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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관명전(觀明殿)
정의
덕수궁의 즉조당 서쪽 준명당(浚明堂) 자리에 있었으며, 고종대에 연회를 행한 건물.
개설
관명전(觀明殿)은 즉조당(卽阼堂)의 서쪽에 있으며, 본래 덕경당(德慶堂)이라 불렸다. 덕경당은 고종이 재위 40년이 된 1902년(광무 6) 2월에 황태자로부터 가상존호책보(加上尊號冊寶)를 받은 장소였다[『고종실록』 39년 2월 25일]. 그해 5월 4일에 고종의 나이가 51세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를 기념하여 황태자와 함께 덕경당에서 기로소 신하들에게 술을 내리는 선온(宣醞)의 행례가 이루어졌다[『고종실록』 39년 5월 5일].
고종에게 매우 기념적인 행사가 이루어진 곳인 덕경당은 5칸으로 규모가 매우 작았다. 그래서 1902년 10월에 28칸으로 확대하여 짓고 관명전(觀明殿)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관명전을 완공한 후 12월 7일에 내진연을 열어 황태자 이하 내외명부, 종친 및 응참 인원이 차례로 술잔을 받았다. 이날의 행사는 야연(夜宴)까지 이어졌다[『고종실록』 39년 12월 7일]. 1903년(광무 7) 2월에도 중화전(中和殿)에서 외진연을 하고, 관명전에서 내진연을 행하였다[『고종실록』 40년 2월 5일].
위치 및 용도
관명전은 즉조당의 서쪽에 위치하며 1902년~1903년에 내진연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변천 및 현황
관명전은 본래 덕경당이었다. 1902년 6월 28일에 덕경당을 헐고 28칸 규모로 확장하여 건립할 것을 결정하였다. 1902년 10월 18일에 공사가 완료되었으며, 관명전이라는 전호를 내렸다.
「경운궁중건배치도(慶運宮重建配置圖)」에는 1904년 대화재 후 즉조당 일대가 재건된 때이므로 관명전이 묘사되지 않았으며, 즉조당 뒤에 3칸 규모의 덕경당이 있다. 1904년(고종 41)에 경운궁 대화재로 인해 즉조당이 소실될 때 관명전도 함께 소실되어 재건할 때에는 즉조당 북쪽에 3칸 규모인 덕경당의 모습으로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는 즉조당 뒤편은 공터로 덕경당의 모습도 볼 수 없다.
형태
관명전의 모습은 『[임인십일월]진연의궤([壬寅十一月]進宴儀軌)』에 수록된 「관명전도(觀明殿圖)」에서 확인할 수 있다. 관명전은 장대석을 쌓아 만든 기단 위에 정면 9칸, 측면 4칸의 규모로 건립되었다. 정면의 양 협칸과 측면의 양 협칸은 반 칸 규모로 온돌방 주변으로 퇴를 두른 형태이다. 가운데 3칸은 마루이며, 동온돌과 서온돌을 갖춘 대칭형 건물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추녀마루에는 잡상이 올려졌다.
참고문헌
『[임인십일월]진연의궤([壬寅十一月]進宴儀軌)』「경운궁중건배치도(慶運宮重建配置圖)」「덕수궁지도(德壽宮地圖)」
문화재청, 『덕수궁복원정비기본계획』, 문화재청, 2005.
##그림1_000189034_『(임인십일월)진연의궤』에 수록된 「관명전도」
관문각(觀文閣)
정의
1888년(고종 25) 경복궁 건청궁 영역에 건립되었던 유럽식[洋館] 2층 건물.
개설
고종이 서구 근대화를 체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대내외적으로 알리기 위해 경복궁 내 건청궁(乾淸宮) 침소 인근에 세우게 한 서구식 건물이다. 관문각은 시위대의 교관이었던 윌리엄 막키 다이([茶伊], Dye, William. M)와 러시아인 건축 기사 사바찐([沙婆眞], A. S. Sabatine)의 거처이기도 했다. 1894년(고종 31) 6월에 조직된 경복궁 시위대의 대장이 다이였으며, 부대장이 사바찐이었다. 다이는 1890년(고종 27) 병조(兵曹) 참의(參議)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당시 고종이 거처하는 궁궐에는 외국인이 2명 머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고종이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외국 공사관에 연락하는 수단으로 삼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은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 당시 관문각에 있었기 때문에 사건의 전체를 목격할 수 있었다.
위치 및 용도
관문각은 경복궁 내 고종의 거처였던 건청궁 영역에 소재하였다. 고종이 관문각에 거처한 내용은 보이지 않으며, 창덕궁의 주합루(宙合樓)에 보관하던 대전의 계유년 옥책(玉冊)과 옥보(玉寶), 대왕대비전의 계미년 옥책과 기묘년 옥보, 중궁전의 병인년 교명(敎命)과 옥책·금보(金寶) 및 계유년 옥책, 세자궁의 을해년 교명과 죽책(竹冊) 등을 옮겨와 봉안하고 있었다. 또한 어진도 보관하였는데, 1897년(광무 1) 6월 15일자 관보에 경복궁 내 어진 장소로 관문각이 거론되었다. 따라서 이곳은 빈전(殯殿) 역할을 한 곳이기도 했으며, 왕실 도서관 내지는 어진을 모시는 선원전(璿源殿)과 같은 기능을 했다고 추정된다.
변천 및 현황
관문각은 여러 차례의 보수 공사가 진행되었다. 1888년(고종 25) 2월에 친군영(親軍營)에서 다시 세우는 공사를 시작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기존의 건물을 증축 내지는 보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종실록』 25년 2월 13일]. 친군영에서는 건물의 수리를 마치고 4월 24일에 관문각의 상량문제술관(上樑文製述官)에 민용식(閔應植), 서사관(書寫官)에 이승오(李承五), 현판서사관(懸板書寫官)에 박봉빈(朴鳳彬)을 계청(啓請)하여 차출하였다[『고종실록』 25년 4월 24일]. 1891년(고종 28)에도 친군영에서 보수 공사를 진행하였다. 1896년(고종 33)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파천 이후 황폐화되기 시작하였다. 고종은 경복궁 건청궁에서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당한 이후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관문각도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결국 경운궁 공사 시 해체되고 말았다. 1901년(광무 5) 6월 6일 『황성신문(皇城新聞)』에는 ‘관문각 철훼(撤毁) 운반비’라는 말이 나오고 있어서 1901년 해체되어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형태
1888년(고종 25)부터 1891년 사시에 건물 준공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아인 사바찐이 건축 설계를 담당했다고 하며 3층의 유럽식 흰색 건물이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 당시 관문각에 거처하던 미국인 다이와 러시아인 사바찐이 명성황후가 일본 시해단에게 학살되는 것을 목격하였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국사편찬위원회, 1967.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우동선, 「경운궁(慶運宮)의 양관(洋館)들」, 『서울학연구』40, 2010.
관물헌(觀物軒)
정의
창덕궁의 동궁 영역에 속하며, 왕이 신하를 소견하고 진강하던 장소로 쓰인 건물.
