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학교에서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끝나고 친구들과 몰려가서 보는 영화는, 주로 성룡이 만든 코믹 액션물이나 [영환선생]같은 강시 영화 그리고 [영웅본색[같은 홍콩느와르가 있었다. 당시에 본 영화 가운데 작품성을 논할 수 있는 영화는 학교에서 단체관람을 가서 보았던 [닥터 지바고]나, 무슨 영화인지도 모르고 본 [지옥의 묵시록] 정도가 있지 않았나싶다.
그러던 와중에 연말에 베르나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마지막 황제]가 개봉했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의정부 중앙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그 때는 의정부에 중앙극장과 대한극장이 개봉관이어서 서울까지 가지 않아도 상당히 큰 스크린에 서울과 같은 때에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개봉 몇 개월이 지난 후, 동두천이나 전곡의 동시상영관에서 작은 스크린으로 보던 영화와는 차원이 달랐다.
더군다나 마지막 황제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비롯하여 9개부문인가 수상한 명작이라는 소문을 듣고, 꼭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의 유치한 생각으로는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으면 당연히 세계 최고의 영화라고 여겼다. 어쩌면 TV에서 하는 ‘명화극장’ 시작할 때 아카데미 상이 마구 돌아가는 인트로에 반복 노출되어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마지막 황제]는 생의 처음부터 끝까지 타의에 의해 강요된 삶을 살았던 한 인간, 황제로 시작해서 감옥의 수인이 되었다가 정원사로 삶을 마감한 한 인간, 자주적인 인간이 되고싶었지만 꼭두각시로 살 수 밖에 없었던 한 인간의 삶을 장대한 스케일과 섬세한 연출로 보여주었다.
[마지막 황제]는 그간 내가 보아왔던 헐리우드 영화와는 많이 달랐고, 잘 모르던 중국 현대사에 관심을 갖게 만들어 주었고, 교활한 일본의 만행에 다시 한 번 치를 떨게 했다.
나는 이 영화를 정말 감명깊게 보았는데, 중국 정부는 이 영화의 촬영에 자금성을 통째로 빌려주기까지 하는 대대적인 지원을 했으나, 실상 나온 영화가 너무 서구인의 시선에 의해 그려졌고, 모택동이 저지른 ‘문화대혁명’을 비판적으로 표현한 데 분노하였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중국판 마지막 황제를 제작했는데, 당시에는 꽤나 인구에 회자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 아무도 중국에서 만든 마지막 황제를 기억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유일하게 그 권위를 인정받던 루쉰의 말로써 그 이유를 말할 수 있을것 같다.
'모든 예술은 선전이다, 그러나 모든 선전이 다 예술은 아니다.'
그런데 이탈리아 사람인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이 왜 중국 현대사에 이렇게 관심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었다.
그 의문은 얼마전 그가 연출한 영화 [몽상가들]을 보고서 비로서 풀렸다. 이 영화는 '68세대'가 주인공들이다. 나이를 따져보니 베르톨루치도 68세대인것 같았다.
이 영화는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하고있는데, 영화를 사랑하는 쌍둥이 남매와 미국에서 온 영화광 청년 이렇게 세 명이 주인공이다.
유명 시인인 아버지 슬하에서 기성세대에게 반항하며 상상을 초월하는 자유분방함을 추구하는 쌍둥이 남매와 그들과의 성적 일탈에 얽힌 미국 청년이 한 달간 동거하면서 벌이는 사건을 그린 것이 [몽상가들]이다.
이 영화에서 전라의 장면이 아무렇지도 않게 수시로 등장하여 관객을 적잖히 당황케한다.
세 사람이 전라 상태로 잠들어 있는데, 휴가에서 돌아온 부모에게 발각된 것을 안 여자 주인공이 자살하려는 순간 갑자기 거리를 메운 시위대가 던진 돌이 유리창을 깨고 집안으로 날아들어온다.
그러자 이들은 모두 깨어나 일어나서 시위대에 합세하면서 영화가 끝을 맺는다.
이 영화에서 주의를 끄는 것은 쌍둥이 남자 주인공의 방 가득 붙어있는 문화대혁명의 포스터와 구호, 모택동의 두상 그리고 홍서(红书)-모택동 어록이다.
심지어 그는 부모들을 하방하여 노동교화를 시켜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영화의 배경은 프랑스였지만, 그들도 홍위병이었다.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당시 중국의 현실을 알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모택동을 추종하였다.
아마도 그것에 대한 성찰이 [마지막 황제]에서 '부의(마지막 황제)'가 거리에서 홍위병에게 조리돌림을 당하는 노동교화소의 소장을 변호하면서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좋은 선생님이다'라고 항변하는 장면으로 나왔을 것이다.
깊어가는 가을, 차츰 가을 기운이 서릿발처럼 뼛속을 파고든다.
고상하게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영화를 한번 감상해보는 것도 가을을 나는 방법일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