아주고 애용해 주니 고맙고도 흐뭇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