개설
정조 때 관물헌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 나타난다[『정조실록』 7년 11월 26일]. 규모가 협소한 데다 영역이 좁으며, 담장은 전각에 바짝 붙어 있고 사방에서 햇볕이 들어 더위에 열악한 곳이었다. 그러므로 신하들은 정조에게 옮겨 거처하라고 했으나 주위가 고요한 것은 물론, 좁은 방이 마음을 안정시켜 준다며 정조 자신은 편안해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정조는 중희당(重熙堂)이 완성되기 전까지 매일 앞뒤로 연달아 놓인 성정각(誠正閣)과 관물헌을 오가며 신하들을 소대했다. 관물헌에서 문신들에게 강경(講經) 시험·과차(科次)를 치르게도 했고, 약방을 들게 하여 진료를 받기도 하였다.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孝明世子) 역시 이곳을 서연의 장소로 썼고 고종도 즉위 초 약 2년간 소대와 진강, 약방의 입진 등으로 빈번히 사용했다. 현재 관물헌에 걸린 ‘집희(緝熙)’라는 현판의 글씨는 이때의 고종이 쓴 것으로 보인다. 이후, 관물헌에서는 1874년(고종 11) 2월 8일 고종과 명성황후(明成皇后)와의 사이에서 순종이 탄생하였고, 백일이 될 때까지 이 집에서 성장하였다[『고종실록』 11년 5월 19일].
위치 및 용도
성정각의 동북쪽에 연이어 있다. 희정당(熙政堂) 동쪽, 중희당 서쪽 그 사이에 들어 있는 동궁 영역의 전각 중 하나였다. 왕이 편하게 신하를 대면하는 편전으로 전용되기도 하였고 왕후의 산실청으로 쓰여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탄생처가 되기도 하였다. 「동궐도(東闕圖)」에는 유여청헌(有餘淸軒)으로 표기되어 있고, 「동궐도형(東闕圖形)」에는 관물헌으로 표기되어 있다.
변천 및 현황
「동궐도」 상에서 관물헌은 북쪽에 자리하며, 단청하지 않은 여러 채의 집과 초가집, 모정 등이 모여 있는 소박한 공간이었다. 이후 순종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궐도형」에서는 부속 건물이 모두 사라졌고 「동궐도」와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어 지금에 이른다.
형태
정면 6칸, 측면 3칸, 익공계집이다. 정면 두 칸은 대청, 양쪽 각 두 칸씩은 온돌이며 각기둥으로 꾸몄는데 동쪽 끝에 반 칸을 뒤로 물려 ‘루(樓)’를 달아 놓았다. 이중처마에 팔작지붕을 얹었고 7단의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높은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관물헌은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金玉均) 등에 의해 고종과 왕비가 경우궁, 계동궁 등으로 이어하였다가 창덕궁으로 환궁하면서 머문 시어소가 되기도 했다. 왕을 감시하던 개화당의 거점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고종실록』 24년 윤4월 19일].
고종의 서거 이후 덕수궁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덕혜옹주(德惠翁主)가 그의 어머니 복녕당(福寧堂) 양씨(梁氏)와 함께 창덕궁에 들어와 관물헌에서 살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경헌집(敬軒集)』
『국조보감(國朝寶鑑)』
『궁궐지(宮闕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홍재전서(弘齋全書)』「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
광명문(光明門)
정의
덕수궁에서 왕의 침전인 함녕전 남행각 밖에 있는 외삼문.
개설
광명문(光明門)은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의 남쪽에 있는 삼문이다. 함녕전은 1897년(고종 34)에 덕수궁에 건립된 침전이다. 함녕전의 남쪽에는 행각이 이중으로 조성되어 내삼문을 치중문(致中門)이라 하고 외삼문을 광명문이라 하였다.
1904년(광무 8)에 함녕전에서 일어난 대규모 화재로 덕수궁의 많은 전각이 소실되었다. 이때 광명문도 소실되었으나 그해 12월에 함녕전 재건이 이루어졌으며 광명문도 외삼문으로 재건되었다. 1927년에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일제는 궁궐 건물들의 매각을 전면적으로 실시하였다. 이로써 덕수궁을 가득 메우고 있던 전각들이 매각되고 궁궐의 규모가 축소되었다. 함녕전 행각에도 이때를 기점으로 변형이 가해졌고, 광명문 역시 원래 위치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1938년에 간행된 『덕수궁사(德壽宮史)』에 수록된 광명문의 사진은 좌우 행각이 철거된 모습이다. 1938년에 미술관을 개관할 때 광명문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홍천사 범종과 보루각 자격루 등 몇몇 유물을 보관, 전시하는 건물로 사용하게 되었다.
위치 및 용도
광명문은 덕수궁에서 왕이 머무는 침전 건물인 함녕전의 외삼문이다. 1919년에 함녕전이 빈전으로 쓰였을 때에는 빈전의 외삼문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938년에 덕수궁이 공원화되면서 미술관 가까운 곳으로 옮겨 유물을 전시하는 야외 전시실로 사용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형태
광명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다. 기둥 상부에는 익공으로 결구하고 겹처마를 갖춘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지붕의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에는 양상도회를 하여 위엄을 갖추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912년에 고종의 친형인 이희공(李熹公)이 죽자 고종은 광명문 밖으로 나와 곡(哭)을 하였다[『순종실록부록』 5년 9월 9일]. 1919년에 고종이 승하하자 함녕전에 빈전(殯殿)이 차려졌다. 함녕전 남행각의 치중문까지 빈전에 제물을 올리고 향을 올리는 행각이 조성되었으며, 광명문은 빈전의 외삼문이 되었다. 빈전인 함녕전에서 고종의 재궁이 발인할 때 치중문을 지나 광명문까지 행각을 설치하여 재궁이 나가는 길을 만들었다. 『덕수궁국장화첩(德壽宮國葬畵帖)』에 고종의 재궁을 싣고 광명문을 나서는 소여의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
참고문헌
『덕수궁국장화첩(德壽宮國葬畵帖)』
문화재청, 『덕수궁 복원정비 기본계획』, 문화재청, 2005.
광명전(光明殿)
정의
경희궁 북쪽에 위치하며 장락전 서쪽, 영취정 남쪽에 놓인 전각.
개설
『궁궐지(宮闕志)』에 광명전(光明殿)은 융무당(隆武堂) 북쪽에 있으며 창경궁의 전각제도를 모방하여 지었다고 했다. 광명전의 모습은 「서궐도안(西闕圖案)」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광명전 주변에는 행각과 담장을 둘러쌓아 궁궐의 다른 공간과 구분하였다. 남쪽 행각 중앙에는 건례문(建禮門)이라는 일각문을 세워 이곳을 통해 광명전에 출입할 수 있도록 했다. 또 광명전 서쪽에는 상휘당(祥輝堂)을 세워 복도로 광명전과 연결했고, 동쪽 행각에는 천성각(天成閣)을 두었다. 한편 광명전 뒤쪽 담장에는 회극문(會極門)을 만들어 경희궁 후원인 영취정(映翠亭)에 드나들 수 있게 했다. 『궁궐지』에는 광명전 동쪽에 경화당(景和堂)이 있고, 경화당 동쪽에는 예전에 단명전(端明殿)이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서궐도안」에는 이들 건물이 있던 자리가 빈터로 묘사되었다.
