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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_27_110p History, Science, and Morality
It is not surprising that during the past fifty years philosophers have begun to call them in question, and to recognize that the process of knowledge, far from setting subject and object sharply apart, involves a measure of interrelation and interdependence between them. This is, however, extremely significant for the social sciences In my first lecture, I suggested that the study of history was difficult to reconcile with the traditional empiricist theory of knowledge. I should now like to argue that the social sciences as a whole, since they involve man as both subject and object, both investigator and thing investigated, are incompatible with any theory of knowledge which pronounces a rigid divorce between subject and object. Sociology, in its attempts to establish itself as a coherent body of doctrine, has quite rightly set up a branch called the sociology of knowledge. This has, however, not yet got very far mainly, I suspect, because it has been content to go round and round inside the cage of a traditional theory of knowledge. If philosophers, under the impact first of modern physical science, and now of modern social science, are beginning to break out from this cage, and construct some more up-to-date model for the processes of knowledge than the old billiard-ball model of the impact of data on a passive consciousness, this is a good omen for the social sciences and for history in particular.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지난 50년 동안 철학자들은 의문을 가져온 것에. 그리고 인식하기 시작한 것에 지식의 과정은 주체와 객체의 명백한 분리와는 다르고 그들 사이의 상호 관계와 상호의존성의 관련성을 포함한다고 생각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특별히 사회 과학에서 중요하다. 1강에서 나중 제안한 바 있다. 역사 연구는 전통적인 지식 이론과는 양립하기 어렵다고. 나는 주장하고자 한다. 사회과학은 일반적으로 그들은 주체와 객체, 조사자와 조사대상자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주체와 객체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어떠한 이론과는 양립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사회학은 어떤 시도를 했다. 정립하려는 시도를 했다. 일관된 이론 체계를 갖춘 학문을 만들려는 시도에서 지식 사회학이라는 학문을 만들었다. 이것은 하지만 아직 이렇다 할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것은 만족해 오고 있는 것 같다. 전통적인 지식이론의 새장 안에서 안주하면 만족하고 있는 듯하다. 철학자들은 처음에는 현대 물리학의 충격으로부터, 그리고 지금은 새로운 사회 과학의 충격으로부터 이 새장에서 깨치고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든다. 약간 더 현대적인 모델, 당구식 모델보다는, 당구식 모델이란 데이타가 부딪혀 오면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모델이다. 이러한 당구식 모델을 벗어나려는 방식은 좋은 징조이다. 사회과학에 특히 역사학에는.
Chapter 3_28_111p History, Science, and Morality
This is a point of some importance, to which I shall return later when I come to consider what we mean by objectivity in history. Last but not least, I have to discuss the view that history, being intimately involved in questions of religion and morality, is thereby distinguished from science in general and perhaps even from the other social sciences. Of the relation of history to religion I shall say only the little that is necessary to make my own position clear. To be a serious astronomer is compatible with belief in a God who created and ordered the universe. But it is not compatible with belief in a God who intervenes at will to change the course of a planet, to postpone an eclipse, or to alter the rules of the cosmic game. In the same way, it is sometimes suggested, a serious historian may believe in a God who has ordered, and given meaning to, the course of history as a whole, though he cannot believe in the Old Testament kind of God who intervenes to slaughter the Amalekites(아말렉), or cheats on the calendar by extending the hours of daylight for the benefit of Joshua's army. Nor can he invoke God as an explanation of particular historical events. Father D'Arcy in a recent book attempted to make this distinction: 이것은 중요한 포인트다. 그것에 나는 나중에 돌아갈 것이다. 우리가 역사에서 객관성이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를 고찰할 때 마지막으로, 중요한 문제는 역사와 종교와 도덕에 긴밀히 관련된 문제들이다. 도덕은 일반적으로 과학하고는 구분된다. 그리고 다른 사회과학들과도 구분된다. 역사와 종교의 관계에 대해 나는 조금만 언급하고자 한다. 내 입장을 드러내는데 필요한 만큼만. 진지한 천문학자가 된다는 것은 신을 믿는 것과 양립이 가능하다. 그 신은 우주를 창조했고, 우주에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그 신은 자의로 행성들의 코스를 변경하고, 일식을 연기하고 또는 우주 게임의 규칙들을 바꾼다 하는 신을 믿는 것과는 양립하지 않는다. 같은 방식으로 때때로 제기된다. 진지한 역사는 신의 존재를 믿을 지도 모른다. 그 신은 역사 과정에 명령한다.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러나 그는 믿지 않는다. 구양성서에 나오는 신과 같은 존재는 아말렉 인들의 살상에 끼어든다든가, 조슈아의 군대를 위해서 낮의 길이를 더 길게 하는 것에 의해 달력을 속인다든가 하는 것은 믿지 않는다. 그리고 특별한 역사적 사건들의 설명을 위해서 신을 부르는 것도 할 수 없다. ‘다이시’ 신부는 최근 책에서 이와 같은 구별을 시도했다.