내용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에는 「경희궁지(慶煕宮志)」라는 글이 수록되었다. 이 글에는 경희궁에 만들어진 많은 전각의 위치와 용도가 기술되었다. 「경희궁지」에서 “광명전이 있는데 내전(內殿)에서 하연(賀宴)을 받는 곳이고, 서북쪽 건물은 상휘당이라고 하며 협실(夾室)이다. 그 서쪽으로는 영취정과 춘화정(春和亭) 두 정자가 있는데 원정(苑亭)이며, 영취정의 경치에 대한 것은 기문에 상세하다.”고 기술되었다. 광명전이 내전에서 하연을 받는 곳이라는 기록을 통해 이 전각에서는 항상 즐겁고 기쁜 일이 많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궁궐지』「광명전조」에는 영조가 지은 여러 어제문(御製文)이 전한다. 「광명전기회(光明殿記懷)」라는 제목의 글이 3편, 「옛날의 회포를 글로 써 광명전에 붙인 것을 추억하면서[憶昔記懷書付光明]」, 「장락전을 바라보고 광명전에 앉아 회포를 적다[瞻長樂光明記懷]」 2편, 「광명전기」가 수록되었다. 모두 지난날 광명전에서 직접 겪은 일들을 회상하면서 숙종 및 돌아가신 가족들에 대한 추모의 내용을 담은 글이다. 이들 글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행사는 가례(嘉禮)이다. 1702년(숙종 28)에 숙종과 계비인 인원왕후(仁元王后)김씨(金氏)의 가례가 광명전에서 치러졌다. 또 1704년(숙종 30)에는 영조 자신과 정성왕후(貞聖王后)서씨(徐氏)의 가례, 1718년(숙종 44)에는 경종과 선의왕후(宣懿王后)어씨(魚氏)의 가례, 1762년(영조 38)에는 세손인 정조와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金氏)의 가례가 광명전에서 치러졌다. 이후 1819년(순조 19)에는 효명세자(孝明世子)와 신정왕후(神貞王后)조씨(趙氏)의 가례가 광명전에서 치러졌다[『순조실록』 19년 10월 13일].
연회와 관련된 내용도 수록되어 있다. 「광명전기」에는 1710년(숙종 36) 봄에 어머님의 병이 나은 것을 축하하기 위해 연회를 광명전에서 베풀었고, 그해 여름에 또 다시 연회가 있었으며, 1714년(숙종 40) 가을에도 연회가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이들 연회에서 영조는 왕자의 자격으로 술잔을 올렸다. 1744년(영조 20)에는 영조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축하하는 축하연이 광명전에서 치러졌다. 「광명전기」는 1760년(영조 36)에 지은 것인데, 이때 ‘억석봉환(憶惜奉歡)’이라는 친필 현판도 같이 만들었다. 이후 친필 현판은 광명전 북쪽에 걸어 놓도록 하고, 기문은 남쪽에 걸어 놓도록 했다. 이들 외에 1719년(숙종 45), 1766년(영조 42), 1773년(영조 49)에도 내연을 광명전에서 치렀다.
하지만 최초로 사료에 등장하는 광명전은 즐겁고 기쁜 일과 거리가 멀었다. 1632년(인조 10) 6월 28일에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인경궁(仁慶宮) 흠명전(欽明殿)에서 승하하셨다[『인조실록』 10년 6월 28일]. 당시 창덕궁, 창경궁은 이괄의 난으로 주요 전각이 모두 사라진 상황이었다. 이런 까닭에 인조는 광해군이 새로 만든 인경궁과 경덕궁을 이궁(離宮)으로 삼아 머물렀다. 원래 인조의 잠저였던 경덕궁에는 인조가 머물렀고, 경덕궁과 거리가 가까운 인경궁에는 인목대비가 머물렀다. 이런 와중에 대왕대비가 승하하면서 대왕대비의 시신을 급히 경덕궁으로 옮겼다. 이때 시신을 모신 빈전(殯殿)으로 광명전을 사용했다[『인조실록』 10년 7월 1일]. 인목대비 외에도 광명전을 빈전으로 사용한 사례가 있다. 1730년(영조 6) 6월 29일에 경종의 계비인 선의왕후(宣懿王后)가 경덕궁 어조당(魚藻堂)에서 승하했을 때[『영조실록』 6년 6월 29일] 빈전으로 광명전을 사용했다.
그 밖에 여러 다른 용도로 사용한 내용이 사료에 전한다. 1661년(현종 2)에는 대왕대비인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에게 존호를 가상(加上)하고 왕대비인 효종 비 인선왕후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의식을 치렀다. 이 중 대왕대비전에 존호를 가상하는 의식은 광명전에서, 왕대비전에 존호를 가상하는 의식은 흥정당(興政堂)에서 치렀다.
광명전에서 어진(御眞)을 모사한 일도 있었다. 1735년(영조 11)에는 영희전(永禧殿) 제2실의 세조 어진이 너무 오래되어 변색된 것을 광명전에서 새롭게 모사했다[『영조실록』 11년 8월 27일]. 1837년(헌종 4)에는 태조의 어진을 광명전에서 모사했다. 이해 10월에 함경도 영흥 준원전(濬源殿)에 도둑이 침범해 태조 어진을 훼손한 사건이 있었다. 훼손된 어진은 함경도에서 한양으로 옮겨졌고, 모사가 완성된 후 다시 준원전에 봉안했다.
광명전 수리에 관한 내용이 『경덕궁수리소의궤(慶德宮修理所儀軌)』에 전한다. 1693년(숙종 19)에 이미 감역관(監役官)을 보내 경덕궁을 수리하였다. 하지만 일이 중대해 담당을 수리소로 격상하고 인력을 보충해 공사를 진행했다. 공사는 대전(大殿) 영역과 광명전 영역으로 나눠 실시했다. 대전 영역의 전각들은 무일합(無逸閤)처럼 완전히 허물고 다시 건설한다거나, 융무당에 동행각을 덧붙인다거나, 사현합(思賢閤)에 퇴칸을 첨가하는 등 형태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광명전 영역은 세자궁 쪽에 부속 공간을 지은 것 외에는 커다란 변화 없이 기존 건물을 수리하는 정도에 그쳤다.
1782년(정조 6)부터 1785년(정조 9)까지 광명전이 허물어졌다는 내용이 『승정원일기』에 계속해서 등장한다. 경희궁을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건물이 계속 퇴락하였다. 하지만 정세가 좋지 않아 쉽사리 수리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수리를 어떻게 진행했는지, 언제 마쳤는지에 대한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광명전 수리를 지시하면서 광명전이라는 전각의 성격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매우 특이하다. 1783년(정조 7) 1월 12일에는 광명전에 대해 내정전(內正殿)이라고 했으며, 같은 해 7월 17일에는 광명전이 대내(大內)의 조하(朝賀)를 받는 정전(正殿)으로 인정전(仁政殿), 명정전(明政殿)과 차이가 없다고 했다. 광명전이 경희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막대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참고문헌
『경덕궁수리소의궤(慶德宮修理所儀軌)』
『대왕대비전왕대비전존숭도감도청의궤(大王大妃殿王大妃殿尊崇都監都廳儀軌)』「서궐도안(西闕圖案)」
서울학연구소 역, 『궁궐지(宮闕志)』2, 서울학연구소, 1996.
광연루(廣延樓)
정의
조선초기 창덕궁에서 군신(君臣)이 모여 연회하던 누각.
개설
1405년(태종 5) 태종이 창덕궁을 시어궁으로 삼으면서 새로이 조성한 누각이다. 1406년(태종 6) 4월, 창덕궁의 동북쪽에는 해온정(解慍亭), 동남쪽에는 광연루가 마련되었는데 주로 종친과 신하를 불러 연회를 베풀던 장소였다[『태종실록』 6년 4월 1일].
광연루는 경회루(慶會樓)에 버금가는 누각으로 조성한 흔적이 있으나 연못의 규모가 경회루보다는 작았다[『태종실록』13년 4월 12일]. 2층으로 구성되어 신하들을 시험하거나 소대하는 일은 광연루의 아래서 이루어졌고, 연회나 구경은 누각의 위에서 이루어졌다. 광연루의 아래에는 부용각이라는 부속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예종실록』 즉위년 9월 21일].
위치 및 용도
창덕궁의 동쪽 수강궁(壽康宮)과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지금의 낙선재(落善齋) 근처로 추정된다. 사신을 접대하고 연향을 베풀며 군신과 종친이 함께하는 놀이 공간으로 쓰였고, 태종이 광연루 아래 별전에서 승하했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연못을 파 연꽃을 옮겨 심고 주변에 아름다운 화목을 심어 정원을 조성하여, 꽃구경하며 소요하는 장소로도 쓰였다[『태종실록』 9년 3월 26일][『태종실록』 11년 6월 14일]. 누각에서 격구와 활쏘기를 즐기며 연향을 베푼 일이 잦았던 것으로 보아 궁궐 한쪽 너른 공간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나라에 가뭄이 들었을 때 동자를 모아 비가 내리도록 기도하는 장소로도 쓰였다.
변천 및 현황
단종 때 피서할 별실을 광연루 옛터에 세웠다는 『조선왕조실록』 기사가 있어, 단종 이전에 광연루가 소실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세조 때에는 광연루에서 잔치를 베풀면서 성삼문(成三問) 등이 거사할 것을 알아채고 미리 세자를 그 자리에 참석치 못하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것으로 보아 새로 별실을 세워 광연루로 호칭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성종 때 신하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려 잔치한 기록을 끝으로 광연루의 쓰임은 보이지 않는데, 1484년(성종 15) 창경궁을 창건하면서 철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형태
건물 앞에 연못이 조성되어 있고 2층의 규모로 지어져 위·아래층을 함께 사용했던 누각으로 추정된다.
관련사건 및 일화
태종 때 광연루의 아래층에서 명나라 황제에게 조공할 처녀를 왕과 왕비가 직접 선발하였고 처녀의 아버지들을 불러 음식을 내려 주었다.
세종의 모후인 원경왕후(元敬王后)가 수강궁에서 승하하자 광연루와 수강궁의 근처인 명빈전(明嬪殿)에 빈소를 마련하고 세종은 광연루 동쪽, 한 칸 집에서 머물려고[居廬] 하였다. 그러나 큰비가 오고 물이 넘쳐 광연루 아래로 옮겨 머물렀다[『세종실록』 2년 7월 7일][ 『세종실록』 2년 7월 13일 3번째기사].
참고문헌
『속동문선(續東文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임하필기(林下筆記)』
광지문(廣智門)
정의
창덕궁 북쪽 바깥 담장에 설치한 문.
개설
『궁궐지(宮闕志)』에 “창덕궁 남문은 돈화문(敦化門), 단봉문(丹鳳門), 북문은 광지문(廣智門), 서북문은 요금문(輝金門), 동문은 건양문(建陽門), 서문은 경추문(景秋門), 금호문(金虎門)이고, 안쪽에 어구교(御溝橋)가 있다.”고 기술되어 창덕궁의 북문이 광지문임을 알 수 있다.
내용
본래 광지문은 따로 문 이름이 없다가 1475년(성종 6)에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서거정(徐居正)이 전교를 받들어 지었다. 광지문은 외북장문(外北墻門)의 명칭이었다[『성종실록』 6년 8월 23일].
창덕궁 후원 북쪽 담장은 지대가 높은 응봉 자락에 해당한다. 이곳에 문을 만들고 군사를 배치했더니 궁궐의 후원 내부가 군사들에게 노출되는 문제점이 있었다. 따라서 1497년(연산군 3)에 “광지문 밖의 경비하는 곳이 후원을 내려다보게 되고, 너무 문에 가까워서 파수 숙직하는 군사가 들여다보는 폐단이 있으니, 영(營)을 낮은 곳으로 물려서 문만 바라다보게만 하면 가하다.” 하며 군사 주둔지를 지대를 낮춰 옮기게 했다[『연산군일기』 3년 5월 23일].
그런데 이후 사료에서는 창덕궁 광지문을 찾아보기 어렵다. 『승정원일기』 1629년(인조 7) 3월 21일자 기록에서 광지문 인근의 소나무를 벌채하는 내용만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동궐도(東闕圖)」에도 창덕궁 후원 북쪽 궁장에는 오직 건무문(建武門)만 묘사되어 있고 광지문이 보이지 않는다. 건무문은 사료에서 1784년(정조 8)에 처음 등장한다. 『승정원일기』 1784년(정조 8) 6월 22일자 기록에는 광지영(廣智營) 서변에서부터 건무문 동변까지의 궁장이 가라앉았으니 빨리 개축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광지문 대신에 광지영이 기록되었다.
광지영에 대해 『만기요람(萬機要覽)』「군정편」 훈련도감(訓鍊都監) 공해(公廨)조에서는 “응봉 아래에 있는데 15칸이다.”고 했다. 창덕궁 궁장을 수비하는 영 가운데 집춘영(集春營)이 있는데, 집춘영은 집춘문에 설치한 영이다. 따라서 광지문에 설치한 영이 광지영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기록에 광지문 대신 광지영이 등장하는 것은 이미 광지문을 폐쇄하고 이곳을 수비하는 영만 계속해서 운영한 결과로 판단된다. 광지문을 폐쇄하는 대신에 동쪽 편에 건무문을 새롭게 만들었을 가능성도 크다. 이는 모두 광지문이 위치한 곳에서 창덕궁 후원이 쉽게 노출되기 때문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희궁에도 광지문이 있는데, 왕이 경희궁 안에서 출궁하는 문로 중 하나이다. 이 광지문은 양덕당(養德堂)의 계명문(啓明門) 밖 동북쪽 인근에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만기요람(萬機要覽)』「동궐도(東闕圖)」
서울학연구소 역, 『궁궐지(宮闕志)』1, 서울학연구소, 1994.