Chapter 3_29_112p History, Science, and Morality
It would not do for a student to answer every question in history by saying that it was the finger of God. Not until(후에야?) we have gone as far as most in tidying up mundane events and the human drama are we permitted to bring in wider considerations. The awkwardness of this view is that it appears to treat religion like the joker in the pack of cards, to be reserved for really important tricks that cannot be taken in any other way. Karl Barth(칼 바르트), the Lutheran theologian(루터파의 신학자), did better when he pronounced a total separation between divine and secular history, and handed over the latter to the secular arm. 역사학도는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신의 섭리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속세의 문제들을 모두 처리하고 난 뒤에야 더 큰 문제들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을 허락받는 것이다. 이 견해의 어색함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종교를 카드 게임에서 조커같이 취급하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용될 수 있는 중요한 트릭을 보유한 듯이. 루터파의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오히려 더 낫다. 그가 선언했을 때, 완전한 분리, 종교적인 역사와 세속적인 역사의 완전한 분리를 선언했을 때, 그리고 세속적인 역사는 세속적인 손에 넘겨준다고 했을 때.
Professor Butterfield, if I understand him, means the same thing when he speaks of technical history. Technical history is the only kind of history you or I are ever likely to write, or he himself has ever written. But by the use of this odd epithet, he reserves the right to believe in an esoteric or providential history with which the rest of us need not concern ourselves. Writers like Berdyaev, Niebarhr, and Maritain purport to maintain the autonomous status of history, but insist that the end or goal of history lies outside history. Personally, I find it hard to reconcile the integrity of history with belief in some super- historical force on which its meaning and significance depend - whether that force be the God of a Chosen People, a Christian God, the Hidden Hand of the deist(자연신론자), or Hegel's World Spirit. 버터필드는 교수는 내가 그를 이해한 게 맞다면 그는 세속적인 역사를 기술적인 역사라고 말한다. 기술적인 역사는 오직 어떤 종류의 역사이다. 당신이나 나나 지금까지 쓰 왔던 역사, 지금도 쓰고 있는 역사. 그러나 이런 색다른 명칭에 의해 그는 비교적인, 섭리적인 역사를 믿을 권리를 보존한다. 우리들은 관심 둘 필요 없는. epithet(색다른 명칭), esoteric(비교적인), providential(섭리적인) 베르자예프, 니부어, 마리탱 같은 작가들은 주장한다. 역사의 자율적인 지위를 유지한다는 취지에서 주장한다. 역사의 목적이나 목표는 역사밖에 있다고. Berdyaev(베르자예프), Maritain(마리탱) 개인적으로 나는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다. 역사의 순결성과 초역사적인 힘에 대한 믿음, 그 초역사적인 것에 의미와 중요성을 의존하는, 그 힘이 선민들의 신이건, 기독교 신이건, deist의 보이지 않는 신이건, 헤겔의 세계 정신이건.
Chapter 3_30_113p History, Science, and Morality
For the purposes of these lectures, I shall assume that the historian must solve his problems without recourse to any such deus ex machina, that history is a game played, so to speak, without a joker in the pack. The relation of history to morality is more complicated, and discussions of it in the past have suffered from several ambiguities. It is scarcely necessary today to argue that the historian is not required to pass moral judgments on the private life of the characters in his story. The standpoints of the historian and of the moralist are not identical. 이 강의들을 위해서 나는 역사가는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deus ex machina’ 에 의존함이 없이. 즉, 역사는 게임이다. 그 게임 안에는 모든 것을 한 방에 해결하는 ‘조커’가 있지 않다. 역사가의 도덕에 대한 관계는 더 복잡하다. 그리고 과거에는 이것에 대한 논의에서 많은 모호성들을 겪었다. 오늘날 거의 주장할 필요가 없다. 역사가는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그의 역사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개인적인 사생활에 대한 도덕적 판단에 대해서는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역사가의 관점과 도덕가의 관점은 다르다.