광지문(廣智門)
정의
경희궁 양덕당의 계명문 밖 동북쪽 인근에 위치한 문.
개설
광지문(廣智門)은 왕이 경희궁 내에서 궁 밖으로 나가는 문로의 하나이다. 세자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던 양덕당의 계명문 밖 동북쪽에 있었다.
내용
경희궁에 만들어진 문이다. 1811년(순조 11) 『승정원일기』에 세 차례 등장하는데, 모두 왕이 경희궁 내에서 출궁하는 문로의 일부로 기록되었다. 내용에 따르면 영상문(永祥門), 삼선문(三善門), 양덕당(養德堂) 후정(後庭), 계명문(繼明門)을 지나 광지문에 이르며 이후 병례문(秉禮門)을 통과해 다른 곳으로 나아갔다.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서궐도안(西闕圖案)」에 따르면, 영상문과 삼선문은 지효합(至孝閤)의 남쪽 동서행각에 만들어진 문이다. 또 삼선문과 계명문은 양덕당 뒷마당 동서행각에 위치한 문이다. 따라서 광지문이 양덕당의 계명문 밖 동북쪽 인근에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서궐도안」에서는 이곳에 나무를 무성하게 표현했기 때문에 실제 담장이나 광지문의 형태를 확인할 수 없다.
동일한 이름의 궁궐 문으로 창덕궁 후원 북쪽 담장에 있는 광지문이 있다. 이곳에서 궁궐의 후원 내부가 군사들에게 노출되는 문제점이 있어 조선후기에 이르러 이 광지문은 폐쇄되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서궐도안(西闕圖案)」
서울학연구소 역, 『궁궐지(宮闕志)』2, 서울학연구소, 1996.
광화당(光華堂)
정의
경운궁 함녕전(咸寧殿) 동쪽에 있으며, 고종의 후궁이었던 귀인이씨가 거처하던 건물.
개설
광화당(光華堂)은 고종의 후궁이었던 귀인이씨(貴人李氏)가 거처하던 건물이다. 또한 귀인이씨의 당호이기도 하다. 1914년에 고종의 후궁이었던 귀인이씨가 덕수궁에서 아들을 낳자, 왕은 아들의 이름을 이육(李堉)이라 하고, 귀인이씨에게 ‘광화당’이라는 당호를 내려주었다[『순종실록부록』 7년 7월 3일]. 광화당(光華堂) 이씨(李氏)가 당호를 받고 한 달쯤 지나 덕수궁 내에 광화당 이씨를 위한 건물을 건립하는 비용으로 1,000원이 지급되었다[『순종실록부록』 7년 8월 27일]. 이때 영복당(永福堂) 뒤쪽에 광화당 건물이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위치 및 용도
광화당은 함녕전의 동쪽에 있는 영복당 영역의 동북쪽에 있다. 광화당의 북쪽에는 양심당(養心堂)이 있으며, 남쪽에는 복녕당(福寧堂)이 있다. 광화당을 비롯하여 영복당, 삼축당(三祝堂), 복녕당, 보현당(寶賢堂) 등은 모두 후궁의 처소였다.
변천 및 현황
1914년에 귀인이씨에게 광화당이라는 당호를 내리고, 영복당 뒤쪽에 건물을 마련하였다. 1907(융희 1)~1910년(융희 4)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경운궁중건배치도(慶運宮重建配置圖)」에는 영복당 뒤쪽에 광화당이 없다. 그러나 1938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덕수궁지도」에는 영복당과 삼축당의 영역 동북쪽에 광화당이 있다. 1919년(순종 12)에 고종이 승하한 뒤, 1923년(순종 16)에 덕수궁 내에 거처하던 후궁들을 위하여 궁궐 밖에 건물을 마련해 주었다.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간동에 광화당 이씨와 삼축당 김씨가 함께 살던 집이 남아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광화당 이씨의 본래 이름은 이완덕이다. 덕수궁의 나인이었으나, 22세에 후궁이 되었다. 1914년에 왕자 이육을 낳아 ‘광화당’이라는 당호를 받았다.1916년(순종 9)에 왕자가 죽고, 1919년에는 고종이 승하하였으며, 1923년부터 1970년까지 서울특별시종로구 사간동 집에서 살며 일생을 보냈다.
참고문헌
「경운궁중건배치도(慶運宮重建配置圖)」「덕수궁지도(德壽宮地圖)」
문화재청, 『덕수궁복원정비기본계획』, 문화재청, 2005.
광화문(光化門)
정의
경복궁 남쪽의 정문.
개설
광화문은 백악산을 뒤로하고 서 있는 육조거리의 중심이었고, 법궁의 정문으로서 조선왕조와 궁궐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건물이다. 궁성 남문인 광화문의 이름은 1426년(세종 8) 세종이 집현전(集賢殿)에 명하여 지어졌다[『세종실록』 8년 10월 26일]. ‘광화(光化)’란 천자나 군주에 의한 덕화(德化), 즉 국왕의 통치에서 우러나오는 빛으로 백성을 교화시킨다는 의미이다.
위치 및 용도
광화문 앞 좌우는 중요 관청이 들어선 육조거리였으며 현재는 세종로이다. 광화문의 문루는 태종대 창건 당시에는 상·하층이 있었는데, 다락 위에는 종과 북을 달아서 새벽과 저녁을 알려 신하들이 조회 시간을 엄수하도록 했다. 광화문은 백관들이 출입하던 문이기도 했다. 1867년(고종 4)에는 대궐문을 출입하는 규례를 정했는데 승지(承旨)는 영추문(迎秋門), 백관(百官)들은 광화문의 동쪽과 서쪽 협문으로 출입하되 문관은 동쪽 협문으로, 무관은 서쪽 협문으로 출입하였으며, 각 관서의 당직 관원 이하는 편의대로 하도록 했다[『고종실록』 4년 11월 14일].
또한 광화문은 궁궐의 입구라는 점에서 각종 의례의 중요 장소가 되었는데, 왕이 궐외로 나아갈 때 광화문에서 여(輿)로 갈아탔으며, 궐내에서 행해지는 문·무과 시험 때에는 응시자들이 신호에 따라 광화문 앞에 모여 정렬했다가 궐 안으로 들어갔다. 중국의 사신이 올 때에는 광화문 앞에 채붕(綵棚)을 설치하여 잡희(雜戲)를 베풀어 영접했으며, 칙서가 올 때에도 광화문에서 맞이했다.
변천 및 현황
경복궁은 도성 내의 다른 궁궐과 달리 궁성을 갖추고 있으며 궁성의 네 면에 각각 성문과 문루를 두고, 궁성의 남쪽 양끝 모서리에는 각루(角樓)를 두었다. 1395년(태조 4) 경복궁을 창건할 때에는 궁성 없이 내전과 외전, 궐내의 시설과 오문(午門), 행각만을 지었다[『태조실록』 4년 9월 29일]. 1398년(태조 7)에 궁성을 쌓기 시작하여 1399년(정종 1)에 완성했는데, 궁성의 남문인 광화문은 1397년(태조 6) 7월에 먼저 완성되었다. 창건 당시 문루는 3칸으로 상하층이 있었으며 석축에도 3개의 홍예가 있었다. 처음에는 궁성의 동·서·남쪽 삼면에만 문을 세웠고 궁성의 정면 동쪽과 서쪽 모서리에는 석축 위에 각루인 동십자각(東十字閣)과 서십자각을 세워 궁성의 망루로 삼았다. 동·서 각루는 세종대에 기울어져 위태하고 쓸모없다 하여 철거했으나 고종대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다시 세웠다.
광화문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조선후기 경복궁 중건 시 궁성과 함께 제일 먼저 공사를 시작하여 1865년(고종 2) 10월 11일에 상량했다. 이때 지은 광화문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1926년 건춘문(建春門) 북쪽으로 옮겨졌다가 6·25전쟁 시에 폭격으로 문루가 소실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실측한 도면을 토대로 1968년 경복궁의 남쪽 궁장에 철근 콘크리트로 복원했으나 그 위치는 경복궁 배치 축에서 동쪽으로 약간 틀어지고 북쪽으로 후퇴한 곳이었다. 2010년에 이것을 헐고 원래의 위치를 찾아 목조로 복원했다.
형태
광화문은 다른 궁문과 달리 출입을 위한 홍예를 중앙과 좌우 3곳에 두어 왕과 신하가 출입하는 것을 구분했다. 여장은 벽돌에 무늬를 넣어 장식했고, 홍예의 이맛돌에는 귀면을 조각했다. 육축 위의 문루는 외2출목, 내3출목의 다포 형식이다. 정면의 폭이 전체 24m가량 되는데, 주칸은 3칸으로 어칸의 폭이 8.5m(27자)에 달한다. 이렇게 기둥 간격이 넓으면 기둥 상부에 얹은 가로 부재가 아래로 처질 수밖에 없는데, 이 같은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기둥 양 옆에 1m 정도 간격을 두고 작은 기둥을 하나씩 세워 상부의 가로부재[창방]를 지탱했다. 광화문은 도성의 남대문인 숭례문과 규모가 거의 비슷한데, 숭례문은 도리칸이 5칸이어서 어칸의 폭이 훨씬 좁다.
고종대에는 광화문의 동쪽과 서쪽 궁성 모서리에 십자각을 세웠다. 그중에서 서십자각은 일제 강점기에 경복궁내에 각종 박람회를 개최하면서 이용객의 편리를 위해 전찻길을 내기 위해 헐렸다. 현재 남아 있는 동십자각은 고종 초기 경복궁 중건 당시에 지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방형 평면에 내부 고주칸에는 창호를 달았다. 육축 위에는 전돌로 여장을 쌓았으며 남쪽과 동쪽에 연잎을 조각한 석루조가 2조씩 있고 여장 하부의 석축 상단에는 당초문과 앙련, 복련을 조각하여 화려하게 장식했다. 모임지붕에 절병통을 얹었고 기둥과 창방에는 낙양을 달았으며 공포는 이익공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정조는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서 도성 내에 종(鐘)을 설치하여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은 이 종을 쳐서 알렸다고 보았는데, 종각, 종현(鍾峴)과 함께 도성 내 종이 설치된 곳이 바로 광화문이었다. 광화문에 처음 종을 달았던 것은 1412년(태종 12)이었으며, 이때 변계량(卞季良)이 종명(鐘銘)을 지었다. 임진왜란으로 광화문과 종루의 종은 망가졌으며, 1451년(세조 7)에 만들어 흥인문(興仁門)에 달았던 종을 고종대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광화문에 달았다고 한다.
참고문헌
『궁궐지(宮闕誌)』
『궁궐지(宮闕志)』
『임하필기(林下筆記)』
문화재청, 『궁궐의 현판과 주련1, 경복궁』, 수류산방, 2007.
광희문(光熙門)
정의
한양 성곽의 동남쪽에 설치한 소문.
개설
조선초에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후 최초로 성곽을 조성할 때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을 두었다. 사대문으로 정북에 숙청문(肅淸門), 정동에 흥인문(興仁門), 정남에 숭례문(崇禮門), 정서에 돈의문(敦義門)을 설치했다. 사소문으로는 동북에 홍화문(弘化門), 동남에 광희문(光熙門), 서남에 소덕문(昭德門), 서북에 창의문(彰義門)을 두었다[『태조실록』 5년 9월 24일]. 후에 홍화문은 혜화문이 되었고, 소덕문은 소의문이 되었다.
내용
광희문은 속칭 수구문(水口門)이라고 한다. 조선초에 성문을 만들면서 광희문이라고 명명했지만 조선초기의 『조선왕조실록』에서 광희문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정식 명칭인 광희문 대신에 수구문이 등장한다. 이런 현상은 『승정원일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18세기 초반 영조 이전의 기록에서는 대부분 광희문 대신에 수구문이라는 명칭으로 등장하며, 이후 수구문과 광희문이 혼용되다가, 1784년(정조 8) 이후 수구문이 사라지고 광희문이 대신하고 있다.
수구(水口)는 풍수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성곽 내에 흐르는 개천을 일컫는다. 수구는 내수구와 외수구로 나뉘는데, 한양의 경우 청계천이 내수구에 해당하고 한강이 외수구에 해당한다. 청계천의 물줄기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나간다. 따라서 한양 성곽에는 청계천이 빠져나가는 곳에 수문(水門)을 설치했다. 수문은 흥인문 남쪽에 위치하는데, 오간수문(五間水門)이라고 했다.
남산자락에서 시작한 물줄기 역시 광희문 북쪽으로 흘러나간다. 이곳에도 수문을 만들었는데, 이를 이간수문(二間水門)이라고 했다. 2개의 물줄기 중 훨씬 중요하고 큰 물줄기가 흥인문 인근을 통해 흘러갔는데, 흥인문이 아닌 광희문을 속칭 수구문이라고 부르는 연유는 명확히 알 수 없다. 아마도 풍수적인 관점에서 정동 방향보다 동남쪽으로 수구가 형성되는 것이 훨씬 이상적이기 때문에 동남쪽의 광희문을 수구문이라고 칭한 것으로 추정한다.
광희문 밖으로 난 길은 왕십리로 이어지고 동교(東郊)에 이른다. 이곳에는 두모포(豆毛浦)가 위치하였다. 두모포는 북한강과 남한강을 따라 내려온 물자들이 모이는 대표적인 항구이다. 이곳에 도착한 물자들은 광희문을 통해 한양으로 옮겨졌다.