Henry VIII may have been a bad husband and a good king. But the historian is interested in him in the former capacity only in so far as it affected historical events. If his moral delinquencies had had as little apparent effect on public affairs as those of Henry II, the historian would not need to bother about them. This goes for virtues as well as vices. Pasteur and Einstein were, one is told, men of exemplary, even saintly, private lives. But, suppose they had been unfaithful husbands, cruel fathers, and unscrupulous colleagues, would their historical achievements have been any the less? And it is these which preoccupy the historian. Stalin is said to have behaved cruelly and callously to his second wife; but, as a historian of Soviet affairs, I do not feel myself much concerned. 헨리 8세는 나쁜 남편이었고 좋은 왕이었다. 그러나 역사가는 나쁜 남편이라는 capacity에 대해서는 그것이 역사적 사건들에 영향을 줄 때만 관심을 가진다. 만약 그의 도덕적 결함들이 공적인 일에 겉으로 보기에 거의 양향을 주지 않았다면, 헨리 2세처럼, 역사가는 도덕적 결함들에 대해서는 별로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미덕에 대해서도 악덕과 똑같이 적용된다. 파스테르와 아인스타인은 듣기에 거의 모범적인 생활을 했다. 거의 성인에 가까울 정도로 개인 생활을. 그러나 만약 그들이 신의 없는 남편이고, 나쁜 아버지이고 배은망덕한 동료였다고 그들의 역사적 업적이 더 작아질까? 그리고 이아 같은 것들이 역사가를 사로잡는다. 스탈린은 그의 두 번째 부인에게 가혹하게 callously 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소련 역사가로서 나는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Chapter 3_31_114p History, Science, and Morality
This does not mean that private morality is not important, or that the history of morals is not a legitimate part of history. But the historian does not turn aside to pronounce moral judgments on the private lives of individuals who appear in his pages. He has other things to do. The more serious ambiguity arises over the question of moral judgments on public actions. Belief in the duty of the historian to pronounce moral judgments on his dramatis personae has a long pedigree. a view based on Acton's almost mystical belief in the objectivity and supremacy of historical facts, which apparently requires and entitles the historian, in the name of History as a sort of super-historical power, to pass moral judgments on individuals participating in historical events. 이것은 도덕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또는 도덕적인 역사가 역사의 정당한 일부분이 아니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러나 역사가는 개인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개인적인 생애에 대해서. 그의 페이지에 나타나는 개인들의 생애. 그는 다른 할 일이 있다. 더 심각한 모호함은 공적인 행동에 대한 도덕적 판단에 관한 문제이다. 그의 드라마 주인공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믿음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19세기 영국만큼 그렇게 강력했던 때는 없었다. 그것은 더 강화되었다. 그 시대의 도덕화 경향에 의해 그리고 절제되지 않은 개인주의의 숭배에 의해. 로즈베리는 말했다. 영국 사람들이 나폴레옹에 알고 싶었던 것은 좋은 사람이었나 하는 것이었다. 액턴은 크레이톤과의 서신에서 선언했다. 도덕적 코드의 확고함은 역사의 권위와 위신과 효용의 비밀이다. 그리고 주장했다. 역사는 논쟁의 중재자이며, 길 잃은 자에 대한 지침이며, 세속적 권력과 종교의 권력에 의해 저하 일로에 있는 도덕적 기준의 지지자이다. 이 견해는 액튼의 거의 신비로운 믿음에 기초한 견해이다. 그 믿음은 객관성과 역사적 사실들의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겉으로는 요구하고 부여한다. 역사가들에게 역사의 이름으로 일종의 초역사적인 힘을, 역사적 사건들에 참가하는 개인들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할 권리들에 대한.
[역사란 무엇인가_시즌2] 1월 6일(목)_115p~120(90+5*6)p
Chapter 3_32_115p History, Science, and Morality
This attitude still sometimes reappears in unexpected forms. Professor Toynbee described Mussolini's invasion of Abyssinia in 1935 as a 'deliberate personal sin';" and Sir Isaiah Berlin, in the essay already quoted, insists with great vehemence that it is the duty of the historian 'to judge Charlemagne or Napoleon or Genghis Khan or Hitler or Stalin for their massacres'. This view has been sufficiently castigated by Professor Knowles, who in his inaugural lecture quoted Motley's denunciation of Philip II('if there are vices. . . from which he was exempt, it is because it is not permitted by human nature to attain perfection even in evil') and Stubbs's description of king John('polluted with every crime that could disgrace a man') as instances of moral judgments on individuals which it is not within the competence of the historian to pronounce:’ The historian is not a judge, still less a hanging judge.' But Croce also has a fine passage on this point, which I should like to quote: 이와 같은 태도는 가끔씩 예상 못했던 형태로 다시 나타난다. 토인비 교수는 무솔니니의 아비시니아 침공(1935년)을 의도한 개인적인 죄악이라고 묘사했다. 이샤야 벌린 경은 이미 언급한 에세이에서 큰 분노로 역사가의 의무는 샤를마제 또는 나폴레옹 또는 칭기스칸이나 히틀러를 그들의 학살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했다. 이와 같은 견해는 놀즈 교수에 의해 반박되었다. 그는 그의 취임 강연에서 모틀링의 필립2세의 대한 비난(비난 내용이란 만약 악덕들이 있다면, 악에 대해서도 완벽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리고 스텁스의 존 왕에 대한 기술(한 인간의 욕되게 할 수 있는 모든 죄악에 물들은)을 개인들에 대한 도덕적 판단의 예로 보았다. 그것은 역사가의 권한을 넘는 것이다. 역사가는 재판관이 아니다. 더욱이 사형 선고를 내리는 재판관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크로체는 이 문제에 대해 멋진 문장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인용을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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