한양 성곽은 임진왜란으로 크게 파괴됐다. 임진왜란 이후 한양 성곽에 대한 일부 보수가 있었지만 크게 부족했다. 본격적인 한양 성곽 복구는 한참이 지난 1704년(숙종 30)에 시작했다[『숙종실록』 30년 2월 15일][『숙종실록』 30년 9월 16일]. 곳곳에서 무너져 내린 성벽을 보수하고 다시 설치하는 공사가 몇 년간 계속됐다. 성곽 공사가 거의 완료되면서 광희문을 새롭게 설치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승정원일기』 1711년(숙종 37) 2월 15일자 기록에 따르면 기존의 광희문은 철거하고 새롭게 성곽을 쌓기로 했으며, 광희문의 좌우측 성곽도 다시 쌓기로 했다. 기존에 없던 광희문 문루를 새롭게 건립하자는 논의도 있었다. 『승정원일기』 1711년 3월 14일자 기록에 따르면, 광희문 문루는 흥인문이나 숭례문과 같이 높게 만들 필요가 없고 단지 남한산성의 문루 제도를 따라 만들도록 지시했다. 광희문의 성곽 공사는 2달여 만인 1711년 4월 21일에 마쳤다. 성곽 공사를 마쳤지만 문루를 조성하는 공사는 문루를 건설할 재목을 마련하지 못해 약간 뒤로 미루어져[『숙종실록』 37년 6월 3일], 같은 해 10월 29일에 완성됐다. 1719년(숙종 45) 1월 25일에는 이미 문루가 완성됐으니 국초(國初)와 같이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내걸어야 한다는 제안이 있었고, 2월에 현판을 내건 것으로 여겨진다.
숙종 때 광희문의 문루가 완성됐지만 문루에 단청을 칠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승정원일기』 1743년(영조 19) 11월 10일자 기록에 광희문은 병자년에 외적을 피해 인조께서 피난 가신 길이라면서 문루는 있는데 왜 단청을 하지 않았는지 이상하다고 의아해했다. 이후 영조는 광희문에 단청을 칠하라고 지시했고, 1744년(영조 20) 4월 3일에 광희문 단청을 마쳤다. 1864년(고종 1)에는 광희문 수리를 진행했다. 서까래와 청판이 많이 썩어 손상됐고 기와 역시 탈락한 상태였다. 수리공사는 5월 15일에 시작해 바로 마친 것으로 여겨진다. 광희문의 문루는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이후 육축만 남아 있었다. 1975년에 새롭게 도로를 개설하면서 남쪽으로 15m 이건했고, 다시 문루를 중건했다.
관련사건 및 일화
광희문은 다른 성문과 달리 유독 시신이 나가는 문으로 많이 알려졌다. 일명 ‘시구문(屍口門)’이라고 지칭하는데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및 기타 사료에 시구문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시신과 관련한 사건은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양 성곽 내부에는 무덤을 만들지 못하게 했다. 따라서 한양에서 죽은 사람의 시신은 모두 성곽 바깥으로 옮겨져야만 했다. 왕실의 인산은 사대문을 이용한다. 하지만 왕실을 제외한 사람들은 소문을 이용하는데 한양 동쪽으로는 광희문을 통해 나갔고, 서쪽으로는 서소문(西小門)을 통해 나갔다[『중종실록』 29년 8월 22일]. 이런 까닭에 광희문과 서소문 바깥쪽에는 공동묘지가 많이 만들어졌다. 시구문이란 별칭은 이 때문에 불린 듯하다.
참고문헌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서울특별시, 『서울건축사』, 서울특별시, 1999.
교태전(交泰殿)
정의
경복궁의 내전 영역에서 왕비의 침전.
개설
경복궁은 1395년(태조 4)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며 조선왕조의 법궁으로 조성된 첫 궁궐이다. 그러나 태종이 주도한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1399년(정종 1) 개경으로 환도하여 경복궁은 4년 만에 빈 궁궐이 되었다. 1405년(태종 5) 태종이 한양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경복궁 대신 창덕궁으로 거처를 정했으며, 이때부터 조선의 궁궐은 법궁과 이궁을 함께 운용하는 체제를 확립하였다[『태종실록』 5년 10월 25일].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경복궁의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이후 1868년(고종 5) 경복궁이 재건되어 왕실이 이어하기까지 276년간 빈터였으며, 유명무실한 존재로 법궁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런 배경에서 경복궁은 명확히 초창기 경복궁과 중창기 경복궁으로 나눌 수 있다.
교태전은 초창기 경복궁인 태조 때의 궁궐 영건 안에는 없었던 전각이다. 『조선왕조실록』 기사에 따르면 경복궁의 내전은 보평청(報平廳)을 포함한 그 북쪽의 건물들이었다. 연침은 연생전(延生殿)·경성전(慶成殿)이라 하는 동·서 소침을 따로 둔, 7칸 규모의 좌우에 방을 두었고 사방에 행각을 두른 강녕전(康寧殿)이라는 전각이었다[『태조실록』 4년 9월 29일]. 따라서 통상적으로 경복궁의 강녕전은 왕의 침전이고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이라고들 하나, 이는 세종대 이전의 경복궁에는 적용되지 않는 설명이다.
정종이 경복궁을 뒤로하고 돌아간 개경의 궁에도 ‘중궁’의 공간은 존재하였고 창덕궁이 운영되었던 태종대에도 중궁전은 존재하였는데 경복궁의 중궁전은 따로 언급이 없다. 당시 창덕궁 침전의 이름은 ‘대조전(大造殿)’이 아닌 ‘양의전(兩儀殿)’이었다[『세조실록』 7년 12월 19일]. 이름 그대로 왕과 왕비가 함께 거처하는 침전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동·서 두 개의 소침을 가졌던 강녕전 또한 왕과 왕비가 함께 거처한 침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교태전이 건립되기 이전까지 경복궁에서 거처하는 왕비에 관한 기록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태조의 후비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는 경복궁을 완공하고 왕실이 한양으로 이어한 지 일 년도 안 되어 승하하였는데, 그동안에도 병증에 시달리느라 주로 외부에서 머물렀다. 한양으로 돌아온 태종은 창덕궁을 영건하여 경복궁에 들어가지 않았다. 세종 때에 이르러 경복궁의 여러 전각이 보수되고 비로소 교태전을 건립하였다. 당시 『조선왕조실록』 기사에는 세종이 교태전을 건립하기 위해 왕과 왕비의 처소를 동궁으로 옮겼다고 하였다[『세종실록』 22년 9월 6일]. 그러므로 ‘강녕전’이 창덕궁의 ‘양의전’처럼 왕과 왕비가 쓰던 침전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 후 세종은 동궁의 궐내 거취 문제를 논의하면서, 강녕전·사정전 등은 정궁이지만 교태전은 자신이 세운 자그마한 집으로 정궁이 아니라며 교태전을 정의하였다.
세조대는 왕이 신료들과 함께 정사를 의논하고 왕비와 함께 연회를 베풀거나 외국 사신을 불러 나례와 같은 재주를 구경하고 접대하는 일 등을 교태전에서 하기도 하였다.
위치 및 용도
경복궁은 크게 임진왜란 이전과 고종시기의 궁궐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임진왜란으로 왜군에 의해 파괴되기 이전의 경복궁은 현존하는 자료의 부족으로 정확한 배치 상황과 그 형태를 알기가 어렵다. 270여 년 비어 있는 동안 경복궁의 기단과 초석이 보전되어 있어 새로 재건되는 경복궁의 배치가 옛터를 따를 수 있었지만 임진왜란 이전의 상황과 같을 수는 없다.
1767년(영조 43) 이후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경복궁전도(景福宮全圖)」에 의하면, 광화문(光化門)부터 교태전까지 일직선상에 각 문을 비롯한 주요 건물이 놓이고 행각으로 전각 영역을 구획해 놓고 있다. 재건된 경복궁의 주요 건물과 배치 및 순서가 다르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고종 때 교태전은 궁궐의 중앙부에 놓이는데, 이 지도에서 교태전은 후원과 인접하여 궁궐 전각 가운데 가장 북쪽, 굳이 분류하자면 후궁 영역에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교태전은 강녕전의 북쪽에 있으면서 강녕전과 같은 영역, 한 행각 안에 들어 있고 강녕전의 좌우에 놓인 연생전, 경성전과는 행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교태전 행각 밖 좌우에는 함원전(含元殿), 인지당(麟趾堂)을 배치해 두었고 자미당(紫薇堂), 청연루(淸讌樓) 같은 주변 건물을 거느리고 있었다.
1868년(고종 5) 재건된 경복궁은 초창기 경복궁의 주요 건물이 놓인 축과 다르지 않은 배치를 하고 있다. 하지만 동북쪽에 대비전인 자경전(慈慶殿)이 들어서고 후원 영역이 확대되면서 교태전이 중앙에 들어가게 되었다. 또한 교태전을 둘러싼 부속 건물의 배치가 조밀해지면서 영역을 나누는 행각의 형태가 달라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변천 및 현황
교태전은 1440년(세종 22) 창건되었다[『세종실록』 22년 9월 6일]. 세조 때 전각의 사용이 가장 활발하였으나 창덕궁·창경궁을 시어소로 자주 사용하였기 때문에 교태전을 사용했던 기록은 많지 않다. 명종대에는 교태전 처마가 짧아 비바람을 피하기가 어렵다며 처마를 보충하는 공사를 명한다. 당초에 교태전은 전각을 밝게 하기 위해 처마가 짧았는데, 이때 보수를 시작한 것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궁궐의 대부분이 소실되었을 때 교태전도 함께 소실되었다. 그대로 폐허인 채 270여 년이 흘렀고, 1865년(고종 2) 대왕대비 조씨(趙氏)의 공식 표명으로 경복궁의 재건이 시작되었다. 4월 2일의 공식 표명 이후 11일 만에 공역이 시작되었고 그해 6월 2일에 정초, 10월 11일에 상량하였다. 1867년(고종 4) 8월 18일에는 교태전을 비롯한 주요 전각의 전호와 당호, 각 문의 이름이 정해졌던 것으로 보아 주요 전각들의 공역은 끝이 난 듯하다. 다음 해에 왕실이 이어하였고 교태전은 중궁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873년(고종 10) 12월 자경전 곁에 있던 순희당(純熙堂)에서 불이 나면서 교태전을 함께 잃었다. 이 화재로 왕실은 창덕궁으로 이어하였고 국가 재정상의 이유로 1875년 5월이 되어서야 복구를 시작하였다. 이때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교태전 전후의 건물이 서로 붙어 있고 회랑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화재에 취약하니 구조를 변경하자는 주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약간의 변화를 수용하며 1876년(고종 13) 3월에 공사를 완료하였다.
그런데 그해 11월에 또다시 내전 일곽이 화재를 입는다[『고종실록』 13년 11월 4일]. 이번에는 교태전에서 발화되었는데, 무려 830여 칸을 잃는 대재앙이었다. 사정전(思政殿)까지 불길이 번지지는 않았지만 자경전, 교태전, 강녕전 등의 주요 전각과 주변 건물을 잃게 되었다. 다음해에 다시 창덕궁으로 이어하였고 1888년(고종 25)까지 내전 일곽이 재건되었고 교태전 북쪽의 향원정(香遠亭)·건청궁(乾淸宮)·집옥재(集玉齋) 일곽이 새로이 조성되거나 증축되었다. 이렇듯 어렵게 완공된 교태전은 1917년 창덕궁 대조전의 화재를 복구하기 위한 대체 건물로 창덕궁으로 이건되었고, 지금까지 창덕궁의 대조전으로 탈바꿈하여 보존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훼철된 교태전은 1990년에 ‘경복궁 복원 정비 사업’을 시작하면서 1993년 상량하였고 1995년에 침전 지역이 중건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형태
고종대에 재건된 교태전은 조선과 왕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경복궁의 중창과 함께 조성되어 조선왕실이 행한 마지막 영건 작업인 1888년의 재건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난의 기록을 함께했던 전각이다. 1888년 재건된 교태전은, 1907년(융희 1) 전후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는 「북궐도형(北闕圖形)」과 일부 남아 있는 사진으로 인해 비교적 형태를 정확히 알 수 있다.
「북궐도형」에 의하면, 교태전 본체는 정면 9칸 측면 4칸 집이고 동·서 양쪽의 끝 칸은 ‘루(樓)’로 구성되어 있다. 전각의 중앙은 대청마루로 정면 3칸, 측면 2칸 총 6칸의 규모이고 양쪽에 정면 2칸, 측면 2칸씩의 온돌을 배치하였다. 전각의 전·후면은 툇간을 놓아 전면은 모두 툇마루이고, 후면의 대청마루 부분은 툇마루, 온돌방으로 구성되었다. 이 집은 장대석 네 개의 기단 위에 올려놓았고 월대는 없다. 대신 중앙에 5단짜리 계단 셋을 놓았다. 후면에도 중앙에 계단 하나가 있다. 기둥은 각기둥을 썼고 이익공 겹처마 집에 용마루 없는 무량각 팔작지붕을 얹었다.
교태전의 전정 마당은 장방형이고 마당과 교태전을 ‘口’ 형태로 행각이 두르고 있다. 동익각이 ‘원길헌(元吉軒)’, 10칸 규모의 무익공집이고 서익각이 ‘함홍각(含弘閣)’, 13칸 무익공집이다. 후면 마당은 아미산으로 화계(花階)를 조성해 아름답게 꾸몄다. 교태전의 북동쪽 끝, 두 칸에 잇대어 아미산 일부를 침범해 14칸 무익공의 ‘ㄱ’자형 평면 ‘건순합(健順閤)’을 부속채로 들여놓았다. 이 건순합은 1888년(고종 25) 재건 때 들여놓은 것이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궁궐지(宮闕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임하필기(林下筆記)』「경복궁전도(景福宮全圖)」「북궐도형(北闕圖形)」
문화재청, 『경복궁침전지역 중건공사 보고서』, 문화재청,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